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지 못할 과거는 없습니다
[411호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
개신교는 용서의 종교다. 조폭 두목도, 정치 깡패도, 고문 기술자도 용서를 받고 목사가 될 수 있다. 많은 교회에서 이들을 불러다 간증을 시킨다. 단상 앞에 나와 과거에 얼마나 추악했는지를 이야기하면, 함께하는 성도들은 감탄하며 손뼉을 친다. 더 이상 과거를 추궁하지 않고, 깨끗이 잊어준다. 너무 과해서 논란이 될 정도다. 그런데 잘 용서해주지 않는 죄가 있다. 바로 ‘혼전순결’을 어긴 죄다.
정말 그러한가? 검색창에 ‘◯◯◯ 죄책감’을 검색해보자. ‘거짓말’을 넣으면, 기독교 관련 글이나 영상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폭력’도 마찬가지다. 일반 기사들이 나올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다른 단어도 마찬가지다. 음주, 흡연을 넣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네이버, 구글, 유튜브 등에서 검색해도 결과는 같다. 여기에 ‘순결’을 넣어보자. 곧바로 기독교 관련 글이나 영상이 나온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혼전순결 문제로 죄책감을 토로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많아서, 호응하는 콘텐츠가 많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혼전순결 문제로 고민했던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참 이상하다. 누군가를 때리고 속인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혼전순결을 어겨서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 말이다. 신앙이 아닌 상식의 잣대로 보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어른들은 요즘 청년들이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많은 청년이 아직도 혼전순결이 주는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다. 혼전순결을 어긴 이도, 혼전순결을 지키는 이도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네티즌 글이 있어서 띄어쓰기만 수정하고 그대로 옮긴다.
순결을 잠시 지켜낸 뒤에는 잘못하려 했다는 죄책감만이 내 맘을 짓누른다. 이대로 몇 년이 흘러 부부의 연을 맺게 되면 순결을 지켜온 게 기쁠까? 잘 모르겠다. 혼전순결이라는 가치가 점점 싫어진다. 세상 모든 죄는 회개받을 수 있는 것처럼 쉽게 지으면서 혼전순결만은 나를 놀리는 듯이 그 가치를 지키고 있으니 역겨우니 그지없다.
죄책감이 주는 충격과 아픔
인간은 성욕이 있는 존재다. 연애할 때 마음뿐 아니라 몸도 가까워지고 싶다고 느낀다. 단언컨대 성욕과 연애는 분리할 수 없다. 목사나 선교사도 성욕을 느끼고 스킨십을 한다. 더 깊은 스킨십을 원하는 마음과 싸우기도 하고, 생각만큼 절제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혼전순결을 지키려는 의지는 더 강할 수 있지만, 연애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회자나 평신도 사역자들을 보면 가면을 쓴 사람 같다. 마치 결혼하기 전까지 손만 잡아본 사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분들 연애는 성욕이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처럼 보인다. 이분들이 의도한 바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청년 시절에 강의를 들었던 분들에게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람직한 연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이 이미지는 현실과 괴리가 컸다. 내 욕구가 이상적 그림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번번이 경험했고, 그때마다 좌절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틈만 나면 글을 썼다. 에버노트를 켜고 ‘어디까지가 아름다운 스킨십인가 연구하기’라는 제목을 써두고 생각날 때마다 이런저런 내용을 적어두었다. 매번 몰려오는 자괴감을 정리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
신앙생활에 진심인 청년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한다. 혼전순결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해서 죄책감이 없지는 않다. 연애하는 내내 갈등하고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적 욕구를 품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데, 부정하려고만 하니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앞서 살펴본 네티즌 사례처럼 연애하는 순간마다 강한 죄책감 속에서 버틸 뿐이다. 혼전순결을 지켰다는 것은 그만큼 죄의식이 강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겪을 죄책감은? 이 감정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난해, 공공정책에 영향을 주는 심리학·사회과학 논문이 실리는 저널인 〈ASAP〉에 한 논문이 게재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정적인 성적 메시지’(금욕 장려, ‘처녀성’ 미화, 성 억압 등 성에 관한 부정적 신념 조장)에 노출된 사람이 겪는 성적 죄책감에 관한 연구다.1) ‘부정적인 성적 메시지’란 혼전순결 등을 지키게 하기 위해 성욕에 부정적 감정을 형성하게 하는 메시지를 말한다. 성적 죄책감은 성관계 등 성적 행동을 할 때 느끼는 수치심, 불안감을 지칭한다. 이 논문에 담긴 연구는 어릴 때부터 부정적인 성적 메시지를 접해온 사람들과, 아동기에 성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이 갖는 성적 죄책감을 조사했다.
결론이 충격적이다. 부정적인 성적 메시지를 접해온 사람이 느끼는 죄책감이 성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보다 크게 나왔다. 아동기에 성적 학대를 당해도 사람에 따라 성인이 되어 성적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어릴 때부터 부정적인 성적 메시지에 노출된 이들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결론이다.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가 혼전순결이나 성에 대해 가르쳐온 것이 성적 학대보다 더한 충격을 주었다는 말이다.
죄를 지적하기 전에 아픔을 보자
성적 학대를 겪은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과거를 탓하거나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겪었을 충격을 이해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런데 진지하게 신앙생활하고, 교회 가르침을 따르려 한 청년들이 그보다 더 큰 충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혼전순결을 지키는 청년들도 죄책감과 싸우고, 지키지 못한 청년들은 더한 자괴감을 경험하며 괴로워한다.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과거를 묻기보다 충격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죄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죄책감에 짓눌린 고통을 헤아리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적어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다섯 번 결혼한 후에 또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따지지 않으셨다.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이 죄인지도 판단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녀의 전남편들은 남편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경험했을 죄책감을 먼저 보시고, 그녀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다들 그녀와 지금 동거하는 남자가 남편인지 아닌지에만 관심을 둘 때, 그동안 겪은 아픔과 죄책감을 헤아려주셨다. 여인은 그런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다. 비로소 여인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한다. 여인은 신앙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자 신학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까지 주의 깊게 살피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결혼이라는 사회적·신앙적 기준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반복해서 버림받으면서도 다섯 번이나 결혼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다섯 번째로 버림받고 더 이상 기준을 지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큰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자기를 책망했을까? 예수님은 그 마음을 먼저 헤아리셨다. 그리고 여인은 깊은 자괴감에서 빠져나와 다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도 이랬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따르고 싶지만 죄책감에 짓눌려서 힘들어하는 영혼의 외침을 먼저 보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이와 성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나도 그렇다고 얘기해주면 좋겠다. 성적 욕구를 참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절제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죄책감이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공감해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은 절대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가면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다독여주면 좋겠다. 하나님의 눈으로 봤을 때 우리 중에 순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함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자고 손 내밀어주면 좋겠다.
혼전순결이라는 기준에 도전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죄를 지적하기 전에 아픔을 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혼전순결 메시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감당할 죄책감과 고통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위 연구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성에 관해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어겼을 때 느끼는 죄책감과 충격이 너무도 크다. 죄를 지적하기 전에, 교회가 한 마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청년들의 아픔을 봐주면 어떨까? 그럴 때 청년부 어딘가에 숨어있던 ‘사마리아 여인’들이 회복되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을까.
지우지 못할 과거는 없다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유독 혼전순결에 죄책감을 크게 느끼는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지우지 못할 과거는 없다.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기(요일 1:9)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매일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혼전순결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나도 크고 벗어나기가 힘들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도 지울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 안에 이런 믿음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믿음이다.
왜 이런 이상한 믿음이 생길까? 나는 ‘순결’이라는 단어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할까 봐 먼저 얘기하자면, 순결이 갖는 의미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어 속에 비복음적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단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순결은 ‘성관계 경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순결은 성관계를 한 번이라도 하는 순간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적 외에는 방법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용서를 받아도 경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과 상충한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사 1:18)이라는데, 순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한 번 규칙을 어기면 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 단어 속 메시지를 거부하기란 불가능하다.
순결은 물론 소중하다. 기독교의 가치가 들어있다. 하지만 더 소중한 것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보혈을 믿는 자에게 지우지 못할 과거란 없다. 십자가 보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순결 문제로 고민하는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간신히 순결을 지켜가는 청년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순결을 지키지 못해 사마리아 여인처럼 하나님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숨어 지내는 청년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들의 영혼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는 보혈의 능력을 갈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우지 못할 과거는 없다는 그 진리가, 교회 안에 온전히 선포되기를 이들은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교회 안에 온전한 복음이 선포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를 위해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보고 싶다. 복음의 진리를 온전하게 선포하는 데 ‘순결’이라는 단어가 방해된다면 다른 단어를 사용해보자. 사람들이 혼용해서 쓰는 ‘혼후관계’가 어떨까? 이 단어가 출발한 곳이 세속 사회이기에 부담이 있을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은 결혼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이 때문에 순결을 강조해왔으니 충분히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대신, 순결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집중적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이 묵직한 단어를 남녀 관계에만 사용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순결이라는 단어를 청년들에게만 짊어지게 하지 말고, 온 교회가 함께 짊어졌으면 좋겠다. 이 무거운 단어 앞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는 모든 과거를 용서하시는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모든 성도가 순결이라는 단어를 함께 짊어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우리는 모두 주의 순결한 신부로 함께 빚어져갈 것이다.
정태형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과 교회를 이루어가는 여린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의 사각지대를 보려고 노력한다. 《부모가 먼저 행복한 회복탄력성 수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