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체에서 13년 동안 일하며 만난 반짝이던 순간들 ― 청어람ARMC에서 사임하는 오수경 대표

[412호 현장과 사람]

2025-03-01     오수경
ⓒ복음과상황 정민호

활동가로 일하다 보면 함께 현장에서 애쓰던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형편과 떠나는 이유를 묻고도 싶고, 앞으로의 인생 여정도 축복하고 싶은데요. 그저 쳇바퀴처럼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바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기독 시민 교양 아카데미 ‘청어람ARMC’에서 13년을 보낸 오수경 대표의 사임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후회를 더하기 전에 오랜 시간 기독운동을 함께한 동료로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서울 상수동 청어람ARMC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 대표님, 안녕하세요. 독자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청어람ARMC(이하 청어람) 오수경 대표입니다. 인터뷰는 어쩐지 어색하고 민망하네요.(웃음) 그래도 인터뷰는 독자님들께 말 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복음과상황을 워낙 좋아하고요. 큰 영광이라 생각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임합니다.

- 그동안 청어람에서 오래 일해 오셨는데요. 언제부터 일하셨나요?

소위 청어람 하면 ‘명동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은데요. 그때인 2011년부터 일했으니 햇수로 14년째입니다.

- 학복협(학원복음화협의회) 시절을 거쳐 청어람(당시 청어람아카데미)으로 오셨죠? 당시 일터를 옮기시면서 어떤 설렘이 있으셨나요? 학복협은 제법 역사가 있지만 당시 청어람은 신생 단체에 가까운 곳이었잖아요.

학복협은 복음주의 청년 운동 연합 기관인데요. 7년을 일하고 퇴사하기로 했을 때 청어람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 청어람에서 온라인 매거진 분야를 개척할 계획이 있었는데, 이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어요. 제가 학복협에서 여러 일을 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일이 〈물근원을 맑게〉라는 학복협 회지를 제작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사실 그전부터 청어람이 제게 낯선 단체는 아니었어요. 처음 만들어질 때 행정과 조직 관련해서 조언을 구하러 학복협에 오시기도 했거든요. 청어람에서 하는 강좌들에 관심이 많아 직접 수강하기도 했고요. 당시 청어람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단체였고, 저도 선망하는 부분이 있어서 한 번쯤 일해보고 싶었어요. 마침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와서 설렘이 대폭발했죠. 굉장히 기쁘게 이직했었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저도 그동안 청어람에서 했던 수많은 강의나 포럼, 모임 등이 생각납니다. 대표님께서 지내왔던 청어람에서의 시간들 중 가장 반짝이거나 기억에 새겨진 순간은 언제일까요?

좋았던 순간이 너무 많으니 오히려 생각이 안 나네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제가 1년 동안 혼자 청어람을 운영하던 시절(2012년)에 했던 기획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저만 남게 되었던 때였는데요. 모든 행사를 혼자 기획하고 진행해야 했었죠. 특히 옥명호 대표님(현 잉클링즈 대표)을 설득해 읽기, 쓰기, 편집자 과정을 시리즈로 기획한 적이 있었거든요. 몇 개월 동안 진행되는 호흡이 긴 프로젝트였습니다. 많은 분이 수강해 주셨어요. 저에게도 개인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고, 그때 맺은 인연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복상과 맞물려있기도 한데요. 2012년은 복음주의 논쟁이 한창 활발하게 이어지던 때였어요. 저희도 거기에 맞춰서 콘퍼런스를 기획했어요. 그때 했던 이야기들이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 생각과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나왔던 문제의식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청어람이 가나안 성도를 위한 활동도 하고 있지만, 교회를 위한 프로그램도 많이 기획했거든요. 그중 매년 진행하던 청년 사역자 콘퍼런스가 있었어요. 청년 트렌드를 소개하는 콘퍼런스였어요. 하루 진행하는 거였는데, 사역자분들이 새벽부터 기차 타고 올라오시고 교회에서 단체로 오시기도 했어요. 보람이 많이 남았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프로그램은 2016년에 진행한 월례 강좌입니다. 지금처럼 혐오가 사회적 문제가 되기 시작한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요. 이슬람·동성애·여성·종북 네 가지 주제로 ‘혐오와 포비아’라는 큰 키워드를 가지고 강의를 진행했어요. 그중 여성 혐오 주제가 5월에 예정돼 있었는데, 강사님 사정으로 몇 주 미뤄져 6월 첫째 주에 열게 되었죠. 그사이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이 발생한 거예요. 충격적이고 많이 놀랐지만, 다행히 콘퍼런스를 통해 여성 혐오적 맥락을 잘 살펴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그때가 어느 정도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이후 백소영 교수님과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시리즈 강좌도 열었고, 그해 하반기에 페미니즘 이슈 북클럽도 했습니다.

- 청어람 행사를 기획한 시간이 대표님께도 차곡차곡 영향을 주었던 거네요.

사실 저에게는 청어람이 직장이기도 했지만 저의 신앙과 지식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게 된 학교 같기도 했어요. 굉장히 좋은 공동체였다고 생각해요.

- 당연히 어려운 순간도 많으셨겠죠?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앞서, 1년 동안 혼자 청어람을 운영했던 적이 있다고 언급했었는데요. 입사하고 바로 다음 해였거든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주위에서는 1년을 잘 유지만 해도 충분하다고들 말씀해 주셨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두려운 마음에도 정말 열심히 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긴장 상태였던 것 같아요. 하루는 다음 날이 행사인데 제가 욕실에서 넘어진 거예요. 대체할 인력이 없잖아요. 그래서 병원도 가지 않고 출근했어요. 힘들었지만 또 그렇게 하면 보람이 공존하잖아요. 가장 많이 힘들기도 하면서, 또 가장 많이 성장한 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혼자 한다는 걸 아시는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떤 기획 때문에 부탁드리면 대부분 거절하지 않고 수락해주셨죠. 내 일처럼 도와주시는 분들의 도움으로 1년을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웃음)

그리고 청어람 역사를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죠. 다들 아시겠지만 2019년에 전 대표의 문제로 청어람이 존폐 위기에 놓였을 때입니다. 개인적 상처도 깊었고 청어람을 신뢰하던 분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도 결코 무관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수습을 해야 하잖아요. 그해 8-9월은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많은 분이 비난하셨고, 실망했다고 하시면서 떠나셨죠. 후원을 해지하는 분도 많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저희에게 힘을 주신 분들을 새롭게 만나게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지인은 저에게 ‘청어람이 없어지지 않게 하려면 뭘 해야 하나요?’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럼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바로 후원을 시작해 주셨어요. 그렇게 새로 후원해주신 분도 많았습니다. 당시 너무 힘들었지만 청어람이 누구 한 사람의 운동이 아니었구나, 그럴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어람의 역사는 지난 시간 속에서 형성된 가치와 연결된 사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구나 생각하게 되니 힘이 났어요. 그리고 사과문부터 시작해 당시 상황을 공적으로도 최대한 투명하게 공개하고자 애썼어요. 나중에 지나고 나서 그렇게 대처했던 부분은 많은 분이 인정해 주시더라고요.

- 이런저런 문제로 휘청거리는 비영리단체가 한둘이 아니더라고요. 공적 자세로 문제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단호하게 해결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먼발치에서 청어람을 지켜보았지만 그때 잘 견디셨다, 잘 해내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단호하게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다만 제 마음도 돌보고 동료들 심리 상담을 받게 하고 싶어요.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당시엔 생존에 급급해서 놓쳤어요. 그 여파가 좀 오래 지속되지 않았나 싶어요. 개인적으로도 동료들에게 두고두고 마음이 아픈 사건이었어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청어람을 ‘복음주의’라는 한 단어로 규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복음주의 운동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했었고 제가 일했던 학복협이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이기 때문에 복음주의는 제가 딛고 선 땅과 같은 곳이었어요. 청어람이 복음주의 단체인가 아닌가는, 사실 저도 헷갈리는 부분이에요. 현재 청어람이 다루는 어떤 주제는 복음주의 영역에서 부담스러워하는 건 맞거든요. 그렇다고 복음주의 단체가 아닐 필요는 없겠죠. 저는 청어람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다채로운 면이 있는 단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청어람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레이첼 헬드 에반스가 ‘진화하는 신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청어람도 지금까지 다양한 상황 가운데 다양한 분들과 공명하면서 유연하게 진화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청어람의 활동은 진화의 여정 가운데 있는 것 아닐까요? 청어람이 어떤 경계에 있는 분들한테는 그 경계를 넓히는 일도 해왔고요. 또 바깥으로 나간 느낌 때문에 외로워하는 분들한테는 ‘저희도 같이 있어요’라고 이야기해주는 역할이 되어드리길 기대하면서 프로그램을 열심히 만들어왔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20년 넘게 복음주의 운동 영역에 있으면서, 청어람이라는 ‘경계’에서 활동하면서 여성·퀴어 등 복음주의가 다루기 부담스러워하는 주제들에서도 목소리를 내주셨는데요. 그간의 활동 가운데 느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청어람이 유연한 조직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구성원의 관심사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거든요. 청어람이 누군가에게는 경계선일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가장 안전한 영토였던 것 같아요.

저를 오래 알아온 분들은 제가 페미니즘과 퀴어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모르셨을 거예요. 저는 보수 교단에서 자라고, 보수적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훈련받고 활동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제가 여러 사건, 상황, 사람과 부딪히며 그때와 다른 신앙을 가지게 되었죠. 저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제 신앙이 진화했고, 넓어졌다고 생각해요. 특히 20년 동안 다니던 교회를 나오고, 청어람을 만나고, 페미니즘과 퀴어에 관해 배운 게 제 신앙 여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변화 동기예요.

감사하게도 제 경험과 변화를 공적으로 표현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죠. 그게 누군가를 불편하게 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용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어요. 이 영역에서 연차가 쌓이고 직책이 높아지니, 작을지라도 제가 가진 영향력을 기존 복음주의 운동에서 소외된 주제를 드러나게 하는 데 쓰고 싶어서 일부러 더 떠들어댄 적도 많았어요. 그래서 ‘적’도 많이 생겼고 벽에 대고 외치는 느낌도 들어서 고독해졌지만, ‘편’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후회는 없어요. 다만 조금이라도 너그럽게 말했더라면 좋겠다는 반성은 있습니다.

- 복음주의 운동에 바라는 점, 변화되었으면 하는 점도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 사회 전체가 담론장이 다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해져서 어떻게 보면 장기 내전 상태로 들어간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요. 시대와 상황이 변했으면 운동의 언어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복음주의 운동 특유의 거대 담론의 언어가 중요한 지향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못 지키는 것 같아요. 성소수자들은 계속 밀려나고 페미니즘은 더더욱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고요. 그러는 사이 극우적 신앙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게 된다고 했을 때 복음주의가 ‘우리는 그래도 저 사람들과 달라요’ ‘저들이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라고 말하는 식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생태계가 망가지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는 강력한 대항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전혀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운동의 언어와 어젠다를 발굴하고 소신껏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 이제 청어람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시는데요. 이건 좀 직접적으로 여쭤볼게요. 왜 청어람을 떠나기로 하셨나요?

때가 되었다고 할까요? 가끔 농담 삼아 ‘어쩌다 대표’라고 저를 표현했는데요. 정말 느닷없이 대표가 되었어요. 2019년 위기 상황 당시, 저희는 사고 수습과 단체의 방향성 전환을 동시에 해야 했었는데요. 청어람 조직을 가장 오래 경험한 여성 비목회자인 제가 대표가 되는 게 가장 자연스러웠어요. 그때 저는 대표를 오래 할 생각이 없었어요. 청어람이 어느 정도 정상 궤도로 복귀하면 그만둬야지 생각했죠. 지난 4년 동안 코로나를 겪으며 단체를 유지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전하며 빌드업하고 나니 어느새 ‘20주년’이 코앞에 닥쳤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20주년을 가장 청어람답게 맞이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어요. 제가 경험한 청어람은 반걸음 정도 앞서가는 모험을 선택하는 곳이었고, 그게 안정 지향적인 저를 힘들게 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어요.

그렇다면 20주년에 내디뎌야 하는 발걸음은 뭘까 고민했을 때 내린 결론은 ‘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상징적 인물이 단체를 과대표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흘러오며 새로운 역동을 만들어내는 구조. 우리 단체가 상징적 인물로 흥했다가 망할 뻔한 곳이었기에 더더욱 이런 구조가 중요했어요. 1기 대표, 2기 대표… 이런 식으로 역사성을 갖는 것도 중요했고요. “청어람이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새로워지겠습니다!” 말하고선 아무 변화 없이 하던 걸 계속한다면 누가 믿어주겠어요. 4년 정도 청어람의 변화를 각인시켰으니, 이제는 또 변화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변화 키워드는 ‘흐름’이라고 제 나름대로 방향을 잡았어요. 가장 오래 고인 물이 흘러가야 새로운 물이 흘러온다는 생각이랄까요.

개인적으로도 이제 쉬고 싶었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20년 넘게 한 번도 못 쉬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몸도 마음도 늘 긴장 상태였어요. 2019년부터 지금까지의 5년은 더더욱 그랬고요. 청어람의 변화 시기와 저의 변화 욕구가 잘 맞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때가 되어 떠납니다.

- 사임 이후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복상 독자들께도 마무리 인사 부탁합니다.

우선 저에게 ‘텅 빈 시간’을 선물로 주기로 했어요. 오랫동안 상황과 조직의 필요에 최적화한 삶을 사느라 저 자신을 소외시켜 왔더라고요. 쉬는 기간 동안 저 자신과 좀 친하게 지내고 싶고요. 바쁘다는 핑계로 못 만났던 지인들 만나고 좋아하는 드라마도 실컷 보고, ‘읽어야 할 책’이 아닌 ‘읽고 싶은 책’도 읽으며 지내볼까 해요. 그러다 보면 다음 한 걸음 디딜 힘이 생기겠죠. 다음 스텝은 그때 고민하려고요.

10년 정도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마감 노동자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복상은 제 기고 인생의 고향과 같은 곳이에요. 공적 글쓰기 경력이 전무하던 저에게 지면을 맡겨주신 고마운 곳이죠. 그런 복상에 제 인생의 중요한 매듭을 공유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저의 울퉁불퉁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청어람 근처에서, 복상 애독자로서 얼쩡거릴 거라 떠난다는 생각이 아직 별로 들지는 않네요. 하지만 드라마로 치면 시즌1의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이라 상상하며 인사드릴게요.

예전에 책 모임에서 읽은 《한나의 선물》의 한 대목이 생각나네요. 암으로 어린 딸을 잃은 후 엄마가 쓴 책이에요. 저자는 어린 한나의 일생을 이렇게 기록해요. “삶을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은 얼마나 오래 살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충만하게 살았냐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빌려, 오늘을 충만하게 사시길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응원할게요.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