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 뱀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410호 구선우의 동물기]
새천년을 맞이한 서기 2000년, 하늘이 열린 개천절에 부모님과 함께 강화도로 교회 야유회를 갔다. 어른들은 마니산에 올랐고, 친구와 나는 산 아래 냇가에 남았다. 새로운 곳에서 모험하는 일은 초등학생 소년들에게 좋은 자극이었다. 소년들은 냇가에서 뱀 한 마리를 잡았다. 페트병에 넣었다가 스티로폼 박스로 옮겨 담았다. 나뭇가지로 툭툭 치기도 하고, 뱀에게 먹이를 줄 생각으로 지렁이나 벌레를 잡으러 다니며 재밌게 놀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뱀에게 물렸다. 스트레스를 받던 뱀이 내 오른손 검지를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고, 따끔했다. 함께 있던 친구는 미안하고 화가 나서 뱀을 산에다가 버렸다. 산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물으셨다. “뱀이 얼마나 컸니?” “손바닥 정도였어요.”
작은 물뱀이니 별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몸이 심상치 않았다. 얼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고, 이내 손이 바람을 불어 넣은 고무장갑처럼 부풀어 올랐다. 구급차를 타고, 시골 병원으로 이동했다.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뱀이 얼마나 컸니?” “팔뚝 정도 길이였어요.”
시골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으면서, 물뱀이 아니라 새끼 살모사였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가을엔 새끼 뱀도 독성이 강하기에 서둘러 이동했다. 강화도에서 인천 부평까지 꽉 막힌 도로를 지나며, 아버지는 갓길을 달리고 어머니는 창문을 열고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아파요!”라고 연신 외치셨다. 공포심이 어린 나를 덮치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간신히 도착한 집 근처 종합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뱀이 얼마나 컸니?” “야구방망이 정도였어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았다. 당시 병원 침대에 적힌 병명은 스네이크 바이츠(snake bites). 나는 병원에 있는 동안 병문안 오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독뱀에 물렸다가 간신히 살아난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이제 뱀에 물렸으니, 스파이더맨 만화영화에서처럼 나만의 초능력이 생기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내게 뱀은 아픔을 주기도 했지만, 내 상상력을 자극했던 좋은 친구였다.
소설가 이승우는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에서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유혹의 이야기를 다룬다. 신이 만든 동물들 가운데서 가장 영악하고 교활한 동물, 인간을 유혹하는 뱀이 등장하자 여자는 고민한다. “뱀은 어디서 왔을까.” 뱀의 목소리가 기이하게도 여자 내부에서 들리는 것도 같았다. 여자는 계속 고민한다. “도대체 뱀은 어디서 왔는가.” 남자도 여자에게 소개받은 뱀을 보며 자신이 이름 지어준 동물이었는지 의아해한다. “도대체 뱀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여자는 하나님께 묻는다. “뱀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1)
도대체 뱀은 어디서 왔을까? 이 네 번의 질문은 뱀에 대한 상상력을 다시 한번 자극했다. 아담이 이름을 지어준 동물 중에 뱀이 있었을 텐데, 너무 많아서 까먹은 것인가. 왜 하필 뱀이었을까? 옛날 사람들에게 뱀은 어떤 존재였을까?
신묘한, 그러나 사악한
나는 뱀이 창조물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는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뱀은 사탄으로부터 왔다고 여겨진다. 중세 이후 그 생각이 굳어졌으며, 이전에 뱀은 사탄 자체이기도 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뱀을 악 그 자체로 여겼던 셈이다. 마지막 한 가지 생각은 뱀이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뱀이 말을 걸었으리라는 철학적 성찰도 가능하다.
뱀이 어디서 왔든지, 뱀에게 죄의 책임을 물 수 있을까. 뱀에게 죄가 있다면, 뱀도 인간처럼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필 동물이 인간보다 먼저 죄를 지어서 인간에게 핑곗거리가 생겨버렸다. 죄의 삯은 인간에게 있다. 뱀에게 원죄의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하다. 이러한 질문과 생각들이 왜 익숙하지 않을까?
동물은 먹거리가 되기도 하고, 인간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지구별에 사는 존재이지만 때때로 인간의 상상 안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상상을 통해 동물을 새롭게 그려낸다. 인간의 상상력은 각 동물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실재하는 동물을 넘어 표상과 상징이 나타난다. 많은 동물 이미지가 현실 속 동물에 관한 경험과 인간의 상상력이 합쳐져 탄생하는 셈이다. 도상학(Iconography)은 다양한 예술 작품, 문화 속에서 동물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분석한다. 기독교 미술에서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비둘기가 성령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동물이 상징적 의미를 한두 가지만 지니고 있지는 않다. 여러 상징을 가진 동물도 있다. 뱀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스신화에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 감겨있는 뱀은 치유와 의학을 상징하는 반면, 메두사·히드라와 같은 사악한 괴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 뱀은 재생과 변형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동양에서는 십이지 중 하나로서 지혜와 장수를 나타냈다. 고대 이집트에서 뱀은 보호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북유럽의 요르문간드(Jǫrmungandr), 그리스의 라돈(Λάδω, Ladon), 인도의 나가(नाग, Naga) 등 다양한 신화에 등장하는 뱀들도 땅을 지키는 존재다. 음과 양의 조화, 우주와 자연의 균형을 담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기 꼬리를 먹는 뱀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 Ouroboros)는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연금술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영원성과 무한을 상징한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자신이 수집한 연금술 자료들을 인간 상징 세계에 적용했다. 그는 자기와 무의식의 통합을 상징하는 동물로 우로보로스를 소개한다. “그리스의 연금술에서는 이러한 사상[원질료와 최종질료의 통일]이 하나, 즉 전체라는 공식으로 표현된다. 이것의 상징이 자신의 꼬리를 집어삼키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다.”2)
또한, 뱀은 악어, 대형 파충류 등과 함께 용의 기원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한국 전통 신화에서 뱀은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는 용이 된다. 뱀과 용은 여러 신화나 민담에서 혼용된다. 이렇듯 뱀은 영물이며 참 신묘한 동물이다. 뱀이 가진 다양한 상징적 의미는 오랜 기간 각축을 벌였고, 가장 강력하게 살아남은 상징이 바로 ‘악’이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 내 인간을 유혹하는 악한 존재로 등장한 뱀은 요한계시록에서 큰 용으로 변신한다. “그 큰 용, 곧 그 옛 뱀은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데, 온 세계를 미혹하던 자입니다.”(계 12:9, 이하 새번역) 에덴의 뱀은 악마이자 사탄이 되었고, 서구 기독교 세계를 거치며 생명·회복·지혜·수호 등 다른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여전히 뱀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존재이자 신성한 상징으로 보는 일부 문화권도 있지만, 많은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는 악의 화신이자 악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
동물이 악마가 될 수 있을까? 악 혹은 죄라는 개념을 동물에게 사용해도 괜찮을까? 뱀은 전통적으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에 갇히기보다, 통합적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는 다른 상징이 잊힌 듯 악의 이미지가 절대적이다. 대부분 뱀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뱀을 보면 께름칙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독이 있는 동물을 대하는 본능적 반응이기도 하고, 실제로 뱀은 인간을 공격한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생물학적 요인 외에 문화적 요인도 존재하며, ‘옛 뱀’은 오늘날까지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악의 상징 걷어내기
미국 성서학자 제임스 찰스워스는 뱀이 기독교 세계에서 늘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요한복음 3: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에서 뱀이 가진 치유와 구원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많은 학자가 ‘들어 올리는 행위’에 집중한 것과 달리, 찰스워스는 뱀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뱀이 단순히 들려 올라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한다.3)
찰스워스는 6년간 연구한 결과물을 통해 성경과 기독교 문화 속 뱀 인식이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에덴동산 속 뱀에 관한 주장은 흥미롭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악마나 사탄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뱀은 신의 창조물이자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당시 뱀을 무섭거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묘사한 기록도 없으며, 뱀이 수컷이라거나, 하와를 유혹했다는 성적 메타포도 찾기 힘들다. 찰스워스는 중세에 미켈란젤로처럼 뱀을 여성으로 묘사한 사례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큰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뱀에게만 모든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한다. 뱀에게 악이라는 단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4) 뱀이 가진 복합적 상징성을 고려해 뱀을 입체적으로 본다.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단지 동물일 뿐인 뱀에게 ‘악’이라는 고정된 상징을 씌우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다.
인간이 그린 상징을 지워내면 뱀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사실상 뱀은 인간이 자신들을 무엇으로 생각하든 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 상상을 돕는 동물들까지 금하는 조치는 너무 과한 것 같다. 우화는 지금까지 인간 마음을 키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이야기를 읽고,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상상력이 주는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나쁜 이미지로 인해 뱀에게 있는 고유한 특성마저 지워내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 동물이 잔인한 사냥꾼이자 포식자라고 해서, 그를 악당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쥐·개구리 등을 잡아먹는 뱀은 해충을 관리하며,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먹이사슬은 생태계를 유지하는 체계이다. 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지표다.
실제 동물 모습과 상상 속 이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악을 상징하는 뱀의 경우에는 그렇다. 뱀이 지닌 신묘하고 사악한 이미지는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이 상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뱀이 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동물이 자신들이 가진 능력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을 제안한다. “번영하는 삶과 방해받는 삶 사이의 대조”를 통해 인간 중심 동물권이 아닌, 각 동물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 누스바움이 주장하는 동물을 위한 정의이다.5) 뱀에게 씌워진 고정관념을 지우는 일은 생태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상과 현실의 균형
뱀에 대한 상상은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상상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현실의 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뱀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고, 뱀이 가진 생태적 가치를 인식하며 뱀을 뱀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
인간의 상상력이 동물에게 여러 상징을 입히고, 특정 상징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 그 동물에게는 엄청난 힘이 생긴다. 지나친 상징화는 우상화할 위험이 있다. 아론이 만들었던 황금송아지(출 32:24)처럼 인간은 자기 염원을 동물에게 담는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동물을 사랑하면 자연숭배사상에 빠질 수 있다고 염려한다. 숭배까지 안 가더라도 동물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염려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동물에게 빠져서 동물을 사랑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목회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동물 사랑은 위험한가? 그렇다면 동물에 대한 상징도 문제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사랑과 상상은 위험할 수 있지만,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은 오랜 기간 인류와 함께해온 익숙한 관념이었다. 현대사회에서 동물숭배나 자연숭배는 그저 미신적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되기도 한다. 영국 인류학의 창시자라고 평가받는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동물에 대한 원시 사상이 일반적인 페티시 숭배 이론(물신숭배, fetishism)에 포함된다고 분석한다. 그는 “현대의 교육받은 세계의 시각에서는, 하등 문명의 현상들 중에서 인간이 짐승을 숭배하는 광경보다 더 측은한 것은 거의 없을 듯하다”라며, 동물숭배 자체를 인류 초기 단계에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100여 년 전, 그는 페루·필리핀·캄보디아·시베리아 등 다양한 지역 원주민들이 곰·늑대·원숭이·매·악어 등 다양한 동물을 숭배해온 현상을 연구했다. 동물의 영혼을 믿은 인간은 동물들에게 다양한 감정, 주로 두려움을 느끼면서 반응했다. 이 원시 개념은 낡아 보이지만 현대인에게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타일러는 이어서 말한다. “우리의 본분은 생물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이다.”6) 오늘날에는 타일러의 고전적 인류학을 더 정교하게 적용해야 한다. 영혼에 대한 믿음에 집중해서 평가하지 말고, 원주민들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배워야 할 것이다. 원주민들은 동물들을 주체로 인정했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며, 생태계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상상과 현실의 균형으로부터 출발한 생각이다.
현대인은 미신처럼 낡아버린 동물숭배·자연숭배에서는 자유로울지라도, 특정 물체에 과도한 의미나 힘을 부여하는 물신숭배는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원시사회에서는 숭배 대상이 동물과 자연이었다면, 물질문명 사회에서는 자본이다. 인간은 돈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자본은 고유한 자원 이상으로 권위를 지닌다. 돈이 주된 행위 동기가 된다. 자본 숭배는 탐욕을 부추기고 불평등을 심화한다.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 자본주의적 착취는 동물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공장식 축산, 모피 산업, 전시 동물 산업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된다. 뱀 가죽은 여전히 고가에 거래되는 중이다. 특정 동물을 더 사랑하는 반려동물 시장은 이미 거대해졌다. 자본주의적 소유 관념이 동물을 향한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면서 생긴 결과이다. 돈은 동물을 사랑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건강한 사랑을 방해하기도 한다. 자본이 주는 폭력성이 동물을 향한 과도한 사랑보다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동물에 대한 지나친 상상이 동물숭배나 자연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염려는 잠시 내려놓고 싶다. 현대인에게도 과도한 것은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걱정해서 시작조차 안 할 때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상상은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 동물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명료한 결론보다 질문과 상상이 더 힘이 세다. 자연을 단순히 자원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자연과 공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결국 뱀에 대한 묵상은 단순히 뱀이라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신화와 전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뱀, 기독교 세계에서 부정적 상징으로 고착화된 뱀. 오늘날까지도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는 뱀. 뱀에 대한 우리 인식을 되돌아보는 작업은 곧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고민까지 확장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 일부이며,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뱀에 대한 고정관념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뱀과 동물을 통해 건강한 상상력을 발휘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치는 나라(사 11:8)는 상상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이다. 상상이 만들어낼 아름다운 현실 세계를 기대한다. 뱀과 동물, 모든 자연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뱀을 만나기 위해 아들과 실내 동물원을 찾았다. 마침 뱀 체험 시간이었다. 아들은 뱀을 팔 위에 얹어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다.
“체험해보실 뱀은 미국의 옥수수밭에서 많이 발견되는 콘스네이크입니다. 주로 쥐를 잡아먹고 삽니다. 사육용으로 많이 키우는 종인데, 체험하실 때는 머리랑 꼬리만 조심해주세요.”
사육사에게 짧은 안내를 들은 후, 체험이 시작됐다. 뱀을 만져본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짧은 감상평을 내뱉었다. “미끈미끈해.” “쫀득쫀득해.” “부드러워.” “지갑 같아.” “생각보다 좀 무거워.”
순간, 상상력이 발휘될 자리는 없어 보였다. 상상의 나라가 아닌, 작은 사육장의 뱀만이 남았다. 상상 대신 유희만이 남았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잡아 놀던 때에 비하면 정말 안전하게 뱀을 만나볼 기회였다. 세상 참 좋아졌다. 나도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되었지만, 우리 아이가 아프다며 갓길을 달리던 아버지의 절박함을 경험할 일은 별로 없다. 적어도 뱀 때문에는 말이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 점점 더 커졌던 뱀, 나를 슈퍼 히어로 스네이크맨으로 만들어줬던 그 뱀이 그리워졌다. 상상의 날개를 가득 펼쳐야 할 시기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동물원에서 이루어지는 인위적인 짧은 체험이 오히려 뱀과 동물을 향한 상상력을 제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동물이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함께해야 할 텐데.
1) 이승우,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문이당, 1998), 37쪽; 57쪽; 61쪽; 90쪽.
2) 칼 구스타프 융, 한국융연구원 C.G 융 저작번역위원회 옮김, 《인간의 상과 신의 상》(솔출판사, 2024), 182쪽.
3) James H. Charlesworth, 《The good and evil serpent》(Yale University Press, 2010), 15쪽.
4) 앞의 책, 343-348쪽.
5) 마사 너스바움, 이영래 옮김, 《동물을 위한 정의》(알레, 2023), 31쪽.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은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의의가 있으나, 쾌고감수능력(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에게만 적용되며, 역량 측정과 실천적 구현이 어려운 철학 개념이라는 한계가 있다.
6)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유기쁨 옮김, 《원시문화 2》(아카넷, 2018), 423-426쪽. 애니미즘에 대한 현대적 적용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유기쁨,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눌민, 2023) 참고.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