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사람, 평화

[410호 예술, 구원을 묻다]

2024-12-31     백지윤

시각예술은 훌륭한 옷장이나 벽난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늑하면서도 웅장하고, 친근하면서도 신비롭고, 압도적이면서도 따뜻하게 맞아주니까요. 그것은 저만치 자리를 잡고서 우리를 넉넉히 기다립니다. 또, 중요한 무언가를 그 안에 담고 있지요. …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otherness)을 사랑하게 되는 비밀, 이기적인 자아와는 구별되는 만물의 부요함을 사랑하게 되는 비밀입니다.1)

이 글을 읽으며 커크 교수의 시골 저택에 있던 크고 비밀스러운 옷장, 호기심 가득한 루시를 나니아로 안내했던 옷장이 떠올랐습니다. 그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들어간 페벤시 남매는 그곳에서 신비로운 왕, 사자 아슬란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지요. 사실 예술을 옷장과 벽난로에 비유한 이 글에서 더욱 제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옷장(아름다운 옷)과 벽난로(따뜻한 불꽃)처럼 시각예술도 그 안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담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술이 우리의 자기중심적 본능을 넘어 나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 더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의 풍요를 사랑하게 되는 비밀을 담고 있다는 말은 요즘 아침마다 묵상하는 골로새서에서 말하던 ‘플레로마’(πλήρωμα, 충만함)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함이 머물고 있으며, 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 역시 하나가 되어 충만함에 이르게 된다고 했던가요. 어쩌면 예술이 담고 있다는 비밀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이 충만의 비밀과 그리 멀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연재 제목을 “예술, 옷장의 비밀을 파헤치다”라고 했어야 하나 봅니다.

구원을 다시 생각하다

‘예술, 구원을 묻다’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식상하고 다른 누군가에겐 무겁게 다가갈 수 있을 ‘구원’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지 한참 망설였는데요. 그렇지만 오히려 교회 안에선 낯선 주제일 예술이 우리가 잘 안다고 믿는 구원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이라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그동안 종교적 수사와 교리에 가려져있던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줄지도 모르겠다고요. 어쩌면 우리가 구원이라 부르는 것은 마법사의 숨겨진 옷장을 통해 들어간 나니아에서 사자 아슬란을 만나고, 그의 신비한 통치를 서서히 깨달아가면서 나니아인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인간”의 고귀한 운명을 회복하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구원은 다름 아닌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기이한 평화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참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역사의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유다의 사자가 사실은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드러나는 계시록 5장의 극적인 반전 드라마 말입니다. 그 위대한 역설의 승리가 가져오는 진정한 샬롬, 세상의 평화야말로 온갖 벽과 차별로 너와 나를 가르는 데 익숙한 이 땅에서 우리의 온 마음과 삶을 다해 구해야 할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참된 평화와는 점점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를 살면서, 오늘 우리 삶에서 과연 어린양의 승리가 가져오는 구원, 이 평화의 비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삶 안에서 구현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만 갑니다. 아쉽게도, 신실한 신앙인들이라고 할수록 이상하리만치 세상과 우리 자신을 보는 눈이나 사고방식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꿈꾸는 우리의 신학적 상상력 역시 너무 메마르고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우리의 눈과 감성, 상상력을 새롭게 일깨워주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샬롬이 충만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해줍니다. 나아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삶으로 체현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기독교 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고되지만 무척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제 마음 한편에는 서로 전혀 다른 어휘와 문법을 이해하지 못해 어느새 오해와 불신의 벽으로 가로막혀버린 기독교 신앙과 예술, 더 구체적으로는 현대미술이라는 두 세계를 이어주는 또 다른 종류의 번역가라는 꿈이(꿈이라 쓰고 부담이라 읽습니다) 늘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이 연재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시도해왔던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은 노력의 연장선이자, 의미 있는 첫 열매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가 그동안 신앙과 예술 세계 사이의 경직된 이분법적 틀 안에서 고민하고 씨름해온 기독교인 예술가와 예술 전공생에게, 기존 교회에서 듣기 힘들었던 격려와 영감의 목소리로 전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계 7:10)이라는 장엄한 찬양이 울려 퍼지는 천상의 참된 실재가 아직은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가져오시는 참평화의 비밀로 우리를 안내해줄 비밀스러운 옷장 같은 예술 세계를 독자들과 함께 아주 살짝이라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너무 얕고 자기중심적 “구원의 확신” 대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부요한 구원의 실재, 나와 다른 타자를 포함하는 만물의 평화와 충만함을 꿈꾸고 구하고 경험하는 참된 사람의 길을 희미하게나마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화 전쟁을 넘어

그동안 개신교 전통 안에도 예술과 문화에 관심을 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노력이 물론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기본적 태도는 성경적 ‘규범’에 근거한 일방적 의심·경계·비판이 주를 이루었는데요. 저도 아주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면서, 반기독교적이고 반성경적으로 보이는 이 시대 문화와 예술,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에 맞서 기독교 진리와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기독교적 관점을 보다 잘 훈련하고자 멀리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 칼리지로 유학을 왔고 지금까지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여전히 기독교인으로서 갖는 현대미술을 향한 관심과 열정은 동일하지만, 이 문제에 접근하는 저의 태도만큼은 많이 바뀌어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밖의 그들을 암묵적으로 ‘적’이라 규정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그들과 잘 싸우고 기독교적 가치를 지켜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상 모든 영역에 선포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변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내세우는 우리 모습 안에,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환대보다는 배제와 폭력의 논리가 더 많이 숨어있음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져오실 온 세상의 평화, 샬롬을 구원이라 부르는 우리라면, 이제는 적어도 예술을 바라볼 때도 너와 나를 극명하게 가르고 편협한 기독교적 규범의 우위만을 관철하려는 문화 전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좀 더 인간 보편의 관점, 참된 사람의 길로 접근해보면 어떨까요.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미술사가 한스 로크마커가 했던 말 중 제가 너무 좋아해서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부르기 위해 오셨다.” 아쉽게도 로크마커 자신도 기독교인의 제한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있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라면, 누구보다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춤추면서 좀 더 열린 자세로 포용하고 때로는 겸손히 배울 줄도 아는, 진정으로 충만하게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예술이라는 멋진 선물 역시 그저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기보다는 마음껏 경축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에야 비록 예술이 지닌 여러 불완전함 가운데서도 우리의 인간됨(what it means to be human)에 대하여, 그것이 종종 드러내는 통찰에 주목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람, 생존이 아닌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것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넘치게(페리손, περισσὸν)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이 말씀은 우리를 사람으로 부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로크마커의 말을 되울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넘치도록 풍성한 페리손의 생명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해줄 테니 말입니다. 더 나아가 이 페리손의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사람이 처음부터 어떤 존재로 지어졌는지 알려줍니다. 즉, 우리는 필요와 효용성의 원리에 근거해서 딱 필요한 만큼의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생존 자체가 아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며, 그리하여 더 온전하고 풍성한 삶을 갈구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필요가 아닌 온전히 무한한 사랑에 근거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술은 이렇듯 사람이 효용성과 생존의 요구에 반하여 세상과 삶의 의미를 묻고 구하는 존재임을 생생히 증언합니다. 생존을 넘어 의미를 추구하는 가장 특별한 인간의 활동이 예술이니까요.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이란 의미의 체화(embodiment of meaning)라고 정의하기도 했는데요. 물론 전통적 예술관을 가진 분이라면 ‘의미’ 대신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넣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현대미술 발전 과정을 길게 논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일단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추구하는 바가 의미이든 아름다움이든, 사실 예술은 우리가 먹고사는 일이나 당장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특히 많은 기독교인이— 예술에 반감을 갖거나 중요성을 부여하길 꺼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쓸모없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사치, 심지어 죄악(!)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인류 역사는 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예술이 처음부터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본질적 요소였는지를 보여줍니다. 3만 6천 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남겨놓은 쇼베 동굴 벽화가 좋은 예인데요. 이 동굴에서 발견된 총 1천여 점에 달하는 벽화는 색감과 형태뿐 아니라 다양한 기법으로 해부학적 정밀성과 운동감을 표현하는 등 구석기 원시인류가 그렸다고 하기엔 놀라울 정도의 기교와 심미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조르주 바타유를 인용해 쇼베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생존에 목적을 둔 세계에 대한 항의”였다고 말합니다(《두번째 도시, 두번째 예술》). 인간은 생존을 위한 효용성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놀이나 만들기, 즉 예술적 활동과 언어를 통해 세상과 자신들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프랑스 동남부 아르데슈 협곡에 위치한 쇼베 동굴 벽화

이렇듯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는 창조주를 따라 이토록 오래전부터 예술적 창조 행위를 통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창조적 예술 활동의 원천과 기원은 효용성의 원리가 아닌 사랑에 근거해 온 세상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넘치도록 풍성한 페리손의 생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술, 역설적인 생명력의 역동성을 증언하다

역설적으로 악과 어둠이 아직 위세를 떨치는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에 연결된 페리손의 생명력은 세상이 정의하는 방식의 ‘풍요’를 누리는 삶이 아닌, 오히려 고통의 한복판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직은 구속받지 못한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풍성한 생명을 취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난을 무릅쓰는 가운데서도 선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부활의 실재가 온 창조세계의 실재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 성령이 맛보게 하시는 그 생명력이 때로 우리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고 사랑을 위해 적극적으로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겁니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세상의 악과 어둠 앞에서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빛을 발하는 이 역설적인 생명력의 역동성을 증언하는 현장이 됩니다.

에텔 아드난(Ettel Adnan, 1925-2021)은 레바논에서 출생한 화가이자 작가입니다. 저는 아드난의 작품이 이처럼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거나 사그라들지 않는 넘치는 생명력, 페리손의 생명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어난 시대와 지역이 암시해주듯, 여성으로서, 예술가로서 그의 삶은 많은 면에서 분명 녹록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그림을 그렸던 아드난이지만, 그의 삶은 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았고, 아랍계 여성 이민자로서 여러 나라와 언어를 오가며 늘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서 주변부로 살아야 했습니다.

오래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저로서는 이렇듯 뿌리에서 단절되어 이방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설움과 고단함을 조금은 압니다.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던 아드난에게 예술은 집이 되어 주었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생생한 색채가 여러 경계와 문화를 초월하는 하나의 언어였습니다. 색채라는 소리 없는 언어로 아드난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모든 실존의 고통과 폭력적 현실로도 억누를 수 없고 소멸할 수 없는 무한한 창조주의 사랑에 잇닿은 세상의 생명력이 아니었을까요. 이처럼 아드난의 회화는 생명의 근원 자체에 연결되어 있기에, 깨어지고 고단한 이 세상의 폭력과 상실의 현실에서도 우리를 온전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해주는 페리손의 생명력, 예수님이 주러 오신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을 증언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놀랍게도 아드난에게 이것은 사랑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The Cost for Love that We ar not willing to pay)’라는 에세이에서 아드난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또 가장 위험하고 가장 예측 불가하고 가장 미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한 내가 아는 유일한 구원이기도 하다.”

에텔 아드난의 회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아직 깨어진 세상 안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이 넘치는 생명력을 묵묵히 증언하는 예술가들로부터 우리는 겸손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에텔 아드난(사진: Fabrice Gilbert·courtesy Galerie Lelong & Co.)

사실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우리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과 어두움의 한복판에서 이런 역설적인 생명력의 가능성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목소리는 교회 밖에서도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기 며칠 전 에티 힐레숨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는 이것이다. 이곳의 고통은 실로 끔찍하다. 그러나 낮이 내 뒤편 저 깊은 곳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간 깊은 밤, 나는 종종 철장을 따라 내 걸음에 봄을 실어 걷는다. 그러면 삶은 영광스럽고 장엄하다는 느낌이,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 말리라는 느낌이 몇 번이고 내 마음에서 —나도 어찌할 수 없이, 어떤 가장 근본적인 힘처럼 그냥 그렇게— 곧장 솟구쳐 오르곤 한다.2)

이처럼 가장 깊은 악과 어두움 한복판에서도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는 페리손의 생명력을 증언하는 이들은 어쩌면 교회 안의 제자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는 일방적 선포와 가르침으로 우리가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벗어나, 교회 밖에서도 성령께서 이미 일하고 계심을 (때로는 아주 희미하게 일지라도) 보여주는 이들의 증언에 우리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보면 어떨까요. 그래서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으로 살아 숨 쉬는 신비로운 사람의 길, 단순한 생존이 아닌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참된 인간됨을 더 깊고 온전하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주

1) 케이티 크레서(Katie Kresser), 《브살렐의 몸(Bezalel’s Body)》
2) 에티 힐레숨, 《Interrupted Life》, 294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이상 IVP)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