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순간을 놓치지 않게
[410호 책방에서] 정은귀,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 경험이 너무 강력해 삶의 중대한 변화로 이어지기도 하는 순간이요.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보낸 일주일이 그랬습니다. 떼제공동체에 머물며 했던 거라곤 하루 세 번 예배하고 산책하는 일이 전부였죠. 심심할 정도로 단조로운 일과를 반복하다 보니, 시끄럽고 어지럽던 머릿속이 어느 순간 맑아졌고요. 뾰족하게 터져 나오기 일쑤였던 마음도 차분해졌습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섯째 날 저녁 예배의 침묵 기도는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시간이었죠.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한 절대자를 거대한 고요 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몸이 된 말씀, 섬김으로 사랑을 보이신 독생자를 환한 침묵 속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비롭게 다가온 경이(驚異). 분명한 건 그 순간이 그때까지 달려온 삶을 멈춰 세웠다는 거예요. 새롭게 시작할 동기가 되었고요.
그런 순간을 지금 이곳 연천에서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연천은 멸종위기종 두루미가 겨울을 보내기 위해 찾는 곳인데요. 오랫동안 두루미를 살피며 조사하는 이웃과 두루미 모니터링을 하게 되었죠.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민간인통제구역(CCZ)에 출입증 있는 이웃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잘 관찰할 수 있게 언덕에 자리를 잡았죠. 영하의 날씨가 매섭고, 솟구치는 바람이 날카로웠지만 뚜루뚜루, 멀리서 두루미 노랫소리가 들려왔고요. 가족끼리 무리 지은 두루미가 머리 위를 지나갔습니다. 먹이터로 향하는 두루미들을 보는데, 마음이 벅차올랐습니다. 모든 걸 잊게 만드는 감격과, 이걸로 충분하다는 충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가슴에 묻어둔 “경이”라는 단어를 꺼내줍니다. 이 책을 아껴가며 읽었던 건 저자가 ‘읽는 시간’과 경이 그리고 시를 연결했기 때문이에요. 읽는 시간은 능동적일까요, 수동적일까요.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건 적극적인 행동이죠.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건, 책이 나를 통과할 수 있게 가만히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시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번역하고, 소개해온 저자는 “매일 시를 기다린다”고 해요. 신비롭게 찾아오는 은총을 기다리는 구도자처럼. 저자는 ‘읽는 시간’을 경이로운 순간을 기다리는 기도처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시는 성급한 독자를 호흡과 여백으로 멈추게 하네요.
새해를 어떤 책으로 열어야 할까요. 추천하는 책도 많고 새로 나온 책은 더 많은데, 이것도 저것도 읽어야 하는데. 그러다 시를 읽자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찾아오는 은총을 놓치지 않게, 주변을 둘러싼 신비를 지나치지 않게, 가슴 벅찬 경이로운 순간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이수진·김희송
경기도 연천 조용한 마을에서 작은 빵집이자 동네책방, 그리고 여행자들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인 ‘오늘과내일’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