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이혼은 없습니다
[412호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
‘요즘은 이혼이 흠도 아니잖아?’ 이혼한 사람을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이 이혼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질문 3위에 올랐다고 한다.1) 한 유명 연예인은 설문 결과를 듣고 무심결에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끼리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지 조금은 흠이다.” 이 짧은 말속에 이혼 후 겪은 많은 고통이 함축되어있다. ‘흠’은 상한 자국이라는 뜻이다. 이혼 후 남들의 시선이나 자책으로 생긴 생채기가 흠이 되기도 했겠다. 겉으론 멀끔해 보여도 마음과 인생에는 지우지 못할 흠이 남는 것이다. 그만큼 속앓이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홈스와 라헤 스트레스 척도2)에 따르면 징역형을 받아 수감 생활하거나 가까운 가족이 사망했을 때의 스트레스가 63점인데, 이혼했을 때의 스트레스는 73점이다. 이혼이 흠도 아니라는 말은, 그들의 고초를 부정해버리는 말이 될 수 있다. 이혼한 사람을 대할 땐 마음속으로 이 말을 되뇌었으면 좋겠다. ‘쉬운 이혼은 없다.’
이혼을 막으려는 의도가 지나친 사람들은 이 당연한 명제를 무시하기 쉽다. 교회에서 결혼 혹은 부부 생활에 대한 강의나 설교가 진행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통계가 있다. 이혼 사유를 조사한 통계인데, 대체로 1위가 ‘성격 차이’인 자료3)를 인용한다. 이때의 결론은 하나같이 똑같다. ‘고작’ 성격 차이를 이유로 쉽게 이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이들은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철없는 사람들이 된다. 마음과 인생에 남겨진 흠은 철부지가 치러야 할 대가로 평가절하된다. 이런 풍토에서라면, 이혼의 아픔보다는 사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사람이 철부지는 아닐까 의심하고 판단하게 된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어서 소개한다.
“이혼한 K씨(여·40세)는 이혼 직후 새 교회를 찾아 그동안 소홀했던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성경공부와 각종 프로그램에도 열심히 참여해 집사 직분까지 받았다. 초등부 교사와 여전도회 임원 봉사까지 맡게 된 K씨는 그러나 이혼한 사실을 주위에 알리지 않았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고 의지하던 권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은 후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K씨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기가 힘들어졌다. 교인들이 이유 없이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목회자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초등부 교사직을 그만 쉬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기도 했다. 결국 마음에 상처를 입은 K씨는 또다시 교회를 옮길 결심을 하게 됐다.”4)
교회의 관점은 어디서 왔을까
성경을 읽다 보면 교회의 관점과 성경의 관점이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다.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일단 교회는 결혼을 강조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말을 한다. 바울에 따르면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고전 7:38)이다. 바울은 결혼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신을 권장했다. 그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초점이 아주 명확하다. 하지만 교회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혹자는 이 구절을 당시의 과부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재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였다고 보는데, 그건 정확한 독법이 아니다. 바울은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고전 7:25)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재혼을 고려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결혼을 처음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혹자는 바울이 당시 임박한 종말론을 가지고 있어서 극단적 교훈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라면 우리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막 13:33)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당대에만 적용되는 교훈으로 봐야 한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고 하시는 말씀 또한 임박한 종말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는 게 더 잘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외면해버린다. 왜 그럴까?
사실 성경은 독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바울은 독신으로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권장했다. 기독교 역사를 봐도 수많은 사람이 주를 위해 독신의 삶을 택했다. 그런 독신자들은 존경받았다.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교회의 관점은 어디서 왔을까? 유교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맹자는 독신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원녀(怨女)라고 부른다. 원망으로 가득 찬 여인이라는 뜻이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남성을 광부(曠夫)라고 부른다. 공허한 남자라는 뜻이다. 맹자가 봤을 때 성군이 다스리는 사회에는 독신 남녀가 있을 수 없다. “[태왕이 다스리던] 이때에는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었고 밖으로는 홀아비가 없었”5)다고 말한다. 결혼에 대한 교회의 관점은 유교적 관점, 그중에서도 맹자와 비슷해 보인다.
이혼 금지가 아닌 유기 금지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심각한 가정 폭력이나 불륜 등의 문제가 있어도 이혼을 말리는 교회가 있다. 바울은 이혼을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배우자 간에 종교 갈등이 있으면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 7:15)고 한다.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갈등이 있다면, 입증할 필요도 없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이혼하고 싶어 하면 해주라는 말이다. 이런 일에 구애받지 말라고까지 언급할 정도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합의이혼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합의이혼과 그렇지 않은 이혼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지, 모든 이혼을 다 죄로 규정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막 10:9).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과 함께 봐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아내를 버리는 선택이 옳은지(막 10:2) 여쭈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버린다’이다. 제자들은 합의이혼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일방의 결정으로 결혼을 끝내는 행위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걸 이혼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합의이혼 개념과 다르다. 우리가 아는 이혼은 한쪽의 의사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아봤다. 민법 제840조(재판상 이혼)는 일방적으로 배우자를 쫓아내거나 별거를 강제하는 경우를 ‘악의적 유기’라고 표현한다. 예수님 말씀은 이혼이 아닌 악의적 유기에 대한 내용이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은 악의적 유기를 금한다는 뜻이다. 모든 이혼이 죄라는 뜻이 아니다. 악의적 유기 금지는 고린도전서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바울은 말한다. “어떤 여자에게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전 7:13) 여기서도 예수님 말씀과 똑같이 ‘버린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바울 역시 악의적 유기를 금한다. 하지만 상대방도 이혼을 원할 때는 다르다. 새번역은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려고 하면, 헤어져도 됩니다.”(7:15) 서로 합의가 될 때는 이혼이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혼에 대한 교회의 관점은 정말 성경적인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이 해석에 불편함을 느낄 분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혼을 장려하느냐고 우려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어왔다고 반드시 성경적 관점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바울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고전 7:38)이라 했고,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 7:15)고 했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읽었을 때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면, 잠깐 멈춰서서 진지하게 대면해야 한다. 우리의 관점이 정말 성경적인가?
개역개정에서 ‘이혼’을 검색해보면 모두 13개 구절이 나온다. 13개 중 4개는 ‘이혼당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레 21:7·14, 22:13, 민 30:9), 4개는 ‘내보내다/내쫓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신 24:1·3, 사 50:1, 렘 3:8), 1개 구절은 ‘학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말 2:16). 나머지 4개 중 3개가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는 예수님 말씀이다(마 5:31, 19:7, 막 10:4). 이혼에 관한 13개 구절 중에 12개 구절이 악의적 유기를 의미한다. 이런 내용이 안 나오는 구절은 단 한 구절로(겔 44:22), 제사장에 관한 규정이다. 일반인과 결혼했던 여인(사별·이혼 포함)과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맥락에서 언급된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혼은 합의이혼이 아니다. 악의적 유기다. 하나님은 그렇게 유기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조강지처가 싫어져서 내쫓는 것은 제 옷을 찢는 것과 같다. 나는 그러한 자들을 미워한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말 2:16, 공동번역)
하나님은 배우자를 악의적으로 유기하는 행위를 미워하실 뿐, 이혼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다섯 번 이혼한 사마리아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해보자. 아무런 정죄도 하지 않으셨다. 간음한 여인을 만났을 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셨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죄라는 단어를 입 밖에도 꺼내지 않으셨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하나님이 이혼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다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 어려울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성경의 증거도, 더 많은 신학자의 증언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지워지지 않는 흠으로 남은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을 대변할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흠을 지워주는 교회
사실 나에게는 이혼 소송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친구가 있다. 친구와 매일 몇 시간씩 통화하면서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은 두 가지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와 ‘이혼이 하나님 뜻일 수 있다’이다. 소송은 진행 중이다.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이 친구의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가 될지도 모른다. ‘성격 차이’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다. 폭행이나 불륜 등 가시적 참상을 제외한 모든 고통의 이야기가 ‘성격 차이’로 규정된다. 이 친구만 이럴까? 이혼에 이르게 된 많은 사람에게는 밤새워 말해도 모자를 아픔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쉬운 이혼은 없다.
이 친구와 함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혼에 따른 고통도 힘든데 신앙적 정죄 의식까지 더해지면, 그 고통은 너무나 커진다는 것이다. 친구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자꾸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이혼 관념이 바뀌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했다. 그래도 계속 목소리를 내려 한다. 물론 걱정도 된다. 교회와 교인들을 잘 아는 만큼, 반응이 어떨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고 흠을 만드는 교회를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이혼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은 덜어줄 수 없을지라도, 교회 때문에 생기는 고통은 덜어주고 싶다.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교회가 변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이혼이 아니라 악의적 유기라고 선포하는 교회를 꿈꿔본다. 이혼 때문에 인생과 마음에 생긴 흠을 깨끗하게 지워주는 교회를 꿈꿔본다. 그런 교회라면 이혼한 사람들의 아픔을 진정 위로해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1) SBS TV, 〈신발 벗고 돌싱포맨〉, 2회(2021.7.20.)
2) Arlin Cuncic, ‘What Is the Holmes and Rahe Stress Scale?’, 〈Verywell Mind〉(2022.11.17.)
3)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대 초부터 이혼 사유 1위는 ‘성격 차이’였으며, 꾸준히 45%를 웃돌고 있다.
4) 표현모, “이혼했지만 맘 편히 교회 다니고 싶어”, 〈한국기독공보〉(2010.7.14.)
5) 맹자, 김원중 옮김, 《맹자》(휴머니스트, 2021), 79쪽.
정태형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과 교회를 이루어가는 여린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의 사각지대를 보려고 노력한다. 《부모가 먼저 행복한 회복탄력성 수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