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412호 예술, 구원을 묻다]

2025-03-01     백지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만든 예술품이다.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창 1:31, 새번역)

사진: 필자 제공

밴쿠버의 석양은 참 아름답습니다. 키칠라노 해변 가까이에 살던 시절, 해 질 무렵 바닷가로 자주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못내 아쉬웠던 태양이 남기고 간 불그레한 자취로 한껏 달아오른 하늘과 그 위로 단아하게 브이 자를 그리며 집으로 날아가는 구스 친구들, 파도마저 잔잔해진 고요한 바다 위에 수를 놓듯 돛단배들이 떠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하늘과 땅의 얇은 틈새로 창조주의 영광이 새어 나오고, 그의 작품인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잠깁니다. 마치 변화산에 오른 것처럼, 분명 늘 보고 알았던 세상 안에 감추어져있던(apokruptó) 전혀 다른 차원의 실재가 드러나는(phaneroó) 장면을 목격하는 신비로운 순간입니다. 이처럼 창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은 그것을 만드신 예술가 하나님을 향한 경탄과 찬양으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고양된 물질적 감각은 우리 안에 초월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열망과 상상력으로 이어져 마침내 예술적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태생적으로 창조주의 예술적 DNA가 새겨진 잠재적 예술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 인간의 창조적 예술 활동과 향유에 관한 신학적 묵상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예술과 예술가 소명의 의미와 가치를 살펴보기 위해 창조신학을 소환해볼까 합니다. 아, 그런데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다음 문장이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물리적이며 감각적인 것에 대한 혐오가 서구[또한 한국] 기독교 세계에 매우 깊게 스며들어 있어 … 여전히 풍경이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며 언어나 그림 또는 소리에서 기쁨을 느끼는 일을 경멸해야 할 것으로 믿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2) 행여 밴쿠버의 석양과 예술의 가치를 운운하는 것이 내심 불편한 분들을 위해 먼저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실한 예술가’는 모순어법?

일반적으로 영육 이분법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분위기는 우리 삶에서 신앙과 예술(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공존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이게 합니다. 종교적 신실함을 배격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예술계도 상황은 마찬가지인데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실한 예술가’는 양쪽 모두에서 ‘말 못 하는 수다쟁이’처럼 모순어법(oxymoron)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둘의 양립 가능성을 용기 있게 탐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화가이자 CIVA(Christians in Visual Arts) 책임디렉터를 맡고 있는 캐머런 앤더슨은 교회와 예술계 양쪽 모두에서 비웃음을 살 위험을 감수하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신실한 예술가(Faithful Artist)》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신앙과 예술에 대한 진지함을 동시에 붙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여정을 들려주는데요. 앤더슨은 10대 시절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를 처음 보았을 때 거기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미학적 경험을 합니다. 그림 앞에 서는 순간,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스페인 내전의 참상과 폭력의 실재가 너무도 생생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겁니다. C. S. 루이스가 말했던 “상상력이 세례를 받던” 밤이나, 폴 틸리히가 보티첼리 그림을 보고 빠져들었던 “계시의 황홀경”과 비슷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예술가의 창의적 수고가 만들어내는 물질적 오브제와 공간이 어떤 심오한 의미를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방식이 아닌 우리 몸을 통해 대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에 심오한 매력을 느낍니다.

〈게르니카〉(1937)

그러나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앤더슨에게, 그가 자란 북미 복음주의 보수 개신교 환경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엄청난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토록 중요한 의미였던 교회가 예술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특히 현대미술에는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에 깊이 좌절합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교회에서 예술가의 소명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말해주는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중심에 두는 개신교 교회에서는 예술을 무시하고 배격하거나, 최선의 경우라도 우리 신앙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부차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로 취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세상 문화는 무조건 악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교회 안에서, 예술가의 가치와 소명을 확인받지 못해 방황해야 했던 이는 비단 앤더스만이 아닐 겁니다.

가톨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앤더슨이 (개신교) 교회에서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예술가의 소명을 긍정하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가톨릭 전통에서 더 분명히 들려옵니다. 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편지에서 이렇게 씁니다. 조금 길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독창적인 창작자인 여러분. 예술가들만큼 창조의 새벽에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을 바라보시며 느끼셨던 그 깊은 감정을 더 깊이 공감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이 소리와 언어, 색채와 형태의 숨겨진 힘에 매료되어 자신의 영감의 산물인 작품을 바라볼 때, 그 눈길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에서 느끼셨던] 바로 그러한 감정과 유사한 어떤 것이 반짝입니다. …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인간은 여느 때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드러나며 … 사랑 어린 시선으로 하나님 예술가는 인간 예술가에게 자신의 뛰어난 지혜의 불씨를 건네주시며, 그를 자신의 창조적 능력에 동참하도록 부르십니다.3)

‘예술적 창조성’을, 인간이 지닌 가장 명확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교황의 목소리는, 앤더슨처럼 교회와 예술가의 소명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사람에게 더없는 격려와 자유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와 영성(Reel Spirituality)》을 쓴 로버트 존스톤도 문화 영역에서 개신교가 보여온 편협한 태도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톨릭 전통에 주목하는데요. 그는 개신교가 이성적 말씀만 강조하면서 시각적 이미지를 경계하는 것은 창조신학을 배제한 채 구속신학만 강조해온 결과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존스톤은 가톨릭 신학자 데이비드 트레이시의 통찰력 있는 연구에 근거해 개신교는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과 세상의 죄성을 강조하는 반면, 가톨릭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말처럼 세상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내재성(immanence)과 세상을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현현의 장소로 보는 인식을 강조한다고 말합니다(이 내용은 2006년 영문 개정판을 참고했으며, 2000년도 초판을 옮긴 국내 번역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톨릭의 신학적 특징이 세상을 보는 특유의 가톨릭적 상상력을 발전시키고, 더 의미 있는 문화와의 대화와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기억이 납니다.

칼뱅은 정말 예술의 적일까

그렇지만 개신교 전통에도 인간의 창조 활동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통찰이나 예술가의 소명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문제는 역사적 맥락과 오해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신교가 예술과 멀어진 가장 주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을 말씀 중심 신학은 종교개혁 당시 루터를 비롯한 여러 종교개혁가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즉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한 것에서 출발했는데요. 이 ‘오직 말씀’ 교리는 종교개혁 당시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 전통과 교리의 절대적 권위 아래서 성화나 성물을 둘러싼 폐해가 극심했던 시대적 맥락과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술의 적으로 알려진 칼뱅의 이미지 역시 어느 정도 내외부의 오해에서 기인합니다. 그의 청교도 후예들에겐 다소 놀랍게 들리겠지만, ‘전적 타락’을 역설한 칼뱅은, 또한 《기독교강요》에서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음식·의복 같은 인간 문화에서도 합당하게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심지어 시편을 주석할 때는 “음악과 그림과 같은 예술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며 예술을 대놓고 긍정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문제는 이후 개신교 발전 과정에서 종교개혁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종교개혁가들의 가르침을 또 다른 독단적 교리로 만들어버린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는 복음의 언어적 선포에만 모든 중요성을 부여한 채, 떡과 포도주로 구현되는 우리 삶과 신앙의 성례전적 차원은 철저하게 무시할 뿐 아니라 창조세계와 그 물질성을 거부하고 배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영과 육을 분리하고 물질세계를 근본적으로 열등하거나 악하게 여기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성경이 아닌 그리스철학 사상에 기원을 두는데요. 잘 알려진 대로 플라톤은 감각적 물질세계를 초월적이고 비물질적인 실재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특히 《파이돈》에서 그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될 때 참된 실재인 이데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육체를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비유하기도 했지요. 톰 라이트가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을 비롯한 여러 책과 강연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듯, 육체에서 해방된 영혼이 원래의 고향인 천국으로 돌아간다는 식의 이야기, 어쩌면 중세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기독교인이 자신의 구원을 이해해온 방식은 바울이 아닌 플루타르코스(Plutarch)라는 플라톤주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놀랍도록 닮아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겠습니다.

개신교의 (뜻밖의) 반전

이 지점에서 글 초반에 중요한 문제 제기로 우리를 멈춰 세웠던 월터스토프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색깔에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않고 소리에서 어떤 쾌감도 느끼는 것을 피하면서 감각의 기쁨을 단호히 피하려 결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플라톤주의자다.4) 칼뱅의 후예라 할 수 있는 개혁주의 철학자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개신교 전통 안에도 요한 바오로 2세 못지않게 인간의 창조적 예술 활동을 긍정하는 목소리가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두 권의 미학서 《행동하는 예술》과 《예술의 작품과 세계(Works and Worlds of Art)》를 야심 차게 저술했는데요. 물론 월터스토프의 미학적 입장이 예술 자체보다는 철학적 고찰에서 출발하며, 예술의 자율성(art for art’s sake) 개념을 비판하고 예술의 기능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현대미술사와 미술 이론에 반하는 다소 제한적인 관점에 머문다는 점은 조금 아쉽지만, 개신교 전통 안에서 본격적인 기독교 미학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활동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역설하는 또 다른 칼뱅의 후예가 있는데요. 복음주의 문화 전도사 앤디 크라우치는 《컬처 메이킹(Culture Making)》에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따라 계발자(cultivator)이자 창조자(creator)로 부름받았다고 강조합니다. 크라우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더 새롭고 의미 있는 것들을 만드는 문화 창조자의 역할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자 임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문화 창조자로서 인간의 정체성과 소명을 야생 상태의 자연을 돌보고 새롭게 경작하는 창조적 정원사의 역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술

그럼 마지막으로 창조신학 관점에서 바라본 예술의 가치와 예술가의 소명을 정리해볼까요. 기독교 이야기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일깨워주는 창조신학은, 보고 만지고 맛보고 느끼는 감각적인 물질세계의 선함을 끈질기게 긍정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예술을 긍정하는 중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합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신들 사이에 벌어진 경쟁과 싸움의 불행한 부산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고대 근동 지방의 다른 어떤 신들과도 다르게,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보시며 ‘좋다’고 말씀하시는 무한하고 놀라운 창조성의 근원으로 그려집니다. 더 나아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피조물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점진적으로 조성해가고 유지하는 선한 통치자로 그려집니다.

그렇기에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 인간 역시 이러한 창조자와 선한 통치자 역할을 부여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처럼 무에서의 창조(cratio ex nihilo)가 아니라 창조된 것에서의 창조(cratio ex creatis), 즉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롭고 더 온전한 형태로 다시 만드는 역할과 능력이 주어진 것이겠지요.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러한 문화 창조자 역할에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성실하게 돌봐야 하는 책임이 따라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정복’과 ‘다스림’의 명령은 힘과 우월성으로 자연 위에 군림하여 주인처럼 마음대로 부리라는 말이 아니라, 창조주이자 선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따라 창조세계를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사랑으로 돌보고 계발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 묵상으로 이어지는데요.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를 미완결 상태로 남겨두어 창조세계를 돌보고 완성하는 일에 인간이 참여하게 하는 것, 우리 인간을 쿠페라토르 데이(Cooperator Dei) 곧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사랑’(kenotic love)의 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원래 빌립보서에서 유래한 ‘케노시스’(kenosis)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 가운데 드러난 자기 낮춤, 자기 비움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인데요. 그렇지만 사실 기독교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는 창조 자체가 하나님의 케노시스를 보여준다고 말해왔습니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이 이미 완벽한 사랑의 관계 속에 거하시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필요가 아닌 온전히 사랑에 근거해 창조세계를 만드신 대가 없는(gratuitous) 창조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자 자기 비움이었다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을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로봇 같은 조수로 만드는 대신, 능동적 주체로 참여할 창조적 능력과 온전한 자유를 허락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자기 제한과 자기 비움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의 창조 활동과 예술 역시 하나님의 섬김과 자기 비움의 사랑을 비추어내야 마땅할 것입니다.

독일 예술가 볼프강 라이프는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작품을 통해 이런 섬김과 자기 비움의 사랑을 구현하는 예술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통찰은 제니퍼 크래프트의 《Placemaking and the Arts》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헤이즐넛 꽃가루(Pollen from Hazelnut)〉는 아주 특별한 설치 작업인데요. 이것은 그의 시골집 근처 들판에서 계절을 따라 수년에 걸쳐 꽃가루를 정성스럽게 모으는 과정에서 시작합니다. 라이프는 엄청난 인내와 고된 노동을 거쳐 모은 꽃가루를 유리병에 담아 보관하다가, 때가 되면 갤러리로 가져와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로 숟가락과 체만을 이용해 전시장 바닥에 거대한 사각형 모양으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뿌려놓습니다.

 유튜브 〈Art21〉의 ‘Wolfgang Laib in “Legacy” - Season 7 - “Art in the Twenty-First Century”’ 영상 갈무리

꽃가루를 모으는 일도, 전시장 바닥에 조심스럽게 뿌리는 일도 마치 수도승이 해나가는 수행처럼 자기 비움의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꽃가루 역시 자기 생명을 쏟아 놓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재료인데요. 이 꽃가루를 그토록 소중히 모으고 뿌리면서 자연의 신비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예술 작업은 다시 그 자연에 전혀 새로운 방식의 아름다움을 부여합니다. 꽃가루가 만드는 경계가 흐릿한 사각형은 여느 차가운 사각형과 다르게 따뜻하고 명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햇살이 깃든 헤이즐넛 꽃가루의 눈부신 노랑은 인공 물감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치유를 불러오는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섬김과 자기 비움이라는 지점에서 자연과 예술이 하나로 만나는 라이프의 작품은 관객들 역시 그 아름다움을 함께 경험하도록 초대하고, 그리하여 그들 역시 동일한 섬김과 자기 비움의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저는 이교도 ‘수도승’ 예술가 볼프강 라이프에게서 이마고 데이와 쿠페라토르 데이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창조적 정원사’를 봅니다.

■ 주

1)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행동하는 예술(Art in Action)》, 135쪽.
2) 위의 책, 158쪽.
3)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Artists)〉(1999)
4) 《행동하는 예술》, 158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이상 IVP)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