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평화교회의 의사 결정 소시오크라시

[410호 평화교회 한 걸음]

2024-12-31     김홍석

이 글의 초고를 쓰고 있던 12월 3일, 한국 군사독재의 오래된 망령이 되살아날 뻔했다. 한밤중에 현직 대통령의 계엄령은 깨어있는 시민들과 의회의 발 빠른 조치로 수포가 되었지만, 그의 탄핵을 둘러싼 내홍은 계속되고 있다. 기도하건대, 하나님께서 공의와 평화의 마음을 모든 정치인에게 심어주셔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살아나는 결정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역사적 평화교회, 특히 퀘이커의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의사 결정 방법론이 긴급하고 주요한 결정을 앞둔 한국 사회에 시의적절한 참고가 될 것이다.

퀘이커 전통의 참여적 의사 결정

현대사회에서 교회 공동체와 일반 단체의 의사 결정 방법론은 보통 세 가지 중 하나다.

첫째, 피라미드 의사 결정 모델: 이 모델은 최고 상층의 지도자나 지도자 그룹이 스스로 중요한 안건에 대한 의사 결정을 하고 이를 하층부에 통보하고 실천할 것을 종용한다. 권위주의적인 조직 구조나 비상적인 상황에서 활용된다. 빠른 의사 결정이 장점이나 대다수 공동체 구성원의 의견은 무시되기에 실행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강제성이 수반된다. 중세 가톨릭교회, 근대 왕정 국가, 전시의 군사 조직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다수결 의사 결정 모델: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다수의 공동체가 사용하는 모델이다. 조직은 구성원들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찬반을 표현하고 과반수 또는 그 이상의 찬성을 얻은 의사 결정을 실행하며 모든 구성원은 이에 승복한다. 현대사회에서 민주적 절차라고 하면 이러한 다수결 제도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질서 있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고 구성원들의 승복으로 실천력도 어느 정도 담보될 수 있다.

셋째, 컨센서스 모델: 조직은 수평적 구조로 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동의해야지만 안건이 통과되어 실행된다. 주로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며 의사 결정의 속도는 가장 느리지만, 모두가 동의한 내용이기에 실천력은 높다.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한다면 의사 결정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맹점이 있기도 하다. 친밀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표방하는 단체에서 이러한 형태의 의사 결정을 시도한다. 한 예로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는 커다란 군중을 대상으로 이러한 컨센서스 모델을 실험하였다.

현재 전 세계에서 “민주적”이라고 불리는 의사 결정 모델은 대부분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즉 교회, 학교, 공공 조직에서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의사 결정 프로세스는 영국 의회의 의사 결정 모델을 미국의 로버트 장군이 축약해서 내놓은 ‘로버트 규칙’에 따르는 다수결 시스템이다. 우리가 흔히 교회의 총회에서 들었던 “동의합니다, 제청합니다!” 등의 표현을 떠올려보자.

처음 로버트 규칙이 등장한 배경은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무질서에 있다. 로버트 경이 출석하던 교회에서 한 가지 의사 결정 사항을 가지고 교회가 크게 분열되었는데 이에 로버트 장군은 본인의 교회에서 영국과 미국 의회에서 막 활용하기 시작한 의사 결정 모델을 도입할 필요를 느꼈다. 하여 조직의 의사 결정에 “질서”를 찾아주기 위해 의회처럼 질서 있는 의사 결정 프로세스를 전해주고자 한 것이었다.1) 이는 이전의 왕정 체제나 1인 독재 체제에서는 볼 수 없는 의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민주적인 투표, 그리고 다수결에 의한 의사 결정을 인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로버트 규칙으로 대표되는 다수결 절차는 몇 가지 한계에 부딪혔다. 첫째는 이 절차가 잘 작동되기 위해서는 참여자들이 투표할 의제에 대해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한 정보와 시간이 부족하면 불분명한 투표가 될 수 있고, 절차를 진행하는 소수의 사람이 정보를 쥐고 빠르게 안건을 통과시켜서 절차적 민주성을 가장한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대부분의 의사 결정이 반수만 넘기면 되기 때문에 의견이 다른 상대방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상대방을 악마화하거나, 의제와 상관없이 상대방의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인신공격을 일삼게 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구성원들은 차츰 더 양극화되어 간다. 셋째는 존중받지 못한 소수 의견은 사장되며 소수파는 점점 공동체에서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반수 또는 3분의 2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수 의견이 계속 소외되면서 공동체 분열로 이어지기도 한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민주주의

소시오크라시(sociocracy)라는 말은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서 처음에는 교양 있는 사회과학적 지식인에 의한 통치 정도로 인식되는 단어였다. 실천적인 형태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퀘이커 교육가였던 케이스 부커와 베티 캐드베리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시작 무렵, 왕성한 반전운동을 벌이다가 네덜란드에 정착하였고, 집에서 자녀들을 비롯한 아이들을 모아 직접 ‘칠드런스 커뮤니티 워크숍’(Children’s Community Workshop)이라는 대안 교육 학교를 설립했다. 몬테소리 교수법을 기본으로 퀘이커의 ‘센스오브 미팅’, ‘공동책임(Co-responsibility)’을 활용해 자기 주도적 공동체 운영을 실험했다. 부커와 베티는 특히 퀘이커 공동체에서 1천 명이 넘는 인원들이 논쟁이 아닌 대화와 소통을 통해 합의해가는 방식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 기법을 배워 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지스탕스로, 또 폴란드에서 탈출한 유대계 학생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피난처를 제공했다. ‘칠드런스 커뮤니티 워크숍’은 학교이자 피난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성장한 졸업생 중에 네덜란드의 기업가가 된 헤라르트 에덴뷔르흐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이상적인 일터를 만드는 데 활용했고, 치열한 경쟁이 있는 기업에서도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연과학적 지혜를 접목했다. 그렇게 협력과 자기 주도를 통하여 조직을 운영하는 방법론인 ‘소시오크라시 서클 매니지먼트’(Sociocracy Circle Management)를 창안하여 자신의 회사에서 실험하였다.

그의 회사인 에덴뷔르흐 일렉트로닉스는 소시오크라시로 인해 생산성이 30퍼센트 이상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민주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조직 운영 방법을 배우고자 그의 회사를 찾았다. 현재는 협동조합을 비롯해 세계 에코 빌리지 연합 등, 영리 및 비영리 조직에서 이 방법론을 도입해 활용 중이다. 특히 수평적 조직문화를 지향하는 조직과 공동체에서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국 NVC(비폭력대화)센터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적 평화교회인 퀘이커 교회의 의사 결정인 소시오크라시의 기본 원리는 세 가지다. 동의를 통한 의사 결정, 서클 회의 구성과 진행, 이중연결 등이다. 첫 번째 원칙인 동의의 원칙은 포용적인 의사 결정이 절실한 조직에서 자체적으로 실험을 해봐도 좋을 것이다.

소시오크라시의 세 가지 원리2)

① 제1원리: 동의(Consent)를 통한 의사 결정

전원 합의 의사 결정과 다수결 의사 결정의 장점을 합한 의사 결정 방식이다. 전원 합의의 경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다수결의 경우에는 소수의 의견이 무시된다. 동의(Consent)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적극적인 찬성뿐만 아니라 적극적 찬성이 아니지만 수용할 수 있다는 반응까지를 동의로 보고 이의가 없을 때 이 안건을 진행한다.

만약 적극적인 반대 표시인 이의가 있을 때, 그 의견을 함께 듣고 안건을 수정하거나 보류하거나 발전시켜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의 수용을 끌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동의를 통한 의사 결정은 100% 동의를 전제로 하나 동의율 또한 해당 공동체에서 조정할 수 있다.

소시오크라시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장기적인 정책(governance issue)인 경우에만 동의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일반적인 관리(management issue)의 경우는 해당 책임자가 자율적으로 방법론을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기적인 물품 구매나 조직 운영에 관한 사항은 매니저에게 맡기고,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항(남녀 사역자의 업무 분담, 교회 예배 시간 결정 등)에는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0명 이하의 작은 조직에서 특별한 안건에 대한 찬반을 물을 때, 진행자(퍼실리테이터)를 정하여 모두의 의견을 한 명씩 서클 프로세스를 활용해 이야기한다. 이를 라운드라고 한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는 의제에 대한 추가 질문이나 정보 공유를 하며,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발언하고 답을 들을 기회를 얻는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의제에 대한 동의(찬성 또는 이견 없음), 또는 이의에 대해 의사표시를 한다. 셋째 라운드에 이르러 이의 표시가 없는 경우 안건을 채택하고, 이의 표시가 있는 경우 이의의 이유를 듣고 수정 제한을 통해 이의가 없는 안건으로 조정하거나 시기를 조정한다. 조율이 되지 않으면 안건을 부결하거나 보류할 수 있다. 또한, 추가적인 자료수집이나 연구가 필요할 경우 별도의 팀을 꾸려 일임한다.

② 제2원리: 서클 회의(Circle Meeting)

공동체와 조직에서 한 팀의 구성단위를 서클로 편성하여 이 안에서 의제를 다루는 회의를 진행한다. 서클에는 각 서클의 방향성을 조율하는 리더, 회의를 진행하는 퍼실리테이터, 그리고 서기를 둔다. 이들 역시 동의 과정을 통해 선발한다. 소시오크라시의 서클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한 구조이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소시오크라시 서클은 다른 서클 프로세스를 통해 깊은 신뢰를 쌓은 조직에서만 효율적으로 작동하였다.

③ 제3원리: 이중연결(Double Links)

조직의 구성원이 많은 경우에 한 개의 서클로만 운영되기 어렵다. 한 서클에는 8명 내외가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각 서클을 조율하는 ‘총서클’을 만들어서 각 서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세우고 조율하며 조직 전체를 위한 목표를 세운다. 각 서클과는 마치 전기가 플러스(+)와 마이너스(-) 전류를 통해 흐르듯이 각 서클의 대표가 총서클에 오고, 또 총서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각 서클에 구성원으로 참여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과 피드백이 원활하도록 돕는다.

물론 이 장의 설명만을 가지고는 언뜻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사 결정 방식이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의사 결정 방식은 탑-다운이나 다수결만 있지 않다. 더욱이 앞으로 교회의 주인이 될 세대의 경우는 수평적 의사 결정과 참여가 더욱더 중요한 공감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기도와 성경 공부 못지않게 공동체의 바람직한 의사 결정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의 구조가 아직도 중세의 피라미드 구조에 갇혀 있다면, 과연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직문화와 협력적 의사 결정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으로서 필자도 계속 고민하고자 한다.

■ 주

1) 최평윤, ‘민주적 회의진행규칙 ‘로버트 룰’’, 〈NBN미디어〉(2015.3.4.)
2) 존 벅·샤론 빌린스, 이종훈 옮김, 《소시오크라시: 자율경영 시대의 조직개발》(한국NVX출판사, 2019) 참고.

 

지금까지 6회에 걸친 역사적 평화교회에 대한 성찰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다시 한번 소금과 빛이 되도록, 평화 제자도와 건강한 조직문화를 실천하고 전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홍석
평화교육을 비롯해 건강한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 ㈜조율컬렉티브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