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연 속에 계십니다

[409호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

2024-11-30     정태형

계획할 힘도 없을 때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 플랜,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영화 〈기생충〉 주인공 기택의 대사다. 기택은 실패가 너무나 아파서 더 이상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기로 한 사람이다. 기택이 이 대사를 했을 때,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웃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웃을 내용이 아니었다. 실패가 너무나 아파서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말이 우리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느 순간에 기택이 된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대처를 못 할 때가 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초연한 척하지만 정작 속마음은 엉망일 때가 있다. 미래를 맞이하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기생충〉 스틸컷

다행히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이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런 만큼 서로를 이해해주면 좋겠지만, 이상하게 내가 그랬던 기억은 금세 잊어버리고 기택처럼 사는 사람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참다 참다 결국은 한마디하고 만다.

“왜 그렇게 사니?”

나는 이렇게나 힘들었는데 지금 네가 뭐가 힘드냐며, 상대의 힘듦을 쉽게 부정한다. 왜냐고 물어보지만, 딱히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미 마음속에서 원인을 단정 짓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교회를 함께 다녔던 동생이 생각난다. 그 동생은 주일예배에 매번 늦게 오곤 했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쉬는 날 오전에 잠을 이기기 어려운 대학생들은 부지기수가 아닌가. 예배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당시 40대였던 한 집사님이 그 동생에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나는 대학생 때 생활비도 벌고 공부도 하면서 교회에 빠지거나 늦은 적이 없었는데, 너는 주중에 얼마나 힘든 일을 하길래 그렇게 못 일어나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 같다. 옆에서 듣는 나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생은 답하지 못했고,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다. 구직 단념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러 갔을 때 겪은 일이다. ‘구직 단념 청년’이란 최소 6개월 이상 취업 활동 이력이 없는 청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에게 물어봤다. ‘나 때는 이만큼 힘들었는데, 너희는 뭐가 힘들다고 그러니?’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드냐고. 많은 청년이 기분은 나쁘지만 할 말이 없어서 수긍한다고 답했다. 그 말이 슬프게 들렸다. 나도 내가 왜 힘든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느부갓네살이 떠올랐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은 굉장히 황당한 인물이다. 왕으로서 세워야 할 계획은 세우지 않은 채, 자기가 무슨 꿈을 꿨는지 맞혀보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자기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불안이라는 실체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꿈을 꿔서 힘들다고 말하면 되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니 답답하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예민하고 화가 났다. 그나마 왕이라는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껏 화를 낼 수 있었고, 아무도 그의 입을 틀어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택은 다르다. 계획조차 세울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네가 뭐가 힘드냐는 윽박지름에 입을 다물고 수긍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종신형을 내리지 마세요

느부갓네살에게 자기도 모르는 꿈의 내용을 설명해줄 다니엘이 있었던 것처럼, 기택에게도 앞날을 계획하지 못할 만큼 지쳐있는 마음을 설명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도 나는 그런 사람을 하나 안다. 진로 상담 분야 권위자인 존 크럼볼츠(John Krumboltz)는 인생을 살다가 어디에선가 멈춰버린 채 나아가지 못하는 기택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상담가다. 수많은 임상과 상담을 통해 그들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설명해주면서 미국상담협회에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린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기택이 힘들어진 이유는 ‘계획하는 태도’에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는 계획이 아니라 계획하는 태도다. 계획하는 태도가 어떠냐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에게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종신형을 선고하기도 한다.1)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한 청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임용고시에 반드시 합격할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은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말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23년 중등 임용고시에 지원한 사람은 4만 8,784명인데 그중 떨어진 사람이 4만 2,647명이다.2) 시험에 붙을 확률보다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시험에 도전하는 사람도 많다. 이 청년이 시험에 떨어지고 도전하기를 반복하다가 취업 적령기를 놓쳤다고 생각해보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시험을 준비하다가 30대에 들어선 이들의 곤혹스러운 심정이 드러나는 글들이 넘쳐난다. 그 과정에서 겪은 아픔과 자책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임용고시를 보겠다고 계획한 순간을 후회하고 임용고시에 임했던 자기의 태도를 정죄하며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다른 계획을 세우려고 해도 실패했다는 데서 오는 정죄감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말 그대로 스스로에게 내리는 종신형이다. 이 청년이 임용고시를 보겠다고 계획을 세운 것이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계획을 세우고 도전한 일이 문제가 아니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계획을 세우고 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거의 자신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 끝없는 죄책감의 감옥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많은 사람이 계획과 태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실패를 경험하면, 계획을 세운 자신을 미워한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계획조차 세우지 못한다. 미래를 준비해봐야 아프기만 할 뿐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게 되는 식이다.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노 플랜’이라고 말하는 기택의 목소리는 이런 사람들을 대변한다. 하지만 크럼볼츠에 따르면, 계획과 태도를 구별할 때 길이 보인다. 계획은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내 선택이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고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요인은 계획이나 결과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의 내 선택이 아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선택을 반복해서 비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들여다봐야 할 지점은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태도다. 계획과 결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나 잔혹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가르치는 계획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인생의 특정한 계획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부모님에게서, 학교에서, 심지어 또래 집단으로부터. 세대가 다르고 성별이 달라도 모두 마음속에 동일한 계획이 있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학군이 있는 지역에서 살려고 한다. 여기에는 종교도 정치도, 좌파도 우파도 없다. 개신교도 가톨릭도 불교도 무교도 관계없다. 온 세상이 한목소리로 이렇게 인생을 계획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대다수 사람은 세상이 가르치는 계획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추종한다. 수학이나 자연법처럼 세상을 이루는 근본 진리인 양 대한다. 이런 태도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아프게 한다.

청소년부 담당으로 전임 사역을 하던 시절에 만난 학생이 있었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고 늘 장난만 치는 친구였다. 장난이 너무 심해서 예배에 방해가 되긴 했지만 늘 밝아 보여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궁금해서 물어봤다.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더 좋지 않겠냐고. 그랬는데 그 친구의 답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상상도 못 했던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밝아 보이던 얼굴은 사라지고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사님, 제가 지금부터 열심히 해봐야 서울대에 갈 수 있어요?” 중학교 1학년,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을 나이였지만 이 친구 마음은 몹시 지쳐있었다. 일말의 가능성도 꿈꾸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는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했다.

세상이 가르치는 계획을 추종할 때 우리 안에는 잘못된 믿음이 싹튼다. 남들이 동경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믿게 된다. 이런 믿음은 우리 마음 중심부에서부터 우리를 갉아먹는다. 남들이 동경할 만한 것을 얻지 못하면 어디에도 마음을 쏟지 못하게 되고, 결국 마지못해 삶을 견뎌내는 껍데기만 남은 존재가 된다. 가끔 학교에 가서 수업하다 보면 이렇게 영혼 없이 껍데기만 남아있는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어떤 기대도 없는 눈빛으로 자리만 지키고 앉아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프다.

결과가 아닌 존재에 감사합시다

믿는 우리는 다른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지만 세상이 가르치는 계획을 높일 때가 많다. 우리의 간증을 보면 우리가 누구를 높이고 있는지가 보인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대다수 간증 사례는 ‘그래서 간증’이다. ‘그래서 간증’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도록 도와주셨기 때문에 하는 간증이다. ‘병이 낫게 해주셨다, 그래서 간증한다’ ‘좋은 대학에 가게 해주셨다, 그래서 간증한다’ ‘사업을 재기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간증한다’…. 언뜻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간증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누군가 이 간증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 때문일까? 아니면 병이 낫고, 좋은 대학에 가고, 사업이 잘되는 등 세상이 가르치는 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후자일 확률이 크다. 간증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하나님보다 계획을 높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탄은 이런 우리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욥 1:9-10)

물론 간증하는 사람들이 간직한 진심은 잘 안다.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간증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한 바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을 높이고자 간증했더라도, 계획을 높이는 결과가 되어버릴 수 있다. 하나님을 높이는 간증을 하려면 감사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결과가 아닌 존재에 감사해야 한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결과에 감사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기를 반복했다. 홍해를 건너게 해주신 결과에 감사했지만, 물이 없다고 원망했다.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다.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고기가 없다고 원망했다. 결과에 감사하는 사람은 원망에 끝이 없다. 하지만 모세는 달랐다.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 땅에 자기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눈은 흐려지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신 34:7).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결과가 아니라 존재에 감사했기 때문이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6) 모세에게는 승리라는 결과보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더 중요했다.

결과가 아니라 존재에 감사하는 일이 어색할 수 있다. 결과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전해보자. 서로의 존재에 감사해보자. 이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이나 영향력 때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감사해보자. 하나님의 존재에 감사해보자. 나에게 행하신 일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나를 아시고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의 존재에 감사해보자. 세상이 말하는 계획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우리가 보일 것이다. 계획이 아니라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높이게 될 것이다.

우연 속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 삶에는 계획이 필요하다. 성경도 계획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하지만 동시에 계획의 위험성도 경고한다. 개미처럼 미리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잠 6:8) 말하다가도, 1년 동안 타지에 가서 장사할 계획을 세우는 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경고한다(약 4:13). 언뜻 모순처럼 보이지만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 가지다. 바로 하나님은 계획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다가 하나님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계획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다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바라는 계획이 실패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어디서 하나님을 찾아야 할지 몰라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은 우연 속에 계신다고.

아간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제비를 뽑으라고 시키셨다. 제비를 뽑으면서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친다. 그 결과, 죄를 범한 아간의 범죄가 드러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연 속에 계신다. 계획을 세우되 매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우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우연히 친구 생일날을 알게 되면, 어떻게 지내는지 귀를 기울여보자. 우연히 함께 퇴근하게 된 직장 동료에게 귀를 기울여보자. 우연히 읽게 된 기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곳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계획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더라도, 뜻하지 않은 사건 때문에 좌절을 겪는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우연 속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우연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세상이 가르치는 계획을 거부할 수 있다. 과거의 아픔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마음 없이 껍데기로 존재하는 매일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실패가 무서워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내 안의 기택과 이별할 수 있을 것이다.

■ 주

1) 존 크럼볼츠·앨 레빈, 이수경 옮김, 《굿럭》(새움, 2012), 66-67쪽.
2) 박윤구, ‘교사 1명 뽑는데 68명 몰려…미달 되던 지방도 경쟁률 ‘쑥’’, 〈매일경제〉(2022.11.5.)


정태형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과 교회를 이루어가는 여린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의 사각지대를 보려고 노력한다. 《부모가 먼저 행복한 회복탄력성 수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