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 남은 믿음

[412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5-03-01     이한주

나와 이름이 같은 대학 선배가 시집을 냈다. 이 시집(이한주, 《몸이 기억하고 있다》, 삶창)에 실린 시 한 편을 딸에게 읽어주었다.

자주 쓰는 문장은
휴대폰 자판이 알아서 기억해준다

감사한 마음 전하고자
‘고’만 쳐도 ‘고맙습니다’
완성된 문장이 마중 나오지만

그 마음
너무 쉽게 증발되는 게 싫어

ㄱ ㅗ ㅁ ㅏ ㅂ ㅅ ㅡ ㅂ ㄴ ㅣ ㄷ ㅏ
전해지지 않아도
전하고 싶은 마음 담아
한 자 한 자 꾹꾹 누른다

- 〈고맙습니다〉 전문

이 시를 읽고 핸드폰 자동완성 기능을 해제했다. 같은 문장이라도 자동으로 완성된 문장과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은 문장은 다른 거라고, 보이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딸에게 시를 읽어주며 이런 얘기를 했더니 ‘글쎄’ 하는 표정이다. 딸은, 받은 사람에게는 똑같은 ‘고맙습니다’일 뿐이라며 그 문장이 자동완성인지, 붙여넣기인지, 한 글자씩 눌러쓴 건지 아무도 모를 거라 했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아빠는 누가 보낸 휴대폰 메시지가 자동완성인지, 한 글자씩 썼는지 구분할 수 있어?” 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고, 시를 읽어주며 훈훈하게 인생의 교훈을 전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똑같은 문자메시지라도 어떤 것에는 증발되지 않는 마음이 담겨서 읽는 사람의 마음에 도달할 거라는 나의 믿음은 딸의 합리성을 넘지 못했다. 나 역시 명절에 받은 메시지 중에 어떤 것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은 것이고, 어떤 것이 단체로 보낸 것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이 믿음이 옳다는 근거도 없다. 그래도 아직 자동완성 기능을 복구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믿음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한강 작가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한승원 작가가 팔십 인생을 돌아보는 소설을 냈다. 제목이 회고록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의 길》(문학동네)이다.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한 아기 박새에게 늙은 백양나무가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동화가 실려있는데, 백양나무는 아기 박새에게 몸이 자라는 만큼 사랑과 선행을 해야 한다 가르쳐주며 이렇게 말한다.

자기보다 더 몸이 약한 것과 가난하고 외로운 것들을 품어주고 돌보아주는 것, 그들을 위로해주고 그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사는 것이 사랑하기이고 선행하기인 거야.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은 다 그렇게 사랑과 선행을, 배고픈 것들이 밥을 먹어대는 것처럼 해야만 하는 거란다. (31쪽)

작가는 늙은 백양나무를 통해 평생 고민하며 찾았던 ‘사람의 길’이 사랑과 선행이라고 알려주는 듯한데, 이 말을 들은 아기 박새는 “우리는 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에요?” 질문한다. 백양나무는 “글쎄, 그것은 장차 네가 자라서 알아보도록 하고 나한테도 좀 가르쳐다오” 할 뿐 분명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늙은 백양나무와 아기 박새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것은 작가가 오래전 자기의 어린 딸에게 들려주었던 동화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기 박새 같던 어린 딸은 자라서 약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것들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된 것 아닐까? 백양나무와 아기 박새가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나도 답을 찾아본다. ‘왜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은 자기보다 약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것을 품어주고, 위로하고 그들과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이 없는 것은 아닌데 말하기가 쉽지 않다. 미움에는 많은 이유가 있고,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것도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된다. 사랑과 선행에는 꼭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사랑과 선행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믿음이 숨어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에 실려있는 〈안티고네〉를 읽었다. 안티고네는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살해와 근친상간의 비밀을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되어 방랑길에 올랐을 때 따라나섰던 딸이 안티고네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왕에서 물러나자 그의 두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왕좌를 놓고 다투다 둘 다 죽는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의 외삼촌이자 처남인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만 장례를 치러주고, 적국의 군대를 끌고 테베를 공격했던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매장을 금지해 새와 들개의 먹이가 되게 한다. 국가를 배신한 자는 죽은 후에도 예외 없이 처벌받는다는 원칙을 세우려는 크레온은 시신을 매장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예외 없이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고네는 왕이 금지하는데도 오빠의 시신을 가져와 묻어주려 한다. 파수병에게 발각되어 크레온 왕 앞에 끌려온 안티고네는 자신이 한 일이 정당한 이유를 말한다.

내게 그런 포고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지 않았으니까요. 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 받고 싶지 않았어요. (450행)

오빠의 시신을 묻어주려는 안티고네는 왕의 포고령보다 신의 법을 따른다. 신의 법은 변함없지만 문자로 적혀있지 않은 불문율(不文律), 보이지 않는 법이다. 신의 법은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만 영원하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왕의 법보다 강력하다. 신의 법은 믿음의 법이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죽은 사람이라도 그 몸을 새와 들개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는 게 신의 법이라 믿고, 이 믿음을 따라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대항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신의 법은 왕의 법보다 강하다.

 

나온 지 반세기 만에 고전이 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열린책들)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가 배경이다. 존경받는 변호사 애티거스가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흑인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자 이웃들은 그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조롱한다. 애티커스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흑인을 변호하는 이유를 자신의 어린 딸 스카웃에게 말해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군을 대표해서 주 의회에 나갈 수 없고, 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148쪽)

애티커스가 말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앞의 두 개는 무효가 된다. 흑인을 변호하는 일 때문에 오히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사회적 지위도 위협받는다. 아이들에게 위선적인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는 바람만이 그가 양심을 지키는 이유로 남는다. 하지만 재판이 가까워질수록 아이들까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아들 젬은 아버지를 쓰레기 같다 비난하는 노인의 정원을 망가뜨리는 사나운 짓을 한다. 자신의 신념이 자녀들에게도 해가 될 수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애티커스는 양심에 대해 한 가지 고백을 한다.

이 사건, 톰 로빈슨 사건은 말이다, 아주 중요한 한 인간의 양심과 관계있는 문제야…. 스카웃,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어. …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야. (200쪽)

애티커스가 양심을 지키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고 억울한 약자를 도우라 명령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양심은 다수결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분명하고 단단하다. 법률가로서 애티커스는 사법제도가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드러내주는 위대한 제도라 믿는다. 이 믿음으로 그는 배심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해주길 부탁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톰 로빈슨의 무죄를 호소한다. 그는 훌륭하게 무죄를 증명했지만 배심원들은 편견을 넘지 못하고 톰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실망하는 애티커스의 아이들에게, 지혜로운 모디 아주머니는 그들의 아버지가 흑인이 강간 혐의자인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든 유일한 변호사였고, 그 일은 사람들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했다며 아빠의 뒤를 이어 그 일을 하라고 격려해준다.

 

믿음의 전쟁터가 된 것 같은 요즘이다. 믿음은 허공의 집이면서 땅의 집을 세우는 반석 같아서, 근거가 없어도 현실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결집한다.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이 무죄라 믿는 사람 중에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아는 개신교인이 많다. 탄핵이 인용되면 판결에 불복하는 게 양심이며 신앙이라 소리 높이는 이들에게는 법보다 믿음이 우선이다. 진실을 부정하고 음모를 꾸미는 데 믿음이 작동하면 어떤 말로도 설득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하며 믿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연결하듯 보이지 않는 마음들을 연결하는 믿음이 아니라면, 사랑과 선행을 하는 이유가 되고 죽은 사람과 억울한 사람 편에 서는 양심을 지켜주는 믿음이 아니라면, 잘못된 발걸음과 이상한 길을 통해서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믿음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쓸데없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의혹과 의심이 걷히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사랑의 이유와 소망의 근거가 되는 믿음만 남아 그 반석 위에 새로운 집이 세워지길. 내게 있는 마지막 믿음이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