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회개의 토양 위에 꽃핍니다

[410호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

2024-12-31     정태형

기독교 기업을 표방하는 회사가 있었다. 대표자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등 신앙 활동에 열심이었다. 다양한 선교단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진 청년들이 그 회사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었다. 일이 생기면 밤샘 근무를 당연하게 여겼다. 야근 수당도 없었다. 아침이면 1시간 일찍 출근해야 했다. 큐티와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근무시간으로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사장한테 혼났다.

1980년대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10년 전 이야기다. 더 놀라운 점은, 아침 기도회 때마다 가슴을 치며 우는 청년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힘들어서 울었을까? 아니다. 힘들다고 불평했던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회개의 눈물이었다. 회개하고 난 청년들은 어제의 고통은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회사를 위해 일했다. 이런 헌신으로 회사는 나날이 성장했다. 사무실 공간으로 한 층만 사용하다가 한 건물을 사용하고, 법인 차 20대를 운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년들 인생과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다. 울다 회개하기를 반복하던 청년들은 결국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나서야 회사를 떠났다. 모든 것을 불태운 청년들은 진로를 이어나갈 동력을 상실하고, 프리랜서 일자리를 전전하거나 낙심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고는 했다.

이들을 괴롭게 만든 사장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큰소리치며 잘살고 있는데, 이용당하고 고통받은 청년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채찍질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화가 났다. 진짜 잘못한 사람을 책망해야지, 왜 자기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가 답답했다. 당신들 잘못이 아니라 사장이 만든 회사의 구조가 불의한 것이라고 설득해보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자기를 의심하고 채찍질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도대체 왜 이럴까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교회에서 이렇게 배웠구나.’

가해자는 용서하고 피해자는 채찍질하는 신앙

수련회 때 거의 모든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용서의 시간이다. 보통 수련회 마지막 날 진행된다.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자기가 미워했던 사람이나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하고 안아주고 기도해준다. 수련회 마지막 날에 서로를 끌어안고 우는 사진이 많이 찍히는 것은 용서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신앙의 유익을 경험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용서가 의무가 될 때, 피해자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자기 마음을 바꾸는 방법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마음속에서 죄를 찾아내고 자기를 채찍질한다. 대부분은 이렇게 용서를 배운다. 그러면서 가해자는 용서하고 피해자는 채찍질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의 용서를 그린 문학작품을 보면 이런 모습이 나오곤 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또한 마찬가지다. 전과자의 징표 때문에 하루 묵을 곳을 구하지 못했던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호의 덕분에 따뜻한 잠자리를 구한다. 하지만 장발장은 그 호의를 배신하고 주교관에 있는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교관의 여인들은 장발장에게 분개한다. 주교의 반응은 이 여인들과 달랐다. “그런데 그 은그릇이 우리 물건이었던가?”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절도범에 대해 열을 올리며 화를 내던 자기 모습에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참 이상하다. 부끄러움은 절도범의 몫이어야 하는데, 왜 피해자가 느껴야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신앙도 비슷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가시에 찔릴 때 아픈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이럴 때 본질적인 해결책은 가시를 뽑아내고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시는 그대로 두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나를 정죄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그대로 두고, 그를 미워하는 나를 채찍질한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플라세보(속임약)효과다.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는 달라진 것이 없다. 고통은 계속된다. 마음의 상처가 아문 것도 아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서 상처가 덧난다. 그렇게 점점 분노는 커져간다. 자기 정죄감과 혐오감도 커져간다. 결국 더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의 굴레에 갇혀버린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호인이 되길 원하시지, 호구가 되길 바라시지 않는다고.

호인과 호구는 다르다

호인과 호구, 언뜻 보기에 비슷하다. 다른 사람에게 잘 대해준다는 면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르다. 돈을 받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우리는 호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식업을 하는 사람이 돈을 받지 못한 경우엔 호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호구와 호인은 결과로 구분할 수 있다. 악이 커지면 호구, 선이 커지면 호인이다. 먹을 것을 팔고 돈을 받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걸 가만히 넘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은 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다음에도 똑같은 행동을 할지 모른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이보다 더 심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피해가 확산된다. 악이 커지는 결과다. 반대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도움을 받은 누군가는 이 사회가 아직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누군가는 돈으로 후원하든지, 와서 봉사할 것이다. 선이 커지는 결과다.

호구면 어떻고 호인이면 어떠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관점에선 차이가 있다. 호구는 악을 키우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위해서도, 가해자를 위해서도 용서 때문에 호구가 되면 안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예수님은 무조건적 용서를 말씀하시지 않았다. 회개라는 단서를 다셨다. 회개 없이 용서가 이루어지면 죄악이 더 심해질 뿐이다. 자신을 채찍질하여 힘들게 악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용서하려 했던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겠지만, 불필요한 죄책감에 떠밀려 강박적으로 용서하지는 않아도 된다. 아파하는 사람의 탄식 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께서 용서를 강요하시는 분일 리가 없지 않냐고,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나를 아프게 한 가해자의 잘못을 엄하게 다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보자고 권하고 싶다.

예수님도 왼뺨을 돌려 대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호구가 될 필요는 없다. 제대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호구가 되면 안 된다. 많은 교회에 가서 이런 메시지를 전파했는데, 의외로 저항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이 주로 물어보는 성경 구절들이 용서에 대한 말씀이었다. 특히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와 같은 구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물어보았다. 무조건적 용서 혹은 맹목적 용서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사장이 야근 수당도 없이 부당하게 야근시키면, 자발적으로 다음 날도 야근해야 할까? 월급이 아무 고지도 없이 입금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다음 달 월급도 반납해야 할까? 이 말씀은 불의에 대해 침묵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하라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보자.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의 심문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심문을 피하지 않으셨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지적하기도 하셨다. 그 모습을 보던 대제사장 수하가 화를 내며 손으로 예수님을 때렸다(요 18:22). 예수님은 더 때리라고 하셨을까? 그러지 않으셨다.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

예수님은 맹목적으로 용서하지 않으셨다. 불의에 침묵하거나 동조하지 않으셨다. 가해자를 똑바로 바라보셨고, 이치를 따져 물으셨다. 불의에 저항할 수단이 있을 때 그걸 굳이 사용하지 않을 필요는 없다. 그걸 사용한다고 해서 용서가 훼손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불법적인 체포로 일신의 자유를 빼앗기셨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말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불의한 대우에 항의하셨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말씀에 대한 일반적 해석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바울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을 더럽혔다는 모함으로 폭동이 일어나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했는데, 로마 군대가 개입해 간신히 살아났다. 치안을 담당하던 천부장은 폭동 원인이 바울에게 있을 것이라 보고 채찍질하여 심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

바울의 말에 천부장과 수하들은 깜짝 놀랐다. 로마 시민을 함부로 가두고 채찍질하려 한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할까 싶어서 두려워했다. 바울은 불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당당하게 사용했다.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활용해서 자기를 보호했을 뿐 아니라, 해를 가하려는 자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바울의 경고에도 이들이 계속 바울을 때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바울은 이들의 잘못에 대해 상급 기관에 알렸을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총독이 유대인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자, 상급 기관에 해당하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로마에 가서 재판받기도 했다. 바울도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악을 외면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악을 교정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맞았을 때 왼뺨을 돌려 대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무기 삼아 권력자와 맞섰다.

진정한 용서는 회개의 토양 위에 꽃핀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기를 채찍질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가족들 사이에서, 회사와의 관계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할 때 경험한 불의한 일들을 혼자 삼키고 용서해보려고 씨름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마음은 너무 귀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불의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제대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도, 바울도 그랬다. 시비를 가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갈등이 생기고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꼭 겪어야 할 과정이다. 진정한 용서는 회개의 토양 위에 꽃피는 법이다. 회개 없는 용서는 우리를 호구로 만들 뿐 아니라 상대를 죄의 길로 인도한다. 이걸 기억하고 있으면, 내가 다 끌어안은 채로 덮어놓고 용서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조금은 누그러질 것이다.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은 늘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사자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곤경을 아신다. 지혜가 부족한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구하기만 하면 후하게 주신다(약 1:5).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혜를 주시고, 잘못한 사람의 회개를 이끌어낼 지혜를 주신다. 무턱대고 용서를 강요하는 하나님은 이제 잊자.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를 채찍질하는 신앙을 넘어서자. 불의와 싸우고 진실을 밝히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 아픈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버리고 누구 잘못인지 가려달라고, 진짜 속 이야기를 말씀드려보자.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다.

굴종보다 존엄을 선택하자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왼뺨을 내주고, 겉옷을 내주고, 오 리를 더 가라는 말씀(마 5:39-41)이다. 우리가 가진 권리를 포기하고 불의에 동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말씀의 상황은 특수한 상황이다. 갈등의 당사자들이 법적으로 대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자기를 보호할 어떤 수단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을 갖지도 못한 사람들, 예수님처럼 항의할 수 있는 발언권조차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도 불의와 맞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말씀하셨다. “자발적으로” 왼뺨을 내주고, “자발적으로” 겉옷까지 내주고, “자발적으로” 오 리를 더 걸어가주라고 하셨다. 물론 성경에 ‘자발적’이라는 단어는 없다. 하지만 맥락 안에 자발적이라는 단어가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사람에게 마지막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힘이 없어 무기력하게 불의에 굴종하는 희생자가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존엄한 하나님의 자녀로 그들 앞에 서라고 명하신 것이다.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가치는 존엄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존엄함을 지키는 선택을 하자. 악을 선으로 갚자. 굴종하듯이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면서 불의 앞에 저항하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정태형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과 교회를 이루어가는 여린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의 사각지대를 보려고 노력한다. 《부모가 먼저 행복한 회복탄력성 수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