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삶은 그렇게 계속되었으니까

[409호 커버스토리]

2024-11-30     박미선

‘나 그리고 행복한 기다림’.

난임병원 수첩 표지에 적힌 글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든다. “행복한 여정 맞나?”

매일 반복하는 일과 중 가장 집중하는 시간은 난임 카페에 들어갈 때이다. 나와 비슷한 사례들을 찾아보고 약간의 위로라도 받고 싶은 마음에서다. 하지만 대부분 시험관 과정에서 겪은 실패와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이라 같이 슬퍼하고 절망하기 일쑤다.

교회 청년부 시절에는 맡은 사역이 많아 외로운 줄 모르고 지냈다. 미혼인 채로 청년부를 졸업하고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니 외로움이 온몸을 가격했다. 배우자 기도를 시작했다. 요즘에도 결혼 적령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예상했던 때보다 늦어진, 마흔둘에 결혼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그는 ‘아기를 갖는 것’에 반대했다.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거란 보장이 없어서라고 했다. ‘좋은 아빠’가 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아기를 바라왔던 터라 이별을 택했다. 하지만 인연이었는지 우리는 부부가 됐고, 난임 과정을 겪는 지금은 남편이 더 간절히 아기를 원하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병원 진료에 동행하며 원장님께 질문도 많이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종종 꿈에 우리의 아기가 나왔다며 좋아도 한다.

아기들만 보면 눈물이 왈칵

결혼 후 1년 만에 난임병원을 방문했다. 몸이 여기저기 많이 아팠기에 아기를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하다가, 산부인과에서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로 살 계획이 아니라면 당장 난임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듣고 난 후였다. 조기 폐경을 진단받았고, 바로 시험관을 진행하게 됐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아기 천사가 금방 찾아올 줄 알았다. 결과적으로 작년 6월부터 시작해 단 한 번의 이식도 없었다. 처음 배아를 한 개 동결하고 나서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더 동결된 배아가 없다. 난포에서 난자를 채취해 정자와 수정시킨 후, 동결된 배아를 세 개 모아야 이식할 수 있다. 배아 한 개로는 임신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기간에 두 번의 난자 채취가 더 이루어졌지만, 한 번은 공난포1), 한 번은 수정 실패.

얻은 건, 주기마다 복용하는 약과 배에 맞는 주사들로 인한 부작용, 탈모와 8킬로그램이나 불어난 몸무게뿐이다. 조금 더 난포가 자라 배아까지 생성되길 바라며 진행하겠지만, 아마도 아기를 갖는 내 여정은 한 번의 이식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이식 1차에 임신하는 일은 기적이라는 말을 들어서 조바심이 상당하다. 첫 방문에서 배아가 동결됐기에 두세 달만 더 고생하면 되겠다는 야심 찬 기대를 했는데, 절망의 기운이 점점 더 짙어졌다.

언제부턴가 지나가는 아기들만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방에 임산부 딱지를 걸고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는 것이 바람이 됐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성경 속 사라, 한나, 엘리사벳의 이야기가 내 것이 됐다. 생명, 창조, 기다림, 급기야 ‘귀여움’이란 단어까지 아기와 연관되어 코끝이 아려온다. 시험관 시술로 임신에 성공했다는 연예인들 이야기는 어찌나 많이 방송되는지 모르겠다. 1%도 되지 않는 가능성으로 임신에 성공했다는 여배우의 간증 영상까지 찾아봤다. 아기를 준비하는 동안 여러 지인의 임신 소식을 접했다. 난임 카페에서 가까운 이들의 임신 소식에 힘들다는 글을 종종 보면서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자신했는데… 자연 임신으로 넷째를 가진 친구, 교회 자매의 임신, 나보다 늦게 결혼한 친구들의 임신 소식이 SNS를 통해 전해지니 축하하고 싶은 마음보다 부러운 맘이 앞선다. 누군가의 큰 기쁨과 축복을 순수하게 축하할 수 없는 속내가 부끄럽다. ‘그럼 그렇지, 하나님이 내게 좋은 걸 주실 리가 없지!’ 고질적인 원망이 한숨이 되어 터져 나온다. 주변에 아기를 기다리는 가정이 여럿 있는데 엄마가 되는 축복에서 나만 제외될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든다. 벌써 학부모가 된 친구들, 자식을 결혼시키는 지인들 소식에 세게 ‘현타’를 맞기도 한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구나

아기에 대한 소망을 신앙인들과 나눌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주시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둘이 잘 살면 된다”이다. 머리로는 수긍이 되는데 가슴으로 얹힌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구나. 자기는 아이가 있으면서 저런 말을 하네?’ 반발심이 솟구친다. 나를 위하는 말들이 삐딱하게만 들린다.

어느 날은 남편이 한나처럼 부르짖으라며 성경을 펴놓고 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오빠나 그렇게 기도해. 내 간절함을 알아?” 하며 화를 냈을 법한데, 이날은 진지하게 읽어봤다. 오죽했으면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드린다는 서원을 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서원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지한 고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마음으로 적용되었는데, 그를 내 바람대로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모습을 회개할 수 있었다. 아마 나중에 아이를 키우게 될 때도 이 말씀을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결혼을 두고 기도할 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구했다. 소위 말하는 세상 기준으로는 불가능한 결혼 같았다. 지금 아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동일하다. 나이, 육체, 경제적으로 모두 한계에 부딪혔다. 하지만 끈질기게 생명을 바라는 마음이 본능을 넘어선 하나님의 뜻이길 바라며 한나의 기도를 드렸다.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삼상 1:18, 새번역)

‘마더와이즈’라는 교육을 받을 때였다. 아내, 엄마, 더 나아가 사회와 교회 등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삶의 역할들을 말씀으로 바로 세워나가는 교육이다. 이 교육에서 ‘진심으로 아기를 갖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하나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기도 가운데 더 깊은 열망을 발견했는데, ‘사랑받고 싶다’는 것이다. 오롯이 엄마를 향해 두 팔을 뻗고 달려오는 작은 생명체를 안고 싶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부모의 돌봄이 있는 안전한 세상. 그렇게 아이의 세상이, 전부가 되고 싶다. 여전히 사랑에 목마르다는 것, 아기에게조차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게 맞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괜찮다고 따뜻하게 반응해주신 분들 덕분에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기를 원하는 이유를 두고 기도하면서 숨겨진 두려움도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과의 첫 만남은 일곱 살 때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갓 태어난 나를 할머니에게 맡겼다. 할머니 손에 자란 유년기 시절에는 부모님을 뵌 기억이 없다. 학창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고부터 다시 혼자였다. 어느덧 가족과 함께 산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어졌다. 짙은 외로움, 아무도 날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공포와 싸워야 했다. 언제부턴가 버티는 일이 버거워졌다. 마음속 생채기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졌다. 자기 소멸의 의지가 자라나 신경정신과 약을 먹고 상담과 영성 지도를 병행했다.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진리가 드디어 진짜로 다가왔을 시점에 남편을 만났다. 하지만 사랑받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늘 불안했다. 언젠간 다시 혼자가 될 거란 두려움. 이것이 아기를 갖고 싶은 소망과 연결된다는 걸 발견했다. 남편이 내 옆에서 사라질 날이 오면 견디지 못할 것 같고, 그 상실감을 채워줄 대안으로 아기를 바란다는 생각. 아기가 나와 남편을 연결하는 끈 같았다. 만약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애틋이 여기며 살게 될까? 아니면 우리의 결혼생활이 끝날까?

두려움과 연결된 소망을 자각하고 나니 허무하다. 끊임없이 ‘있고 없음’의 문제에 집착하는 인생이다. 집, 돈, 건강, 배우자, 이제는 아기. 이것들을 구하고 주어지지 않아서 절망한다. 필요와 바람이 집착을 넘어 목적이 되어버린다. 바라고 구하다 길을 잃었다.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 질문하며 침묵한다. 하나님의 현존. 그래,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현존을 누리는 일뿐이다. 기도를 드린다.

“어떤 마음으로 생명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제가 지닌 상처와 두려움들을 마주할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니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길 소망합니다. 혹여나 아기를 바라는 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더라도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원합니다.”

끝까지 아기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는다. 잠시 불안이 살짝 옆으로 비껴간다.

끝이라는 건, 슬픔이자 위로

병원에서 기대했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돌아올 때마다 의기소침해진 나를 위로하기 바쁜 남편이다. 의심하는 내게 분명히 하나님은 아기를 주실 거라고 장담한다. 불임 판정을 받았던 형님에게 자식이 둘이나 생긴 이야기, 기다리던 아기를 포기한 순간 50세에 임신했다는 외숙모 이야기를 덧붙여. 그런 남편에게 고마워 의연한 척 애쓴다. 하지만 지연되는 소망에 남편 속도 많이 상한 듯하다. 최근에는 진료 후 침묵이 길어진다. 남편이 속마음을 털어놨다. 결혼 전, 본인이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서, 아니면 잘못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것 같다고.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섬기는 당신이 엄마가 되고 싶다는데 너무하지 않느냐고. 힘겹게 꺼내놓은 속마음에 가슴이 미어진다. 나만의 아픔이 아니고 우리의 아픔이구나. 함께 걷는 여정이라는 위로와 동시에 나의 탓 같아 자꾸만 미안해진다.

사실 나 역시도 거듭되는 실패에 잘못과 회개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금식기도를 하지 않아서일까? 영혼까지 탈탈 털어 회개하면 소원을 들어주실까? 하나님을 쪼잔하게 만든다. 여전히 우리의 공로에 따라 하나님을 상과 벌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잠시 눈을 감고 난임의 시간을 돌아봤다. 생각해보면, 삶의 희로애락에서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 원하지 않았던 슬픔과 아픔이 나를 더 하나님께로 이끌었다. 모든 순간 의미를 해석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다만,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을 뿐이다. 이 과정도 그렇게 지날 거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눈물이 고였다. 임신과 출산의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얻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또 새롭게 만나 주시겠구나. 이전보다 하나님을 조금 더 아는 것. 그것이 내게 복이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나온 글귀를 계속 곱씹어 삼킨다.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 스랜리 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IVP)

분명히 끝이 있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여정. 끝이라는 건, 위로이면서 슬픔인 것 같다. 어떤 마무리일지 모를 불확실한 걸음을 조금 더 걸어보려 한다. 지금까지처럼 기대와 실망, 기도와 소망을 안고 또 힘을 내어. 언제나 삶은 그렇게 계속되었으니까. 어느 때보다 기다림이 깊어지는 대림절을 맞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의 은총을 구한다.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찾아올 생명을 기도한다. 문득, 죽음만을 생각했던 우리의 삶이 이토록 생명으로 충만했던 적이 있을까 싶다. 그야말로 은총이다.

■ 주

1) 난소에서 난자를 채취하려는 과정에서 난자가 발견되지 않는 경우. 난소 내에 난포는 있지만 그 안에 성숙한 난자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 경우 시험관 시술 진행이 불가하다.


박미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명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하고도 뜨거운 그리스도인. 기도와 선교하는 공동체 산돌교회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