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현장에서
[410호 발행인의 글]
‘국민 여러분, 국회로 나와주십시오.’
화요일 밤, 책을 읽다가 오후 9시쯤 잠들었다. 한쪽 다리는 소파에 걸치고 나머지 몸은 의자에 얹혀서 책으로 복부를 덮고 잤다. 11시에 몸이 으스스해서 눈을 떴다. 목회자들의 학습공동체 카톡방에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소식이 올라왔다. 잠결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었다. 평소랑 달리 모두가 욕을 했다. 사랑하는 아우님들은 언제나 점잖아서 비속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날은 ‘미쳤다’ ‘말이 되나?’ ‘정신 나간 새끼’ ‘정말 돌겠네’ 등의 말들로 가득 찼다. 나도 첫 반응을 했다. 11시 15분이었다. “졸다가… 지금 국회 앞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썼다. ‘12월 4일, 오전 12시에 국회로 모이자’라고 썼다.
수요일 오전 12시 7분이었다. 국회의원들에게 국회로 돌아오라는 국회의장의 발표가 있었다.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국회로 속속 집결하고 있다고 뉴스가 나왔다. 유튜브를 통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호소를 들었다. “국민 여러분, 국회로 나와주십시오.”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을 더욱 단단히 결정했다. 가자, 국회로.
국회의원들만이 이 비상계엄령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갖고 있다. 이 비상계엄령을 해제할 수 있도록 의결해야 한다. 나중에 명확해졌지만, 비상계엄으로 군인들을 국회로 파견한 이유는 국회의원들의 의결을 막기 위해서였다. 현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그들의 의결을 막으려고 국회 출입을 막고 포위하려고 하였다.
자동차를 탔다. 우리 카톡방에서도 갑론을박이 잠시 일어났다. 전부 다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내일 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잠을 자는지 아무런 말도 없는 이도 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오늘은 지켜보자고 하는 목사님도 있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오늘 밤 체포할 거야.” 나와 같은 건강한 사람들이 먼저 나가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나가면 된다. 지금 1천 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나는 국회로 간다, 추우니까 속옷 갖추어 입고 나와라”라 쓰고 달렸다. 12시 31분에 자동차 액셀러레이터를 최대로 밟았다. 엔진이 가속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덜덜거린다. 신속하게 이동했다. 국민 여러분, 국회로 나와주십시오. 이 외마디가 나를 불렀다.
국민이 국회를 지켰다
새벽 1시에 성산대교를 지나는데 국회의원들의 비상계엄령 해제 투표가 가결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새벽 1시 2분, 성산대교 지나간다며 짧게 답했다. 국회가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더 급해져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양화대교를 지나는데 차량의 속도가 느려진다. 영등포로로 빠져 여의2교로 향했다. 이미 자동차가 꽉 막혔다. 국회의 가결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윤석열의 꼼수와 거짓을 알기에 더 불안했다. 여의2교 옆 올림픽대로로 향하는 길옆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국회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밤에 1.3킬로미터를 달렸다. 새벽 1시 22분에 현장의 중심인 국회 현관 1번 문에 도착했다. 밤이라 자동차가 없어 총 43킬로미터 거리를 29분 만에 도착했다.
나보다 먼저 온 국민이 국회 회관 출입 1문 앞에 모여서 외치고 있었다. 사태를 판단하는 상식과 민주주의를 향한 양심이 신속한 반응을 끌어냈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국민들이 소리쳤다. 나도 외쳤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사람들의 외침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탄핵이다. 우리 국민은 온갖 수난을 딛고 민주주의를 키워왔다. 김민석 의원이 청문회에서 계엄령 발표에 대하여 우려하는 질문을 할 때마다, 저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 황망함 속에서도 국민은 정확하게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처음부터 국민들은 사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국민들은 이 내란 혐의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총질했다.
국민 약 10만 명을 국회의원 1명이 대신한다. 그러나 이날 국회 앞에 모인 4천~5천 명의 시민들은 무기도 없이 자신의 몸뚱이로 경찰을 막고, 일부 시민들은 출동하는 계엄군의 장갑차를 막았다. 헬기 이륙 소리가 요란했다. 두려웠다. 그러나 목이 아프도록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국회 앞을 맴돌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국회의원 재석 190명 중 190명이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핸드폰에 국회의장의 비상계엄 해제 가결 소식이 떴다. 모인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비상계엄 해제 가결 후에 파견 군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국회의장이 명명백백 경고하였다. 나중에 보니 국회 보좌관들과 국회 사무처 직원들이 계엄군과 물리적 충돌을 하며 싸웠고, 그들의 국회의사당 난입을 막아냈다. 국민이 국회의원들을 보호하고, 보좌관들이 국회의원들을 지켜냈다.
국회가 국민을 지켰다
대통령 윤석열이 화요일 10시 23분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2시간 뒤 4일 오전 1시 1분에 국회의장이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하였다. 새벽 4시 30분에 그는 국무회의를 열어 국회의 계엄 해제안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국회가 국민을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밤새는 의원들 생각에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의원님, 우리가 밖에서 밤새며 지키고 있습니다.’ 의원님 답이 왔다. ‘감사합니다’라고. 갑자기 눈물이 팍 쏟아졌다. 국회의원들과 보좌관들이 목숨 걸고 국회를 지켰다.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에 눈물이 터졌다. 선거가 아니고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 이 감격! 국민을 보호할 줄 아는 국회의원들이구나. ‘국민을 대변’하는 영혼 없는 메아리만 듣다가 위기 때 국민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거는 지도자들이 있어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피곤함이 사라졌다.
국민들의 민첩한 행동으로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다고 들었다. 시민들이 계엄군과 경찰을 막아선 30분은 헌법에 보장된 권한을 사용한 국회의원들이 역사의 퇴보를 막고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의사 결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던 국민과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장의 늦어지는 의사 진행을 보며 서두르라 채근했지만, 의장은 그 급박한 순간에 침착하게 절차를 잘 지키려 했다. 그 모습에 안도감을 가졌다.
총칼의 직접적인 희생은 없었지만, 민주적인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을 요구하고 그 대가를 치러야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간다. 국회가 국회 앞에 모인 4천~5천의 시민들과 국민을 보호하였다. 주위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젊은이들이 많았다. 밤늦게 자는 친구들이라 많이 나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비상계엄 해제 가결 후 경찰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경찰버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명령을 따라야 하는 군인들은 내란죄가 틀림없는데 어쩌나. 철수하는 경찰을 보며 군대 간 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복무 중인 아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읽을 시간도 아니지만. 이어 가족 카톡방에 메시지를 날렸다. 큰딸이 먼저 답을 했다. “아빠 깔리면 어떡해유, 조심하쇼.” 아빠의 물리적인 안전을 걱정한다. 나이 든 아빠니까. 아빠인 나는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의 안전을 걱정한다. 생명의 안전은 기본이지만 자녀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욕구를 펼칠 수 있는 공간과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국회 출입을 막던 경찰버스가 빠져나간다. 국회가 국민을 지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도 교회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다. 새벽기도회 시간. 국회의사당 담벼락을 따라서 걸었다. 묵묵히 기도했다. 경찰을 보며, 닫힌 문을 보며, 불 켜진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한 바퀴 돌았다. 정문에는 여전히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들에게도 피곤함이 역력하다. 다행히 물리적인 충돌은 적었지만, 위기를 넘긴 것 같았다. 1번 출구부터 순서대로 걷기 시작하였다.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확 살아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대구에서 처음으로 탱크를 봤다. 1980년 전두환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로 모든 대학교 앞에 탱크가 서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형님은, 대학교 다녔던 형님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계엄령이라고 했다. 광주에서 전두환 정권의 잔혹함을 나중에 사진을 통하여 봤다. 근데, 그 단어를 다시 듣다니. 충격이다. 이 문명화된 시대에 이런 국가 폭력이 존재하다니 문명과 폭력, 야만과 문화, 잔인함과 아름다움이 겹쳐있다.
몇 시간 뒤에 어느 국회의원 보좌관 여성분이 계엄군 총부리를 잡고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싸우는 영상을 봤다. 눈물이 났다. 며칠 뒤 이분이 뉴스에 나와서 그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선배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많이 생각했다”라고 했다. 한강 작가의 말대로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 국회의사당 담벼락을 돌며 떨리는 나를 위해 기도했다. 투입된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들은 명령만 따른 반란군인데 저 군인들의 부모 마음은 어떨까. 군대 간 아들을 둔 부모 마음으로 돌아갔다. 주여, 저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하옵소서. 명령 수행 자체가 원죄이니 내란죄와 반란죄는 엄하게 처벌한다. 국가의 질서를 파괴하기에. 정해진 설교 본문을 따라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답답함을 느꼈다. 거짓 유튜버들이 제기한 부정선거 음모를 파헤치려고 했다니 더욱 한심하다.
12월 4일 오후에 아들의 문자가 왔다. “ㅋㅋㅋ 역시 저기 갔을 줄. 난 잘 있어요.” “아들아 네 문자 보니 눈물 난다”고 했다. 아들 답장이 왔다. “왜? 나 살아 있는데 왜 눈물을.” 아들이 살아있어 눈물 난다. 며칠이 지나고, 12월 7일 아들의 문자가 왔다. “병년 씨, 집회 나갔나유? 조심하슈.” “응, 오늘은 아빠가 너무 바빠서 못 나갔고 막내가 혼자 나갔어.” 막내가 보내준 시위 현장은 축제의 장소였다. 유명 가수들의 공연 참가자처럼 형광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탄핵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부결되었는데도 젊은이들은 지치지 않고 노래한다. 우리 세대와 다른 시위 문화다. 그들이 옳다. 정치는 즐거운 것이다. 아직 비상계엄의 후폭풍이 거세지만, 이미 젊은이들은 이 문제보다 앞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끝나지 않은 시대를 안고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고맙다. 젊은이들아.
김병년
본지 발행인. 다드림교회 담임목사와 교회개척운동 시티투시티코리아(CTCK) 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