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닌 것들로 견디는
[411호 이한주의 책갈피]
“목사님은 고난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
고난에 대해 설교한 날 이런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날 나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라는 구절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을 연결해서 인간에게는 고난을 견딜 힘이 있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고난은 지나간다고 설교했다. 이 설교가 너무 순진하게 들렸나 보다. 내게 고난이 뭔지 모른다고 했던 이는 자신의 굴곡진 인생과 질곡에 매인 형편을 이야기했다.
“시험을 당한 사람의 마음에는 금이 갑니다. 다시 시험이 와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용기보다, 다시 시험이 오면 그때는 정말 죽겠다는 불안이 더 큽니다. 정말 큰 시험을 겪은 사람들은 사라져 말이 없고, 적당한 시험을 겪은 사람들만 살아남아서, 고난은 지나간다, 태평스럽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이 나의 설교보다 진실하게 들려서 부끄러웠다.
얼마 전 고 박완서 선생의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주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다시 나오기 어려운 작품이다. 박완서 작가만큼 문학적 역량을 갖춘 작가가 다시 나온다 해도, 그런 작가가 한 해에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는 비극을 겪기를 바랄 수는 없고, 그가 이 비극의 시간을 통과하며 신과 대결하는 기록을 남길 거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난에 관한 한 필적할 다른 작품은 없는 이 작품에도 〈욥기〉처럼, 고난의 의미를 시원하게 밝혀주는 계시의 순간은 없다. 〈욥기〉가 고난과 상관없어 보이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듯이, 《한 말씀만 하소서》도 고난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 대신 밥 이야기로 끝난다. 아들을 잃고 슬픔과 고통의 날들을 보내던 박완서 작가는, 한 말씀을 듣기 위해 머물렀던 수녀원에서 신의 음성 대신 밥과 된장국 냄새에 식욕을 느끼고 비빔밥을 맛있게 먹는다.
“그날 이후 내 배는 영락없이 끼니 때만 되면 고파왔다. 그 이상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다. 참척을 겪은 기막힌 애통과 절망은 당연히 에미의 목숨을 단축시킬 줄 알았다. 살고 싶지 않은 게 조금도 거짓이 아닌 이상 육신은 의당 거기 따라주려니 했다. 그러나 내 육신은 내 마음과는 별개의 남처럼 끼니 때마다 먹고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육신에 대해 하염없는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155쪽)
깊은 절망과 상심 속에서도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짐승 같은 생명이 있다. 죽고 싶은 마음이 거짓은 아닌데 육신은 마음을 거슬러, 먹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영혼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이 육신에 굴복하는 부끄럽고 괴로운 일을 경험하면서 어떤 변화가 생기고 치유되기 시작한다. 구원이 육신이 된 말씀과 살과 피에서 온다고 믿는 기독교는 육신과 물질에 깃든 신비를 믿는 종교다. 신에게 길고 처절한 원망과 분노와 저주를 쏟아냈던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172쪽)
개정판에는 이해인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 큰딸 호원숙 작가가 쓴 글이 수록되어 이후의 일들을 알려준다. 박완서 작가의 편지다.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 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예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가까이 계시어 분도수녀원으로 저를 인도해 주신 것은 그래도 살아보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183쪽)
박완서 작가를 지켜보았던 딸은 어머니를 이렇게 회상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슬퍼하셨다. 누구와도 나눌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그 비애를 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문득문득 그 고통을 못이겨 베게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어머니의 일기를 다시 읽는다. (210쪽)
일기는 감사의 기도로 끝났지만 기록되지 않은 날들에 여전히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밤에 자다가도 생생하고 예리하게 가슴이 아프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다. 이렇게 금이 간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그 마음이 몸과 어울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구원의 신비다.
레이먼드 카버의 보석함 같은 단편집 《대성당》(문학동네)에 실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도 자식을 잃은 부모가 나온다.
앤과 하워드 부부는 행복하고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순탄한 부부 생활을 이어온 둘 사이에는 며칠 뒤면 여덟 살을 맞는 아들 스코티가 있다. 앤은 쇼핑센터 빵집에 스코티의 생일 파티에 쓸 케이크를 주문하는데 바로 그 생일날, 등교하던 스코티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진다. 초조한 마음으로 병상을 지키던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잠시 집에 들르는데 이때 하워드는 “케이크는 왜 안 가져가냐”는 전화를 받는다. 앤도 다음 날 새벽 “스코티 일은 잊어버렸냐?”는 남자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날, 혼수상태에 있던 스코티가 죽고, 아들의 죽음에 상심해 집에 돌아온 부부는 또다시 “스코티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냐”는 전화를 받는다. 그제야 앤은 자신이 생일 케이크를 주문한 사실을 떠올리고, 집요하게 전화를 건 사람이 빵집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부부는 한밤중에 차를 몰고 빵집으로 찾아간다. 빵집 주인은 이제야 왔냐며 두 사람을 퉁명스레 대하고 상해가는 케이크를 반값에 가져가라고 한다. 슬픔과 분노가 폭발한 앤은 빵집 주인에게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며 얼굴을 감싸고 소리 내 운다. 그제야 사태의 진실을 알게 된 빵집 주인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한다. 진심으로 용서해달라며 사과한 빵집 주인은 탁자를 치워 두 사람을 앉게 하고, 뭘 좀 드셔야겠다며 빵을 가져온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그는 오븐에서 따뜻한 계피 롤빵을 가져왔는데, 갓 구운 빵이라 겉에 입힌 설탕이 아직 굳지도 않았다. … 그들이 각자 접시에 놓인 롤빵을 하나씩 집어먹기 시작할 때까지 그는 기다렸다. 그들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141쪽)
빵집 주인은 빵을 먹는 두 사람에게 아이가 없는 자신의 처지와 자식 없이 중년을 보내는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잃은 부부는 아이가 없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위로를 받고, 그가 만든 빵을 배부르게 먹으며 새벽을 맞는다. 자식을 잃는 일은 모든 것을 별것 아니게 만드는 큰 비극이지만, 이 비극을 견디는 데 뭘 좀 먹는 일, 별것 아닌 것들이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에서 담담한 희망을 배운다.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에서 주인공 영두는 중학생 때 순신과 첫사랑을 한다. 어느 날 영두가 성당에 다니는 걸 알게 된 순신은 거기서 뭘 배우냐고 묻는다. 영두가 “구원에 대해 배운다”고 하자, 순신은 “구원이 뭔데” 질문한다. 영두가 “수난이 그치는 거야”라고 대답하자, 순신은 이어서 수난이 뭐냐고 묻고 영두는 손바닥 위에 놓인 얼음 이야기를 해준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158쪽)
중학생 영두가 생각하는 고난은 추운 겨울, 손바닥 위에 있는 얼음이다. 손이 얼어도 내던질 수 없고 가만히 손바닥 위에서 녹여야 하는 얼음. 영두는 그 얼음이 녹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하면서도 순신에게는 당연히 녹는다고 말해준다. 영두가 어른이었으면 고난은 가만히 녹일 수 있는 얼음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과 흉터를 남기는 숯불에 더 가깝다고 말했을 것이다. 영두도 어른이 되면서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하는 일들’을 경험한다. 그래도 영두는 얼음이 녹는 것처럼 수난은 결국 그친다고 믿었던 시절,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구원을 이야기했던 그 대화를 잊지 않는다. 첫사랑의 마음만 그렇게 구원을 말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고난을 손바닥 위의 얼음으로 상상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온기를 주고받으며, 얼음이 녹을 때까지 함께 견디려는 마음이 있다. 비록 고난이 뭔지 모른다는 말을 들어도, 고난은 손바닥 위의 얼음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함께 겨울을 견딜 힘이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싶다. 그리고 올겨울 그 증거들을 본다. 참사가 벌어진 무안공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컵라면과 일상용품이 쌓이고, 자원봉사자들은 사고 당일부터 따듯한 밥과 국을 차려내고 새해 첫날 떡국을 끓인다. 계엄을 목격한 시민들은 탄핵을 요구하는 광장에서 어묵과 커피와 사탕과 꿀떡과 김밥을 나누고, 길에서 밤을 새우며 핫팩과 담요와 은박 비닐을 건넨다. 고난을 견디는 힘이 별것 아닌 것에서 온다는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더 많은 ‘별것 아닌 것들’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다고 가르쳐준다. 이 별것 아닌 것들 덕분에 우리는 온기를 잃지 않고 참혹한 사태를 견디며 얼음 같은 시절을 녹여낸다. 나는 이것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눠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 믿는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