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새로워지리라
[411호 예술, 구원을 묻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후 5:17, 새번역)
수천 가지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소명은 우리 자신이 “새 창조[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동시에 또한 새 창조의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불의와 부패가 가득한 세상에서 새 창조로 살아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겠지요. 또한 우리는 마침내 올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표지를 만들어내는 공동 창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1)
사도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kainē ktisis, new creation), 즉 하나님의 새 창조라고 선언합니다. 여전히 온갖 연약함에 휩싸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볼 때마다 이 놀라운 선언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인데요.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땅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증언하는 이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새 창조를 위해 일하는 대리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듯이, 우리는 마침내 임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가리키는 표지(signs)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공동 창조자”라는 표현은 그것이 ‘함께’하는 일이자 ‘창조’하는 일임을 알려줍니다. 새 창조의 표지를 만드는 일의 공동체적·창조적 차원은 자연스럽게 새 창조와 교회 그리고 예술의 관계로 고개를 돌리게 합니다.
새 창조의 비전, 교회를 위한 처방전
그동안 개신교는 타락한 세상과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구원과 경건에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개인주의적 이해는 자연스럽게 주변의 이웃과 사회, 창조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우주적 차원이나 기독교의 포괄적 비전에는 눈을 가리게 했습니다. 베르카우어(G. C. Berkouwer)가 말하듯 “구원론적 자기중심성이 성경 이야기의 우주적 범위를 주변화”한 겁니다(《The Return of Christ》).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광스럽고 선한 세상의 창조, 그리고 비록 타락했으나 동일한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과 갱신,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라는, 더 크고 온전한 그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술신학자 제레미 벡비(Jeremy Begbie)는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단순히 라이프스타일의 문제, 개인들의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은 기독교가 … 하나님과 인간,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실재에 대한 통합적 비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이 비전은 … 하나님의 첫 번째 “있으라!”로부터 새롭게 된 세상의 영광스러운 피날레에 이르는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로 … 표현된다.2)
“하나님과 인간,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실재에 대한 통합적 비전” 안에서 성경을 읽을 때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요. 복음조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시킨 교회의 고질적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단순히 개인의 죄 문제나 삶의 방식을 다루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온 우주의 창조에서부터 그 궁극적인 결말인 새 창조에 이르는 거대한 서사에 관한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표상되는 이 새 창조, 이사야가 말했던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세상 문화가 완전히 제거되고 사라져버린 천상의 거룩한 영적 세계가 아님을 확인해줍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란 아픔과 고통, 죄와 눈물로 왜곡되었던 선한 창조세계가 정화되고 회복되어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차원으로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새 창조의 종말론적 비전은 이분법적 세계관과 선민의식이라는 우월감에 빠진 교회의 왜곡된 세상 인식을 바로잡는 출발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새 창조와 예술, 공명하는 낯선 아름다움
제레미 벡비가 디렉터를 맡고 있는 듀크대 신학과 예술 연구소(Duke Initiative in Theology and Arts)에서 2019년 개최한 새 창조와 예술에 관한 심포지엄 내용을 바탕으로 2022년 《새 창조의 예술》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 서론에서 벡비는 새 창조라는 성경의 핵심 개념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예술의 역할을 부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경이 드러내는 새 창조의 기이함과 생경함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순전한 기이함… 종종 당혹스럽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 의외성, 간단히 말해 성경이 증언하는 새 창조의 생경함은 너무 자주 완곡하게 바뀌거나 얼버무려진다.
정말로 우리는 성경의 의외성과 급진성을, 보다 다루기 쉬운 구원 공식이나 윤리 명제로 길들이고 싶어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기이하고 역설적인 진리는 그것이 가져오는 어려운 질문들에 쉽고 딱 떨어지는 정답을 찾는 대신, 그 질문들을 삶으로 살아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한 위험천만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현 상태(status quo)에 편안하게 머무르려는 안일함과 무뎌진 의식을 일깨우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할 텐데요. 벡비 말대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역할에 주목하게 됩니다. 늘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에 새로운 주의력을 환기시키고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예술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경할 때가 많은 이 시대의 예술에서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연습하는 일은, 우리의 기대나 상식, 기존의 틀을 깰 때가 많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숨겨진 낯선 아름다움 역시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줄 겁니다.
특히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예술에는 보이는 것 너머를 일깨워주는 힘이 있는데요. 예술이 일깨우는 물질적 감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심오한 실재를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궁극적인 새 창조의 소망이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만 남아있지 않고, 이 땅에 두 발을 견고하게 딛고 살아가는 우리 삶으로 증언되고 체현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럼 이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드러내는 낯선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연습하고, 여전히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새 창조이자 새 창조의 표지를 만드는 사람들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볼까요?
세상을 바르게 보기, 〈차갑고 어두운 물질〉
가장 먼저 제가 좋아하는 코넬리아 파커(Cornelia Parker)의 작품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차갑고 어두운 물질〉(Cold Dark Matter, 1991)은 파커가 영국 군대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실제로 헛간을 폭파한 뒤 그 잔해를 매달아 만든 개념설치미술 작품입니다. 코넬리아 파커의 작품에는 관객의 시선을 잡아 이끄는 강렬한 흡입력과 압도하는 힘이 있는데요. 단순히 조형적 아름다움만을 보여주지 않고,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은 역사·사회·종교의 다층적 의미와 맥락 안에서 고정시킬 수 없는 어떤 내러티브 안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물질〉(Anti Mass)이라는 작품에서는 불에 타버린 흑인 교회 건물 잔해를 가져다가 공중에 매달아 설치했고, 독일의 한 유대인 강제수용소 인근에서 금속 탐지기를 이용해 땅속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그것이 발견된 깊이만큼 반대로 공중에 띄워 설치한 작업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파커의 작품들은 인간 역사와 현실에 존재하는 폭력의 위력과 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새로운 부활의 가능성 안에서 그것을 펼쳐 보입니다.
〈차갑고 어두운 물질〉은 마치 빛의 근원 혹은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모든 부서지고 상한 잔해들이 그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빅뱅처럼 거대한 폭발을 통해 응축된 빛의 에너지가 부서지고 상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우주적 재창조의 순간, 마치 영원의 시간이 세상 안으로 틈입해오는 장면을 포착해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유한한 우리의 이해나 인지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래적 새 창조를 시각적·물질적으로 감각하고 상상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일상과 세상의 어두움을 은유적이고 암시적으로 증언하면서도 어두움에 머물러있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상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바르게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바르게 본다는 말은, 세상을 볼 때 밝고 아름답고 빛나는 면만 부각하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상하고 왜곡된 세상의 실재, 깨어진 인간성의 추함, 폭력적 현실과 그것이 불러오는 처참한 결과들, 이런 세상의 어두운 면 역시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할 텐데요. 그럴 때에만 이 세상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 변혁과 완성을 바라보는 진정한 새 창조의 소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 〈목격자들〉
다음은 캐나다 작가 피터 본 티센하우젠(Peter von Tiesenhausen)의 〈목격자들〉(The Watchers, 1997-2002)이라는 작품입니다. 캐나다 작가를 소개하게 되어 더욱 기쁜데요. 〈목격자들〉은 조각·설치·대지미술·퍼포먼스 등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티센하우젠의 예술 세계처럼 딱 하나의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먼저 티센하우젠은 나무를 깎아 2미터가 훨씬 넘는 인간 목상 다섯 개를 만든 뒤, 캘거리 시내에서 이 목상들을 불에 활활 태워 탄화하는 공개 이벤트를 벌입니다. 마치 불을 통과하는 연단과 정련의 과정처럼 보이는 퍼포먼스는 성령이 불처럼 제자들 위에 임했던 오순절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렇게 불의 연단을 통과한 인간 목상들은 작가의 소형 트럭에 태워져 5년에 걸쳐 캐나다 전역을 횡단하는 총 3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여행길에 오릅니다. 캐나다의 장엄한 자연을 통과하며 길을 가다가, 어떤 장소에 이르면 한동안 머물면서 마치 그 풍경의 일부처럼 그곳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합니다. 이 긴 여행은 목상들이 ‘목격자들’로 거듭나는 시간입니다. 극지방에 도착해서는 쇄빙선까지 올라타 북극권을 통과하고 캄캄한 밤에 눈 덮인 숲길을 지나기도 하면서 목격자들은 자신들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갑니다.
이 긴 여행에서 이 목격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목격하고 있었던 걸까요? 작가는 기후위기로 점점 변해가는 캐나다의 자연을 ‘목격’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고 설명합니다. 목격자들이 바라보는 자연은 여전히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데요. 그 때문에 우리가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상실의 슬픔이 더 역설적으로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예술신학자 제니퍼 크래프트(Jennifer Craft)는 이 다섯 목격자들이 종말론적 소망을 상징적으로 체현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우리가 가끔 엿볼 수 있는, 그러나 아직은 온전히 이해하거나 누릴 수 없는 새 창조를 향한 갈망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 갈망은 수동적인 기다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무 목격자들은 그저 구경꾼이나 방관자처럼 멀리서 자연을 바라만 보지 않고, 변해가는 풍경 일부가 되어서 그곳에 현존하고 조용히 그 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기다림과 참여, 이 나무 목격자들이 보여주는 두 종류의 제스처는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새 창조를 향하여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홈 커밍, 즉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이 세상의 순례자로 살아가는 동시에, 그들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 온전히 속하고 참여하도록 부름받는다.(제니퍼 크래프트, 《Placemaking and the Arts》)
이렇듯, 이 나무 목격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세계로서 그 아름다움을 부분적으로나마 간직한 이 상하고 깨어진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소망을 붙들고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역설적인 삶의 방식, “순례하는 거주자”(wayfaring dweller)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침묵의 기도, 〈플레가리아 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작품은 세계적인 개념설치미술 작가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의 〈플레가리아 무다〉(Plegaria Muda, 2008-2010)입니다. ‘침묵의 기도’(silent prayer)라는 뜻입니다. 작가는 모국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폭력적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100쌍에 가까운 나무 책상은 한 책상이 다른 책상 위에 거꾸로 얹히고 그 사이에는 두꺼운 흙더미를 블록처럼 끼워놓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각 책상은 의도적으로 대략 표준 관 사이즈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두 책상 사이에 끼워진 흙더미는 관을 덮는 흙과 관이 묻힌 땅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품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애곡하는 장소, 일종의 공동묘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세도는 이 작품이 끔찍한 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한 뒤에도 그저 망각되어버린 존재들, 너무 쉽게 ‘무존재’가 되어버린 개개인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이들의 훼손된 삶에 인간으로서 부여받은 가치를 되돌려주기 위한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 발언할 목소리조차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한 일종의 기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살세도는 이 어두운 죽음을 이기고 생명이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 두 관, 침묵당한 죽음을 상징하는 두 책상 사이의 흙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너무 연약해만 보이지만, 이 분명한 생명의 사인은 죽음과 부활의 신비와 대면하게 해줍니다. 부활은 죽음과 탄식의 장소에서만 목격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살세도의 〈플레가리아 무다〉는 책상과 흙 같은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물과 물질을 사용해,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그 너머 생명의 소망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구현하는 한편, 고통과 소망, 죽음과 생명은 우리의 기억과 탄식, 즉 침묵의 기도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새 창조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의외의 장소, 의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 없는 풀꽃도 찬란하게 기억되는 나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끈을 만들어 악을 잡아당기며, 수레의 줄을 당기듯 죄를 끌어당기는 자들”(사 5:18)이 가져온 어둠과 혼란이 참으로 깊기만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고 세상을 위로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어둠과 짝하여 거짓과 혼란을 더하는 모습은 참담한 마음을 더욱 가눌 수 없게 만듭니다. 세상에 진정한 소망과 위로를 주는 참된 기독교의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입니다. 괴팍한 힘의 논리가 아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이기는 참된 평화의 나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이 존중되고 작고 약한 것들이 존귀함을 입는 나라, 억눌리고 억울했던 모든 삶이 치유되고 신원되는 나라, 신음하던 모든 창조세계가 마침내 온전한 샬롬으로 회복되는 나라, 그리하여 이름 없는 들짐승, 풀꽃 하나까지 찬란한 빛 속에서 기억되는 나라. 이런 가슴 뛰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꿈꾸고 싶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종교적 의례와 규범에 묶여있는 곳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했지요(롬 14:17).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것을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이 온전한 샬롬과 번영을 누리는 하나님의 집이 된 창조세계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창조세계를 축소하지 않고, 그것을 변화시켜 영광스럽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집이 되게 하실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끌며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는 우리 모두는 … 탄식하는 중에서도 기뻐하고, 기꺼이 결핍을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며, 이 세대의 악에 맞서 분투하면서 용기와 진실함을 지닌 삶을 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또한 이 모든 것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충만한 인간으로 자라 가도록 부름받았다.3)
마침내 하나님의 집이 된 세상, 하나님의 새 창조를 꿈꾸며,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불완전한 우리이지만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충만한 인간으로 자라가기를 기대합니다. 그 여정에서 우리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낯설고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와도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다면 좋겠네요.
1) 톰 라이트, 〈놀라운 하나님의 신실함(The Surprising Faithfulness of God)〉, 제레미 벡비 외 2인 엮음, 《새 창조의 예술(The Art of New Creation)》(IVP Academic, 2022), 204쪽.
2) 앞의 책, 1-2쪽.
3) 미로슬라브 볼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IVP), 109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이상 IVP)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