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과 계엄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412호 봄봄]

2025-03-01     김영준
문용동 전도사. (이하 사진: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제공)

봄날 야외 예배 자리에서 문용동 전도사는 참 재미없고 깐깐한 설교를 했다. 1980년 5월 13일에 문용동 전도사(1952-1980)가 전남노회 여전도연합회 회원들과 상무대(육군 군사교육 시설)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며 나눈 설교 원고다. “신자는 저 높은 곳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 구원받고, 은혜받고 성전의 높은 담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골방에서 주를 만나 새 힘을 얻고, 다시 밑의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 많은 교회(가) 자체 내의 프로그램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1) 문용동은 당시 상무대교회 전도사였다. 봄날 야외에서 여전도회 회원들과 드리는 예배라면, 가벼운 내용으로 회원들을 격려하는 수준에서 설교해도 되겠는데, 문용동 전도사는 여전도회 모임이 자칫 교회 내 프로그램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계하고 싶었을까. 봄날 야외 예배에서 듣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설교다. 순수하고 예민한 스물일곱 살 청년 전도사는 자신의 설교가 언 땅을 파고드는 봄날 햇살처럼 기어이 씨앗에 닿아 열매 맺기를 모든 예배마다 기대했겠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 “보안대에 급습당하여 끌려온 (전북)대학생들” 5명이 5월 18일 주일에 상무대 영창에 있었다. 전북대 농학과 이세종은 개머리판으로 정수리를 맞아 죽는 바람에 끌려오지도 못했다. 문용동 전도사는 이들과 예배를 드려야 했다. 야외 예배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설교를 해냈던 문용동 전도사는 스스로 “난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가” 질문하며 설교 원고를 쓰지 못한다. 하나님도 침묵하셨을까.

영창예배
분위기가 다르다
6소대 5명의 대학생(전북)
난 무슨 말을 전해야 하는가
어젯밤 보안대에 급습당하여 끌려온 대학생들
죽었다는 말도 있다

(1980년 5월 18일 자 문용동 일기 중)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는 거대한 영창이었다. 영창이면서 사형장이었다. 광주를 고립시킨 채 곤봉과 칼과 총으로 시민들을 죽이는 잔혹한 “프로그램”을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했고 실행했다. “교회 자체 내의 프로그램”을 경계했던 문용동 전도사는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한 “프로그램”에도 저항했다. 비상계엄으로 끌려온 대학생들에게 차마 설교할 수 없었던 문용동 전도사는 5월 18일 상무대 영창에서 예배드린 후 이전에 설교했던 대로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 한 분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에게 붙들려 구타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리면서 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2) “반기절한 시민을 업어다 병원에(서) 치료했다 / 맞은 상처도 치료”받도록 조치한 후 문용동 전도사는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한다.

전두환 신군부의 명령을 받는 공수부대원들은 잔인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함은 시일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18일에 다치거나 죽은 이들은 주로 타박상을, 19일부터는 자상을 입었다. 18일엔 곤봉으로 시민들을 폭행했고, 19일부턴 총구에 달린 칼로 찌르거나 벤 것이다. 계엄군들의 행태가 더욱 잔인해지자 시민들의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다. 심하게 다칠 수도,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적게 잡아 15만여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아스팔트는 붉어졌고, 관을 구할 수 없었다.

한편 5월 20일 서울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상도동 자택에서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황낙주·손주항 의원을 비롯한 보좌진, 보도진 등 3백여 명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려다 군인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계엄 당국은 의원들의 출입을 강제로 막아 임시국회 자체를 무산시켜 버렸다. 원래 이들은 이날 104회 임시국회를 열어 계엄 해제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었다.”3) 1980년 5월 17일, 확대 비상계엄령이 발표된 후 사흘이나 지나서야 국회가 움직인 것이다. 이미 군인들에 의해 국회가 봉쇄되어서 계엄 해제 결의안을 상정조차 할 수 없었다. 국회가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못하자,

그다음 날 5월 21일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앉아쏴 자세로 발포했다. 금남로 주변 고층 빌딩에서도 시민들을 조준 사격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발표하고 2시간 후, 담장을 넘어간 국회의원들은 계엄 해제 요구안을 가결했다. 만약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지 못했다면. 만약 시민들이 에워싸 국회를 호위하지 않았다면, 만약 잠들지 못한 국민들이 눈 부릅뜨고 국회 상황을 주시하지 않았다면, 만약 군대로 국회를 침탈한 윤석열을 12월 14일 탄핵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45년 전처럼 계엄군의 탄환이 시민들 몸을 관통했을 거라 추론한다면 비약일까?

1980년 5월에 서울 여의도 국회는 군에 의해 봉쇄됐지만, 광주 금남로 전남도청은 시민들에 의해 열렸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M16을 발포하자, 시민들은 시민군이 되었다. 다친 이들을 위해 헌혈하던 고등학생이 총에 맞아 영안실로 실려 오고, 폭행당한 시민들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택시운전사마저 계엄군에게 구타당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저항권’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카빈 소총으로 무장해 시민군이 된 것이다. 폭행당해 피 흘리는 시민들을 실어 나르던 택시운전사들이 광주역에서 집결해 도청을 향해 줄지어 달려갔다. 가슴에 타이어를 감고, 계엄군이 쏘는 총알을 맞으며 버스를 모는 이도 있었다. 제아무리 공수부대라도, 도청을 원점 삼아 온몸으로 달려오는 시민들을 막을 순 없었다. 5월 21일 계엄군은 도청을 떠나 시외로 철수해, 전화와 통신을 차단하고 차량의 진출입을 막았다. 광주는 섬이 되었다.

광주가 봉쇄되기 전 화순 탄광에서 TNT 폭탄 두 상자를 시민군이 확보해 도청 지하에 보관했다. 도청에서 폭탄이 터진다면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사는 주민들이 폭사할 수 있었다. 계엄군이 도청 탈환을 시도할 경우, TNT는 계엄군의 도청 진입을 막는 유용한 협상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계엄군에 구타당하는 할아버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던 문용동 전도사는 광주시민 전체를 지키기 위해 시민군이 되어 폭탄과 수류탄 총기류를 관리하는 책임자 역할을 했다. TNT를 관리하기 위해 도청 지하 지킴이를 자원한 것이다. 그때 쓴 일기다.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 이 엄청난 시민들의 분노는 / 어떻게 배상해줄 것인가 /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 명령을 내린 장본인 /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 전대 부속병원 영안실의 / 시체 시체 들 / 병원마다 꽉 메인 총상환자들 / 칼빈소총과 M1으로 무장하고 / 눈이 뒤집어진 시민들의 차량의 돌진 / 완전히 폐허 같은 금남로 / 전소 되버린 문화방송국 / 앙상한 골재만 남고 타버린 수많은 차량들 / 이 엄청난 피해의 현장 / 누가 이 시민에게 돌을, 각목을, 총기를 / 들게 했는가 / 이럴 수가 있는가 / 정말 이런 수도 있는가 // 우린 참여하여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 계엄당국의 엉터리 없는 오도 /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니 / 그럼 내가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 우린 후세에 전 국민에게 /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게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 모든 전 시민이 빵과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르는 / 광경이 적색, 폭도란 말인가 // 뭔가를 / 진정한 민주주의 승리를 보여줘야 한다. /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 외면이 / 수습을 더 늦게 지연시키는 것이다.

(1980년 5월 22일 자 문용동 일기 전문)

TNT가 터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폭탄이 터진다면 3킬로미터 이내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전남대병원·조선대병원·적십자병원 등 주요 치료 시설도 파괴될 것이다. 광주는 더 큰 트라우마를 갖게 될 것이다. 함께 도청 지하 무기고를 지키던 문용동 전도사와 김영복은 폭탄 뇌관을 제거하기로 합의하고, “위기관리를 위한 안전조치로 계엄사를 찾아 뇌관 작업의 도움을 청하기로 비밀리에 결의한 후 5월 24일 오전 군 지프차 운전석 밑에 다이너마이트 도화선 세 다발을 몰래 숨긴 채 문형(문용동)을 옆 좌석에 태우고 손수 운전하여 상무대 계엄분소를 찾”아갔다. “5월 25일 저녁 9시경 문관이 … 무기고에 잠입하게 되어 TNT 두 상자와 수류탄 공이 제거작업 등을 마친 후 자정이 지나 문관은 맨몸으로 무기고를 빠져 나갔다.”4)

계엄군과 은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폭약 전문가를 잠입시켜 뇌관과 공이를 제거한 이유로, 문용동 전도사는 프락치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TNT 뇌관이 제거된 걸 계엄군이 알고 있었기에 도청 공격에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TNT를 협상 카드로 내세워 계엄군의 진입을 지연시키는 중에 세계에 광주 상황이 널리 알려지면, 계엄군도 철수하고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도 좌절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는 어떤 협상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한 작전을 결행하려 했다. “(5월 26일) 밤 7시를 기하여 광주에 거주하는 외국인 207명(미국인 134명, 일본인 9명, 영국인 3명, 기타 61명)이 광주에서 철수하였다. … 피터슨(Arnold Peterson) 목사는 26일 오후 광주의 미 공군부대 데이브 힐과 연락했다. 데이브 힐은 피터슨에게 빨리 광주를 떠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 피터슨 목사는 데이브 힐에게서 ‘한국 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5) 2017년엔 5·18 당시 폭격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는 공군 조종사들의 증언이 나왔다. 문용동 전도사가 TNT 뇌관과 수류탄 공이를 제거했기 때문에 도청이 진압된 게 아니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5월 27일을 정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도청을 폭격해서라도 작전을 끝냈을 것이다.

문용동 전도사.

1980년 당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전남 장성에 살았지만,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4학년이던 형들은 광주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때만 해도 전남과 광주는 사실상 하나의 학군이었다. 늦어도 고등학교부턴 광주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게 시외 지역에 사는 이들의 생각이었다. 외가는 전남도청에서 9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라, 전두환 신군부가 계획한 폭격이 실행되었다면, 전남도청 지하에서 TNT가 폭발했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형들은 모두 폭사했을 것이다.

TNT와 수류탄의 뇌관과 공이가 제거되었을 뿐, 폭탄이 터질 가능성은 남아있었기에 문용동 전도사는 도청 지하를 떠날 수 없었다. 26일 밤 누나들과 형수, 친구들이 찾아와 도청에서 나가자고 했지만 조용히 거절했다고 한다. 문용동 전도사를 설득하기 위해 가족들과 동행했던 친구 윤상현 목사가 문용동 전도사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신학도로, 신앙의 양심으로 도청 지하실 무기고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잘못하면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광주시민과 계엄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무기고를 지키는 것이 신학도인 종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 죽으리라.”6) 문용동 전도사는 광주시민과 심지어 계엄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청에 남았다. 선량한 시민뿐 아니라 잔악한 계엄군마저 그것이 생명이라면 지키겠다는 게 문용동 전도사의 유언이다. “광주시민과 계엄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문용동 전도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를 닮았다. 예수께서 1980년 광주에 오셨다면, 시민에게나 계엄군에게도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 5:43-45, 새번역)

5월 27일 아침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지하 무기고를 지키던 문용동 전도사와 김영복은 투항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투항하는 이들에게도 계엄군이 총을 쏠 수 있기에 문용동 전도사는 김영복 앞에 섰다. 계엄군은 문용동 전도사에게 발포했다. “광주시민과 계엄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무기고를 지키”던 문용동 전도사는 마지막 순간에도 온몸으로 동료 김영복을 지키며 “우흉부 맹관 총창상, 좌전흉부 맹관 총창상, 우수지 관통 총창으로” 죽었다. 검시 결과 광주지검은 계엄군이 쏜 M16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했다.

“호남신학대학교 기숙사 앞의 느티나무” 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문용동 전도사 추모비.7) (사진: 필자 제공)

오랫동안 문용동 전도사는 프락치라는 오해를 받았고, 쿠데타 세력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보안사가 ‘카빈’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한 것이다. 계엄군이 쓰던 M16이 아니라 시민군이 쓰던 카빈에 의한 사망으로 왜곡해 신군부는 문용동을 자신들의 프락치로 전락시키고 싶었겠다. 게다가 문용동 전도사는 광주제일교회에서 고등학생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상무대교회 전도사였고, 광주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 교사였음에도, 오랫동안 교회에서 문용동이라는 이름은 금기어였다. 문용동 전도사는 악한 권력에겐 폭도로 조준되고, 민주 시민들에겐 프락치로 의심받고, 교회에선 금기어였다. 5·18 내내, 돌아가신 후에도 문용동 전도사는 어느 자리에서나 이방인이었다.

5월 26일 문용동 전도사를 만났던 윤상현 목사는 27일 밤을 새워 기도하다가 친구 용동을 만나는 꿈을 꿨다. “호남신학대학교 기숙사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몇몇 친구들이 함께 서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용동이가 자전거를 끌면서 다가왔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책가방을 건네주었다. 상현이,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숙제를 할 시간이 없네. 내일 학교에 오면서 내 숙제까지 해 올 수 없겠는가? 나는 그 책가방을 덥석 받아 들었다. 용동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전거를 타고 바삐 사직공원 쪽을 향해 달리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어이, 내 숙제 꼭 해 오게! 부탁하네.”(윤상현, 〈나의 숙제〉, 《새벽길을 간 이》, 391쪽)

문용동 전도사의 가방. (사진: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제공)
■ 주

1) 1980년 5월 13일, 마태복음 17장에 대한 문용동 전도사 설교, 〈세상을 향한 교회〉 중
2) 정회억, 〈5·18광주민중항쟁과 문용동〉, 故 문용동 순교기념사업회 엮음, 《새벽길을 간 이》(한들출판사), 275쪽.
3) 황석영·이재의·정용호 기록,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182쪽.
4) 김영복, 〈5·18 당시 도청 지하 무기고의 진실〉, 《새벽길을 간 이》, 325쪽.
5)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395쪽.
6) 《새벽길을 간 이》, 411쪽.
7) “추모비를 건립하였을 때는 본관에서 무등산이 보이는 곳(당시에는 학생회관 앞 식당 위)에 자리 잡았다. 후에 비석 옆에 느티나무 서있는 곳이 친구 윤상현 목사가 꿈에서 문용동 전도사를 만난 자리임이 확인되었다. 현재의 기숙사와 도서관은 이후에 건립된 건물이다.”(도주명 목사)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