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현상학자 ― 에마뉘엘 팔크 파리 가톨릭 대학교 명예학장

[410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2]

2024-12-31     김동규

에마뉘엘 팔크(Emmanuel Falque, 1963-)는 1988년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한 후, 1993년 파리 상트르 세브르 신학교에서 신학 교회인가 학위를 받고, 1999년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1년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철학 교회인가 학위를 받고, 2006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연구 지도 자격(Habilitation à Diriger des Recherches)을 획득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현상학적 사유와 연결 지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세철학에 관한 현상학적 해석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 시대 가장 주목받는 종교철학자이자 현상학자 중 한 사람이다. 지은 책으로 《신, 살, 그리고 타자: 이레네오에서 둔스 스코투스까지》, 《경험의 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까지》, 《철학적 성삼일: 겟세마네의 안내자, 유한성의 변형, 어린양의 혼인》, 《루비콘강을 건너서: 철학과 신학-경계들에 관한 시론》, 《사랑의 쟁투: 현상학적·신학적 논쟁들》, 《초-현상: 현상성의 경계에서의 논고》, 《신의 살》 등이 있다. 이 인터뷰는 팔크 교수의 학문적 여정과 철학을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2024년 3월 19일 줌을 통해 인터뷰가 이루어졌으며, 서강대 철학연구소 강지하 선생이 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인터뷰 이틀 후인 21일 파리 가톨릭 대학교 인근 카페에서 후속 대화를 이어갔으며, 파리 소르본 누벨 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장수민 선생이 동행해주었다.

이하 사진: 인터뷰어 제공

- 선생님의 신앙 형성, 그리고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로 한 계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일반 철학자들과 달리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셨고, 신앙과 영성 수련을 받으셨습니다.

저에게 철학과 신학의 연결 문제는 단순히 이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입니다. 제게 신학은 단순한 학문이나 분과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열일곱 살 때 프란치스코 전통을 통해 실제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은사주의적 성격을 지닌 에큐메니컬 공동체에서 가족 모두가 한데 어울려 살았습니다. 이 공동체에 있는 동안 저는 상트르 세브르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경험은 제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가톨릭 기관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제 동료들과 저의 차이점일 텐데, 신학이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제게 신학은 제가 공부한 것 자체입니다. 그때 저는 삼위일체, 그리스도론, 공의회, 교도권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예수회 공동체와 가까웠기 때문에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저는 30일 동안 영신 수련을 했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미 철학을 전공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단순히 철학자가 아니라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 작업은 다음과 같은 영성에서 비롯됩니다. 먼저는 결단의 행위를 포함하는 영신 수련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사유한다는 것은 결단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는 이냐시오적 개념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쓴 《사랑의 쟁투》는 일종의 식별에서 비롯한 책입니다. 저는 마리옹, 크레티앙, 라코스트 같은 동료들과 토론하고, 그들의 방식을 따라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의 결단은 무엇인가? 나 스스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물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아마 그 원천은 예수회일 것입니다. 또 다른 원천은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열일곱 살에 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저는 학교에 있었고, 제 첫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자 토미스트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스무 살 때 쓴 제 첫 논문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유비 문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석사학위를 위해 윤리학과 발생학을 다루는 매우 방대한 논문을 썼는데,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의 발생학 문제를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면서, 저는 그들의 윤리학에 참된 인간학이 다소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저는 철학과 신학에서 신체의 문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잘 알려진 제 책 《루비콘강을 건너며》가 단순히 저의 저술이 아니라 제 삶이라는 것입니다. 루비콘으로서의 제 삶이며, 이는 제게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프랑스에 산다고 할 때, 여러분은 매우 특별한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특별하지만, 프랑스는 라이시테(세속주의) 때문에 특히 더 그렇습니다. 프랑스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장 그레쉬가 제게 한 말을 정확히 다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철학자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저처럼 하세요, 가면을 쓰고 나아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가면을 쓰고 나아가다”라는 말은 사르트르도 했던 표현인데,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라는 말이지요. 저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루비콘강을 건너며》에서 마리옹에 대해 쓰면서, “나는 가면을 쓰고 나아간다(larvatus prodeo)”가 아니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나온 문장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나아간다(detecta fronte prodeo)”라고 썼습니다.

다만, 저는 루비콘을 건너는 일이 철학과 신학을 혼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철학자이자 신학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비콘을 건넌다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자이면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오직 철학자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철학 수업에서 신학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반 신자로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철학보다 신학이 더 지적이라고 말했지만, 저는 항상 그 반대라고 말했습니다. 저 자신이 우선은 철학자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습니다. 제 모든 책의 시작점에는 현상학이 있고, 신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적 성삼일》을 읽을 때, 우리는 계시의 문제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먼저 철학자입니다. 그런 다음 신학이 철학으로 전환할 수 있고, 신학에 의한 철학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철학자일 때는 철학자이고, 신학자일 때는 신학자입니다.

- 선생님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살, 신체,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 관해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현상학자로는 드물게 철학과 신학을 모두 아우르면서 신체의 의미를 재구성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학이 철학에 미치는 일종의 반작용이 있습니다. 미셸 앙리가 육화(incarnation)와 관련해서 했던 작업처럼, 현상학을 신학으로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미셸 앙리가 《육화》에서 한 것은 후설의 신체(Leib) 또는 살(flesh)이라는 개념을 신학적 육화, 즉 그리스도의 육화로 번역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육화’라는 용어가 원래 신학적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프랑스에서 ‘육화’라고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와 같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육화’는 현상학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육화가 이제는 나의 신체, 즉 고유한 신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상학을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장-뤽 마리옹이 살의 개념으로 한 것도 비슷합니다. 신학자들에게 “당신들은 이렇게 해야 하고, 기술해야 하고, 기술적 실천을 해야 한다” 등 교훈을 주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훈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신학자들이 현상학자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미셸 앙리는 우리가 참된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했고, 그것은 나처럼 살을 가진 신체, 영을 가진 신체, 지체를 가진 신체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신체는 영지주의의 천사적 그리스도의 신체와 대립합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체가 참된 신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신학의 참된 신체로 돌아왔고, 신학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신체가 인간의 신체이며 참된 신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물체(corpus)입니다. 단지 살아있는 신체(Leib)만이 아니며, 단지 살아가는 방식으로만 있지 않고, 참된 신체입니다. 천사들의 경우처럼 단순히 현상학적 신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사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신체를 가지지만, 신체를 취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신학이 현상학에 미치는 반작용은 현상학 자체를 변화시키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신체 개념으로 돌아왔습니다. 신체는 단지 데카르트의 연장된 신체의 개념만이 아니기에 저는 새로운 신체 개념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는 ‘고유한 신체(corps propre)’ ‘자기 자신의 신체’입니다. 또 이것은 데카르트의 연장된 신체와 후설의 체험되는 살아있는 신체 사이에 있습니다.

나의 신체는 데카르트의 연장된 신체만이 아닙니다. 단지 체험되는 신체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체험된 신체, 느끼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등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가 동물적 신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동물성이라는 개념을 잊고 있다는 의미이며, 제 책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는 요제프 티슈너에게서 빌려온 매우 중요한 구분이 나오는데, 동물성과 야수성의 구분입니다. 동물성이란 인간 존재의 한 부분, 내가 가진 것의 한 부분입니다. 나의 정념, 나의 충동, 나의 감수성 등입니다. 이는 동물성이며, 동물성은 천사주의의 반대입니다. 동물성은 동물들이 천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사주의란 신체 없는 의식입니다.

저는 동물성 문제가 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특히 성찬례에서 단지 나의 인간성을 위해서나 나의 인간성을 신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의 동물성을 인간성으로, 자녀 됨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나의 동물성 속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혼돈, 나의 충동 등을 만나기 위해 내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만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동물성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 즉 야수성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이 예시를 통해 보면, 신학이 현상학에 미치는 반작용이란 신학이 현상학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나는 현상학자이고, 내게 중요한 것은 오직 존재론뿐이며, 나는 언어학, 사회학, 신학 등 다른 학문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그런 철학자가 아닙니다. 이제 저는 우리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다른 학문들과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폴 리쾨르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전통과 토론하며, 토론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형이상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견해가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루비콘강을 건너며》에서 형이상학의 극복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상학의 목표 중 하나는 일종의 순수한 담론을 찾으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혼합은 없습니다. 미셸 앙리나 마리옹에게는 헬레니즘 등과의 혼합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이데거가 시와 관련해서 했던 작업처럼 정확히 순수한 담론을 찾으려 했습니다. 현상학자인 많은 동료가 신학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신학이 단지 계시의 신학일 뿐이라고 말하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에 대한 일종의 거부입니다. 이제 저는 그러한 방식에 완전히 반대합니다. 순수한 담론이란 없습니다. 계시가 첫 번째가 아닙니다. 계시가 첫 번째라고 말할 때, 당신은 더 이상 철학자가 아닙니다. 또는 칼 바르트처럼 계시가 첫 번째이고, 그것이 신학적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첫 번째인 것은 인간 존재입니다.

- 선생님은 《초-현상》에서, 현상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즉, 하위-현상적인 것, 상위-현상적인 것, 외부-현상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새로운 돌파구는 무엇입니까?

그 책은 트라우마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심지어 저 자신도, 현상학, 특히 프랑스 현상학은 일종의 트라우마적 상황에 우리가 처할 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봄의 신체뿐 아니라 에포케(판단 중지, 괄호 치기) 테제와 관련해서 초-현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제게 일어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위-현상(infra-phenomenon), 상위-현상(supra-phenomenon), 외부-현상(extra-phenomenon)을 구별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하위-현상은 현상의 나타남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 예를 후설의 의식의 흐름에서, 하이데거의 현상의 철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그저 있음’(il y a)의 역할이 바로 하위-현상입니다. 프랑스 현상학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방향에 서는 것이 초현상입니다. 현상이 나를 압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레비나스에게서는 얼굴, 마리옹에게서는 선물이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일이 제게 일어납니다. 다섯 가지 예를 들면, 질병, 이별, 자녀의 죽음, 자연재해, 팬데믹입니다. 저는 이 예들을 통해 외부-현상으로 트라우마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에 직면하면 우리는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자녀가 죽는다면, 만약 암에 걸려 아프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는 더 이상 세계가 없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으며, 여러분 자신도, 더 이상 여러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무너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 자신의 ‘거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거기 있습니다. 초기 레비나스는, 불면증에 대해 말하면서, 죽음의 불안보다 더 비극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존재의 공포입니다. 레비나스에게 존재의 공포란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죽을 것을 알며, 죽기 전에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그냥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무언가가 여러분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이런 물음이 듭니다. “왜? 왜 나는 여전히 여기 있는가? 왜? 왜? 왜 이 질병이 나에게 닥쳤는가?” 이것이 욥기의 시작이지요. 어떤 것이 나에게 닥칩니다. 자녀의 죽음이, 자연재해가 들이닥칩니다. 부부의 이별도 마찬가지 사례라고 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이 이별할 때, 이혼의 순간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외부-현상과 현상 사이에는 분열이 있습니다. 외부-현상에는 원인이 없죠. 크게 잘못했던 것도 없습니다. 암에 걸렸다고, 아프다고 죄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자녀가 죽었거나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신의 살》의 한 부분을 이룬 텍스트가 있습니다. 거기서도 외부-현상을 다루는데, 이것은 이전에 쓴 저의 삼부작에 부족했던 무언가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성목요일에 대한 책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성금요일에 대한 책 《겟세마네로의 안내》, 부활주일에 대한 책 《유한성의 변형》을 썼습니다. 성토요일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성토요일의 순간에 무엇이 일어났을까요? 이것이 최근 저서 《신의 살》의 의미입니다. 제게 성토요일은 신이 내 트라우마 속에서, 외부-현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이는 우리가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토요일과 최후의 심판을 구별해야 합니다. 중간의 날과 마지막 날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토요일에, 신은 내 트라우마 속으로 오지만, 최후의 심판에서는 내 죄를 위해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도신경에서도, 여러분은 “그가 우리 인간을 위해 오셨다”와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를 구별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우리 인간 존재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토요일입니다. 사도신경 라틴어 원문에 그가 내려와 지옥으로(descensus ad inferos)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때 inferosinferus에서 온 말입니다. 이는 내 아래에 있는 것, 지하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는 말이지요. 그리스어로는 하데스, 히브리어로는 스올입니다. 즉 성토요일에,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는 하강하여 지옥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그는 단지 성육신하기 전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 트라우마 속에서 나를 데려가고, 내 트라우마 속에서 나와 함께 있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초-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논제는 마지막 장 고독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원초적 고독에 대해 말합니다. 트라우마가 여러분에게 일어날 때, 그것이 여러분 안에 일종의 구멍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구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빈 구멍과 함께 삽니다. 아이가 죽었거나, 이별했거나, 팬데믹을 겪었거나, 질병이 있거나 등등…. 나는 이런 구멍 난 것들 속에서 완전히 혼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프거나 암이 있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혼자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이 느끼는 것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잃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별을 했더라도, 아무도 여러분을 도울 수 없습니다. 제게 이 고독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는 단지 고독의 신비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자녀를 잃었다면, 내가 이별했다면, 내가 아프다면, 나는 고독합니다. 이것이 내가 타인과 아무런 연결이 없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가브리엘 마르셀이 《존재의 신비》에서 말한 것을 정확히 따라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행위는 두 고독이 함께 연결되는 행위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내 안에는 공유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것이 내가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부부로 살고 있다면, 남편이 아내를 만났거나, 아내가 남편을 만났다는 뜻이지요. 같이 살면서 우리는 내 안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내 배우자는 무엇인지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나만 압니다. 사랑한다는 행위는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안에는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고독의 핵심입니다. 나는 그것이 당신이라는 것을 알고, 당신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것과,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것, 이는 각기 내 안에 있고 당신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고독한 둘 사이의 연결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있는 모습입니다.

성토요일에, 하느님은 내 고독 속에서 나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부활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요? 만약 내가 자녀를 잃었다면, 그리스도가 성토요일에 나와 함께, 내게 오시고, 그가 내 손을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이란 쫓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먼저 오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 손을 잡아라, 그러면 너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너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구원은 트라우마의 소멸이 아닙니다. 다만 구원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성토요일의 경우를 구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간직하지만, 하느님이 여러분의 트라우마 속에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후 심판의 날에 우리의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겠지만, 또한 우리는 우리의 트라우마를 간직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의 살》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성흔과 함께 그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트라우마를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는 새로운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가 있는 진정한 몸에, 우리의 동물성에서 오시지만, 또한 왜 내 트라우마적 존재 속으로 오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현상학에서 부족한 것이 트라우마적 존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초-현상과 관련해서 발견할 수 있고, 성토요일에 하느님이 어떻게 그 안에 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순간, 죽음과 시간의 끝, 몸의 부활과 최후 부활 사이에 우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에 관한 물음입니다.

가톨릭에, 그리스도교에 매우 중요한 개념은 영혼입니다. 형이상학에 관한 거부,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주제 의식 때문에, 현상학은 더 이상 영혼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그것이 너무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프랑스 유심론으로 돌아왔고, 앙리 베르그송에 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프랑스 유심론에는 영혼 개념이 있어서 유심론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왜 영혼의 개념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죽음과 몸의 최후 부활 사이에 있는 나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톨릭 전통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명한 것입니다. 영혼의 개념이 정신, 곧 멘스(mens)가 아닙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1641년 《성찰》에서 “mens sive anima”(정신 또는 영혼)라고 쓴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처음에 영혼이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양 섭취적 영혼입니다. 여러분의 먹는 방식, 여러분의 재생산 방식과 관련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감각적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들의 감각적 영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성적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영혼의 부활이란 단지 여러분의 정신이 하느님 가까이, 하느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지성적 영혼이 영양 섭취적 영혼과 감각적 영혼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정확히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영양 섭취적 영혼과 감각적 영혼 사이의 연결을 그때까지 유지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먹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성(性), 환경을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모든 것, 여러분이 있는 전부를 유지합니다. 저는 유한성과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계시를 먼저 갖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살아있는 신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살에 대해 말하고,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동물성의 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동물성을 받아들이고 동물성을 인간성으로, 자녀 됨으로 변화시키러 오셨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가 야만적인 짐승처럼 될 위험도 도사리고 있지요.

이런 것을 다루기 위해 저는 외부-현상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위-현상, 상위-현상, 그리고 외부-현상을 구별하고, 외부-현상의 다섯 가지 예를 들었지요. 그런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현상과 관련해서 저는 하느님이 무언가를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언가를 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나와 함께, 내 트라우마 속에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항상 고독 속에 홀로 있지만, 하느님은 내 고독 속에서 나에게 도달하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내 고독 속에서 나에게 도달하실 때, 그가 나를 내가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토요일과 최후의 심판을 구별해야 합니다. 삼일(triduum)과 종말(eschaton)을 구별해야 합니다. 내가 최후의 심판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면, 나는 내 트라우마의 성흔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 아마도 한국 (특히 그리스도인) 독자 중에는 선생님의 여러 현상학 기술 중에서 부활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에 많은 관심을 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가 부활에 대해 혼란스러워합니다. 한국에서는 부활을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도 하고, 많은 신학자가 부활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침묵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살》에서 이 물음에 답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아마도 아시아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할 텐데,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회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나의 작은 회심, 누군가를 만난 것, 그것이 작은 부활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부활은 아닙니다. 그것은 메타노이아(회심)이며, 아마도 아시아 전통에서도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단어가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나 자신의 부활, 나의 작은 부활이 아닙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마지막 때, 종말에 있을 몸의 부활입니다. 신조는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왜 우리는 더 이상 부활에 대해 말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더 이상 부활의 신학을 발전시킬 몸의 인간학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일의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말해야 할 오늘날의 몸은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이것이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온 질료와 형상이라는 일종의 실재론적 인간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실재론적 인간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신이 무덤 밖으로 다리를 내밀며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대성당들에서 보는 종말에 관한 묘사입니다. 당신이 무덤 밖으로 다리를 내미는 것, 이것이 부활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부활할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날 당신이 최후의 심판 날에 무덤 밖으로 다리를 내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먼저, 현상학적 개념인 신체(Körper)와 살(Leib)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부활을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미셸 앙리가 이 작업을 했지만, 그는 부활을 위해서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육화와 그리스도의 살, 즉 살아있는 신체에 관해서만 다뤘습니다.

사실 제가 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물리적 신체는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제 《유한성의 변형》을 출간했을 때 한 의사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팔크 교수님, 살아있는 신체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 즉 살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식사 방식, 말하는 방식,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하는 방식 등으로 인식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살이지요”라고 했습니다. 또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항상 무덤에 있었다면 그것은 옳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당신의 살은 부활하지만, 당신의 물리적 신체(Körper)는 여전히 무덤에 남아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은 더 이상 무덤에 있지 않습니다.

물음은 이것입니다. 부활에서 당신의 생물학적 신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현상학에서 생물학적 신체의 현상학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전개되는 신체는 바로 우리의 동물적 몸입니다. 이것이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린 몸입니다. 또 루시안 프로이트가 그린 몸이고요.

몸은 단지 나의 존재 방식이 아니라 참된 몸입니다. 단지 유기체적 몸이 아닌 펼쳐진 몸입니다. 이 몸은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에로스, 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몸은 분명 동물적 몸이지만, 당신은 그것을 또한 인간의 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몸에 담긴 의미입니다. 몸은 내가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의 몸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몸입니다.

이는 최후 부활에 대해 말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듯이 우리 모든 몸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들리겠지만, 그는 우리가 생식기관, 위장, 치아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적 부활과 구성적 부활을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구성적 부활은 용서받은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부활에서 우리의 어떤 것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게 몸의 부활은 진정한 몸, 생물학적 몸의 회귀입니다. 하지만 이 몸은 우리의 살 안에 통합됩니다. 이는 우리의 몸 안에 있는 것까지도, 우리의 물질성까지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되 변형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더 복잡한 점이 있지만, 저는 그것이 몸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