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 쥐는 없어져도 괜찮을까

[412호 구선우의 동물기]

2025-03-01     구선우

“최근에 쥐를 본 적 있나요?”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다. 대부분 오래됐다고 답했지만, 최근의 목격담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공원, 아파트 옥상, 번화가 뒷골목 등, 쥐는 여전히 도시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듯하다. 나도 작년에 오래된 상가 화장실에서 만났다. 당시 내 생각은 ‘아직도 서울에 쥐가 있네?’였다. 지금 만났다면 다른 생각을 할 테지만, 대부분 사람은 쥐가 이 도시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시골 쥐와 서울 쥐〉로 알려진 이솝우화에서는 시골 쥐가 도시에 사는 친구 쥐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요즘 세상이라면 서울 쥐를 처음부터 부러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단순히 서울은 쥐가 살기에 불편한 세상이 아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방역’을 잘해서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쥐가 없는 도시는 괜찮은 도시이다. 쥐가 있다면, 위생에 문제가 있는 지역이라는 것. 이렇듯 쥐는 인간 세상에 없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늘어났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 동물이 많다. 특히 팬데믹 이후 사람들은 동물들을 무서워한다. 21세기에는 박쥐가 감염 매개체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사실 쥐는 전과가 더욱 많다. 쥐는 해로운 동물 1순위, 마치 해충처럼 여겨진다. 정말 해롭기만 한 곤충이 있는지 더 따져 봐야겠지만, 쥐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원하는 도시인은 없을 것이다. 쥐가 해롭기만 한 동물이라면, 없어도 그만일지 모른다. 정말 없어져도 괜찮을까?

다람쥐·햄스터·박쥐는 ‘쥐’가 아니다?

쥐는 세계 어디에나 있다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지역에 산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진지한 관심 밖에 있다. ‘쥐’라 불리는 동물도 다양한 종이 있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최소한의 앎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생물 분류 체계는 ‘종속과목강문계’(種属科目綱門界)이다. 쥐는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에 속하는데, 여기까지는 인간과 같다. 다만 인간은 영장목이고, 쥐는 설치목이다. 설치류라 불리는 설치목 생물종 가운데 쥐과에 속한 동물을 쥐(Muridae)라고 부른다. 다람쥐·햄스터·친칠라·비버·기니피그는 설치류이지만 쥐가 아니다. 이름에 쥐가 들어가는 박쥐는 설치류조차 아니다.

쥐과에 속하는 생물은 650종(種)이 넘는다. 래트(rat)와 마우스(mouse)로 불리는 동물 대부분이 쥐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말에서 생쥐는 마우스, 들쥐나 시궁쥐는 래트에 해당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더 자세하게 분류하겠지만, 일상에서 ‘쥐’라 불리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갈 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요즘 귀여운 캐릭터로 주목받는 카피바라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설명할 때, 몸집이 엄청나게 큰 쥐가 아니라 가장 큰 설치류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글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쥐는 주로 시궁쥐(brown rat)이다. 크고 무섭다는 인식이 강하다. 질병을 전파하는 동물로 여겨져 혐오스럽게 취급되었다. 시궁쥐는 다양한 환경에서 서식하며, 특히 도시에서 많이 발견된다. 도시 폐기물 등 뒷골목과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이 쥐는 오래전 인간이 음식을 저장하기 시작한 시절부터 적(敵)으로 등장했다. 특히 고양이 사육의 역사에 늘 함께했다. 시궁쥐는 도시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고양이는 반려동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살아남았다.

시궁쥐는 설치류 중 가장 지능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집단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로 사람과 교감할 수 있어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한다. 이 경우, 영어명 ‘래트’로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단독생활을 하며 공격성을 띠기도 하는 햄스터보다 인기가 없다. 햄스터가 더 귀엽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양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햄스터처럼 자기 몸을 손질하는 깔끔한 종이지만, 도시 곳곳에 사는 시궁쥐는 환경이 열악해 다양한 전염병을 옮기기도 한다.

생쥐(mouse)는 꼬리가 짧고 가늘며 몸집이 작다. 주로 들판이나 농촌 지역에 서식하지만, 집 안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 덜 무섭고 덜 위협적으로 여겨진다. 실제 크기도 매우 작아 야생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연구용으로 많이 사용되며, 실험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중문화에서 귀여운 초소형 동물로 묘사되는데, 월트 디즈니 마스코트 미키 마우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워너 브라더스 〈톰과 제리〉에서 토마스 캣을 골려주는 제리 마우스도 아주 유명한 캐릭터다. 현실에서 고양이가 잡는 쥐는 주로 시궁쥐이지만, 〈톰과 제리〉 속 제리는 생쥐이다. 어린이와 가족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주인공으로는 작고 귀여운 생쥐가 더 적합한 동물일 것이다. 래트와 마우스의 생물학적 차이를 살펴보았지만, 둘은 문화적으로 혼용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생물학적 분류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이 문화적 맥락에서 쥐를 어떻게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지 보고자 한다.

쥐를 둘러싼 문화적 맥락: 십이지부터 페스트까지

우리나라에서 쥐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종류의 쥐를 지칭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동물로 이해되었다. 주로 동양 문화권에서 긍정적 의미를 드러냈는데, 지혜와 번영, 다산 등을 상징해왔다. 한·중·일이 공유하는 십이지 첫 번째 동물로서 꾀가 많고 움직임이 빨라 새로운 출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한국의 전통 설화와 민담에는 손발톱을 주워 먹어 사람으로 변신하는 둔갑 쥐가 등장한다. 둔갑 쥐는 영리하고 교활하여 흥미로운 사건을 일으키고,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거나 장애물을 놓는다.

이솝우화 〈시골 쥐와 서울 쥐〉처럼 〈사자와 쥐〉에 나오는 쥐도 부정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작은 존재이지만 은혜를 갚는 등, 다양한 문화적 상징을 보인다. 중세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긍정적 이미지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커졌다. 적어도 미키 마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쥐는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오랜 기간 인간과 함께 도시에 살며 지하 세계 군주 역할을 해왔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마법 같은 이야기와 아름다운 음악으로 사랑받는 〈호두까기 인형〉 속 악당은 생쥐들이다. 원작은 에른스트 호프만이 1816년 발표한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인데, 호두까기 인형과 머리가 일곱 개인 생쥐 왕이 벌이는 결투를 그린다. 1844년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각색하고, 1892년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발레 작품으로 초연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발레 공연에는 우두머리 대왕의 머리가 하나지만, 쥐가 악당인 점은 변하지 않았다.

쥐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고착된 배경은 무엇일까? 14세기 유럽 전체 인구의 30-50%, 많게는 2억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적 재앙인 흑사병(페스트)은 쥐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페스트균은 주로 감염된 쥐에 기생한 벼룩을 통해 전파되었다고 추정된다. 당시엔 흑사병 원인이 고양이로 지목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고양이가 악마와 관련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결국 고양이가 학살되면서 쥐 개체 수가 늘어났고, 흑사병이 재확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했다.

19세기 말에야 벼룩과 쥐가 주요 매개체로 밝혀지며, 고양이가 인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쥐와 고양이 사이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흑사병 확산 경로와 원인 연구가 이어지면서, 20년 전에는 인간의 이동이 더 강력한 감염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1) 흑사병의 주된 책임은 쥐가 아닌 인간에게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가 쓴 《페스트》는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의 평범하고 특색 없는 가상 도시 오랑이 배경이다. 도시 곳곳에서 쥐가 무더기로 나타나 죽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카뮈도 흑사병의 매개를 쥐로 믿었던 것 같다. 카뮈는 쥐의 죽음을 통해 페스트 발발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사회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던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을 표현한다. 전염병이 창궐하자 도시는 봉쇄되고, 시민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만다.2) 쥐로 시작된 이야기는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 그야말로 민낯을 보여준다. 《페스트》에서 쥐는 질병 이상의 사회적·도덕적 페스트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다.

타자화·비인간화라는 폭력: “미키 마우스를 타도하자!”

1928년에는 미키 마우스가, 1940년에는 제리 마우스가 귀엽게 등장했지만, 수많은 문학·예술 속 쥐는 여전히 황폐화된 환경 가운데 나타났다. 전쟁의 참상을 비롯해 인간의 고통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쥐에 대한 부정적 은유는 특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는 있으나, 더 큰 문제는 동물을 이용한 타자화에 담긴 폭력이다.

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질병을 넘어, 가장 끔찍한 학살과도 관계가 있는 동물이다. 독일 나치는 유대인을 쥐에 비유하며 그들을 향한 폭력이 정당하다고 선전했다. 미키 마우스마저 유대인과 묶어서 비판했다. 1930년대 중반 독일 〈포메라니아〉지에 실린 기사는 미키 마우스가 세상에서 가장 저열한 모델이며, 세계 최대 병균을 보유한 쥐는 동물의 이상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류에 대한 유대인의 야만 행위를 타도하자! 미키 마우스를 타도하자!”3)

1940년 나치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 다큐멘터리 〈영원한 유대인〉(Der ewige Jude)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가장 공격적인 나치 선전 영상물 중 하나로, 유대인을 쥐에 비유하면서 유대인 혐오를 조장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모습을 쥐의 특성과 동일시했다. 쥐가 무리를 지어 땅을 파괴하고 인간 사회에 기생하듯, 유대인도 인간 사회에 해로운 존재라고 주장했다. 비유를 통해 유대인은 영원한 타도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나치는 유대인 6백만 명을 죽였다.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Maus》 1권 표지. 나치당의 상징 하켄크로이츠 중 앙에 그려진 고양이는 히틀러를 연상하게 한다.

아트 슈피겔만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아버지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 《쥐》(Maus)에 담았다. 작가가 작업하던  1980년대와,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한 유대인이 홀로코스트를 겪은 1930-1940년대 풍경이 교차된다.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과거를 넘어, 오늘날의 세대·인종 간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쥐》는 1992년 그래픽 노블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선구자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대인은 쥐로, 나치는 고양이로 묘사되면서 참혹한 비극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인간성 말살”이 쥐 비유와 관련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저항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유대인을 쥐로 그렸다.4)

인간은 타자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기 위해 동물을 이용해 비인간화한다. 타자를 아예 다른 종으로 규정하는 폭력적 행위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악마로 묘사하거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정적을 ‘버려진 개’로, 부농(富農)을 ‘살찐 돼지’로 비유한 것처럼,5) 쥐·개·돼지·바퀴벌레 등의 동물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동물 비유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 존엄성과 권리를 침해한다. 우리는 비인간화라는 폭력을 경계하고, 모든 인간을 존중하며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동물을 통한 타자화·비인간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키우는 데 필요한 일이다. 동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한 일이다.

인간과 인간이 싸움을 벌이면서 비유적으로 동물을 이용하는 동안, 실제 동물들도 인간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도시에 살던 쥐들은 어디로 갔을까. 많은 동물이 인간의 활동으로 고통받고 있다. 야행성동물은 도시의 빛 공해에 시달리다가 숨어버렸다. 1970-1980년대 ‘쥐 잡기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울의 여우도 야생에서 자취를 감췄다. 생태계에 엄연히 존재해온 일원인 쥐보다, 쥐를 쥐답게 살 수 없는 환경에 방치한 인간에게서 더 큰 문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숲이 파괴되어 도로에 내려올 수밖에 없는 동물들은 차에 치여 죽고, 철새들은 서식지가 사라져 비행기와 충돌할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간다. 과도한 어획은 특정 어종 개체 수를 급감하게 만들어 해양생태계 균형을 파괴하고 있으며, 과도한 개발과 오염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해서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결국 인간 스스로 생존에 위협을 받게 된 형편이다.

인간을 위해 희생되는 쥐

오늘날 도시에서 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실험실이다. 쥐는 생물학·의학·생리학·신경학·면역학 등의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동물이 실험에 사용되지만, 쥐가 그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포유류인 마우스는 인간과의 유전적 유사성, 강력한 번식력,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 때문에 사용된다. 없어져야 할 존재처럼 보이는 쥐는 실험실에서 없어지면 안 될 존재이다.

실험실 쥐는 인간을 위해 희생된다. 인간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해서 벌어지는 일인가? 동물실험은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행위일 수 있으며, 동물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동물실험을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하는가?

쥐에 대한 묵상을 생생하게 이어가기 위해 실험실 쥐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안전 문제나 오염 방지 등 절차적 어려움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실험실이 엄격하게 관리된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마우스 유전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와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불가피하게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동물의 희생을 간과하지 않았다.

관련 분야 연구자들은 가능하면 동물실험을 대체할 다른 방법(세포 배양, 컴퓨터 모델링 등)을 사용하려 한다. 실험에 쓰이는 동물 수를 줄이고(Reduction), 고통을 적게 주는 실험 방법을 개발하는(Refinement) 등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는 동물실험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려는(Replacement) 움직임과 함께, 동물실험을 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3R 원칙을 따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동물을 통해 얻은 지식을 동물 치료에 활용하는 수의학 영역도 있다.

동물실험 완전 중단은 불가능해 보인다. 현실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동물 윤리를 지키는 노력은 계속된다. 이는 인간 윤리가 비인간 동물에게 확장되는 흐름에 있어서 긍정적 신호다. 동물복지는 어디까지 확장돼야 할까.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설 수 있을까?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 나라를 그렸다. 동물에 관한 글도 많이 남겼고, 동물실험도 반대했다. 지식 추구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불필요한 고통을 수반하는 동물실험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며 동물실험을 옹호하는 기독교인을 비판했다. ‘영혼이 없다’는 주장은 곧 도덕적 책임이 없다는 의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동물에게 영혼이 있는가 하는 논의를 떠나서 인간이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일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동물실험에 관한 정당성 주장은 인간을 향한 차별과 폭력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1947년 ‘생체 해부’(vivisection)에 관한 에세이에서 자신의 우려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고발한다.

실제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나치 과학자들이 그 일을 실시했다고 듣고 있습니다.(《피고석의 하나님》, 홍성사)

루이스의 통찰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피조세계에서 인간은 특별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지위는 다른 피조물을 향한 책임으로 이어지는가? 인간은 파괴된 생태계에서 동물과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 주

1) Jo Revill, ‘Black Death blamed on man, not rats’, 〈The Guardian〉(2004.5.16.)
2)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민음사, 2011), 93쪽. 소설이 시작할 때 등장하는 쥐는 래트(rat)이다. 2부 초입에 나오는 “독 안에 든 쥐”라는 표현은 번역문으로, 원문에는 “pris dans le même sac”(같은 가방에 넣어서)이라고 적혀있다.
3) 아트 슈피겔만, 권희섭·권희종 옮김, 《쥐 The Complete Maus 합본》(아름드리미디어, 2015), 168쪽에서 재인용.
4) 아트 슈피겔만, 최유리 옮김, 《메타 마우스》(아름드리미디어, 2015), 115쪽. 2011년 출간한 《쥐》 해설서. 본작 출간 이후 반응과 작품에 담긴 의미를 슈피겔만이 인터뷰 형식으로 기록했다.
5) 선우정, ‘[선우정 칼럼] 스탈린의 ‘개’, 나치의 ‘쥐’’, 〈조선일보〉(2018.12.19.) 참고.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