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성 위염’을 치유할 해독제들

[412호 에디터가 고른 책] 《윌버포스》 외 4권

2025-02-26     강동석
윌버포스 | 윤영휘 지음 | 홍성사 펴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깊어져만 가던 정치에 대한 냉소를 단박에 거둬들이게 된 계기는 12·3 비상계엄이었다. 12월 4일 새벽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와 14일 오후 탄핵소추안 가결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말을 실감했다.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법기관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국에 무엇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만난 이 책은 ‘내란 해독제’가 됐다. 주인공인 영국 그리스도인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이야기는 스치듯 몇 번 들었지만 진하게 마주해본 적 없었다. 충실한 사료와 분석이 뒷받침된 평전의 힘을 익히 경험한 터라, 공부해보자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집었다. 윌버포스 시대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한국의 역사학자가 각 잡고 쓴 평전이었다.

하원의원 윌버포스의 생애와 실천은 반석 같은 신앙에 기초한 소신과 인내로 점철돼있었다. 휘그파와 토리파가 기득권을 놓고 경합을 벌이는 의회 정치 구도에서 끝까지 독립파를 고수하면서,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가 아닌 사회 변화와 성숙을 위한 현실 정치를 추구하는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온갖 술수와 폄훼 가운데 신앙에 뿌리를 둔 인내로 수십 년간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벌였는데, 정치 시스템과 국민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개혁까지 함께 이루었다는 점에서 울림이 크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노예선 선장 출신의 목회자 존 뉴턴,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를 비롯해 당시의 복음주의 운동가들이 기여한 역할도 조명한다. 프롤로그에서 던지는 다음의 물음을 붙잡아야 할 이유이다.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실제 어떻게 일어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기억되는가’도 중요하다.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어떠한 점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성을 지니는 것일까?”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 | 윤영휘 지음 | 홍성사 펴냄

같은 저자가 쓴 이 책은 《윌버포스》와 짝으로도 읽힌다. 윌버포스가 살았던 ‘혁명의 시대’인 18-19세기를, 세속사·교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창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 급격한 과학혁명·계몽주의·탈그리스도교 현상의 원인과, 이에 직면한 그리스도교의 대응 및 변화가 주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두 책 모두 이미지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해 이해를 돕고, 각 장을 맺을 때마다 시사점을 고민해본다는 측면에서 이 책도 시의성이 높다. 최근 학계 동향까지 염두에 두어서, 배워가는 게 많았다.

“최근 학계에서는 ‘혁명’이라는 용어를 ‘군사혁명’, ‘산업혁명’, ‘과학혁명’같이 광범위한 변화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근본적인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자들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대중정치의 출현을 촉발했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산업을 임금노동에 의존하는 구조로 바꾸었으며, 무엇보다 영국인들의 도덕적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점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변화였다. 그래서 역사학자 허버트 슐로스버그(Herbert Schlossberg)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영국 복음주의 정치인들이 주도한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설명하면서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일례로, 당시의 계몽주의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해석한 일반적 시각을 교정하면서 계몽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존재한 활기찬 네트워크의 존재를 짚어내는 등, 그리스도교 역사 이해의 폭을 넓힌다.

구약의 민주주의 풍경 | 기민석 지음 | 홍성사 펴냄

이 책과 아래 두 권을 함께 살펴본 까닭은, 온라인상에서 여러 개신교인이 ‘민주주의는 성경이나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의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장면을 목격한 탓이다.

이 책은 구약에 드러난 ‘고대 이스라엘 의회 제도’를 조명한다. 저자는 한국 교계에서 보기 드문 필력을 지닌 구약학자다. 근현대의 민주주의와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도 민주적 절차가 중요했으며 민주주의와 연결 지을 만한 흔적이 뚜렷했다. 저자가 구약과 더불어 제시하는 자료인 고대 문헌을 보면, 과거의 군주들은 모두 ‘독선적 독재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이해가 얼마나 납작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고대 이스라엘이 지닌 의회 감수성의 중심에 놓인 ‘생명 존중’은 오늘날 정치와 교회 상황에서도 충분히 따져볼 만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출간된 시점에 박근혜 탄핵이 마무리됐다.

“이 책의 집필을 마무리하던 시기,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다. 구약성서와 연계되는 개념인 ‘공동체’, ‘정의’, ‘재판’, ‘소송’, ‘의사 결정’, ‘민주주의’는 재미가 없어서 듣는 사람마저도 화석이 될 것 같다. 그런데 대통령 탄핵 심판을 둘러싼 일들은 그저 과거를 엿보는 것에 그치지 않게 했다. 지금 한국 사회에 주는 뚜렷한 메시지를 고대 세계에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 최태현 지음 | 창비 펴냄

때로 민주주의가 위태롭게 느껴지는 요즘, 이 책만큼 적절한 처방이 또 있을까. 저자는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행정학자답게 몇 차례 성경이나 신학서를 인용하기도 한다. 재해·범죄·사고·질병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까지 품고서 민주주의를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저자가 사려 깊게 이야기하는 대안은, 다름 아닌 삶의 영역 곳곳에 공공성을 세우는 ‘작은 민주주의’다. 읽다 보면 작은 희망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타인과 세계, 특히 주류적 논의로부터 가려진 세계를 이해하고, 강력한 리더에 의존하기보다 민주적 책임을 나누어 지며, 운명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작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마음을 배양하는 길임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파커 J. 파머 지음 | 김찬호 옮김 | 글항아리 펴냄

상처뿐인 민주주의를 회복할 방책, ‘마음의 습관’을 논하는 현대판 고전. 이 책에서 말하는 미국이 처한 혼돈과 분열의 현실은, 출간된 지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더욱 심화된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한 책.

강동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