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콘의 현상학을 향하여 ― 스테파니 럼프자 소르본대 연구원
[411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2]
스테파니 럼프자(Stephanie Rumpza, 1986-)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공부했고, 보스턴 칼리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 철학 연구원으로 일하는 미국인 철학자다. 단독 저서로 《이콘의 현상학: 이미지를 통한 신과의 매개》를 썼으며, 《유한성의 상처 입은 찬미: 장-루이 크레티앙에 대한 응답》·《북미 가톨릭의 대륙철학 수용》·《영화를 사유하기》 등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장-뤽 마리옹 책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녀는 마리옹과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대표적 현상학자 장-이브 라코스트와 가까이 교류하면서 그들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선보이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 현상학과 종교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성화(聖畫)와 종교예술의 체험 및 의미에 관한 탁월한 현상학적 기술을 보여준다. 영어권과 프랑스어권의 철학 세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터뷰는 파리의 럼프자 선생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와 신앙 배경, 미국에서의 유럽대륙철학 수용, 동방정교회의 성화에 관한 현상학적 접근과 분석 등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파리 소르본 누벨 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장수민 선생이 사진 촬영과 안내, 추가 질문 등으로 도움을 주었다.
- 우선 선생님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들려주시겠습니까?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시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대가족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가르침뿐 아니라 실천에서도 가톨릭 신앙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주셨죠. 기도로 가득한 경건한 삶을 사셨고, 인간의 힘이 부족할 때 신의 은총이 우리를 지탱해줄 수 있다는 영성을 항상 심어주셨지요. 신앙의 지적 발달을 늘 격려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성사와 다른 신학적 주제들을 놓고 자주 토론했는데요. 신앙을 토론하고, 신앙으로 살아가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 자연스러웠지요. 이런 환경이 깊게 배어 제가 철학이나 신학에 특별한 친밀감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죠.
시카고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전산언어학자가 되고자 언어학을 공부했습니다.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해독하려 하는 언어학의 퍼즐 같은 특성을 좋아했죠. 마지막 학기에 장-뤽 마리옹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어요. 더 깊이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진로가 바뀌어 대학원 입학 준비를 시작했죠.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하려 했지만, 제 질문들은 더 체계적이고 근본적이었어요. 신학적 형성과 관련하는 양식과는 잘 맞지 않는 개념적 엄밀성을 계속 추구했죠. 그래서 철학으로 전향했습니다. 많은 다른 이들처럼, 저도 종종 고민합니다. 내가 철학자인가, 신학자인가? 이와 관련해 큰 영감을 준 사람 중 한 명은 장-이브 라코스트예요. 그는 단순하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우리 자신을 분류해야 하는가? 왜 선택해야 하는가? 실제로는 훨씬 더 유동적인 학문들 사이에서 왜 선을 긋는가? 저는 강제로 둘을 혼합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두 전통 모두에서 자유롭게 생각의 원천을 끌어오고 글을 씁니다.
- 선생님은 책에서 라코스트와의 관계를 “그분이 말씀하신 것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신 것에서도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라는 말로 아주 멋지게 표현하셨더군요.
장-이브 라코스트는 단순하고 겸손하시죠. 이분의 글을 너무 빨리 읽으면, 심오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깊이 관여하다 보면, 갑자기 모든 것을, 이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돼요. 한 번에 한 꽃잎씩 펼쳐 보이듯이, 결국 지혜의 꽃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방식으로 생각을 펼쳐나가시죠.
여러 해 동안 그가 사제로서 집전하는 미사에도 참석했어요. 어떤 사제들은 성체성사를 정말로 하느님의 현존으로 믿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라코스트가 분명히 그렇더군요. 기도할 때 진심이세요. 그의 삶의 방식과 실천 사이의 일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됐죠. 이것은 이론적으로도 중요해요. 한 논고에서, 라코스트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성체성사를 논의하죠. 성체성사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접근 중 하나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무엇’이 아닌 ‘누구’로서 말이죠. 제가 이콘을 연구하는 데 큰 영감을 준 통찰이에요. 우리는 그가 성체를 들어 올리거나 신자들에게 성체를 전달할 때 이 일에서 구현되는 신앙과의 관계를 볼 수 있어요. 저는 그가 말한 것이 사실임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구현하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믿음에 형성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요.
전반적으로, 섬세함과 엄격함을 동반하는 가운데 우리를 경험의 토대 위에서 —철학과 신학의, 또는 믿음과 실천의— 일종의 통일성으로 이끄는 라코스트의 접근 방식은 제 작업과 신학적·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이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 라코스트의 사유의 핵심인 전례에 대한 생각들을 더 설명해 주신다면요?
우선, 라코스트가 《경험과 절대》에서 ‘전례’라는 말을 선택한 것은 기존의 함의를 너무 많이 담고 있지 않은 용어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하느님 앞에 선 우리와 절대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맥락에서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자 했죠. 일부 독자들은 이것을 즉시 미사의 전례나 성찬례처럼 함의를 풍부하게 담은 신학적 의미의 전례로 해석했어요. 하지만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요. 나중에 이 구분을 명확히 했거든요.
전례의 이런 기본적 의미는 예술 작품과 성화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어요. 둘 다 아름다울 수 있고, 아름다운 성화를 단순히 예술 작품으로 감상할 수도 있죠.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대하는 것과 성화로 대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후자는, 마치 하느님 앞에 나아가듯이 성화 앞에 나아가는 거예요. 성화 안에서 만나는 신성한 시선 앞에 자신을 두는 것이죠. 이것이 라코스트가 말하는 전례적 경험이에요. 그는 전례적 실천들이 어떻게 처음에는 하느님께 닫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 경험의 기본 구조를 확장할 수 있는지 찾고 있었죠.
라코스트는 한 번은 우리의 자연적 상태를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야생의 아이〉에 나오는 아이에 비유했어요. 그 아이는 인간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고, 말하는 법, 행동하는 법, 이 모든 것을 배워야 했죠. 어떤 의미에서 라코스트는 말하죠. 하느님과 관련해 우리는 모두 “야생의 아이들”이라고요. 우리는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자라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열어놓는 방법, 그분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이것은 특히 이 세속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감각이 아니에요. 그래서 전례적 행위들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기 위해 우리의 경험을 확장하는 것을 돕는 거예요. 그 행위들은 우리 삶에서 신성한 현존에 대한 인식과 개방성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선생님이 한 글에서 지적하셨듯이, 특히 미국에서 프랑스 현상학 또는 유럽대륙종교철학은 가톨릭 재단이 설립한 대학들에서 주로 연구되고 있죠. 시카고 로욜라대, 보스턴 칼리지, 포덤대, 드폴대 등은 모두 가톨릭 정신을 기반 삼은 학교들이지요. 이러한 현상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첫째, 시기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융합은 1940-1950년대, 특히 1960년대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매우 프로테스탄트적인 국가로 시작했고, 가톨릭 신자들은 오랫동안 소수였죠. 대다수 가톨릭 신자는 노동자 계층 유럽 이민자들을 통해 나중에 미국으로 유입되었지요. 대부분의 미국 가톨릭 대학들은 가난한 공동체에서 자란, 주류 사회에서 늘 환영받지 못했던 학생들에게 기본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미국 가톨릭은 20세기에 이르러 지적 세력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고, 신토마스주의와 연계함으로써 통합된 학문 공동체로 결집할 수 있었죠.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식은 특히 2차 대전 전후로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루뱅대에서 공부한 미국 철학자이자 하이데거 전문가인 윌리엄 리처드슨 신부는 포덤대에서 표준적인 토마스주의 형이상학을 가르쳤던 경험을 자주 이야기했어요. 제대한 군인들은 특수 형이상학과 일반 형이상학의 구분에 대해 아무런 관용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왜 삶과 죽음이라는 정말 중요한 질문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 되물었다죠. 저는 이것이 전쟁 경험으로 형성된, 핵심적인 실존의 물음으로 관심을 돌리던 당시 미국인들의 특정한 태도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많은 유대인 학자가 미국으로 피난 온 시기이기도 했어요. 많은 이가 분석철학 전통에서 왔고, 엘리트 기관들의 분석철학 수용과 인기는 이 학파가 미국에서 지배적인 철학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럽대륙철학의 성장은 1962년 대륙철학 주요 학술 네트워크인 현상학&실존철학회 설립으로 절정에 이르죠.
같은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일부 지배적 관행이나 사상의 재평가를 꾀하고 신토마스주의를 넘어서는 가톨릭 사상의 확장을 장려했습니다. 이 시대 가톨릭 사상가들의 학회 회의록을 읽어보면, 신토마스주의가 당시 세대에게 제대로 말을 건네고 있지 못했기에 당대의 실제 문제들에 접근하면서 이를 재조정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 사상가 중 많은 이가 유럽대륙철학에서 어떤 공명을 발견했어요. 이 철학적 전통이 세계의 많은 문제를 자기들과 동일하게 보고 있다고 느낀 거죠. 파편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대학의 과도한 전문화, 실제적 의미를 의식하지 못하는 세태,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붙잡을 것이 없는 상황, 지나치게 과학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경제적인 태도 등의 문제 말이지요. 실증주의적 유물론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여러 기존 철학 전통들과는 대조적으로, 유럽대륙철학과 가톨릭 모두 이러한 문제들과 싸우는 데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유된 정신은 이 전통들이 함께 모이게 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는 세 번째 이유로도 이어지는데요. 유럽대륙철학은 가톨릭과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었어요. 물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같은 무신론자들, 후설과 리쾨르 같은 프로테스탄트들, 로젠츠바이크, 부버, 레비나스 같은 다수의 유대인 사상가가 있었기에, 단순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주요 인물이 그리스도교 또는 특히 가톨릭 배경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이데거는 가톨릭으로 자랐다가 루터교로 개종했고, 후설은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그의 많은 제자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가브리엘 마르셀은 평생 가톨릭 신자였고, 메를로-퐁티는 가톨릭이었다가 멀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가톨릭 신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해도, 가톨릭은 영향력 있는 여러 사상가들에게 공유된 문화적 비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 선생님이 쓰신 《이콘의 현상학: 이미지를 통한 신과의 매개》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에선 그리스도교 신자 대다수가 장로교나 감리교 같은 개신교나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동방정교회와 이콘(성상)을 상대적으로 생소하게 여깁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선생님은 이콘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이콘과 우상의 관계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먼저 이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는 매우 까다로운 질문입니다. 이콘은 많은 다른 형태가 있고 설명하는 방식도 다양하기 때문이죠. 장-뤽 마리옹이 이콘을 이야기할 때, 그는 이미지가 아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말하고 있어요. 그에게 이콘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에요. 정교회가 이콘을 이야기할 때, 특정 전통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말하지요. 우리에게 성서의 전통이나 특정한 수도원 영성의 전통이 있듯이, 그들에겐 예술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콘은 많은 신학적 통찰이 이 특별한 방식으로 전통을 구축하는 데 이바지한 형성의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이콘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다양한 용례를 인정하고 모두 존중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하고자 해요. 첫째, 신학적 관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이 개념을 검토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합니다. 정교회의 경우, 성령이 이콘을 이콘이게끔 하는 요소 중 일부이며, 이 이미지를 통해 작용하는 신의 은혜가 중요하다고 믿어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개념들에 호소하지 않고 단순히 현상학적 차원에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신자가 특정한 태도나 실천으로 이콘 앞에 섰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무엇을 보는가? 특정 예술 전통을 따라, 그들은 성스러운 이미지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 저는 이 물음에 관심을 두죠. 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더 넓은 차원에서 이콘들을 비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특히 8-9세기 이콘 파괴 논쟁 때 이러한 선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나 성인들의 이미지를 파괴할 것인지, 그것들이 신실한 기도의 형태인지 아니면 우상인지를 두고 많은 갈등이 벌어졌죠. 비잔틴제국 황제들은 이콘을 파괴하기를 원했고, 대부분의 수도사와 일반 사람들은 보호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들이 많은 신학적 이미지를 담은 훌륭한 그림이라거나 예수가 어떤 방식으로 이 그림들 안에 현존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신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것에 그분을 이미지화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정 그림이 아닌, 신을 이미지화할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을 옹호한 거죠. 저는 구체적인 것이 어떻게 우리를 신의 현전으로 이끄는 통로로 열리게 되는지, 또는 신의 현전이 그것을 통해 비춰져 이미지나 이콘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 두 번째 질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제, 우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더 쉬운 문제가 됩니다. 우상은 나와 신 사이에 놓여있어 나를 신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보듯이, 신 대신 숭배되었던 이교도들의 우상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니체가 말한 철학적 우상도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들이 논하는 것인데, 우상은 내가 신 대신 파악하고 이해하는 어떤 것입니다. 많은 개신교 신자가 이콘을 의심스러워하는 이유는, 두 종류의 우상을 경계하려는 우려와 관련이 있다고 봐요.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누군가가 이미지에 입 맞추거나 절을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정교회의 관점은 “유형에 주어진 공경이 원형에게로 전달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미지를 공경할 때의 제스처는 이미지의 대상인 분에게로 향한다는 말이지요. 이콘에 입 맞추는 것은 헌신의 표현이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향하기를 의도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많은 개신교 신자는 그러한 전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스러워하며, 어떤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즉 나와 신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 수 있다는 염려로 공경을 회피하기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이미지 자체를 위해 입 맞추거나 절하는 것 자체가 좋은 그리스도교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우려는, 아마도 신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에 관한 부분입니다. 9세기 성상파괴론자들의 가장 큰 우려였죠. 우리가 무한하신 신의 형상을 만들 수 있는가? 이미지가 우리에게 거짓을, 즉 하나님 대신 무언가를 주는 것, 우상이 되는 게 아닌가? 이콘을 옹호한 이들의 대답은, 신이 인간이 되셨다면 신이 곧 인간의 몸을 취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분에겐 묘사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가시적 인성을 그린 그림이 그분의 비가시적인 신성을 부인하지는 않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 반론은 히에리아 공의회(754)에서 제기됐어요.
저의 답변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것입니다. 이는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예요. 현상학적 이해에서 보면, 제가 당신 얼굴의 앞면을 보여준다고 해서 당신 머리의 뒷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물을 측면으로 보므로, 그림은 사물의 전체 진리를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묘사될 수 없는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지요. 그림은 항상 하나의 가시적 측면만을 보여주며, 결코 전체를 보여준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개신교의 유보는 분명 이유가 있지만, 모든 이미지를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는 설득력이 없다고 봐요. 이미지 절대 금지라는 입장을 취하면, 훨씬 더 위험한 무언가를 초래할 위험이 있어요. 이콘들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을 매개할 기회가 풍부한 창조, 즉 우주론에서 열려있습니다. 논리적으로, 한 종류의 이콘이 파괴되거나 금지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성상들도 파괴되거나 금지되어야 함을 함축하죠. 그리스도교에서 이콘의 존재, 성인들의 통공, 다른 형태의 매개 사이에 역사적 연관성이 있음은 매우 분명합니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형태의 매개가 신자와 신 사이에 끼어들어 우상이 되어 신으로부터 분리하거나 차단할까 봐 걱정하죠. 정교회와 가톨릭의 접근 방식은 신과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존재, 이미지의 존재, 성인들의 존재에 의해 풍성해지고 강화된다고 말해요. 제 책에서 어떤 교회들에서 발견되는 한 종류의 이콘을 이야기하는데요. 마리아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를 예수께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제게는 성인이나 성상에 대한 공경의 완벽한 묘사입니다. “나는 예수님 대신 마리아를 숭배할 것이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마리아에게 나를 그녀와 함께 데려가달라고, 나와 내 기도를 그리스도께 전달해달라고 청할 것이다”라는 것을 의도하기 때문입니다.
이콘은 영성에서 진정한 상호연결성이 있습니다. 훨씬 공동체적이며, 성사의 영성, 성직자의 영성, 신이 교회의 위계질서를 통해서도 일하실 수 있다는 생각(그리스어에서 위계질서는 “거룩한 질서”를 의미함)과 함께 갑니다. 세계에는 신과의 소통 능력을 풍성하게 하는 거룩한 질서가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반면 개신교는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은 필요 없다. 나는 직접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경향이 있었죠.
- 우리는 마크 로스코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무한한 신비를 느낄 수 있지만, 이것들은 신이나 예수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신성한 신비를 감지하지요. 이러한 작품들도 이콘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요?
마리옹도 예술 작품과 로스코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바 있지요. 로스코 자신도 자기 작품을 명상적인 것으로, 우리를 다른 차원의 경험으로 이끄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장-이브 라코스트를 따라, 무한의 미적 경험과 전례 경험 사이를 구분 지을 수 있다고 봐요. 이 경험들은 서로 이질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죠. 다만 로스코의 그림을 볼 때, 아마도 저는 저 자신의 존재를 넘어 무한 속에 몰입되는 것을 느끼는 무한한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의 시선 앞에 저를 두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만약 그렇다면, 제가 엄격하게 정의하는 의미에서의 이콘입니다.
정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이콘을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한하신 신 앞에 나 자신을 두도록 허용하는 가장 명확한 이미지라고 말할 거예요. 이는 신 앞에 자신을 두는 일이 신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두는 것임을 상기하죠. 미적 경험에서 무언가에 대해,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신의 현존에도 열려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이콘은 훨씬 더 명시적이고 의도적인 방식입니다.
저는 또한 미적 경험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전통적인 이콘 앞에 설 수도 있어요. 고대 대가들의 작품을 보면, 놀라운 선과 흐름과 리듬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콘의 얼굴이 처음에는 추하게 보일 수 있어서 사람들이 감상하기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적 언어를 배우면, 미적 차원에서 정말로 무언가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볼 수 있죠. 물론 그것은 전례 경험과 같지 않습니다. 단순히 미적 경험으로서 몰입하고 그 이상은 아니라면, 이콘으로 작용하지 않아요. 나는 명시적으로 신 앞에 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가다머와 리쾨르에 따르면, 우리는 특정한 맥락이나 전통 안에서 우리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개신교 배경을 가진 사람은 이콘에 의해 특별히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콘을 보는 것과 해석학적 선이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이콘은 시각적 습관, 생활 방식 관련 전반적인 관행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교회 신자인 한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반항기에 늦게까지 파티를 즐기고 돌아올 때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보이는 이콘들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요. 현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또 다른 정교회 출신 친구는 정교회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여전히 그 시선들의 힘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콘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개신교인이나 가톨릭 신자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죠. 이콘 자체의 본질적인 영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이미지들과 맺는 관계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에 기도할 때,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신의 살아있는 임재 앞에 자신을 두는 기회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벽에 많은 이미지를 걸어 두었습니다. 이미지를 좋아하거든요. 어떤 것들은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어떤 것들은 아름다워서, 어떤 것들은 신을 상기하는 용도이지요. 직접 기도하는 이미지들 앞을 지날 때면, 기도의 실천과 습관이 쌓인 경험으로 그리스도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끼죠. 성화 앞에서의 기도는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패턴, ‘지름길’을 만드는 우리의 능력을 활용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파벨 플로렌스키 같은 정교회 신학자들 글을 보면, 이콘 앞에서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전체적인 시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플로렌스키는 이콘 앞에서 더 많이 기도할수록, 우리는 전 세계를 더욱 이콘적으로 보게 된다고 주장해요. 단순히 “이 이미지는 신과 연결되어있고 저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기도로 이콘에 자신을 맞추면서, 은혜로든 선입견으로든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형성되죠. 이러한 기도의 목적은 세상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나의 상상력을 넓히는 것입니다.
- 집필하신 책 말미에서는 이콘의 매개를 이해하기 위한 사유의 틀로 연애편지(Love Letter)를 제시하셨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개념인데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 연구에서 발견한 것 하나는 잘못된 질문에 빠지기가 매우 쉽다는 거예요. 제가 마리옹에게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체계나 틀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입니다. 제 책 전반에 걸쳐,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하던 일 중 하나죠. 이콘이 어떻게 신을 매개하는지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매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제해야 해요. 매개를 생각할 수 있는 기본적인 방법은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의 어떤 내용의 전달입니다. 이에 따르면, 좋은 매개는 내용을 완벽하게 전달하고, 나쁜 매개는 그것이 전달하는 것을 감소시킵니다. 이러한 모형을 따른다면, 이콘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신의 모든 것을 “전달하는” 데 성공할 수 없겠죠. 마치 조개껍데기가 전체 바다를 담으려 하는 것처럼요. 유한하다는 것은 정의상 무한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이콘은 단지 장애물, 우상일 수밖에요. 이러한 매개 모형은 항상 성화 파괴적일 뿐이죠. 신에 관한 어떠한 매개도 허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매개를 이해해야 할까요?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러한 매개 개념이 물질적 실체에 대한 부적절한 비교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유한과 무한의 개념을 크기 문제로 재구성합니다. 크기도 없고, 조개껍데기 속 바다처럼 운반될 수 있는 물리적 실체도 아닌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분명 적절하지 않죠. 미치지 못함으로 정의하지 않고도 유한성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나은 매개의 은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악기는 유한성 없이 기능할 수 없습니다. 그것엔 소리가 공명하도록 설계된 특정한 한계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고유한 음색과 톤을 만들어내지요. 이러한 매개 은유는 가다머가 말하는바,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바로 그 유한성을 통해 의미를 갖거든요. 예술 작품이 효과적인 것은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더 적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세부 사항들을 제거하고 특정한 것들을 강조함으로써 더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해요. 이 경우 유한성은 좋은 미학적 매개에 필수적이죠. 부정적 제약이 아닌, 긍정적 능력입니다.
이콘이 능력으로서 유한성의 긍정적 의미를 활용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콘은 예술 작품처럼 매개하지 않아요. 이콘 앞에서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도입니다. 신의 임재 앞에 나 자신을 두는 것. 그래서 이콘의 매개가 연애편지 모형을 기반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연애편지는 우리가 항상 단순화하고 싶어 하는 긴장의 양면을 매우 잘 결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경험은 무엇인가? 이콘을 아는 것과 경험하는 나의 본래적 방식들이 어떻게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가?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지요. 이것이 신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내가 이해하거나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며, 나의 본래적 조건들에 묶이지 않으시고, 심지어 그것들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신을 위해 이콘을 어떻게 공간에 남겨둘 수 있는가? 이 관계는 내가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거나 명시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곳에서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신과의 관계라는 이 수직적 축은 장-뤽 마리옹 작업의 주요 주제입니다. 이콘에서는 수직과 수평을 대립시킬 수 없습니다. 함께 가야 해요. 십자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요소가 모두 필요하며, 연애편지는 양쪽의 본질적 특성과 그것들이 긴장 관계에 들어가는 방식을 포착한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는 매우 소중합니다. 잉크 색깔, 접힌 방식, 한쪽에 찍힌 얼룩 등 모든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하죠. 거의 성물과도 같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모든 세부 사항이 중요하며, 그것의 유한한 능력이 의미를 매개하는 데 강력하게 사용돼요. 이것이 수평적 축입니다. 한편, 이러한 세부 사항의 풍부함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이의 질, 필체 같은 세부 사항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준 사람과 그 사람이 당신에게 갖는 의미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인 연애편지를 읽으면, 거기 쓰인 말들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사랑하는 이가 이해하도록 의도된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이 아름다운지 추한지는 중요하지 않고, 요점이 아니죠. 편지는 시를 분석하듯 분석할 수 없어요. 전달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논리입니다. 주로 내가 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세부 사항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죠.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니까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수직적 축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이 수직적 축이 지평에 이러한 힘을 부여하여 각 세부 사항을 그것이 가리키는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비추는 거예요.
이것이 이콘이나 예배에서 발견되는 다른 종류의 이콘적 매개 앞에서 가져야 할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하고, 그것들의 세부 사항은 정말로 우리에게 소중할 수 있어요. 동시에, 그것들은 그것들을 보낸 분, 그것들이 우리를 인도하는 분과의 관계 때문에 정확히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일 수 있고, 감상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콘의 매개의 요점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성화가 수평면을 통해 정확히 수직적 축으로 열리도록 돕는 방식이죠.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을까요?
우리의 세계는 매우 경쟁적입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을 측정과 비교의 대상으로 축소해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한지를 판단하죠. 이러한 태도는 사람을 깊이 대상화하고 소외시키지만, 이것이 유일한 시각은 아닙니다. 이콘의 전통은 하나님이 완전히 다른 논리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은 자신의 창조를 가장 뛰어나고 강력한 피조물들만을 위해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태양과 별들뿐 아니라 각각의 작은 참새도 만드셨죠. 우리 중 누구도 신의 무한한 선하심에 필적할 만큼 위대하거나 강력하지 않지만, 그분을 매개하기에 너무 약하거나 작은 것은 없습니다. 사랑의 논리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각 피조물은 자신만의 역할이 있고, 각 목소리는 할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삶은 이러한 성화적 논리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신의 흔적을 보고, 우리 각자가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창조하신 분의 이콘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은 다음 호에 한 회 쉬었다가, 2025년 4월호에 새 시즌으로 돌아옵니다.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