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신학은 일상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412호 책과 사람] ‘일상의 신학자’라 불리는 소설가 메릴린 로빈슨

2025-03-01     메릴린 로빈슨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40여 년 동안 단 다섯 편의 소설만을 발표했지만, 우아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인간의 본질과 종교를 탐구한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또한 현대 소설가로는 드물게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를 담아낸 소설과 글들을 꾸준히 발표해 ‘일상의 신학자’라고도 불린다.”

작년 말 출간된 에세이집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오늘 우리에게 있는 경이의 좌표들》(비아)의 책날개에 적힌 메릴린 로빈슨(Marilynne Robinson, 1943-)에 대한 소개 중 일부다. 잘 정련된 시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그녀는 과작(寡作)의 소설가이지만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받은 영문학자이자, 탁월한 논픽션 작가이기도 하다. 소설로는 1980년 《하우스키핑》을 출간하고 20여 년이 지난 2004년에 두 번째 소설 《길리아드》를 펴냈으며, 2008년 《홈》, 2014년 《라일라》, 2020년 《잭》을 펴냈다. 《길리아드》부터 이후의 작품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인 ‘길르앗’에서 이름을 따온 미국 아이오와주의 가상 마을 ‘길리아드’1)와 관련한 인물들을 다루는 연작소설이다.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2회), 퓰리처상, 오렌지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나라에는 국내 최초로 제정된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을 2013년에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녀의 연작소설에는 두 목회자 가문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나오고, 성서 관련 주제와 소재가 직접적으로 다루어지는데도 비그리스도교인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비극과 은총이 뒤섞인 일상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빼어난 표현력 덕분일 것이다. 한국에는 《잭》을 뺀 네 권의 소설이 번역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는 메릴린 로빈슨의 첫 비소설 한국어 번역서로, 그리스도교 신앙인이자 칼뱅주의자, ‘리버럴’(정치적 자유주의자) 정체성을 한껏 드러내며 현대의 종교·역사·철학·정치·과학 담론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에세이로 가득하다. 매달 25일 발행하는 온라인 ‘그리스도교 전문’ 서평지 〈엠마오〉는 11호(2025년 1월)에서 이 책을 ‘엠마오가 추천하는 이달의 도서’로 선정해 서평과 메릴린 로빈슨의 특별기고를 실었다. 또한 〈엠마오〉는 이메일로 메릴린 로빈슨과의 서면 인터뷰도 진행했다. 본지는 제휴 콘텐츠로, 이 인터뷰를 아래와 같이 게재한다(2월 25일, 〈엠마오〉 12호에도 공개된다). 메릴린 로빈슨 관련 콘텐츠는 〈엠마오〉 11·12호(emmausbooksreview.stibee.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작가님의 작품은 주로 소설이었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는 한국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첫 에세이집입니다. 많은 작가가 에세이를 쓸 때 소설보다 가벼운 어조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님의 에세이는 매우 진지하고 사색적인 느낌입니다. 작가님에게 소설과 에세이 쓰기는 각각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소설이 자기만의 생명력을 지니기를 바랍니다.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고유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어떤 방향을 제시하고 어떤 선택은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과정은 어떤 면에서 이야기와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의도한 대로 써가는 것 같지만, 이야기가 발전하면서 이야기만의 내적 논리가 생기고, 그에 따라 제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최종 결과물은 온전히 제 작품이라고 해야겠지만, 에세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에세이를 쓸 때는 제 생각과 신념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합니다. 에세이는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은 유혹, 제 생각을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 소설이든 에세이든 작가님의 글은 신학적 질문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신앙, 그리고 이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신학은 아름답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특히 신학이 모든 존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그 웅장한 시도를 사랑합니다. 좋은 신학은 우주의 장엄함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일상의 아주 세부적인 부분들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학은 인간의 실패를 품위 있게 만들고, 인간 생명과 삶을 드높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여정에 함께하는 경이로운 동반자로 만듭니다. 이러한 관점은 분명 제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 담긴 깊은 의미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신학에 대한 저의 이해와 저의 문학 활동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학과 문학 둘 다 우리라는 존재가 지닌 무한한 깊이와 풍요로움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 ‘길리아드’ 연작을 통해 작가님은 한 마을의 이야기를 여러 관점에서 들려주셨습니다. 이처럼 같은 공간과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사 방식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특정 인물들이 제 마음에 강하게 남았고, 그들이 자신만의 책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에는 은총, 섭리, 인문주의, 칼뱅주의, 자유주의, 인간의 존엄성 등의 주제가 담겨있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은총이야말로 다른 모든 주제(섭리, 인문주의, 칼뱅주의, 자유주의, 인간의 존엄성)의 근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섭리는 은총의 한 모습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인문주의 역시 은총의 표현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로 서로에게 많은, 심각한 상처를 입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분의 은총에 기대어, 그분의 작품으로서 이루고 행하는 최선의 것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은총이 다른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여기며 관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은총이 있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존엄성이나 가치를 재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들과 우리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가 저의 주요 주제인 이유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가치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 미국의 그리스도교는 한국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작가님은 책에서 교파의 구분과 유산이 신중한 보존 없이 사라질 위험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셨는데요. 칼뱅주의나 청교도주의의 유산 중에서 한국의 칼뱅주의 공동체가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여 지켜나가야 할 가치나 원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미국에서 칼뱅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인, 혹은 한국계 그리스도교인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교인 감소나 다른 이유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아름다운 교회 건물들을 힘을 모아 지켜내고 있지요. 그들은 단순히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 전체를 위해 소중한 섬김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대신하려 했던 근현대의 가치들이 얼마나 부적절하고 공허한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때 사람들은 다시 교회를 찾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분들의 헌신과 신실함 덕분에 이 거룩한 공간들은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겠지요.

칼뱅은 《기독교강요》 시작 부분에서 인간이 가진 사고력, 지각 능력, 손재주와 같은 특별한 능력들을 설명하면서, 이들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을 닮았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가 전한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들 사이의 어떤 차이도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만남에서 경외심과 경이로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소중히 간직하고 깊이 이해해야 할 놀라운 유산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런 태도를 지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칼뱅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기꺼이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2015년 8월의 ‘에든버러 국제 도서 축제’(EIBF)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북 페스티벌이다. (출처: EIBF)

- 최근 한국에서는 대통령 탄핵과 그에 앞선 계엄령 선포가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야당, 특히 좌파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관 짓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엄령을 지지하고 탄핵에 반대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작가님이 언급하신 미국 그리스도교인들의 우려가 이와 평행선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맥락을 설명드리자면,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이 좌파 이데올로기를 두려워하는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 많은 그리스도교인이 북한 정권하에서 박해를 받아 남한으로 대거 이주했고, 한국전쟁 중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오늘날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교인의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넘어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치에 헌신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미국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미국 ‘그리스도교인들’이 현재 지지하는 세력이 결국에는 그들을 배신할 것이라고 봅니다. 요즘 기술 발전이 그리는 미래는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면서 인간다움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새로운 체제에서 자신들이 특별 대우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실제로 이들은 정치인들, 기술 기업 지도자들과 놀랍도록 비슷한 성향을 보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전통에 무관심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깔보며, 오직 돈만 숭배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젊은 세대가 점점 더 이런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희망적인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매우 어렵고,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따라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이런 윤리적 관점을 전혀 공유하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이 더욱 어려워지지요. 북한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철저히 통제된 폐쇄 사회로, 외부 세계를 두려워하고 적대시하도록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사회에서는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개선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빈곤하고 통제된 삶 때문에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은 정말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이 북한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적대감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런 이해만으로는 실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미국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작가님의 첫 번째 작품인 《하우스키핑》이 출간된 지도 45년이 지났습니다. 처음 소설을 쓸 때의 고민과 지금 소설을 쓸 때의 고민을 비교해볼 때 달라진 점이 있는지요? 그리고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나 탐구하고 싶은 문학적·신학적 질문이 있으신가요?

《하우스키핑》을 쓸 때 저는 두 가지, 기억과 은유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 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느꼈지요. 은유는 모든 것이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였고, 기억은 부활을 암시하는 징표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이 나라가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책무를 꽤 잘 수행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쓰라린 깨달음을 얻고 있네요. 그래도 신학은 여전히 무궁무진한 탐구의 대상입니다.

메릴린 로빈슨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의 샌드포인트. 첫 소설 《하우스키핑》의 배경지이며, 호수와 숲과 산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 주

1) 메릴린 로빈슨은 2013년 9월 26일 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서에서 길리아드는 치유와 재생의 공간이다. 초기 미국 정착민들은 노예제 같은 죄악에 물들지 않은 선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담아 자신들의 마을 이름을 길리아드로 붙인 경우가 많았다. 선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과 이로 인한 실망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공간이 길리아드다.”


진행 조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 번역자
번역 민경찬 〈엠마오〉·비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