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 고양이를 왜 좋아할까
[411호 구선우의 동물기]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고양이를 정말 많이 볼 수 있지만, 내 삶에는 고양이가 없다. 산책을 자주 나오는 반려견과 달리, 반려묘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웃집에 드나들지 않으니 직접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길고양이도 다르지 않다.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다가가도 도망가기 일쑤이다. 지난봄, 집 앞 골목에서 흰색 새끼 고양이를 만났다. 울고 있는 모습이 불쌍해서 주차장으로 데려와 물을 주었지만, 먹지 않았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었더니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고양이와 친해질 수 있을까?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문구팬시점으로 변한 대형서점에는 고양이 캐릭터 상품이 단골로 등장한다. 고양이의 귀여운 동작과 행동을 담은 동영상과 사진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인터넷 밈(meme) 문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가장 유명한 밈은 “Happy Happy Happy” 노래에 맞춰 고양이가 춤을 추는 Happy Cat으로, 웃음이 필요한 날 검색해보길 추천한다.
사람들이 유독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어느새 ‘도둑고양이’라는 표현도 사라졌다. 길고양이로 지위가 격상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말이 있다. 귀엽고 예쁜 고양이 사진이나 영상에 달린 댓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나만 없어, 고양이”. 나만 모른다, 고양이의 매력을.
사회적 의미: 동물권 운동 선구자가 되기까지
고양이는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지역에서 가축화되었다고 알려져있다. 특히 고대이집트 문명에서 가장 많은 사료를 찾을 수 있다.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바스테트는 머리가 고양이인 여신으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해왔다. 바스테트 신전에서 수많은 고양이 미라가 발견되기도 했다. 페르시아가 이집트와 전쟁을 벌일 때 바스테트 그림을 새긴 방패를 앞세웠고, 이 덕분에 펠루시움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양이를 신성시하는 이집트 문화를 이용한 전술이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따르면, 이집트를 떠난 히브리인들은 고양이를 유대 땅으로까지 데려갔다. 이들은 약 3천 년 전인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해상무역 과정에서 쥐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를 활용했고, 이를 통해 고양이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다고 한다.1) 기원전 5세기경 페니키아인에게서 그리스와 이탈리아 지역으로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지만, 이스라엘에도 분명 고양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고양이가 나오지 않는다. 왜일까?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양이도 서아시아에서 넘어왔다는 설이 있다. 고양이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 뒤 4세기경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불교가 전래될 때 쥐가 경전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한 목적이었다(중세 수도원에서도 양피지 필사본 등을 노리는 쥐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키웠다). 이후 살쾡이보다 길들이기 쉽고, 쥐를 잘 쫓는다는 이유로 보급되었다.
고양이가 등장하는 한국 최초의 기록을 찾으려면 고려 때로 올라가야 한다. 김부식(1075-1151)이 쓴 시 〈아계부〉(啞鷄賦)에 고양이가 나온다. 내용을 보면, 아침이 와도 닭이 울지 않아 승냥이나 삵에게 잡아먹혔나 싶었더니, 자리에서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다. 새벽을 맞아도 울지 않는 닭은 도적을 만나도 짖지 않는 개, 쥐를 보아도 쫓지 않는 고양이처럼 제구실을 못 하지만 어진 마음으로 죽이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고양이는 삵과 다른 존재로 인식되었고, 개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서양 기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로부터 고양이가 곡식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와 연관되어 고양이는 주로 여신을 비롯해 여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동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아르테미스가 고양이로 변신했다. 고대 중국 농부들은 고양이 신을 숭배했는데, 쥐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고 악령을 몰아내는 다산의 여신이었다.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풍요와 생명력의 상징으로 연결되기도 한 고양이와 여성 이미지는 중세 유럽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고양이는 주로 집 안에 있는 습성 때문에, 가정 내 성 역할 구분이 명확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이미지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중세 가톨릭은 순종·임신·육아 등 고정된 성 역할을 강조했는데, 여기에 따르지 않는 여성을 두고 고양이의 일탈에 빗대었다.
고양이에게 주술적 이미지를 덧씌워 마녀사냥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14세기 흑사병이 유행하자 고양이가 이 병을 옮긴다고 여겨 학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1484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마녀사냥을 본격화한 칙서를 내린다. 악마가 고양이로 변장하고 지상에 내려왔다며,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인 6월 24일 밤이면 고양이를 태워 죽여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유럽 사회에서 고양이와 여성을 엮어서 공격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1566년 영국에서 마녀사냥으로 교수형에 처한 아그네스 워터하우스라는 여성에게 제기된 혐의가 ‘사탄’이라는 고양이 사역마(familiar spirits)를 이용한 주술로 가축과 남편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18-19세기 영국에는 독신 여성이 고양이를 수십 마리씩 기르며 이웃에게 폐를 끼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애니멀 호딩(animal hoarding, 사육자 관리 능력을 넘어서는 규모로 동물을 길러 방치하는 일) 관련 재판이 종종 벌어졌다. 18세기 후반, 고양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독신 여성들이 줄을 선 모습이 판화로 제작되기도 했다.2) 20세기 초 여성참정권 운동 반대파 선전물인 한 엽서에도 고양이가 등장한다. 많은 고양이가 인간과 함께해온 사회인 만큼, 학대와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한때 영국에서는 새끼 고양이를 자루에 담아 강에 던지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듯 유럽 역사에서 고양이는 복합적인 이미지를 지닌 동물이었다. 특히 영국은 고양이와의 우여곡절을 거쳐 여성참정권 운동과 동물보호 운동의 선구자로 나아갈 수 있었다. 1824년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영국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RSPCA)가 설립된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 부부를 비롯해 왕실에서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자, 고양이 기르는 것이 상류층 문화로 자리 잡는다. 고양이 쇼가 1871년에 최초로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리고, 고양이 보호소가 1883년에 설립되면서 고양이를 단순히 쥐 퇴치 도구가 아닌 반려동물로 인식하게 된다.
동물보호 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은 사회 규범상 공적 영역에 나서는 일이 제한되었기에, ‘돌봄’이라는 당시 ‘여성’의 덕목과 관련한 사회 활동이 용인되는 분야가 동물에 대한 일이었다. 주목할 점은,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운동이 여성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파워 코브(1822-1904)와 많은 여성 활동가는 동물을 향한 의학 실험을 여성에 대한 의료 처치와 연결해서 비판했다. 의학계에 팽배한 남성 지배적 권위주의를 여성과 동물 모두를 억압하는 근원으로 보았다. 여성참정권 운동가이자 동물권 운동가로서 동물실험 반대 운동을 이끈 코브는, 동물을 잔혹하게 대하는 태도가 사회적 약자를 향한 억압과 연결된다고 인식했다. 여성운동과 동물권 운동에 담긴 교차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에코페미니즘이 등장하던 제2물결 페미니즘 시기, 1960-1980년대에 고양이에게 있는 자율성과 독립성은 여성해방을 상징하는 특성으로 재해석되었다. 고양이는 서구에서 주류 문화에 저항하는 반문화 운동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자녀 없이 고양이를 키우는 중년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인 ‘캣 레이디’ 같은 부정적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이어졌다. 캣 레이디는 독립적 생활 방식을 선택한 여성으로 재정의되고, 전통 가족 규범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미국 대선 국면에서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기 자신을 ‘자식 없는 캣 레이디’(Childless Cat Lady)라고 지칭하면서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공화당 J. D. 밴스 부통령 후보가 인터뷰에서 해리스 후보를 비아냥거리며 ‘캣 레이디’라고 조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반발적 흐름 중 하나였다.
고양이는 서구 사회를 넘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반려동물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상징과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독립적인 성격 외에 귀여움, 호기심, 재기발랄함 등이 주목받으며 다채로운 매력을 드러낸다. 행운과 보호, 정서적 안정을 위한 반려동물로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단순한 동물을 넘어, 문화적·사회적·심리적 측면에서 인류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의 고양이: ‘집사’에서 ‘TNR’까지
반려 문화가 확산하면서 우리나라 집고양이들은 인간에게 섬김을 받는 존재로 격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양이는 독립적이고 자기 공간을 중요시하는 동물이기에, 주인이 고양이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충실히 노력하는 모습을 두고 ‘집사’라는 호칭이 쓰인다. 마치 고양이가 주인이고, 사람은 고양이를 돌보는 집사처럼 행동하는 상황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쥐로부터 곡식을 지키는 동물에서 ‘주인’이 되기까지 고양이는 인간 사회와 운명을 함께해왔다.
길고양이들은 어떨까? 도둑고양이라 불리다가, 어느덧 인간에게 보살핌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길고양이 급식이나 입양과 더불어, 이들을 돌보는 중요한 방법을 TNR라고 한다. 길고양이를 포획(Trap) 후, 생식능력을 제거하는 중성화(Neuter)를 실시하고 방사(Return)하는 프로그램이다. 야생 고양이 개체수를 조절하고, 번식기에 소리를 내는 고양이 때문에 발생하는 시민의 불편을 막을 수 있다. 이는 고양이에게도 유익한 일이다. 고양이에게 발생하는 각종 종양, 전립선 염증을 예방하여 수명을 늘리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동물복지 차원에서 국가와 지자체로부터 관리·지원을 받는 우리나라의 사업이다. 국가동물보호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TNR 사업이 약 13만 건 시행되었다. 프로그램 효용과 동물의 자기 결정권을 둘러싼 논쟁은 진행 중이다. 고양이가 주인 대접을 받는 듯하지만, 여전히 집사 중심인 사업이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 고양이들은 인간에 의해,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 여성해방문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도리스 레싱이 쓴 소설을 보면, 고양이가 여성의 자율성과 독립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녀는 고양이에 관한 에세이에서 중성화 수술에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 아직도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 않았느냐고, 고양이가 새끼를 낳게 내버려두는 일은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이웃들의 핀잔에 괴로워한다. 결국 앞발을 다친 반려묘 부치킨에게 중성화 수술을 받게 한다. 이후 부치킨은 더 건강해져서 수명이 늘어났다. 동네에서 다른 고양이와도 싸우지 않게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안한 마음을 거두지 못한다. 도리스 레싱의 솔직한 고백은 TNR이 오늘날 고양이 돌봄 사업의 종착지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동물들에게 끔찍한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3)
고양이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
지난해 11월에 연세대학교 고양이 집사들 모임인 ‘연세대 냥이는 심심해’(이하 연냥심)에 속한 학생들을 만났다. 연냥심은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들이 사람과 공생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 길고양이 이미지 개선 및 지원을 위해, 급식과 TNR 사업을 하고 있다. 그 외 고양이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겨울철 추위에 떨지 않는지, 서식지를 옮겼는지 등 교내에서의 생존을 보장하는 활동을 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기 동물 입양을 홍보하면서 팅커벨프로젝트 등 동물권 단체와도 협력하고 있다.
연냥심 학생들과 만나기 전에 나는 적지 않게 긴장했다. 고양이에 대한 이해나 애정이 부족해 실수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달리, 그들은 그저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고양이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동아리 활동 혹은 반려동물 사랑이 동물권 운동이나 비건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동물권 단체와의 협업과는 별개로 자신들이 벌이는 활동을 동물권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 짓지는 않았다. 한 학생에게 동물 담론에서 고양이만의 특별함을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모든 생명은 모두 동일하게 소중합니다. 고양이 권리에 집중하는 것은, 아마 저희 주변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생활과 고양이 생활에 적절한 균형을 맞춰주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괜히 예민하게 동물 감수성을 좇아가며, 고양이 혹은 동물을 사랑하면 거창한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고양이를 좋아해서 고양이를 돌보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 학생은 형편상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못해 학교에서 고양이와 시간을 더 갖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또 다른 학생은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고양이를 점점 더 좋아하게 돼서 시작한 일이었다. 내가 먼저 심각해질 필요는 없었다. TNR 프로그램을 대하는 태도도, 동물에게 있는 생존권과 자기 결정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만 고려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대단한 윤리적 딜레마에 갇혀있을 필요도 없었다. 캠퍼스 내 고양이가 굶어 죽지 않도록 사료와 물을 주는 행위가 우선이다. 생명체에 대한 책임으로 진행하는 일이 TNR이었다. 연냥심 활동은 고양이를 향한 애정 하나면 충분했다.
반려묘를 키우는 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들이 모두 사회적 의미를 따져가며 고양이를 키우지는 않는다. 고양이라는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다채로운 매력에 저마다 빠져들었던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데 남녀노소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유기묘 두 마리를 키우는 친구는, 내게 고양이도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다. 고양이가 지닌 독립성과 자율성이라는 특성만 보고 사람들은 종종 오해한다. 고양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태계와 엮이어 살아간다. 책임을 품고, 자기 자리로 다가오는 고양이를 돌보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
어미에게 버려진 고양이와 질병으로 버림받은 고양이는 친구 부부에게 각각 한 사건으로 다가왔다. 이른바, 간택의 순간 아니었을까. 나도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고, 종종 만나기도 하면서 고양이에게 빠져드는 중이다. 그러자 갑자기 골목에서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봄 만났던 새끼 고양이가 성장한 모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고양이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하얀 고양이뿐 아니라, 지나가던 길고양이, 소셜미디어 속 고양이가 하나둘 내 눈으로 들어온다. 고양이를 알아가니, 고양이가 좋아진다. 내게도 어떤 특별한 동물과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까? 동물을 향한 감수성은 바로 언젠가 다가올 그때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고양이는 예로부터 인간과 불평등한 관계를 맺어왔다. 사회적 의미가 변화했지만, 여전히 불균형적 관계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관점에서 보면, 고양이 반려 문화나 길고양이 돌봄은 고양이를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한 행동일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닌 존중에서 시작된다. 진정 사랑한다면, 독립성과 자율성을 존중해 고양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해주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라고 강조한다.4)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귀여워하는 감정을 넘어선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등 건강관리 영역을 넘어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TNR 프로그램을 통해 길고양이 개체수를 조절하고 건강을 돌보는 일도 사랑의 실천 아닐까? 적어도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생명을 책임 있게 대하는가? 생명을 존중하고 있는가? 마음의 준비가 된 이에게 고양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줄 것이다. 우리는 정말 고양이를, 동물을 사랑할까?
문학작품에서 고양이는 유독 일인칭 화자로 등장한다. 고양이가 드러내는 주체적 태도, 가만히 주변을 관찰하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작품 중 하나로 나쓰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현암사)가 있다. 고양이의 특징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905년 러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이름 없는 고양이가 도쿄 영어 교사 구샤미 집에서 인간 세상을 조용히 지켜본다. 고양이는 구샤미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엿들으며, 인간 사회의 다양한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소세키는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일상의 부조리를 해학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깊은 통찰을 선사한다. 격동의 시대에도 고양이와 주변 인물들이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세키의 고양이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온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볼까? 어쩌면 심각한 사회문제나 날 선 논쟁보다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 평범한 삶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지도 모른다. 우리 곁의 고양이들이 인간 집사들 세상을 조용히 관찰하듯이 말이다. 소설 속 고양이는 툴툴대면서도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읽는 이를 위로한다. 마지막 장에서 고양이는 이렇게 말한다.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612쪽)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전미연 옮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고양이 백과사전》(열린책들, 2022), 45쪽. 이 이야기는 베르베르 소설 《고양이》에도 등장하는데, 작중에서 정수리에 꽂힌 USB 메모리를 통해 인간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 고양이 피타고라스가 주인공 고양이 바스테트에게 하는 인간과 고양이의 역사 강의에서도 등장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전미연 옮김, 《고양이 1》(열린책들, 2018), 126쪽 참조.
2) 미미 매슈스, 이혜인 옮김, 《나폴레옹을 물리친 퍼그》(스윙밴드, 2019), 143-155쪽. 오늘날 동물신학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반려동물 장례식이 200년 전 영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도리스 레싱, 김승욱 옮김, 《고양이에 대하여》(김영사, 2020), 98쪽.
4) 에리히 프롬, 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19), 87쪽.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