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니까 마음이 더 어려운 거예요”

[412호 공간을 찾아서: 전세사기 피해자 인터뷰] 정태운(1992) 님, 대구

2025-03-01     정태운

“제 이야기 들으면 좀 재밌을 건데.” 태운1) 씨가 말했다. 타고난 듯한 그 유머러스함에 긴장이 좀 풀렸다. 환자복 위에 허리보호대까지 착용한 상태에도 그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대구2)에서 살고 있는 빌라의 집단 전세사기 피해가 방송되고, 직장에서 계약 종료를 맞고, 피해자대책위 활동과 생업을 병행하려 얼마간 다시 배달 일을 하다가 불법 유턴을 하던 차에 교통사고를 당한 상황이었다. 흉추 골절 등으로 전치 12주 부상을 입었고, 입원 때문에 긴급 생활비 지원이 끊겼다.3)

배달은 태운 씨에게 일의 시작점이자 가장 오래된 경력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유 배달로 생계를 시작하며 누구보다 빨리 오토바이를 몰고 만진 사람. 알코올의존증인 아버지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집을 나갔기 때문에 그만큼 빨리 일을 시작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3개월 15만 원짜리 사글세 집이 그의 첫 집이다. 바퀴벌레랑 쥐와 같이 살아도 그게 나았던 건 친한 친구가 같이 살다시피 했고, 그 친구의 부모님이 좋은 어른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엄마가 있는 경주로 옮겼다. 혼자 사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힌 태운 씨의 선택으로 엄마 집 근처 월세 7만 원짜리 집을 구했다. 이번엔 벌레보다 추위가 매서운 집이었지만 엄마 밥만은 따뜻했다. 벌써 배달 경력 3년 차가 된 그에게 가게 사장님이 일을 줬고, 그 가게를 넘겨받아 원했던 대로 직접 운영도 했다.

미성년 때부터 해온 다양한 일로 태운 씨는 성취와 실패의 경험을 촘촘히 쌓았다. 배달과 나이트클럽 아르바이트는 물론, 아웃소싱 전문 업체와 공장, 외식업까지. 10대 때부터 꾸준히 업을 다져 스스로를 키우며 경제 개념을 체득했다. ‘불법’으로 규정되는 상황에서도 주변 어른들은 대체로 태운 씨의 노력을 알아봐주고, 그 노력은 빛을 발했다. 친구의 부모님, 가게 사장님, 학교 선생님, 나이트클럽 손님들, 회사 동료, 공장노동자들까지. 그 기간 경북의 도시들을 넘나들었다. 김해→경주→구미→경주→대구→포항→대구.

태운 씨도 현수 씨(본지 411호 참고)처럼 신탁 사기를 당했다. 다만 태운 씨는 그 위험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KAMCO)에 의해서 불거진 것이나 다름없다. 임대인의 체납 세금을 추심하는 캠코 담당자가 태운 씨 거주 빌라에 걸린 부동산담보신탁계약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주택 일부 세대를 넘기면서 일이 터졌다. 그 일로 신탁계약상 건물 소유 권리가 있는 금융기관이 임대인이 불법 임대차계약을 맺은 사실을 알았고, 공매는 취소됐다. 금융기관은 법적으로 불법점유자인 17가구 임차인들에게 퇴거 명령을 하고 명도 소송을 걸었다. 그의 오래된 내 집 마련 소망은 좌절됐다.

“탈당 신고서가 작성되기 전에 저희 한 번만 만나주세요. 부탁드립니다.” 2024년 11월 28일 국민의당 당사 앞에서 외친 이 말을 끝으로 태운 씨는 국민의힘을 탈당했다. 그를 비롯한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 대표 8명이 그날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 면담을 청했으나, 호응하는 당 지도부는 없었다.

“이래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반불법으로 살았네요.”

고등학교 때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했어요. 저녁부터 가서 늦게 마치니까 학교 다니면서도 할 수 있거든요. 출석 못 하는 날 있어도 선생님이 저보고 ‘열심히 사는 놈’이라고 별말씀 안 하셨고요. 손님들이 팁을 많이 주셨어요. 주로 40-50대 공장이나 건설직 손님이었는데, 노래 한 곡 하거나 같이 맥주 한잔하면 만 원짜리도 막 주시고. 벌이가 괜찮았어요. 월급이 60만 원인데 팁만 250만 원까지도 받았으니까. 손님들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었나 봐요. 저도 어른들이랑 이야기하는 게 재밌었어요. 단속 나오면 바로 도망가려고 유니폼 대신 아무 와이셔츠에 대충 조끼 사 입고 이름표도 안 달고 일했어요. 원래 미성년자는 일 못 하는 곳이니까. 이래 얘기하다 보니까 좀 이상하네. 내가 반불법으로 살았네. 맞죠?(웃음)

그래도 수시로 대학에 들어갔어요. 포항대학 자동차과에 장학금까지 받고요. 공고에서 내신 3등급 정도였는데 결석이 좀 있어도, 제 생활기록부 완전 멋졌거든요. 무슨 대통령 될 사람처럼.(웃음) 솔직히 기계 만지고 기름 묻히고 하는 거 배우는 데 공부 잘하는 애들 안 오니까 그런 것도 있고. 여튼 대학 갔는데 바로 실망했어요. 같이 공부할 애들이 너무 양아치 같더라고요. 남자애들만 90명 앉아있는데 다들 덩치는 산만 하고 여기저기 문신만 엄청나게 있고, 분위기 어수선하고. 나는 진짜 차 좋아하고 뭔가 뜯고 붙이는 게 좋아서 고3 생일 지나자마자 운전면허 딱 따고 제대로 배워보려고 학교 갔거든요? 3일 만에 자퇴했어요.

바로 군대 갔어요. 내가 또 군대 스타일이거든. 특전사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바로 해병대 지원했어요. 경쟁률이 7대 1이라 이것도 안 될 줄 알았는데 와, 한 방에 딱 되더라고요. 연평도 포격 사건(2010년 11월 23일) 다음 해라 인기가 높았거든요. 해병대가 대응을 잘해서 칭찬도 받고 그랬을 때라. 제가 1144기인데 현빈도 1137기로 가고, 오종혁도 1141기로 가고 그랬어요. 1년 10개월 동안 거기서도 전차병을 했어요. 탱크 탱크, 50톤짜리. 운전도 하지만 정비도 다 맡아서 하는 거예요. 50톤짜리 탱크는 엔진이 일반 승용차 한 대 크기예요. 부품 꼽힐 곳이 확실하게 딱 정해져있죠. 상관이 저보고 부사관 지원하라고 했어요. 직업군인 하라고. 군대 생활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스물두 살에 홀로서기, 벌레와 동거하지 않을 자유를 사고

구미로 갔어요, 홀로서기를 하려고. 경주에서는 그래도 엄마 옆에 살았잖아요. 구미는 삼성도 LG도 억수로 크게 있고 공장이 엄청 많으니까 공장에서 일해서 돈을 모아 가지고 다시 장사를 해보자, 결심했죠. 자신감이 있었어요.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22살이니까 아직도 어리잖아요. 어릴 때부터 일도 했겠다, 귀신 잡는 해병대까지 나왔겠다. ‘무서울 게 뭐 있노, 나는 다 잘할 수 있다.’

수중에 딱 350만 원 있었어요. 300에 35만 원짜리 월세 원룸을 구해서 새 이불 하나 딱 사서 들어갔죠. 일 구하기 전까지 밥 먹을 돈 필요하니까. 20-22만 원짜리 더 싼 집도 구하려면 많았는데 진짜 바퀴벌레 엄청 나올 거 같았거든요. 부엌 가구 문 열면 막 새까맣게 모여 있다가 튀어나올 거 같은 그런 집들 있잖아요.

돈 더 내더라도 깨끗한 집으로 가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지하 방에서 바퀴벌레랑 쥐랑 같이 산 거는 그보다 더 지옥 같은 일이 일어나는 집을 나왔으니 어쩔 수 없던 거고, 엄마 옆에 살면서 집이 춥고 덥고 해도 엄마한테 따뜻한 밥 얻어먹고 조금 나아지고, 그 다음엔 군대까지 나오고 나니까 이제는 집을 내 능력으로 마련할 수 있더라고요. 더 이상 불법적이지도 않고. 이게 세상이구나, 자본주의사회구나 정확하게 알았어요. 사글세부터 해서 월세 살고 좀 더 비싼 월세 살고, 돈을 더 올릴수록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걸 체감했잖아요.

35만 원짜리 집은 빨간 벽돌 다가구주택이긴 해도 준신축에 주방도 분리된 원룸이었어요. 진짜 깨끗하게 유지하고 살았어요. 군대 이후로 약간 결벽증처럼 습관이 생겨서 생활공간이 깔끔하고 오와 열을 딱 맞추어야 편해서. 더 열심히 살면 더 좋은 집 가겠구나, 나도 아파트 들어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집은 꼭 가지고 싶었고, 우리 집에서 누가 나 도와줄 것도 아니고. 어엿한 집 하나 있어야 결혼도 할 것이고.

취업하러 아웃소싱 회사로 갔죠. 거기서 공장에 노동력을 파견하잖아요. 근데 사무실에서 이력서 쓰는데 대리라는 사람이 멋있더라고요. 뭔가 건달 같은데 양복 입고 일하고 있고. 분위기가 좀 ‘누아르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한 번도 양복을 안 입어봤거든요. 마침 그 사람이 “니 해병대 나왔나?” 말 걸길래, 나도 물어봤어요. 그렇게 양복 입고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랬더니 대뜸 “니 싸움 잘하나?” 묻는 거예요. 바로 사무실 테이블 막 그냥 들어버리면서 싸우는 시늉을 하고 그랬어요. 이게 거짓말 같아도 100% 진실입니다.(웃음) 며칠 후에 대표 면접이라고 보는데 좀 빡셌어요. 흰머리에 장발인데 머리를 묶었고, 덩치도 엄청나서 키도 저보다 크고 몸무게가 120킬로그램은 나갈 거 같았어요. 그 자리에서 팔씨름을 하자면서 자기를 이기면 출근하래요. 이겼죠. 그렇게 공장이 아니라 아웃소싱 업체에서 일하게 된 거예요.

첫 월급 130만 원으로 정장 한 벌 사고, 월세 내고 생활하니까 돈이 사라지더라고요. 130만 원이 그렇게 작은 돈인 줄 그때 알았어요.

첫 사업의 추억과 구미의 쇠락, 냉정한 일의 세계

이쪽이 평탄한 업계는 아니거든요. 응급실에도 불려가고 경찰서도 불려가고 오만 일 많았는데, 그래도 제가 일하면서 회사가 많이 컸어요. 아주 작은 회사는 아닌데 정말로 1년 6개월 만에 인력이 4배가 되고 그만큼 매출도 늘었거든요. 구미 아웃소싱 시장이 그때 레드오션이라 한 공장에만 아웃소싱 업체가 11-12개씩 껴 있었어요. 그 많은 업체가 소속 근로자를 방치하고 나가면 채우고 또 나가면 또 채우고,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고요. 근로자가 계속 왔다갔다 하니 공장에서도 아웃소싱 업체를 더 많이 쓸 수밖에 없는 거죠. 얼마나 신경 써서 인력을 관리하느냐에 차이를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공장 일이 정말 힘들거든요. 근로자 상황 하나도 모르고 방치하면 각자도생 돼요. 이 사람이 그냥 나가버려도 이유를 잘 모르게 되고요. 그래서 우리 회사 소속 근로자들이랑 친해지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공장에서 우리 근로자한테 잘못하는 부분 있으면 할 말도 하고요. 계약 관계만 보면 내가 을이지만, 공장에 일할 근로자 안 보내주면 그 공장도 어려워지는 거니까요. 근로자들이랑 유대 관계를 계속 넓히다 보니까 우리 업체가 소문이 좋게 났어요.

대리 형이랑 같이 회사를 독립했어요. 거래처 14개 중 11개가 시작부터 우리랑 계약해 줬거든요. 그래도 개업일 전에 고생 좀 했죠. 모자란 회계 지식을 둘이서 합숙으로 10일 밤새우면서 독학하느라. 3개월 만에, 전부터 관리하던 인력이 거의 옮겨 왔어요. 뺏으려던 건 아닌데, 아무래도 저랑 소통하던 근로자들이다 보니까. 두 사람 급여를 훨씬 많이 가져가고도 계획대로 회사 잉여금을 남겼어요. 전에 받던 월급 액수에 좀 배신감이 들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버는 족족 많이 써서 많이 모으진 못했어요. 나만 열심히 하면 영원히 잘되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니까 상황이 바뀌더라고요. LG디스플레이가 상당수 공장들을 경기도 쪽으로 이전한다고 하고, 삼성 쪽도 일부만 남기고 구미에서 빠지고. 우리가 인력을 주로 공급했던 2차, 3차 협력 업체들도 대기업이 따라서 같이 떠날 수밖에 없고. 그런 변수까지 다 고려하는 게 사업인 줄 그때 알았어요. 마지막엔 우리 소속이었던 근로자들 일부는 공장에 부탁해서 정규직으로 붙여 보내고, 나는 실직자가 됐어요. 나한테 구미 시장이 그렇게 끝난 거예요.

뭘 하고 사나 고민을 하다가 경주로 돌아가서 배달 사업체를 차렸어요. 사업 접고 배달기사로 일했거든요. 그러면서 업체 돌아가는 것도 배우고. 이것도 시작은 괜찮았는데 3-4개월 되니까 음식점 사장님들이 배달비를 15% 이상 깎아달라고 했어요. 가게 사장님들도 직접 배달원 쓰는 것보다 대행 쓰는 비용이 더 저렴한데, 이제는 그 비용이 아까워진 거예요.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거절은 못 하겠고, 깎아주고 완전 적자 났어요. 재정난으로 두 손 들고 또 사업을 접었고요.

벌써 스물여섯이 됐는데 직업이 뚜렷한 것도 아니고 실패자 같더라고요. 매일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연명하고 점점 자괴감에 빠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대구에서 아웃소싱 사업하는 분이 일을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조건도 괜찮고, 두말할 것 없이 대구로 갔죠. 일하면서 다시 살아났고요. 성과도 내고 안정적으로 급여도 받으면서 자존감도 회복됐거든요. 그때부턴 허튼짓 안 하고 급여도 딱딱 모았어요.

황금동 오피스텔에서 맛본 소소한 성취, 드디어 ‘아파트’로…

대구에서는 오피스텔에 살아봤어요. 수성구 황금동이라고 대구에서 제일 비싼 동네였어요. 500에 55였나? 13층이었는데 진짜 좋더라고요. 층이 높으니까 채광도 좋고 창밖으로 다 보이고.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창밖을 볼 때가 제일 좋아서 아침 일찍 일어났어요. 그 시간에 사람들이 막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 구경하면서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경제적 자유를 이루면 이런 창밖 풍경을 내가 아파트에서 살면서 느낄 수 있겠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옆에 있는 제일 비싼 아파트 보면서 일하고 공부하고 돈 모으고 그랬어요. 열심히 하면 그런 집에서 이 아침 풍경을 다시 보는 날도 오겠지 싶어서.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경영 책까지 두루두루 봤어요. 대구에 코로나 사태 심각해지고 그랬을 땐 집에서 1년간 책을 100권은 봤을 거예요. 그때 돈이 시중에 풀려서 주식시장 사상 최대치 찍고 난리였잖아요. 저도 버는 돈으로 예금도 종류별로 넣고, 주식이랑 국채 투자 실전 연습도 했어요. 그래서 딱 3억 원을 모았고, 청약도 넣기 시작했어요. 집값까지 막 오르고 있었거든요. 불안했어요. 지금 안 사면 못 살 거 같은데, 나는 옛날부터 집이 갖고 싶었고. 청약 경쟁률이 보통 150대 1, 못해도 100대 1이었어요. 그 경쟁률을 뚫고 운 좋게 당첨됐죠. 우리 집 경쟁률이 170대 1인가 그랬어요.

신혼집이었어요. 오래 만난 여자친구랑 연말엔 결혼을 계획했거든요. 서른 살에 정확히 직접 모은 돈으로 3억 있으니까, 결혼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 정도면 신랑감으로 괜찮잖아요.(웃음) 청약 당첨 소식 듣자마자 바로 가서 계약금이랑 발코니 확장, 옵션 비용까지 다 지불했어요. 나머지 반은 대출 신청하고 입주까지 잔금 어떻게 치를지 계획도 짜고. 아파트 입주 전까지 살 집을 전세로 구하기로 하고. 은행 예금 이자가 1%도 안 됐거든요. 월세도 아낄 겸 전셋집을 보러 다녔죠. 사기 같은 건 꿈에도 모르고. 그때 집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우리가 집 보는 와중에 다른 부동산에서 동시에 그 집을 보러 들어올 정도로 전세 매물이 귀했거든요. 그러니까 부동산들도 일단 맘에 들면 계약금부터 넣으라고 하고. 한 달 넘게 집을 보러 다녔는데 계속 그랬어요. 이렇게는 집을 못 구하겠다 싶어서 적당한 곳 나오면 바로 계약해야겠구나 했죠.

지금 집을 결국 집주인이랑 직거래했어요. 빌라인데 집주인이 건물주였거든요. 애 키우는 집인데도 예쁘게 꾸며 놨더라고요. 신축 아파트 부럽지 않을 정도로 좋아서 또 놓칠까 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로 계약하겠다고 집주인한테 말했어요. 입주 청소까지 해놓는다길래 너무 고마웠죠. 그랬더니 중개 수수료가 아깝지 않으냐면서 직거래하자고 하더라고요. 그깟 중개료 40-50만 원이 뭐라고 나도 아까운 마음이 생기고. 그래서 직접 계약하러 집주인 사무소로 갔어요. 사무실이 진짜 삐까번쩍하더라고요. 벽에 상장도 엄청 붙었고 경리도 두 명에, 컴퓨터도 커브드 모니터로 쫙 쓰고, 주식 방송까지 틀어져 있고. 그 자체로 내가 꿈꾸던 삶이었어요. 건물주에, 자기 회사 이름까지 빌라에 넣어서 딱 지어놓고. 와, 나도 저래 살아야 하는데, 싶었죠.

등기부등본 갑구에 신탁등기가 있었어요. 근저당권은 알아도 신탁은 처음 보는 소유권이라 무슨 의미인지 읽을 수가 없었고요. 집주인한테 물어봤더니 전문 용어라 어렵다면서 쉽게 그냥 대신 관리해주는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주택 관리를 하려면 그 권한이 필요하니까 소유권을 잠시 빌리는 거라면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해요. 대출은 없다고 하고. 처남이 관리소장으로 근무한다고 연락처까지 미리 주고. 내가 신탁은 잘 모르니까 집주인 쪽도 대충 속인 거예요. 그렇게 보증금 1억에 월세 35만 원 반전세로 계약했어요. 바로 전입신고 하고 확정일자도 받았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게 잘못이었어요. 나름 이유는 있었죠. 1년은 집에 살지도 못했거든요. 계약하고 1년치 월세도 아예 선불로 내놓고 갑자기 포항으로 장사하러 가는 바람에.  2022년 말에 다시 대구로 돌아와 전셋집에 들어가면서 전입신고하고 확정일자도 받은 거예요. 세입자 입장에서 그 의미나 중요성을 몰랐던 거죠. 부동산 투자 공부한다고 읽은 책들은 그런 내용 없었거든요. 전세금 높은 곳에 매매가가 낮으면 갭 투자가 가능하다, 단돈 몇천만 있어도 집 살 수 있다, 이런 내용만 있지. 세입자인데 정작 세입자 권리는 몰랐어요. 부동산 끼면 볼 수 있는 1억 원짜리 공제증서가 뭔지도 몰랐어요. 우리 빌라에서 부동산 통한 집들도 같이 사기당하긴 했지만. 중개사들도 신탁 건물 계약에 대해서 잘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신탁이라는 거는 그냥 시험 볼 때 달달 외우고 시험만 쳤지, 실제로 뭔지 잘 몰랐다고.

부동산담보신탁계약?

드디어 자동차 헤드라이트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2023년 2월에. 계약직이긴 해도 현대자동차 1차 협력 업체라 대구에서는 큰 기업이었고요. 이제부터는 착실하게 고정 수입을 만들 생각을 했어요. 새 아파트 입주를 2년 정도 앞두고 들어갈 돈이 많잖아요. 입주하고도 계속 대출 갚아야 하고, 결혼식 생각도 있고.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전세사기 당한 사실을 알았어요.

일하다가 한국자산관리공사4) 전화를 받았어요. 캠코요. 3월 말 무렵인가? 채권 추심 담당자인데, 집주인이 종합부동산세를 몇억을 밀려서 우리 집을 공매로 넘겨야 한다는 거예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했죠. 그 담당자가 집까지 와서 설명을 해주는데 어쨌든 절차가 시작되어도 우리는 별문제가 없을 거라고 안심을 시켰어요. 보증금도 거의 다 받아갈 수 있을 거라고. 우리 집 감정평가가 2억 6천만 원 나왔는데 전세보증금은 그 절반도 안 되니까 다는 몰라도 거의 받을 수 있대요. 이 빌라에서 전세 세입자 17세대가 다 선순위인 데다가 근저당권자도 없고 깨끗하다면서 이 중에 빨리 이사 나갈 계획이 있는 세입자 주택 몇 개만 공매로 넘긴다고 했어요. 압류 금액이 그 정도라고. 설명 들으니까 별일 아닌 거 같긴 하면서도 계약 때 봤던 ‘신탁’에 찝찝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온라인으로 뒤지면서 알아봤더니 캠코 직원 말대로 별일 아닌 게 아니고 큰일이겠는 거예요. 인터넷에는 신탁 부동산은 신탁계약상 집주인 맘대로 세입자를 들일 수 없다고들 하는데, 그럼 내가 불법점유자가 되게 생긴 거거든. 분명 캠코 담당자는 17세대 전부 별문제 없을 거라고 했고, 어리둥절했어요. 공공기관 채권 회수 전문가들이 모르고 한 소리는 아니겠거니 하면서도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집주인 쪽에 다시 확인을 했어요. 진짜로 대출이 전혀 없냐고. 그랬더니 그땐 가구당 1억 얼마씩은 대출이 있다고 또 말을 하는 거라. 미치겠는 거예요. 아무튼 급하니까 공매 넘겨 버리기 전에 다시 내가 캠코 담당자한테 메시지를 보냈어요. 신탁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경우엔 집주인이 담보대출을 실행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한 번 더 확인해달라고. 다음 날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는데 진짜 대출이 없다면서, 정말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집주인은 분명 있다고 했고, 캠코는 아무리 찾아봐도 대출이 없다고 하고.

‘한국’이라는 이름 공식적으로 붙기가 쉽지 않잖아요. 한국을 대표하는 한국자산관리공사 말인데, 공매 시스템 자체를 관리하는 기관인데 설마 신탁에 대해서 모르진 않겠지 했어요. 그런데 몰랐던 거였어요. 알아보는 방법조차 모르니까 내가 한 번 더 확인해보라고 부탁했을 때도 없다고만 했을 거고요. 아마 등기부만 봤나 봐요. 신탁계약 내용이 들어있는 신탁원부는 등기부에 안 나오거든요. 왜 굳이 등기부등본을 구에 표시 안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는데, 신탁원부는 온라인 발급도 안 되고 등기소나 법원에 직접 가야 받을 수 있어요. 캠코 쪽은 신탁계약으로 집주인이 대출한 금액이 얼만지, 누가 우선수익자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일부 집을 1차 공매 진행시켰어요, 4월에.

또 일하다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이번엔 대구칠곡신협이라면서 대뜸 “블루하임 301호 사시죠?” 묻더니, 누구랑 전세 계약했냐고 하더라고요. 집주인 법인 이름을 댔더니 그 집이 대구칠곡신협 거라고 하는 거예요. 캠코가 공매를 진행시키니까 일이 터진 게, 부동산담보신탁 계약 내용에 대구칠곡신협이 신탁원본의 우선수익자로 되어 있거든요?5) 신탁재산을 처분하면 국세보다도 우선수익자 채권이 1순위라 캠코가 우리 빌라에서 주택 몇 개를 공매 넘겼을 때, 대구칠곡신협 쪽으로 배당 관련한 안내가 갔을 거예요. 신협에서는 몰랐던 임차 상황을 보고, 저한테 전화한 거고요. 신협 쪽에서는 캠코 담당자가 우리 확인도 안 받고 넣은 공매라 중지됐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쫓겨나기 싫으면 집을 사라고 하는데, 집주인한테 넣은 보증금은 자기네랑 상관이 없으니까 그 돈은 없다 치라는 거야…. 머리가 띵했죠. ’분명 전입신고도 하고 확정일자도 받았는데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상황 이렇게까지 됐는데 캠코에서는 임차인 보호 차원에서 공매 중지했대요. 자기들이 임차인 위험을 발생시킨 거나 다름없는데. 신탁원부 파악도 제대로 안 하고 공매 넘겼다가 신협 쪽에서 세입자들이 불법점유로 사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공매 넘기기 전에 내가 한 번 더 확인해달라고 할 때라도 똑바로 확인했으면 우리 빌라 사람들 시간이라도 좀 벌었을 거예요. 세입자들이 조치할 수 있는 방향을 찾든가 아니면 최소한 신협이랑 이야기라도 해봤거나.

전세사기 피해가 이미 많이 보도될 때였어요. 미추홀구 사태가 크게 알려졌으니까. 우리 빌라 사람들 상황이 다들 어떤지 먼저 알아야 뭐라도 할 테니까 내가 엘리베이터에 포스트잇으로 공지를 했어요. 처음엔 오픈채팅방에 모여서 간단히만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날을 잡아서 커피숍에 모이기로 했는데 17세대가 한 집도 빠짐없이 왔어요. 미리 신탁 사기에 대해서 알아본 게 나니까 정리해서 우리가 사기당한 내용을 공유했고, 그날 침산동 블루하임 대책위가 만들어졌어요. 내가 주도를 했으니까 얼떨결에 위원장도 맡았죠. 이어서 대구MBC에 취재요청도 하고 전국대책위 쪽으로도 연결했고요. MBC에서 바로 취재를 와줬어요. 거의 바로 보도까지 해주면서 대구 피해도 조명을 좀 받았는데, 당장 신협에서 그달 안에 퇴거하라는 내용증명도 와 버리더라고요. 그다음엔 입주민들 전부 명도 소송 걸리고. 건물주는 성공한 줄 알았더니 순 사기꾼이었고, 구속됐어요. 우리 빌라에서 꿀꺽한 보증금만 15억이 넘어요.

‘미분양 천국’에서 애물단지가 된 분양권

대통령실 앞에서도 1인 시위를 했어요. 전국대책위에서도 계속 신탁 사기 이야기를 하고. 신탁 사기 피해 접수만 전국적으로 500가구가 넘는데, 전세사기 피해 규모가 워낙 크니까 적은 축에 속해요. 말 자체도 어렵고 관리 관계가 복잡하니까 전국대책위에서도 당사자가 나서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다루기가 어렵죠. 맡아서 계속 목소리 낼 사람이 없잖아요. 신탁 사기 피해자로 6월부터 싸웠는데 국회 갔을 때 저도 같은 신탁 사기 피해자를 딱 한 분 만났거든요. 어떤 분이 저를 툭툭 치더니 종이 한 장을 쓱 주고 가셨는데 신탁 피해자분이셨어요. 본인들 피해 사례도 좀 이야기해 달라고 써있더라고요.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갑자기 불법 임차인이라고 명도 소송을 당하게 생겼는데 너무 쪽팔린다고.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니까 마음이 더 어려운 거예요. 피해자들 다 마찬가지지만 신탁 사기 피해자들은 일단은 본인 잘못이라는 더 생각이 커요. 주눅이 드니까. 그런데 이 사태가 정말 다 피해자 개인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캠코 직원도 똑바로 모르고, 부동산 중개인도 돈 받고 제대로 설명 안 하는 내용인데.

심상정 정의당 의원님6)이랑 이수연 정책보좌관님한테 정말 고마웠어요. 다른 국회의원들이 절레절레하는 신탁 사기 문제 맡아서 특별법 안에서 피해자(등)까지는 인정되도록 정말 억수로 노력해 주셨거든요. 특별법 개정안 만들 때 신탁 사기 피해 문제까지 포괄할 수 있게 법적 근거를 많이 만들어주신 것도 있지만, 당장 우리 빌라 사람들 다 쫓겨나게 생겼을 때 대구까지 달려오셨어요.7) 대구칠곡신협 이사장 만나서 이 사람들 내쫓지 말아 달라고 대신 부탁해주시고. 그전까진 신협에서 빨리 재판 진행해달라고 재판부에 계속 요청 넣었는데, 의원님 다녀가고 안 그러더라고요.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서, 우리 다 정의당 가입했어요.

저는 원래 국민의힘 당원이었어요. TK(대구·경북)에서 자랐잖아요. 지역 투표도 그렇고 대통령도 국민의힘 착착 찍었죠. 정치에 관심 깊었다기보다는 그냥 부자 편에 마음이 갔던 거 같아요. ‘오로지 자기 능력과 자신감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거다’ 늘 그렇게 생각했고요. 어릴 때 가정 형편 안 좋고 세상에 불신도 많았지만 나름 계획을 갖고 필사적으로 살면서 3억이라는 돈도 모으고, 내 집 마련도 눈앞에 있었으니까. 이게 미친 전세 제도 속에서 완전히 무산될 줄은…. 대통령 하는 소리 들으면 진짜 뭐라카노 싶어요.

대구가 특히 미분양 천국이다 보니까 ‘마이너스피’8) 내놨는데도 분양권이 안 팔려요. 아파트 들어갈 돈도 없는데 청약은 취소도 안 되고. 상담받았는데 신용불량자 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래요. 잔금 내는 시점에 치르는 후불제 이자를 어느 이상 연체하면 신용불량으로 등록되고 분양권 자동 포기된다고. 그러고 서서히 신용 회복하거나 개인회생 신청하거나, 선택하라고 하더라고요.

시간이 꽤 지나니까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도 하네요. 웃음 나올 상황은 아니지만.(웃음) 2023년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서울 다니느라 이동비도 많이 들고 너무 바쁘게 지나가 버렸어요. 대구에서 계속 목소리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가끔은 좀 외롭기도 하고. 그래도 이대로 그냥 나가떨어지고 싶지가 않아요. 전세사기 피해를 회복하려는 것도 있지만 너무 심해서 화가 많이 나요. 전세사기 피해자가 전국에 2만 명이 넘거든요. 이런 세상에 지기가 싫어요. 이런 제도를 방치한 국가도 잘못됐다는 거 알려주려고 대통령실 앞에서 혼자 1인 시위도 한 거예요. 인수인계는 해놓고 자꾸 다른 정부 탓만 하니까. 대통령은 계속 바뀌고, 어느 정부에서 잘못한 일이든 책임질 의무가 있잖아요? 고쳐야죠. 이 제도 그대로면 세입자들은 대체 어떻게 살겠어요. 부동산 시장이라는 건 앞으로도 출렁일 수 있는데. 그러다 나중에 내 아들이 나오고, 내 아들도 전세 구한다고 헤매면 스스로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요. 어떤 방법으로 계속할지는 고민해야겠지만 이렇게 피해자가 된 마당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의미가 있어요.

■ 주

1) 인터뷰는 2024년 3월 26일 진행했다.
2) 인터뷰 당시 피해자 대책위원회 집계로 대구 전세사기 피해자는 600명.
3) 긴급생계비는 전세사기 피해자 중 1인 가구 기준 월 155만 8,419원 이하 소득자에게 해당하는 지원으로, 식료품비, 의복비 등 생계유지에 필요한 비용에 한정한다는 이유로 14일 이상 병원 입원자는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4) 한국자산관리공사 캠코는 〈한국자산관리공사 설립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설립되어 금융회사 부실채권 인수, 정리 및 기업구조조정업무, 금융취약계층의 재기지원, 국유재산관리 및 체납조세정리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준정부기관이다. 관계 법령에 따라 체납된 국세를 관할 세무서장으로부터 위탁받아 징수한다.
5) 임대인은 부동산 신탁제도를 활용해 자본을 마련해 다세대주택을 건축했다. KB부동산신탁 주식회사를 수탁자로 위탁해 대구칠곡신용협동조합을 우선수익자로 부동산담보신탁계약를 맺었다. 수탁자는 담보신탁으로 소유권을 이전받고 수익권증서를 발행하고, 위탁자는 이 수익권증서를 우선수익자에게 양도함으로써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는다. 부동산담보신탁계약 내용을 보면, 수익권증서 발행 금액은 38억 9백만 원으로 되어있다. 수익권증서 발행 금액은 신탁부동산의 잔존 담보 가격 내에서 우선수익자가 요구하는 금액이다. 이 내용이 신탁원부 제2017-1950호 내에 첨부된 부동산담보신탁계약서에 나와있다.
6) 인터뷰 당시 녹색정의당 소속 경기 고양시 갑 국회의원이었다.
7) 2023년 11월 15일 당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이었던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더불어민주당·녹색정의당 발의) ‘선구제 후회수’ 재추진 등을 골자로 하는 해당 법안에는 신탁 사기 피해자 구제를 위한 대책으로 명도 소송 유예, 공개 매각 및 강제집행 유예, LH의 신탁 사기 피해주택 매입 근거 마련 항목이 포함됐다. 다음 해 2월 27일 야당 단독 의결로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 야당 단독으로 통과됐으나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소속 염태영 의원이 제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대표 발의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대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LH는 신탁 사기 피해 주택, 위반 건축물도 적극적으로 매입하고 ‘10년간 공공임대주택 무상 거주’를 지원하기로 했다.
8) 분양가보다 분양권 가격이 낮게 거래되는 상황을 일컫는 말로 ‘마이너스 프리미엄’의 준말이다. ‘마피’라고도 한다.


오지은
본지 객원기자. 삼프레스 발행인.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언제나 재미있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빵은 만들어 먹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