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제자훈련과 사회참여 사이
[412호 유배지에서 만난 하나님]
1
“야, 서울이다!”
순간 우리는 얼어붙었다. 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은 대관령을 지나 서울로 향했다. 우리는 떠들고, 유행가를 부르고, 춤추며 놀았다. 몇 명은 피곤한지 버스 창가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야, 서울이다!” 왁자지껄했던 버스 안은 일순 침묵에 잠겼다. 버스 중간에서 춤추던 아이들도 얼른 앉았고, 노래와 대화는 멈췄으며, 자던 녀석들도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아이들은 커튼을 젖히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밖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울은 내게 동경과 공포가 기묘하게 뒤섞인 도시였다.
대학 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이랄까, 사회이다. 내가 다닌 교회는 이동원 목사님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담임했던 서울침례교회였다. 동국대학교 후문 초입, 넝쿨이 담장을 뒤덮은 언덕 위에 고풍스러운 교회 건물이 있었다. 그 교회의 대학부는 1980~1990년대에 유명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와 쌍벽을 이루었다. 탁월한 선배들이 해외 선교사로 많이 나가는 바람에 국내에서 목회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교회에 처음 발을 들인 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우리의 기도제목 1순위는 언제나 ‘성경을 가르쳐줄 교사를 보내주세요’였다. 목사도, 전도사도 아닌 교사였다. 내 고향은 경북 울진군 죽변리로, 섬 지역을 제외하면 어디서 가더라도 가장 먼 곳이었다. 그렇기에 목사님이나 집사님들도 체계적인 성경 교육을 제공하기 어려웠다.
그랬던 내게 대학부는 특별한 의미였다. 선배들 모두 ‘서울침례교회 대학부’가 아니라 그냥 ‘대학부’라 불렀다. 나는 이상하다며 툴툴거렸다. 그것은 교회론의 문제였으니까. 여하튼, 1980년대 한국교회에서 선교단체의 제자훈련과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가장 선진적으로 도입한 대학부에서 나는 성경을 배웠다.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SCL(제자훈련 과정) 10단계를 배우며, 그것이 한계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내게는 단비와 같았다.
특히 경건의 시간(Quiet Time)은 내 평생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대학부 리더였던 윤상헌 형은 경기도 성남에서 서울 이문동까지 와서 마가복음을 읽으며 QT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귀공자 스타일의 신사였던 형은 대학부를 이끌었고, 대학원에서 영문학도 탁월하게 연구했다. 주말과 주일에는 교회를 다녔고, 주중에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데모에도 적극 참여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던 중, 어느 날 QT 공책 뒷면에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을 베껴두었다. 형은 못마땅했는지 그날 이후 일대일 교제를 그만두었다. 이후 유학을 다녀와 한동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점에 미안해했다.
서울의 교회에서 성경과 묵상을 배운 경험이 내 신앙과 사역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대학은 마치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커다란 손 같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전했을 때, 나는 펑펑 울었다. 흑백 텔레비전 속 1980년 광주의 대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캠퍼스와 시내를 뛰어다녔다. 그 모습이 무서웠다. TV에서는 그들을 ‘빨갱이’라 부르고, 이 모든 것이 북한의 소행이라 떠들었다.
초등학교 반공 시간에 그렸던 뿔난 늑대는 아니었지만, TV 속 형과 누나들은 무서운 존재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좋은 대학에 다니며 창창한 앞날이 기다릴 텐데, 왜 그 위험을 감수할까? 나처럼 시골에서 어렵게 대학에 온 이들도 많을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데모를 할까? 나는 그들처럼 될까 두려우면서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대자보였다. 캠퍼스가 작아 정문에서 도서관까지의 거리는 100미터도 되지 않았다. 도서관 우측에는 각목과 합판으로 만든 대자보가 있었다. 흰 종이에 매직펜으로 쓴 성명서가 붙어있었다. 대한민국 민중을 ‘레밍’이라 부른 주한미군 사령관과 1980년 광주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이듬해 봄 광주에서 국민을 학살한 뒤 대통령이 되었다고 적혀있었다. 그것은 공포스러운 충격이었다. 나는 단 한 번의 대자보로 충격을 받았고, 이후 계속된 근현대사의 비극을 접하며 점차 잠식당했다. 나는 그 현실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해야 했고, 세계관 공부를 통해 사회참여의 정당성을 이해했다.
2
기독교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다. 1-2학년 때는 대학부와 학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고민을 들어줄 선배도, 속을 터놓을 친구도 없어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듯 책을 더듬어 읽었다. 내 눈을 열어준 것은 1987년에 만난 한 형 덕분이었다. 그는 대학 선배인 김동문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기독학생회(IVF) 사역뿐만 아니라 동아리연합회와 총학생회에도 관여하며, 타 대학 복음주의 학생운동에도 밝았다.
형을 통해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브라이언 왈쉬와 리처드 미들턴의 《그리스도인의 비전》, 앨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프랜시스 쉐퍼의 책도 찾아 읽었다. 그의 책들은 생명의말씀사라는 출판사에서 주로 번역되었는데, 《이성에서의 도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창세기의 시공간성》, 《진정한 영적 생활》, 《그리스도인의 표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을 읽었다.
이 책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아, 사회참여를 해도 되는구나.’ 학생운동을 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첫째, 성경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는 지나치게 철학적이라는 뜻이었다. 세계관과 철학은 다르다고 강조해도, 그 책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관은 철학이다.” 부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하던 나조차도 어렵게 느꼈다. 일반인은 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앨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세계관은 성경적일 때만 우리 삶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 영어 원제목은 ‘Creation Regained’인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책에는 창세기 1장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대신 ‘법’(law)에 대한 논의가 가득했다.
성서신학을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이를 완전히 배제했다. 물론 대학생 때는 몰랐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후에야 깨달았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의 창조 설화와 대조되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성경과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선함과 ‘말’(word)에 의한 창조를 강조한다. 반면, 바벨론 신화는 악한 창조와 폭력에 의한 창조를 주장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읽으면, 창조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해석하는 틀이 된다.
세계관 책과 프랜시스 쉐퍼의 저서를 읽으며 성경에 대한 갈증이 깊어졌다. 결국 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책들을 읽기로 결심했다. 1988년 2월 9일, 종로서적에서 헤르만 리델보스의 《하나님 나라》를 구입해 그달 내내 읽었다. 이어서 조지 엘든 래드의 《하나님 나라》와 비슬리-머리의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연달아 읽었다.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부는 세계관 스터디가 놓쳤던 거시적 시각을 열어주었고, 성경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둘째, 역사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즉,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론 서구, 그것도 화란 개혁파와 미국에서 비롯된 세계관 운동의 산물이니, 그 공백과 괴리는 우리가 채워야 할 몫일 것이다. 그들을 깊이 이해하여 우리 것으로 전유하지 못하는 내 능력의 한계를 탓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는 시공간으로서 우리의 역사, 그리고 한국사와 한국교회사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얽혀있는가? 그것이 궁금해졌다.
먼저, 한국사를 훑었다.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나의 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대신, 한국 근현대사를 통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강만길 교수의 저서를 먼저 읽었다. 이후 근대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갑오농민전쟁을 시작으로 ‘10권 읽기’ 작전에 돌입했다. 갑오농민전쟁, 한국 개신교의 전파와 1905년 105인 사건, 3·1운동, 1920~1930년대의 항일 무장투쟁과 신간회 운동, 해방 전후의 정치적 격변과 한국전쟁, 1960년대의 4·19 혁명,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그리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중대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읽어나갔다.
한국교회사 공부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주로 이만열 교수의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과 《한국기독교문화운동사》를 읽었다. 그가 창립 주역으로 알려진 한국기독교사연구회의 《한국 기독교의 역사 I》, 그리고 민족사관을 정립한 민경배 교수의 《한국기독교회사》도 함께 보았다.
한국사와 교회사를 함께 읽으며 두 역사가 상당히 많이 겹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갑오농민전쟁, 3·1운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계관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재조망할 수 있었다면, 한국교회사는 한국사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얻었다. “복음의 진리와 역사의 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곧 둘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중첩될 뿐이라는 의미였다.
3
내가 세계관 논의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세계관의 타깃은 이원론(Dualism)이 아니라 혼합주의(Syncretism)라는 점이다. 아마 이것이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듯하다. 기존의 세계관 비판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한발 물러서 교회 내부에만 골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주장의 근거는 세 가지다. 성경, 역사, 그리고 현실이다.
첫째, 성경을 살펴보면, 이원론을 문제 삼는 구절이 있을까? 신·구약 성경은 일관되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신약에서는 교회에게 세상과 짝하지 말 것을 엄히 금한다. 질문부터 해보자. 출애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구약에서 가장 결정적인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애굽으로부터의 대탈출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변혁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모델(분리, 일치, 통합, 역설, 변혁) 중 어느 것이 출애굽을 설명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예를 보자. 아브라함은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가나안에 도착했는가? 그가 서있던 자리, 즉 고향을 변혁하지 않고 떠난 그는 기존의 논리로 보자면 ‘이원론자’라고 불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선택은 애굽과의 일치도, 통합도, 역설도 아니었으며, 변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분리, 즉 떠남이었다. 그리고 그 떠남이 곧 변혁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까지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할 것인가?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북이스라엘 백성을 호되게 책망했다. “언제까지 양다리 걸칠 것이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멸망의 궁극적 원인은 단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신을 섬겼다.”(왕하 17:7)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이교의 신을 섬긴 것은 아니었다. 참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을 동시에 섬긴 것이 문제였다. 그들의 죄는 단순한 이원론적 분리가 아니라, 욕망에 찌든 삶과 그 욕망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예배의 뒤섞임이었다. 이러한 혼합주의 때문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다.
예수의 일관된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는 ‘언덕 위의 마을’처럼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가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 부른 이유를 신약학자들은 단순히 고등어를 절이는 방부제로서의 소금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소금은 본래의 고유한 짠맛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리처드 헤이스는 《신약의 윤리적 비전》에서 신약성서의 윤리를 단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1-2) 성경 어디에서도 성속 이원론이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오히려 성속 혼합론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세 번째로 역사를 돌아보자. 많은 역사학자는 교회의 타락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영국 성공회의 레슬리 뉴비긴, 개혁파 신학자 더글라스 존 홀, 아나뱁티스트 전통이 그러하다. 내가 유행시킨 신학 용어 중 하나인 ‘콘스탄틴주의’(또는 콘스탄티누스주의)는 국가와 교회의 동맹 체제를 의미한다. 국가는 교회에 법적·물리적 지원을 제공하고, 교회는 국가에 성사를 부여하며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 결과, 박해받던 소수 종교였던 기독교는 어느새 박해하는 다수 종교가 되었다. 십자가는 칼이 되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것이고, 타자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면, 검(劍)은 남을 죽이는 것이고, 자신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로마에 의한 교회의 승리요, 교회의 패배이며, 교회의 타락이다.
미국의 개혁파 신학자 마이클 호튼은 그의 《세상의 포로 된 교회》에서 교회가 세상의 포로가 되었으며, 미국의 실용주의와 민주주의의 시녀가 되어 이교적 기독교로 변질하고 있다고 깊은 자성의 목소리를 낸다. 월터 윙크는 한 발 더 나가, 미국 개신교가 ‘폭력의 종교’, 곧 폭력을 숭상하는 종교로 타락했다고 비판한다. 미국 복음주의 혹은 근본주의와 공화당 우파의 결탁은 단순한 이원론적 방관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증오와 폭력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사를 훑어보면, 결국 동일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신사참배를 정당화한 교회는,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를 가장 먼저 공명정대하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독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고, 후원을 받았다. 그들은 걸핏하면 로마서 13:1을 내세웠다. “위에 있는 권세에 순복하라.” 국민이자 신도로서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당이 정권을 잡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는 요한계시록 13장을 적용했다.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 그러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다시 로마서 13장을 애정하더니,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또다시 계시록 13장을 들고나왔다. 전두환이 아직 중앙정보부 부장서리였을 때, 그를 위해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어주었다. 그는 대통령조차 아니었다. 당시 그가 권력 실세라는 사실을 알았고, 위협과 위험을 감지한 결과일지라도, 그 권세가 사라진 후에도 반성과 사과조차 없다는 것은 은밀한 공조가 아니었을까?
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산물이 전광훈이라고 생각한다.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보수 기독교인들은 세계관 운동이 강조했던 대로, 자신의 신앙을 세상에 그대로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왜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 그들은 오히려 그 도전에 응답한 것 아닌가? 기독교와 애국심은 혼연일체가 되었다. 이를 이원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다. 이것은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동일시된 교회다. 슬프지만, 혼합주의에 빠진 교회다.
그렇다면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죄 많은 이 교회를 어찌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이원론이 문제인가, 혼합주의가 문제인가?
개혁주의자들은 한국교회가 이원론에 빠졌다는 증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교회 일과 목회, 주일예배는 거룩하지만, 돈을 버는 직업과 일상의 영역은 속되다.” 전성민 교수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같은 논지를 펼쳤다(유튜브 채널 〈민춘살롱〉의 “기독교 세계관을 바라보는 두 시선: 전성민 vs. 김기현” 편 참고). 그는 나의 설교와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직업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이 거룩한 일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원론에 사로잡힌 증거라고 보았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미통합이며 미성숙의 문제라고 본다. 나는 직업과 소명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다. 두 개념은 중첩될 뿐이다. 따라서 약간의 조정만 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 전체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는 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문제다. 내가 고민했던 것, 그리고 세계관 논의의 출발점은 단 하나였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날드 사이더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삶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구체적인 통계를 바탕으로 지적한다. 사이더는 연구 데이터를 활용해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 물질주의, 부정부패, 윤리적 타락이 일반 비기독교인들과 거의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은 미국 평균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을 때도 있었으며, 교회 내에서도 부도덕한 행동이 만연했다. 그들은 입으로는 성경적 가치를 외치지만, 실제 삶에서는 물질주의와 자기중심적 태도에 빠져있다고 사이더는 비판한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이원론의 한 증거라 하더라도, 한국교회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더 심각한 것은 혼합주의다.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내가 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가? 아니면 세속적 가치에 함몰된 신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가? 나는 후자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그 연장선에서 다시 질문하자. 오늘날 12·3 사태와 탄핵에 대처하는 한국 보수 교회의 태도는 세상과 분리된 이원론적 모습인가, 아니면 세상과 뒤섞인 혼합주의적 모습인가? 신앙과 신념이 동일시되었고, 이제 신념이 신앙을 삼켜버렸다. 그런데도 이원론이 문제라고?
김기현
로고스교회의 담임목사이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로 있다.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와 제자가 되어, 작가와 목사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부전자전 고전》 등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