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숙 씨!”
[409호 커버스토리]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엄마들과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여행상점’이라는 여행사와 함께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여행을 간 적이 없는 엄마와 아이, 둘이 살아 오히려 둘이서 여가를 즐기지 못한 가족에게 여행의 기회를 주자는 것. 하지만 우리의 단순한 마음과 달리 펀딩부터 길이 막혔다. 사람들이 그랬다. 베트남이나 태국이면 후원하겠지만 프랑스 파리라니. 자신도 안 가본 곳에 보내주기 위해 후원할 수는 없다고. 그런 생각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 같은 말들을 했다.
하지만 나는 꼭 파리로 가고 싶었다. 한 번도 ‘현장 체험 신청서’를 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현장 체험 장소를 ‘프랑스 파리’라고 적게 하고 싶었다. 얼마나 신이 날까. 얼마나 뿌듯해할까. 아이들 심정을 떠올리면 덩달아 신이 났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엄마들의 로망을 실현해주고 싶었다. 처음에 여행지를 결정할 때 “파리가 여성들의 로망이잖아요”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옆에서 그 소리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이 돼요? 태국 정도 갈 수 있겠죠.”
“왜 말이 안 돼요?”
“에이, 당연히 안 되죠.”
이 대화 중에 나는 왜 객기가 생겼을까. 꼭 여행지를 프랑스 파리로 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파리로 향했다. 펀딩 금액이 턱없이 모자라 여행지를 바꿔야 하나 고민할 때, 한 항공사에서 프랑스 파리행 노선이 프로모션으로 나왔다. 엄청나게 할인된 금액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갈 수 있는 금액으로.
로망이 현실이 된 엄마들도, 현장 체험을 프랑스로 가게 된 아이들도, 그들에게 진짜 여행을 선물하게 된 우리도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이미 하늘을 날았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차근차근 여행을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여행의 주제를 정했다.
‘○○의 엄마가 아니라 ○○○입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된 그녀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아이의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김선영이 아니라 민지 엄마로, 이민정이 아니라 서연 엄마로. 그래서 그녀들을 각자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우리의 프로젝트였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나 파리로 출발하면서부터 다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이름을 불렀다. 선영 씨, 민정아, 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는 자신의 이름인 박인숙보다 선화로 더 많이 불렸다. 선화 엄마도 아니고 선화로. 엄마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포키아동복 26호 선화. 가게 이름이 선화였다. 어린 딸을 떼놓고 장사해야 했던 그녀의 머릿속에 온통 내 생각뿐이었다고, 그래서 가게 이름을 선화로 했다고 했다. 상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상호를 부른다. 그래서 엄마의 가게에 가면 엄마를 “선화야!”라고 불렀다. 내가 돌아보면 “너 말고 네 엄마!”라고 하면서.
그 생각이 나니 눈물이 났다. 엄마에게 전화할 수 있다면 “박인숙 씨!” 하고 전화를 했을 텐데, 아직 하늘에는 휴대전화가 입고되지 않아서 눈물만 훔쳤다.
서울에 돌아와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들 이름을 열심히 불렀다. 왜 그랬을까. 당신 이름을 마음껏 들어보지 못하고 떠난 엄마가 생각나서였을까. 이름을 부르면 말간 얼굴로 소녀처럼 나를 쳐다보던 파리의 그녀들이 떠올라서였을까. 이름을 불러주면 꽃이 되는 거라며, 김춘수 선생의 시 〈꽃〉을 멋대로 인용하면서 아이들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 많은 일이 생겼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윤아야!”
윤아가 울었다.
“왜 울어?”
“몰라요. 이름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윤아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나는 티슈를 꺼내주고, 윤아가 오늘의 눈물을 다 흘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얼마 전에는 몇 명의 아이들을 같이 만나는데 처음 보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만 이름을 몰라서 물었다.
“넌 처음 보네?”
“아, 저는 고3이에요.”
“엥, 고3이 이름은 아닌데… 이름이 뭐야?”
그 녀석도 울었다. 늘 ‘고3’이라고만 답하면 알았다고 했는데, 이름을 물으니 왠지 뭉클해졌다고 했다. 오늘 만난 녀석은 이름이 외자였다.
“오, 이름 예쁜데?”
“그래요? 성 붙이면 안 예쁘지 않아요?”
“아닌데. 성 붙여도 예쁜 이름인데.”
“제 생각엔 안 예뻐요. 혼날 때만 들어서 그런가?”
이 말에 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름, 너무 오랜만에 들어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면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학교에서 출석부를 잘 부르지 않고, 출석부를 불러도 출석을 체크할 뿐이지 이름을 부르는 것 같지는 않고, 학원에 가도 이름은 안 부르고 기계로 출석을 체크한다. 그러면 보호자에게 알림이 간다. 보호자는 학원이 끝났다는 알림을 받으면 카톡으로 묻는다.
‘언제 와?’
‘왜 안 와?’
그 물음에도 이름은 없다.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라고 부탁하고 싶다. 아이 이름은 ‘중2’가 아니다. ‘고3’도 아니다. 아이의 등급이 떨어진 후부터 집에서 “야, 5등급!”이라고 부르는 보호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에게 매겨진 등급이나 숫자가 아이의 이름이 될 수는 없다.
보호자가 있든 없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는 공을 들인다. 한정된 글자에 좋은 뜻을 가득 넣어주고 싶어서 뜻을 찾고, 음을 찾고, 작명소에 가기도 하고, 성직자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아이의 이름은 기도이자 희망이자 고유한 언어다.
내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엄마는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새벽에 나가 장사해야 하니 딸을 기다리고 싶어도 몸이 그 바람을 들어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또 잠들어 있어도 실망하지 않으려고 미리 대비하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쩌다가 엄마가 깨어서 내 이름을 불러줄 때가 있었다.
“선화야!”
내 이름은 ‘꽃 화’(花)를 쓰지 않고 ‘화할 화’(和)를 쓰는데도 그때의 나는 꽃이 되었다. 활짝 피어났다.
지금의 아이들도 그렇다. 민지는 민지로, 서연이는 서연이로 불릴 때 꽃으로 피어난다. 그리고 민지는 자라서 민지가 되고, 서연이는 자라서 서연이가 될 것이다. 명문대생으로 불리지 않아도 괜찮고, 대기업 직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지만, 민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연이가 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주세요, 부탁하고 싶다. 아이들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마음속에 아이가 있는 우리, 서로들에게도.
■ 이 글은 필자의 근간 《청소년이라는 우주》(이상북스)에도 실렸습니다.
오선화
자유로운 글쟁이, 오선화. 청소년과 밥 먹는 사람, 써나쌤. 소설 쓰는 오하루. 세 명이 한 몸에 산다. 지은 책으로는 《그저 과정일 뿐이에요》, 《엄마의 포옹기도》, 《ㅈㅅㅋㄹ》, 《청소년이라는 우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