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빚은 사회참여적 기독교의 창시자
[411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김재준(1901-1987)과 박형룡(1897-1978)은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기독교, 특히 장로교회의 진보와 보수 진영을 각각 대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1880년대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로 시작된 한국 장로교회는 희년을 맞이한 1930년대 이전까지 신학과 사상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주로 영어권 출신 서양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에서 전수한 단색의 전통 신학이 별 긴장이나 갈등 없이 정통이자 유일한 진리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에 2세대 지성적 신학생이 일본·미국 등지의 신학교와 대학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면서, 선교사의 영향력을 넘어, 한국인 신학자가 교회와 사회, 세상에 대한 해석을 주도하는 새 시대가 찾아왔다. 단색이었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실천이 이들의 활동을 통해 1930년대부터 다채로운 빛깔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무지개가 뚜렷한 선으로 구분된 일곱 가지 색깔의 조합이 아닌 것처럼, 이 신진 신학자들과 추종 집단의 색깔도 언제나 명확한 선으로 다른 집단과 구별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1930년대 이후 한국 장로교회는 크게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내부의 신학적 갈등을 이어갔고, 이는 결국 해방 후 조직의 분화, 즉, 교단 분열로 연결되었다. 보수를 대변하는 인물이 박형룡 한 사람만은 아니듯, 진보를 대변하는 인물도 김재준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김재준은 선배 송창근의 강권으로 일본 신학 유학의 물줄기에 합류했다. 신학적 혁신을 대변하는 기관인 조선신학교 설립을 먼저 주도한 인물도 김재준이 아닌 송창근이었다. 그러나 강점기 말 일제가 밀착 감시한 송창근의 사회 활동 제약으로 자연스럽게 조선신학교는 김재준의 학교로 인식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기에는 송창근이 아예 납북당하면서, 이후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구축된 장로교 진보 진영은 사실상 김재준이라는 이름과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1960년대 이후 장로교 보수 진영은 정교분리 원칙을 명목으로 군사정권의 반민주 독재정치에 묵인하며 개인 전도와 교회 성장에만 몰두했다. 반면, 김재준과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기독교장로회 그룹은 성서와 신학에 대한 적극적 재해석을 통해 한국 사회 현실에 부응하는 신학적 윤리학과 사회참여 신학을 창조해내고,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1년에 한신대에서 공식 퇴임한 김재준이 이 신학을 직접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자이자 후배 교수인 안병무·서남동·문익환 등이 독재와 맞서 싸우기 위한 이론적 무기로 1970년대에 체계화하고 활용한 ‘민중신학’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환경은 사실상 김재준이 거의 모두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이 된 직후부터, ‘자유’를 개인·집단·신앙·사상·신학·교회 등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강조했던 그는 장로교회라는 한 집단을 넘어서, 20세기 한국 기독교계와 한국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진보, 개혁을 이끈 아이콘(icon)으로 널리 인정받는다. 이 점에서, 말년에 “못난이의 기록”이라 스스로 평하며 자서전 제목을 《범용기》(凡庸記)로 지은 것과는 달리, 그는 비범하고 특출한 인물이었다.
아오지 소년
평양과 금강산, 개성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북한 지명에는 아오지가 포함될 것이다. 반체제 인사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이들을 유배 보내는 강제수용소로 희화화되어 알려진 아오지 탄광이 있는 곳이다. 1936년에 일제 총독부가 탄광과 석탄액화 공장을 설립하면서 유명해진 이곳이 김재준이 자라난 고향이다.
김재준은 음력 1901년 9월 26일(양력 11월 6일)에 후일 아오지의 일부가 되는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아버지 김호병과 어머니 채성녀 사이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범용기》에 의하면, 창꼴마을은 “두만강 국경지대 유폐된 산촌”(김재준, 2쪽)으로, 조선 시대에 비축미 창고가 있던 마을이어서 창꼴마을(창동)로 불렸다(4쪽). 그는 자신을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고 자서전 첫머리에서 밝혔지만(2쪽), 증조부 시절에 “땅 약 3만평쯤 개간해서 대농 축에 들었”다는 내용(7쪽), 대식구로 “자작 자급하는 중농”이라는 내용(17쪽), 이후 그가 일본·미국 등지에서 유학할 때 빈번히 아버지와 형이 땅과 수확을 기반으로 만든 자금을 보내주었다는 자서전의 여러 일화로 볼 때, 생활수준은 평균 이상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농부였지만, “글 하신 분”, 즉 지식인이었다. 낙방했지만 과거에도 응시했고, 함경남도 문천 고을 원님의 책실(오늘날 비서실장)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풍월을 벗 삼아 시작(詩作)도 하고, 산에서 약초를 캐 약사 노릇도 하고, 서당 훈장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김재준의 아버지는 아들이 개종하고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여 지도급 목사가 된 후에도 새 신앙과 가치관을 거부한 유교적 수구파로 살다가 1940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재준은 다섯 살부터 아버지가 가르치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아홉 살 지나서는 사서(대학·중용·논어·맹자) 중에서, 당판(唐板)으로 각 일곱 권씩 이루어진 논어와 맹자를 모두 암송했다. 같은 시대 유사한 성장 배경을 가진 박형룡·박윤선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가치를 삶에 구현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경전에 관한 꼼꼼한 연구, 옳다고 믿는 것은 거의 타협 없이 밀고 나가는 선비정신 등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20세기 전반기에 성장기와 형성기를 보낸 기독교 지성인들이 갖고 있던 공통 요소였다.
1880년대에 첫 미국인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서울에서 시작된 근대식 교육은 1899년에 캐나다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에는 함경도까지 확산되었다. 캐나다 장로회 선교회가 입국 후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선교 구역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김재준이 서당 교육을 마친 1910년에는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뿐 아니라, 한국인 교육자들이 세운 사설 학교들도 지역 곳곳에 있었다. 열 살 된 김재준은 경흥의 서쪽에 인접한 어머니 고향 경원군 함양동에서 외갓집 인사들이 참여하여 세운 사립 향동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신학문을 배웠다. 2년 후에는 같은 경원군 공립 고건원보통학교에 편입하여 2년 정도 더 공부했다. 졸업 후 외갓집 식구들은 김재준을 더 서쪽에 있는 회령군 회령간이농업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한문을 완벽하게 습득하면서 비상한 지성을 드러낸 김재준은 세 학교 모두에서 수석을 차지하며 졸업했다. 5-6년간 받은 신식 교육은 김재준에게 신학문을 맛보게 해주었고, 일본이 통치하게 된 한반도의 식민지 현실을 경험하게 했으며, 벽촌 바깥 더 큰 세상을 알게 해주었다.
청소년기 김재준에게는 특별한 민족의식이나 사회의식이 없었다. 졸업 후 회령군청 간접세과 임시직원으로 취직해 3년 일하다가 결혼한 직후, 웅기금융조합 서기로 전직해서 약 3년간 일했다. 졸업 후 5년 이상을 일본 제국 식민지 관청 공무원으로 일하며 평범한 소시민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경흥·경원·회령이 두만강과 인접한 국경 지대인 만큼, 1919년 3·1운동 직후 이 지역을 거쳐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는 애국지사들과 종종 조우했다. 그때마다 그는 돋보이는 그들과 초라한 자신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40쪽).
신세계: 서울-일본-미국
함경도 벽지에서 평생 식민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했을지도 모를 김재준의 인생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해준 이는 그가 일평생 친구이자 동지로 생각한 두 살 많은 송창근이었다. 경흥군 웅기면 웅상 지역은 일찍부터 기독교 마을로 유명했는데, 이 지역 출신 송창근은 일찍 기독교 신자가 된 후 간도 명동중학에서 공부하고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이동휘의 권유로 귀국하여 서울 피어선성경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사역했다. 그러나 3·1운동 이듬해에 〈독립가〉를 작사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징역을 치른 후 부모를 뵈러 고향에 와있었다. 당시 기독교에 냉담하던 김재준에게 느닷없이 찾아와 인사한 송창근은 이튿날 길에서 조우한 김재준에게 서울에서 공부해서 새 시대에 필요한 청년이 되라고 강권했다. 가슴이 들뜬 김재준은 금융조합에 사직서를 내고 창꼴에 있는 부모와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42쪽)
서울에 머문 3년은 평생 직업인 기독교 교육자로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한 학기에 한 학년 과정을 속성으로 교육하는 중동학교 고등과에 입학했지만, 고향에 다녀오느라 수업에 많이 빠진 탓에 수학·물리·화학 공부는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서울에서 지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승동교회에서 열린 서울 장로교회 연합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김익두의 창세기 1장 1절 설교를 듣고 개종에 이르렀다. 이 개종에는 다음과 같은 회심 체험이 동반되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쟁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는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47쪽)
갓 회심한 김재준의 신앙을 자라게 한 두 영양 공급처는 YMCA와 승동교회였다. 그는 YMCA에서 이상재·윤치호·신흥우의 강연을 듣고, 거의 매일 잡지실에 들러 한국어와 일본어로 쓰인 잡지를 읽었다. YMCA 영어 전수과 3학년에 1년 다니며 영어도 배웠다. YMCA를 통해 그는 1920년대 식민지 문화정치 시대의 민족주의적이고 계몽적인 기독교 신앙을 습득한다. 아마도 그가 1930년대 이후 유학과 해방 정국, 민주화 등을 통해 강화하게 되는 사회참여적 신앙의 시발점이 YMCA였던 것 같다. 이 시기 그는 일찌감치 개화하여 상경한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잡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 기독교인인 그가 독서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들은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일본 빈민운동가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이들은 공히 물질을 멸시하고 청빈하게 살면서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한 인물들이었다. 그는 이들처럼 살겠다고 결심하는데, 이 초심을 일평생 지켰다고 대체로 자부하는 것 같다(48-55쪽). 한편, 신앙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세례를 미루고 있던 그는 회심 후 3년이 지나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는 신앙의 내용과 이를 담은 그릇인 형식 간의 균형 감각을 알게 해준 김영구 목사를 은인으로 여겼다(59쪽).
1923년 겨울까지 서울에 머문 그는 귀향하여 근처 용현소학교·귀낙동소학교·신아산소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활동했다. 무급으로 일한 첫 두 학교에서의 교사 생활은 사방이 막힌 산촌 소년이었던 그에게 근대 교육을 선물한 선배 교육자들에게 받은 빚을 갚으려는 사명감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본에 유학 가있던 송창근에게서 받은 편지 등이 또다시 그를 자극했다. “그만큼 촌에서 일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가는 여비를 만들기 위해 급료를 주는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 여섯 달 일한 후, 일본으로 떠났다.
서울에 3년간 머물며 ‘기독교인’이 된 김재준은 일본에 3년, 미국에 4년 머문 후에는 몇 가지 수식어가 붙은 기독교인으로 성장한다. ‘자유로운’(free, liberal) ‘국제적인’(international) ‘학문적인’(academic) 등이 대표적이다. 감리교 신학교인 아오야마학원(청산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던 송창근이 소개해주어 근우관이라는 고학생 숙소에 머물며 일본식 된장 낫토를 팔았고, 지진으로 무너진 아오야마학원 교사 건축 현장에서 일하며 청강생으로 3년 남짓 공부했다(76-86쪽).
아오야마 출신 한국인 신학생들 대부분이 공통으로 언급했듯, 김재준에게도 아오야마 학풍을 대표하는 핵심 단어가 ‘자유’였다. “학생이고 선생이고 간에 개인 자유, 학원자유, 학문자유, 사상자유, 모두가 자유분위기다. 물속의 고기 같이 자유 속에 살았던 것이다.” 신학 사상은 뉴욕 유니언과 유사했고, 교수들은 뉴욕 유니언과 독일 튀빙겐 출신이었다. 그는 바르트의 초월론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썼다(92쪽).
그가 아오야마의 ‘자유’를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그를 신학적 자유주의자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현대신학사에서 바르트와 뉴욕 유니언의 대표적인 신학자들(니버 형제,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회퍼 등)은 19세기 말 유럽의 고전적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정통의 창조적 회귀를 선언한 신정통주의자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1930-1950년대에 한국 장로교 내 보수파로부터 ‘자유주의자’ ‘신신학자’라는 정죄에 극심하게 시달리는데, 이는 김재준이 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열린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 이후 미국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미국 교회와 사회에 끼친 여파를 현장에서 비슷하게 경험했으면서도, 귀국 후 한국인 신학생들이 택한 ‘노선’은 서로 달랐다. 이 ‘노선’들이 한국교회의 구조적 분열을 낳았다. 여하튼, 처음 신학을 정식으로 배운 학교의 학풍이 그의 생각과 판단의 뿌리가 되었다. 미국에서 받은 추가 3년 교육은 아오야마라는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김재준의 미국행도 송창근의 권유로 인한 것이었다. 송창근은 야오야마 졸업 후 북장로교를 대표하는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김재준을 위해 입학 허가서와 연 200달러 장학금을 미리 마련해놓았다. 프린스턴에는 한경직도 있었다. 여비를 윤치호에게 제공받은 김재준은 1928년 9월부터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보낸 두 학기에 그는 프린스턴의 보수파를 대표하는 그레셤 메이첸의 강의를 모두 듣고 그가 쓴 책도 모두 읽었다. 학생 다수가 메이첸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었지만, 김재준은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근본주의 투사 메이첸은 결국 이듬해에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자서전에서 김재준은 메이첸의 신학을 딱히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강의가 인기 있고, 무던히 명석했다고 언급한다. 학생들과 잘 대화하고, 다과회와 파티도 잘 열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친절했다고 회고한다. 특히 이미 졸업했기에 자신과는 친교가 없는 박형룡이 메이첸을 그대로 본뜬 제자였다고 썼다. 이렇게 메이첸의 인품과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투지적 근본주의의 총수였기에 사랑이 투지에 눌려 낯에 화색이 없었다”며 메이첸을 안쓰러워한다. 아마도 이것이 두 학기 동안 메이첸의 과목을 모두 듣고 그의 책을 모두 읽었으면서도 김재준이 메이첸과 그의 한국인 아바타(avatar) 박형룡의 길을 따르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97-107쪽).
프린스턴에서 1년을 보낸 김재준은 이번에도 송창근을 따라 피츠버그의 웨스턴 신학교로 진학했다. 신학사(STB) 2학년에 편입한 그는 구약을 전공하고 조직신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김재준이 2년 차를 맞았을 때 송창근은 석사를 마무리하고 덴버의 아일리프 신학교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김재준은 ‘홀로’ 1932년 5월에 석사학위(STM)까지 마무리했다. 이 무렵 한 한국 선교사와의 일화는 그가 앞으로 취하게 될 노선, 또한 이로 인해 겪게 될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국에 있던 선교사는 학업을 마무리한 그의 노선이 무엇인지, 즉 근본주의인지 자유주의인지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에서는 근본주의자라야 기독교 기관에 취직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재준은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 박을 수가 없소. 그러나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하여는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골(goal)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나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경륜대로 써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며, 또 그렇게 믿고 있소”라고 답했다(112-119쪽). 김재준은 이 입장을 대체로 평생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국외자: 아웃사이더
1932년 5월까지 일본과 미국의 공신력 있는 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극히 드문 인재였음에도, 선교사와의 만남이 암시했듯, 김재준은 수개월간 무직자로 지냈다. 고향의 함북노회도 선교사나 교단 치리회(노회·총회) 추천 없이 제멋대로 유학한 그를 외면했다(128쪽). 프린스턴 동문 송창근은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동시에 산정현교회 후임 담임으로 내정되어 봉사했고, 한경직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경교사와 교목으로 일하다가 대형교회인 신의주제이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1933년 4월에 김재준은 한경직의 뒤를 이어 숭인상업학교 교목으로 부임했고, 8월에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다. 숭인상업학교 교목으로 지내는 기간에 평양신학교 교수로서 〈신학지남〉 편집책임자였던 남궁혁이 그에게 편집실무를 맡기고, 그와 채필근·송창근·한경직에게 매호 글을 기고할 기회를 주었다(130-134쪽). 유학파 신학자로 대접을 해준 것이다. 그러나 신학과 인품에서 포용력이 있던 남궁혁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이들 신진 유학파 학자들이 한국 장로교계에서 오래 국외자로 남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소위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이다.
1929년에 미국 감리교 아빙돈 출판사가 출간한 《Abingdon Bible Commentary》를 한국 감리교가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번역하면서, 한국인 저자들 글도 섞어 출간하기로 하고 유형기에게 책임을 맡겼다. 한국에서는 이 주석이 1934년에 출간되었는데, 김재준을 비롯한 장로교 4인방도 집필에 참여했다. 김재준은 요나서를 제외한 소선지서 집필을 맡아, ‘보수적이고 전통적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길선주를 비롯한 원로 목회자들, 평양신학교 보수파 교수 박형룡과 선교사 교수들의 비판에 직면한 채필근은 자기 글을 빼기로 했다. 나머지 셋은 자신들이 쓴 글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빼지는 않겠지만, 이 사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했다(135쪽). 결국 이 사건 이후 신진 유학파들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신학지남〉에 글을 싣는 것도 영영 어려워졌다.
해외에서 문자 그대로 국외자였던 김재준은 귀국한 후에도 국외자, 즉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김재준은 다시 평양을 떠나기로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던 절친한 송창근도 평양을 떠나 부산으로 갔고, 한경직도 신의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1936년 4월에 숭인상업학교를 사임한 그는 북간도로 떠났다.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회의 선교지부로 기독교가 융성한 동시에, 국외 민족운동 중심지였던 용정의 은진중학교가 목적지였다. 송몽규·윤동주·문익환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한 은진중학교에서 1936년 여름부터 1939년 가을까지 3년간 교편을 잡았다. 1937년에는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도 받았다.
한반도와 개신교의 중심지 평양에서 외면받은 국외자 김재준은 오히려 한반도 바깥 북간도에서 후일 총사령관인 그의 명령을 따르는 참모라 할 만한 탁월한 제자군을 육성하는 데 성공한다. 은진중학교 시절부터 먼 시골 주일학교를 창설하고 주민 봉사와 교육에 힘쓰는 등, 신앙 부흥과 민족중흥을 연결하는 참여적 신앙을 체화한 강원용·김영규·전은진·안병무·김기주·신영희·최동렵 등은 해방 후에 김재준이 설립한 야고보교회(경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한신-기장 계열의 주역이 된다(김경재, 58쪽).
진영 구축: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기독교장로회
은진중학교 교사로 3년을 채운 김재준을 송창근이 또다시 불러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유일한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38년에 폐교했다. 그러나 여전히 존속하고 있던 교회를 위한 목회자 양성기관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이들이 이듬해부터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해 평양신학교를 대체할 학교 창설을 논의했다. 승동교회 장로 김대현이 기금을 내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설립 사무를 맡았던 송창근이 김재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송창근은 수양동우회(흥사단)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자기 일을 김재준에게 위임하려 했다. 승동교회에서 시작한 조선신학교는 이듬해 1940년에 총회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보수파가 지배하던 이전 평양신학교와 총회로부터 국외자로 취급받았던 김재준은 교수직에 이어, 1943년에는 원장(설립 당시는 조선신학원), 1945년에는 교장직에 올라 일제강점기 말기 한국 기독교의 소멸 위기 속에서 거의 혼자서 조선신학교를 이끌어갔다.
교수와 신학자, 교장으로서 김재준의 포부는 그가 기안한 조선신학교 교육 이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자유·자율·실제·활력 등의 단어로 대변되는 정신이 각 조항에 가득하다.
① 우리는 조선신학교로 하여금 복음 선포의 실력에 있어서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학적·사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도록 할 것.
② 조선신학교는 경건하면서도 자유로운 연구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하도록 지도할 것.
③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 없이,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 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 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④ 성경 연구에 있어서는 현대 비판학을 소개하며, 그것은 예비적 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이요 신학 수립과는 별개의 것이어야 할 것.
⑤ 어디까지나 교회의 건설적인 실제 면을 고려해 넣은 신학이어야 하며, 신앙과 덕의 활력을 주는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을 위한 분쟁과 증오, 모략과 교권의 이용 등은 조선 교회의 파멸을 일으키는 악덕이므로 삼가 그러한 논쟁을 하지 말 것. (김경재, 71쪽)
1940년부터 5년간 ‘일시적으로’ 한국 장로교 신학의 지배자가 되었던 김재준은 해방 이후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해방 직후 서울역 앞 동자동의 천리교 부지를 미군정에게서 할당받아 교사를 신축했고, 1946년에는 송창근에게 교장직을 물려주었다. 1947년에는 대학 인가를 받은 후,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부터 이름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바꾸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38선 이북 지역을 소련 군정과 김일성의 공산주의 정권이 통치하자, 이북 기독교인들이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기독교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서북 지방(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었던 이들은 대부분 평양신학교의 보수 신학을 유일하게 바른 정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47년 경남에서는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가 탄생했고, 이어서 1948년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서울에 설립되었다. 이전 평양신학교에서 보수파 신학을 대변한 박형룡과 박윤선이 두 학교의 교장과 교수로서 다시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학 색깔, 지방색, 권력욕 등이 맞물려, 해방 이후 장로교계는 사분오열했다. 이런 요소들이 뒤얽힌 상태에서 김재준은 1947년부터 반대자들의 집중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47년 4월에 대구에서 열린 총회에 조선신학교 51인 학생이 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이 결정타였다. “서울 조선신학교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일동 근백”이 작성한 “51인의 진정서”는 김재준과 송창근이 신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오류가 많다고 가르치며, 정통 교리를 부인한다는 내용을 수업 필기 노트를 기초로 작성한 것이었다. 이들은 정통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서울에 설립하고, 그 학교를 정통파 교수들로 강화하며, 순수한 신학으로 학제를 변제해달라고 탄원했다 “학생들의 오해라는” 김재준의 해명, “김재준은 성경의 파괴적 고등 비평 옹호자이자 자유주의 신신학 옹호자라는” 박형룡의 검토, 총회 심사위원회 조사와 김재준의 사과가 이어지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정규오, 65-87쪽). 그러나 남한에 장로회 신학교가 셋이 존재하는 상태에선 교단 분열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한국전쟁기 1951년 3월부터 조선신학교(4월부터 한국신학대학)는 부산으로 피난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1951년 5월에 부산에서 열린 총회에서 부산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뭉쳤던 출옥 성도파가 총회를 이탈하여 고신 교단을 따로 세웠다. 이 총회는 한국신학대학에 대한 총회 인가 취소, 김재준 목사 파면, 한신 졸업생의 교회 위임 거부, 기존에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의 노회 재심사도 논의했다. 결론은 1952년 총회에서 났다. 김재준은 목사에서 제명되었고, 동역자 윌리엄 스코트(서고도) 선교사도 처단되었으며, 한신 졸업자에게는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결의였다. 결국 이 조치에 반대한 이들이 1953년에 ‘법통’(호헌) 총회(1954년부터 ‘기독교장로회’)를 결성하면서 한국 장로교 내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새 교단이 탄생했다. 미국 북부와 남부, 호주의 장로교 선교회가 기존 예수교장로회(예장) 총회를 지지한 반면, 스코트가 속해있던 캐나다 연합교회는 신생 기장의 편에 섰다. 1953년에 새로 탄생한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창립 선언문은 1940년에 작성된 조선신학교 선언문의 연장선에 있는데, 그사이에 김재준의 사상이 발전한 측면을 보여준다. 기존의 자유·자립·자조에 더하여, 1948년의 세계교회협의회(WCC) 창설을 계기로 등장한 세계교회와의 협력 정신(ecumenism)이 새롭게 강조되기 시작했다.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②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 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 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김경재, 101쪽)
한국전쟁이 끝난 후 다시 서울로 복귀한 김재준은 1955년에 기장과 평등한 선교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캐나다 연합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1957년에 수유리에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를 조성했다. 이듬해 그는 처음으로 캐나다에서 쉴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요양하면서, 캐나다 연합교회의 주요 회의에 참석하여 기장과의 친선 관계를 더 강화했다. 1959년에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유니언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1년에는 만 60세 이상의 학장, 총장은 모두 은퇴하라는 군사정부의 명령에 따라 한국신학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로써 신학자이자 교수, 학장으로서 그의 공식 역할은 끝이 났다(천사무엘, 161-178쪽).
퇴임 후: 민주화 투사
퇴임 후 1963년부터 김재준은 민주화 투사로 한층 진일보했다.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정부가 신문을 폐간시키기까지 10년간 논설을 썼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65년에는 한경직·이해영·강신명·문재린·송두규·이태준 등과 함께 종교계의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71년 4월에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도 이병린·천관우 및 이후 추대된 함석헌·지학순과 함께 대표위원이 되었다. 1973년 12월에는 유신헌법 개정을 정부에 요구하는 건의서를 작성한 15인 원로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1971년 12월 6일부터 1974년 3월까지 네 차례나 가택 연금을 당하면서 독재 정권의 감시에 시달렸다.
1974년 3월부터 1983년 9월까지 약 10년간 김재준은 캐나다로 가서 노년을 보냈다. 그러나 은퇴 와중에도 재외 단체 대표직을 여럿 역임하며 재야 민주화 원로의 역할을 이어갔다. 1983년 9월, 83세가 되어 귀국하는데, 민주화운동 진영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고,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다. 김재준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1987년 1월 고 박종철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석했고, 19일에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자유·자율·양심·활력·실제·협력·평화·정의를 일평생 강조한 ‘장공’(長空) 김재준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다. 그는 1월 27일 그가 그토록 염원한 자유가 있는 ‘장공’으로 떠났다.
김경재, 《김재준 평전: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삼인, 2001).
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회사(상)》(해원기념사업회, 2014).
천사무엘, 《김재준: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살림, 2003).
한신대학 신학부 교수단 편, 《김재준 전집 13: 범용기 (1) 새 역사의 발자취》(한신대학출판부, 1992).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