박윤선: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
[409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요한복음 1장과 21장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친구 빌립을 통해 예수를 처음 만났다. 빌립이 예수를 모세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 메시아라고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처음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을 만난 예수가 그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하자,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열두제자 명단에 항상 빌립과 함께 등장하는 바돌로매가 아마도 나다나엘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나다나엘은 순전, 진실, 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박윤선(1905-1988)은 그를 친구로, 선배로, 스승으로, 가족으로 알았던 많은 이들에게 ‘나다나엘’과 같은 신앙과 성품을 가진 이로 각인되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1927-1931)부터 친구이자 동지였던 방지일은 일평생 박윤선을 ‘나다나엘’로 여겨, 그에 대한 회고문 제목을 아예 “우리에게 있는 나다나엘”로 잡았다(방지일, 153-184쪽). 제자이자 후배인 신복윤도 박윤선의 생애를 정리하는 글 제목을 “성경의 사람, 한국의 나다나엘”로 정해서 그의 “진실하고 사욕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과 삶에 주목했다(신복윤, 69-91쪽).
박윤선은 박형룡(1897-1978)과 함께 한국 장로교회 내 보수파의 신학적·정신적 지주로 널리 인정받는다. 변증학·조직신학 분야에서 활동한 박형룡이 한국 보수 장로회의 교리적 정통성을 변증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면, 박윤선은 성경/주경신학자로서 장로회 목회자들의 성경 연구와 설교 표준을 형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1938년부터 성경 주석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9년 《요한계시록 주석》부터 1979년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까지 출간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성경 전권 주석을 냈다. 집필에 41년, 출간에 30년이 걸린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이라는 전통적인 전제 아래, 냉철한 학문성을 과시하기보다는, 따뜻한 경건과 ‘순전한’ 신앙이 녹아든 설교용 참고 문헌으로 주석을 집필했다.
그는 1936년에 떠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1차 유학 후 평양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가르치며 첫 교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반대한 평양신학교가 1938년에 폐교하자, 1941년부터 2년간 만주의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쳤고, 해방 후 1946년 가을부터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석 성도가 중심이 된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주일성수 문제로 고려신학교에서 해임된 후, 1963년부터 1974년까지 11년간은 서울 총회신학교에서 교수했다. 1980년 말부터 1985년에 은퇴하기까지는 총신의 교권주의자들에 저항한 교수와 학생들이 설립한 합동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이로써 그는 1930년대 한국 장로교, 강점 말기 만주 디아스포라 목회자 후보생, 해방 후 고신파, 분열 후 장로회 합동파, 1980년 이후 합동 내 비주류 진영 학생들을 두루 가르쳤다.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회 보수파 목사 대부분의 스승이 된 것이다. 한편, 이런 여러 학교 이동은 교회 정치의 중심에 서기를 거부하고, 교회의 ‘순전성’을 지향한 그의 행보를 보여준다. 신앙·신학·경건·교회 주제에서 보여준 행동과 선택으로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거의 ‘성자’로 우러름을 받는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윤선의 이런 간사함이 없는 순전성은 그를 20세기 한국 개신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표상으로 만들었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영광스럽게 하려던 순전함이 ‘그의 의도와는 달리’ 일부 이웃들, 특히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 구성원 다수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다. 박윤선과 사별한 첫 번째 아내 김애련(1908-1954) 사이에서 태어난 3남 3녀 중 차녀 박혜란(1941-)은 73세가 된 2014년에 《목사의 딸》을 출간, ‘성자’의 이면을 폭로하는 내밀한 가정사를 공개하여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한학과 기독교 신식 교육(대동소학교-오산중학교-신성중학교-숭실전문학교)
박윤선은 을사늑약 직후 음력 1905년 12월 11일에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의 빈농 가정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 박근수는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당시 평민 남성 중에는 희귀한 금주가였을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한 농부였다. 그저 김씨로만 불렸던 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하고 나눠주기 좋아하는 여성이었지만, 아들들이 모두 신자가 되고 난 후에도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유교 관념에 집착하는 전통적인 여성이었다. 박윤선은 어머니가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국 유학 전에 어머니 이름을 진신(眞信)으로 지어드렸는데, 이 소망은 박윤선이 처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 1936년에 어머니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성취되었다(방지일, 153-157쪽).
박윤선은 아홉 살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와 오경(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중, 사서 전부, 그리고 예기와 주역을 제외한 경서를 거의 다 외웠다. 논어와 맹자는 이 책들에 대한 주해까지도 다 외웠다. 이를 외우기 위해 매일 밤 벽을 보고 몸을 흔들며 암송했다. 그의 기억력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비상했다.
박윤선은 후에 기독교인이 되어 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 근 10년간 한학을 배운 일이 헛수고였고, 동양철학이 기독교 신학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한 바 있다(박윤선, 27쪽). 그러나 기독교와 유교를 비교하면서 후자를 무가치하다고 폄하한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 박윤선의 학문과 삶에 유교가 끼친 영향은 상당한 것 같다. 고대 경전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헌신, 군신유의·장유유서·지사충성 등의 질서에 대한 애착, 새것을 수용하고 개혁하여 뒤집기보다는 옛것을 보수하고 유지하려는 의지, 수신과 겸양의 미덕 등은 유교가 강조하는 특징들이다. 박윤선이 강의, 저술, 설교, 일상 행동을 통해 정형화한 그의 장로교 보수 신학과 경건, 세계관에는 유교의 이런 덕이 강하게 감지된다. 필자의 이런 판단을 박윤선을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한 신학자 서영일도 공유한다. 그는 20세기 초에 태어난 한국인 중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한학에 10여 년이나 몰입한 박윤선에게 유교가 무의식적으로 끼친 영향의 깊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서영일, 42-46쪽).
박윤선의 세계관을 형성한 첫 기둥이 한학 공부로 갈고닦은 유교라면, 이 기둥을 보완하고 극복한 더 큰 기둥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근대 서양식 교육이었다. 한학 공부를 마무리한 17세에 그는 철산군 백령면의 이웃 마을(동문동) 교회당에 주일마다 출석하기 시작했다.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이어서 그는 장평동 여성에게 장가든 선천 대동소학교 설립자 아들인 학교 교사의 권유로 이 학교 6학년에 편입했다. 박윤선의 고향 마을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선천군 군산면 장공동에 자리한 이 학교는 마을 유지이자 기독교 신자였던 김도순이 세웠다. 한국 기독교인이 세운 당대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아침마다 경건회가 진행되었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렸으며, 교사들이 주일학교 반사(班師)를 맡았다. 특히 3·1운동이 일어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은 데다, 교사 다수가 만세 시위에 참여해 투옥된 경험이 있어 일경의 감시가 심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의 전형적인 관습대로, 부모가 정해준 여성과 결혼했다. 세 살 어린 15세 신부 김애련은 무학의 농촌 여성이었다. 그는 김애련과의 사이에서 박혜란 등 3남 3녀를 낳아 기르게 된다(박윤선, 24-26쪽).
대동소학교 6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이어서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이 세운 대표적인 기독교계 민족학교로 유명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많은 학교에서 일어난 동맹 휴학을 오산학교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한 학기 만에 휴교한 오산학교를 떠나 선천의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1906년에 양전백·김석창 등이 북장로회 선교회로부터 지원받아 세운 이 학교는 후에 백낙준·박형룡·김창인·김양선·방효원·방지일·장준하 등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 다수를 배출한다. 신성학교 시절 박윤선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젖소 먹이기, 우유 배달, 김매기, 변소 치우기, 무산 아동 교육 등을 병행하며 공부했다. 더구나 중학교 1-2학년 과정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상태에서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 시간이 절대 부족했으므로, 그는 늘 5분 만에 식사를 해치웠다. 그때 생긴 별명이 ‘5분’이었다.
방학 중 집에 갔다가 생긴 첫아이는 태어난 지 1년 후 병으로 사망했으나, 그는 아들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이때를 포함해서, 그는 재혼으로 새 가정을 꾸리기 전까지, 첫 아내, 그리고 첫 아내가 낳은 자녀들에게 가장으로서 맡아야 할 책임을 거의 방기한 것으로 보인다(27-29쪽; 박혜란, 33-44쪽). 이 시기 그는 신성학교에서 박평흠 선생, 함가륜(C. S. Hoffman) 선교사, 길선주 목사, 선천북교회에서 양전백 목사에게서 설교를 들었지만, 이들 모두의 성경 해석과 설교에 만족하지 못했다. 심지어 졸업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서 4년간 들은 교수와 목사들의 설교도 불만족스러웠다(박윤선, 40-42쪽). 그가 후에 주경신학자와 주석가, 설교자의 길을 가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이 시기까지도 그는 열심 있는 교인이기는 했으나, 확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 근처 수청고개 시냇가를 산책하던 중에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 증거라는 세미한 음성을 들음으로써 확고부동한 신자가 되었다. 성경, 즉 특별계시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도 이때 이후 견고해졌다(27-33쪽).
5년제 신성학교 졸업 직전에, 아내에게 거의 무심한 데다 부모의 권위에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던 박윤선은 두 습관 모두를 거스른 놀라운 사건을 벌이게 된다. 아내는 박윤선과 결혼했음에도, 남편이 4년 내내 외지에 공부하러 나가있던 터라 문자 그대로 ‘시집가서’ 집안일과 농사일만 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내가 겨우 한글만 익힌 무학 상태로 지내는 것이 안타까웠던 그는 부모에게 아내를 선천으로 데려가 공부를 시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그는 밤중에 몰래 아내를 업고 나와 선천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아내 이름도 김애련에서 김영선으로 개명시켰다(33쪽; 방지일, 155쪽).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박윤선은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했다. 여전히 고학생이었던 그는 청심환을 팔기도 하고, 철도호텔 종업원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오직 신앙과 관련된 내용만을 언급한다. 이 시기 그는 거의 온전히 신앙과 기도, 전도에만 몰입했다. 나다나엘 기질 그대로였다. 주로 6명 신앙 동지와 함께 매일 새벽에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모란봉 숲에서 기도했는데, 이 덕에 이들에게는 ‘조기부대’(早起部隊)라는 별명이 붙었다. 방학마다 몇 주씩 학생회 임원 중심으로 전도대를 결성하여 전국을 순회했다. 그도 평북 철산, 만주 봉천 등으로 가서 전도하고 설교했다. 신학생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모란봉 뒤 가현교회에서 거의 전임 목사처럼 매 주일 설교하고 심방했다. 그가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다.
숭실전문 시절 박윤선에 대해서는 방지일이 회고하는 일화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소유나 세상일에 거의 무관심하고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외골수 기질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증언이다. 우선 언어 재능이다. 박윤선은 중학생 시절부터 영어에 통달했다. 경건회 외국인 설교자의 설교에 대한 영어 감사 인사를 맡았고, 영어 교과서 1-5권을 통째로 완전히 외웠다. 아마도 동양 고전을 완전히 암기했던 학습법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성경도 읽고 또 읽으며 외웠다. 성경 원어인 헬라어·히브리어에, 라틴어·독일어·네덜란드어도 읽고 해석할 수 있었다. 공부, 특히 언어를 익히고 암송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가 늘 생각에 골몰하느라 다른 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증언도 있다. 기숙사에서 식사할 때, 밥·국·김치를 함께 먹지 않고 밥을 다 먹은 후 국을 다 먹고, 그 후에 김치를 먹은 적이 많았다. 옆자리 친구가 그의 국에 있던 고기를 다 건져 먹고 김치 그릇을 가져가도, 아예 모르고 있다가 자기 국에만 고기가 없고 김치가 없다고 의아해하는 일도 잦았다. 모자를 기차에 두고 왔다며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던 그의 한 손에 모자가 들려있는 일도 있었다. 골똘히 생각하며 걷느라 바로 앞에 온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간 일도 있었다. 아랫목에서 자고 있던 아기가 깨서 심하게 우는데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그를 부엌일하던 아내가 들어와 핀잔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157-160쪽). 한학으로 터득한 유교적 세계관과 교회 및 기독교 학교들을 다니며 습득한 기독교 세계관은 박윤선이라는 존재를 형성한 두 체질이었다.
소명의 길: 평양신학교 재학,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 평양신학교 강사
박윤선은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던 숭실전문 4학년 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3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재학 중에 부친이 별세했고, 3년간 숭실중학교 사감으로 일하며 성경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그는 마펫(마포삼열)·로버츠(라부열)·레널즈(이눌서)·어드만(어도만)·랍(업아력)·엥겔스(왕길지) 같은 외국인 교수, 남궁혁·이성휘·박형룡 같은 한국인 교수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는 평양신학교 신학이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칼뱅주의’적이지도, ‘개혁주의’적이지도 않았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이런 용어조차 거의 들어보지 못했고, ‘성경신학’이라는 단어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즉, 그저 성실하고 경건한 선교지 목회자와 설교자를 양성하기 위해 단순한 근본주의식 주입교육을 시행하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박윤선, 44-58쪽).
이런 아쉬움을 보상받기 위해 박윤선은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추천한 이는 박형룡이었다. 박형룡은 프린스턴 신학교 재학 중 그레셤 메이첸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메이첸이 1929년에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를 설립하자 제자 박윤선에게 자기 모교 대신 신생 학교를 추천한 것이다. 박윤선은 평양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걸린 약 한 달 여정에도 성경을 암송했다. 유학 시절까지 연장해서, 결국 그는 요한계시록을 모두 외웠다(51·64쪽).
1934년 가을부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에 재학하며 신약신학을 전공했다.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에서 체계적인 신학과 성경해석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다며 아쉬워했던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는 크게 만족했다. 특히, 박형룡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믿으면서도 학문적 비평 능력을 보여준 학장이자 신약학자 메이첸의 가르침에 매혹당했다. 박윤선에게는 메이첸이 학자와 신자의 이상형이었다. 메이첸이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학문에만 매진하면서 학생들을 자식처럼 여기며 지내는 것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내는데, 아마도 자신은 결혼하였음에도 가정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부담감, 또한 메이첸처럼 되고 싶다는 부러움이 반영된 표현인 것 같다(66-71쪽; 서영일, 134-141쪽). 유학 중에 모친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한글을 배운 후, 붓글씨로 요한복음 3:16을 쓰고 그가 지어준 이름으로 서명하여 보낸 일은 그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박윤선, 66-71쪽).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동안 메이첸, 존 머리(머레이), O. T. 앨리스, 앨런 맥크레이, 폴 울리, 네드 스톤하우스 등 영어권 장로교 학자들뿐만 아니라, 코닐리어스 반틸, R. B. 카이퍼 같은 네덜란드계 개혁파 학자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일평생 견지하며 강의와 주석에 반영한 개혁주의의 내용과 원리를 세 장 분량으로 기술한다. 그는 개혁주의를 칼뱅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며, 이 사상의 근본 원리를 “성경을 바로 깨달으려는 주의”라고 정의한다. “성경을 믿되 성경을 바로 해석한 그 내용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은 결국 성경주의이다.” 또한 “성경은 자초지종 초자연주의”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초자연주의 구원운동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가감 없이 받아서 바로 해석하는 그대로 믿는 것이 개혁주의(칼뱅주의)이다”(73-76쪽). 결국 개혁주의와 칼뱅주의와 초자연주의와 성경주의는 사실상 동일어다.
오늘날 학문적 기준으로 이런 표현은 너무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경건하고 단순한 가르침 이외에는 신학의 기본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한국 신학 교육 상황에서, 미국 장로교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서 근본주의의 길을 선택한 웨스트민스터가 보여준 소위 ‘정통 개혁주의 신학’은 그에게 맑은 물이 솟아나는 유일한 샘이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신약석사 유학을 마치고 1936년 8월에 귀국한 박윤선은 귀국 직후 두 가지 일을 맡았다. 하나는 모교 평양신학교의 성경 원어 강사,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성경 강사로 교수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장로회 총회가 감리교에서 발행한 《아빙돈 단권 주석》의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표준성경주석》 편집위원회에 들어간 일이었다. 당시 편집위원회 위원장 박형룡은 누구보다도 박윤선의 귀국을 반겼다. 박윤선은 편집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웨스트민스터에서 배운 성경해석학을 고린도후서 주석 집필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박윤선이 쓴 고린도후서 주석은 1938년 6월에 박형룡과 박윤선의 공저작으로 발표되는데, 사실은 박윤선이 단독으로 쓴 것이다(서영일, 153-161쪽). 이로써 정통 개혁신학을 반영한 한국어 성경 주석 전권 집필에 일생을 바치려던 꿈의 첫 단계가 실현되었다.
귀국하여 2년간 주석 집필과 원어 강의에 집중한 박윤선은 1938년 8월에 다시 웨스트민스터로 가서 원어와 변증학을 약 1년간 더 공부했다. 특히 이 시기 성적표에 따르면, 시리아어·히브리어·아랍어, 성경 아람어 등을 집중해서 공부하고, 반틸에게서 변증학도 배웠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그의 성경신학은 성경 원어와 고전어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 위에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학의 단호한 선포적 성격을 종합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165-169쪽).
현장1: 만주 봉천신학교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에서 두 번째 유학을 마무리했으나 돌아갈 직장이 없었다. 그가 유학을 떠난 직후 1938년 9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피하고자 폐교했기 때문이다. 1939년 10월에 일본에 도착하여 주석 집필을 지속하던 그는 이듬해 3월에 귀국했다가, 폐교된 평양신학교 후신격으로 만주에 신학교를 세우려 준비하던 동포 기독교인들에게 초청을 받아 가족을 데리고 봉천(선양)으로 건너갔다. 지역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봉천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41년에 문을 연 봉천신학교에서 신약과 성경 언어를 가르쳤다. 박형룡도 곧 합류했다. 일제가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있었다. 두 박 교수는 봉천신학교에 합류하면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은 후에 자신이 한 차례 신사참배를 한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개인의 이 행위, 그리고 신사참배를 해야 운영할 수 있는 학교 환경에 대한 자책 때문에, 그는 1943년에 사임한 후 봉천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안산에 머물며 요한계시록·시편·공관복음 주석 집필에 몰두하다 해방을 맞았다.
현장2: 부산 고려신학교
해방 후 고향에서 반년 정도 보내다 이듬해 봄에 서울로 이사한 그는 경남노회 출옥 성도 한상동에게 초청받아 진해로 내려갔다. 거기서 시작된 신학 강좌는 1946년 7월 출옥 성도 주남선이 주도한 경남노회 결의를 거쳐 9월 말 부산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개교 전에 설립위원회는 당시 만주에 머물던 박형룡을 새 학교 교장으로 청빙할 계획을 세웠다. 이 학교가 경남노회 출옥 성도 집단만을 위한 분파주의 학교가 아니라, 평양신학교 적통을 잇는 총회의 학교로 인정받으려면 박형룡 같은 권위자가 교장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교 이듬해 10월에 박형룡이 합류하면서 교장이 되었고, 박윤선은 그 전 공백기에 교장서리를 맡았다. 박형룡이 교장이 되자, ‘51인 동지회’ 학생 중 34명이 고려신학교에 편입했다. 이들은 평양신학교 폐교 이후 1940년에 서울에 세워졌던 한국 장로교회의 유일한 총회 직영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등 교수들 신학 사상을 자유주의로 인식하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던 학생들이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총회에서 경찰에게 끌려 나갔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 브루스 헌트(한부선, 1903-1992)를 비롯한 정통장로교회(OPC) 선교사 몇 사람도 교수 및 강사진에 합류했다.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로 인한 교회의 배교를 회개하자는 출옥 성도들의 개혁 의지와 바른 신학에 근거한 교회 개혁을 이루자는 두 박 교수의 의기가 투합하여 세워졌다(89-92쪽; 서영일, 203-226쪽).
그러나 박형룡과 출옥 성도 집단 간의 교회론 이해 차가 협력에 균열을 일으켰다. 고려신학교가 장기적으로 총회 인준을 받은 전국구 서울 신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은 박형룡과는 달리, 출옥 성도들은 회개하지 않는 총회 인사들과는 분리된 순전한 신학교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갈등으로 박형룡은 1948년 5월에 부산을 떠나 서울에 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세웠다. 조선신학교에서 이탈해서 고려신학교에 합류한 학생들도 모두 박형룡을 따랐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와 1952년 결성된 고려파(고신) 교단에 남았다. 박윤선의 선택은 1929년에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를 세우고, 1930년대에는 결국 북장로회를 떠나 정통장로교회를 세운 메이첸 일파가 보여준 행보를 따른 것이다. 그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보다는 회개와 순수성에 더 무게를 두는 교회론을 견지했다(박윤선, 92쪽; 서영일, 226-235쪽).
박형룡이 떠난 후 박윤선은 고신의 대변자가 되었다. 14년 동안 고신 신학교와 교회에서 강의하고 설교하면서 고신 신학의 틀을 닦았고, 1948년 12월에 창간한 〈파수꾼〉 편집장을 맡아, 매호 권두언을 비롯해 신학과 신앙, 문화, 삶 등 거의 전 주제를 다루는 글을 200편 가까이 썼다. 고신 교단의 유일한 유학파 신학자였으므로, 이 시기 그는 거의 고신 그 자체였다(235-241쪽).
48세이던 1953년 5월에는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네덜란드 자유 대학교로 떠났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네덜란드계 미국인 신학자들을 통해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을 경험했으므로, 더 본격적으로 대륙 개혁신학을 탐구해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우선, 장학금을 받기는 했지만, 생활비가 부족해서 곤궁하게 지냈다. 둘째, 네덜란드의 습하고 우울한 날씨, 그리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신앙을 가진 그와는 달리, 너무도 메마른 네덜란드 교회의 상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급작스러운 사망이었다. 그는 5개월 만에 급히 귀국해야 했다.
박윤선 아내 김애련(김영선)은 만취한 미군 해병이 몰던 트럭에 받혀 1954년 3월 18일에 사망했다. 네덜란드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파숫군〉, 1954.3., 34쪽)에는 나다나엘 기질의 어두운 면, 즉 하나님과 교회만 생각하느라 가족에 무심한 자기중심적 일면이 그대로 나타난다.
“나를 위하여 기도만 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마시오. 주님이 허락하시면 돌아갑니다.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안 돌아갑니다. …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시면 가족을 만나 보는 것보다 좋습니다. 당신도 나를 만날 날을 도무지 기다리지 마시오. …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편지를 종종 하시오. 나는 너무 외롭습니다.” (264쪽; 박혜란, 52쪽)
이 편지는 부부가 주고받은 마지막 편지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열흘 후 부산에 도착한 그가 제일 처음 한 일은 미해병사령부에 아내를 죽인 자를 선처해달라는 편지를 쓰고, 피의자 병사에게 투옥된 일에 유감을 표하는 편지를 쓴 것이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그는 신학교에서 경건회를 인도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심지어 유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아이들을 맡아줄 고아원을 알아봐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해결책으로 재혼을 권유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첫 아내가 사망한 지 불과 7개월 후에 고려신학교 출신의 35세 여성 이화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집에 와 있는 낯선 여자가 새엄마라는 사실을 느닷없이 통보받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녀들에게 위로를 건넨 적도 없었고, 고아원이나 재혼 문제를 상의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자녀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미 가족에 대한 무심함, 세상 물정과 생활을 전혀 모르는 무능함, 성자로 취급받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설정한 너무 높은 신앙과 도덕 기준, 자녀에 대한 가혹한 체벌, 아내에 대한 가정 폭력 등으로, 이전부터 파탄 상태였던 박윤선(그리고 둘째 부인 이화선)과 첫 부인이 낳은 여섯 자녀의 관계는 이후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서영일, 261-265쪽; 박혜란, 51-130쪽). 헌트 부인(한부선의 아내)은 1954년 3월 22일에 자기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박윤선이 가족, 특히 아내의 희생 덕에 현재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냉정한 평가였다.
“그녀는 똑똑하고, 유능하고, 자애로우며, 생각을 깊이 하는 훌륭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박윤선이 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반려자였습니다. 박윤선은 그녀 덕분에 현실적인 삶의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서영일, 264쪽)
1946년부터 14년 동안 고신을 대표하는 신학자였던 박윤선은 1960년에 고신과 결별한다. 첫째 이유는, 예장 총회와 분열하며 교회 건물을 놓고 일어난 분쟁을 교회 법정을 넘어 세속 법정으로 가져가 소송전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1956년부터 진행된 논쟁이었다. 박윤선은 불가를 선언했으나, 고신의 유력한 지도자 송상석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교단 주류는 점차 박윤선의 견해에 반하는 입장을 취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스푸너 사건’이었다. 1956년부터 고신과 협력한 정통장로교회 아서 스푸너 선교사 가족이 1960년 7월 금요일에 미국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정상 출항이 주일 아침으로 연기되자, 박윤선은 이들을 배웅하고 항구 주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시간 문제로 택시를 탔고(즉 주일에 돈거래를 했고), 부두 수속이 늦어져 교회당에서 예배하지 못한 대신 약식으로 선상에서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귀가했다. 박윤선은 부득이하게 선한 일을 하느라 정식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일은 죄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으나, 고신 총회는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도 건덕상 문제가 될 때에는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결했다. 박윤선은 총회와 고려신학교 이사회의 사과 요구와 교장직 사임 요구를 거부했고,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들도 박윤선을 지지했으나, 결국 그는 해임되어 학교와 교단을 떠나야 했다(270-283쪽).
현장3: 서울 총회신학교
해임 후 얼마간 부산 동래에 머물던 박윤선 가족은 이듬해 2월 서울 동산교회로부터 목사 청빙을 받아 서울로 이동했다. 통합과 합동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교회였던 이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개혁신학교도 설립하여 운영했다. 그러나 1962년 11월에 합동 측 총회신학교에서 교수 초청이 오자 이를 수락했다. 이때부터 1974년에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총회신학교 교수·교장·대학원장,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 교수 등으로 활동하게 된다. 총신 시기에 그는 신학교 개혁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지역성 강한 소교단 고신과 달리, 그의 눈에 합동 교단은 부패, 교권 투쟁, 정치적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총회신학교도 정치와 권력 놀음의 현장일 뿐이며, 캠퍼스는 그저 수많은 비도덕적이고 자격 없는 졸업자와 목회자를 양산하는 공장처럼 비쳤다(292-300쪽).
총신 시기 박윤선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같은 세 가지 일에 집중했다. 우선 교수로서, 서울 총회신학교와 부산 분교(1965.2.-1967.2.)에서 가르쳤다. 동시에 1964년까지 동산교회에서 목회한 후, 부산에 있을 때는 성산교회를 담임했고, 서울로 복귀한 후에는 1968년에 한성교회를 개척한 후 1973년까지 매주 설교했다. 물론 이후에도 설교를 요청하는 곳은 어디든 사양하지 않았다. 고신 시절 14년 동안 주석을 25권 썼고, 총신 11년 동안에는 13권을 집필했다. 1974년 은퇴 후에는 4년간 미국 LA에 거주하며 12권을 집필했다. 이로써 그는 1939년부터 총 40년 동안 매진한 성경 전권 주석 발간을 완료했다. 1979년 10월 9일에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가 총신대 대강당에서 열렸다. 그는 “나의 최대의 즐거움은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고 말할 만큼, 이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다(박윤선, 108-118쪽).
현장 4: 수원 합동신학교
박윤선의 회고록은 성경 주석을 완간하고 기념 예배를 드린 1979년으로 끝난다. 그러나 1988년 6월 30일에 사망할 때까지 남은 9년간 그는 신설 합동신학교 및 합신 교단과 운명을 같이했다.
1970-1980년대는 민주화 운동 시대였다. 1979년 10월부터 시작된 ‘총신 사태’도 이 흐름의 일부였다. 이 사태 중심에 ‘교황’이라 불린 이사 이영수가 있었다. 교권을 장악한 그는 자기 하수인들을 총회 임원과 신학교 이사로 세워두고, 교직원도 자기 사람으로 임의 채용했다. 학생 시위, 조기 방학, 개강 연기, 이사진 사퇴, 박윤선의 학장서리 임명 등이 약 1년간 이어졌으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급기야 합동 총회장으로 선출된 이영수는 사태의 중심에 있는 학생·교수·이사를 색출하여 심문하고, 일시 폐교와 학생 퇴학을 일삼았다. 그러자 양심상 이런 상황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 없다며 젊은 교수 4인, 즉 신복윤·김명혁·윤영탁·박형용이 10월 23일 자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이들을 지지한 학생 약 200명이 네 교수를 따라 자퇴한 후 남서울교회에서 10월 28일에 시작된 ‘개혁신학교’에 합류했다. 이 학교는 11월 11일에 ‘합동신학원’이라는 새 이름으로 공식 출발했다. 박윤선도 10월 30일에 총신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11월 11일 개강 예배에서 축도를 맡았고, 1985년까지 초대 원장을 맡았다. 온전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을 구현한다는 목표로 세워진 합동신학교의 교훈은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었는데, 이는 박윤선이 평생 실현하고자 했던 꿈이었다. 이로써 박윤선은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 보수 교단, 즉 일제강점기의 조선예수교장로회, 해방 후 예장고신·예장합동·예장합신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한국 장로교 보수 진영 목회자 대부분을 가르친 스승이 되었다. 그의 전권 주석은 장로교 보수 교단들뿐만 아니라, 다른 장로교단 대부분과 비장로교 교단의 목회자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박윤선은 박형룡과 함께, 한국 보수 장로교회의 양대 기둥이었다. 특히 그의 전권 주석은 한국교회에서 20세기 말까지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업적이었다. 그는 나다나엘 같은 인격으로 거의 모든 제자에게 성자 같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간사함이 없는’ 그의 나다나엘 성품이 전통적인 유교의 선비 성향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성경 위인들은 모두 구속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동시에 인간적으로는 연약한 약점을 지녔다. 박윤선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영음사, 2015).
박혜란, 《목사의 딸: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아가페북스, 2014).
방지일, ‘우리 안에 있는 나다나엘’, 《성경과 나의 생애》(영음사, 2015).
서영일, 장동민 옮김,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신복윤, ‘성경의 사람, 한국의 나다나엘’, 합동신학교출판부 편,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