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과 영원

[413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5-03-31     이한주

4월에 결혼하는 청년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왔다가 편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혼집으로 이사하려고 짐 정리를 하다 고등학생 때 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발견했단다. 편지에는 우정이 담긴 말과 함께 “우리 열심히 살자. 세월호 아이들의 몫까지”라는 친구의 다짐이 쓰여있었다. 편지를 읽고 청년은 마음이 찡해져 한참 동안 그때를 생각했다. 4월에 부부가 되는 커플은 10년 전 고등학생이었다. 문득, 잊고 있던 친구가 생각나듯 세월호 아이들이 떠올랐다. ‘살아있었으면 어른이 됐겠구나, 지금쯤 결혼할 나이구나.’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소설 《오래된 빛》(문학동네) 주인공 앨릭스는 노년의 연극배우다. 10여 년 전 딸을 잃은 충격으로 은퇴 상태에 있던 그에게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 상대역인 젊은 여배우 돈 데번포트는 인기 스타지만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우울에 빠져있다. 그녀가 촬영 도중 자살을 시도하자 앨릭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던 자신의 딸을 떠올리며 돈 데번포트와 이탈리아 해안을 찾아간다. 딸이 절벽에서 몸을 던졌던 그곳에서 앨릭스는 오래된 숙제 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가 죽으면 그게, 우리였던 그 모든 게 어디로 갈까? 내가 사랑했으나 잃어버린 그 모든 사람을 생각할 때면 나는 어둠이 깔리는 정원에서 눈 없는 조각상 사이를 헤매는 사람과 같다. 주위의 공기는 부재들로 웅얼거리는 듯하다. … 우리 사이에 있는 이런 것들, 이런 것들과 또 수많은 다른 것들, 많고 많은, 그녀의 이 남은 것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의 저장소이자 유일한 보존자인 내가 사라지면 그건 어떻게 될까? (233쪽)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은 마주칠 눈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죽음이 가져간 것들에 대해 묻는다. 우리였던 그 모든 것은 어디로 갈까? 있었던 것들은 그냥 없어지는 것인가? 있다 사라진 것들은 단지 기억에 남아있을 뿐, 그 기억을 저장하고 보관하던 나까지 사라지면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오래된 질문에 부재의 현실만 웅얼거릴 뿐 세상은 조각상처럼 침묵한다. 사랑했지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은 누구나 오래된 빛(Ancient light)을 볼 것이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주는 빛. 고대로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보았던 오래된 빛이다. 인간이 이 빛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단편 〈그 개와 혁명〉으로 2025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예소연 작가는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다. 예소연 작가가 최근 출간한 《영원에 빚을 져서》(현대문학)는 작가의 20대 시절이 반영된 작품으로, 10년 전 해외 봉사 활동을 함께하며 친해진 30대 여성들 이야기다. 대학생이었던 동이와 혜란, 석이는 선교사가 세운 캄보디아 ‘바울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럭저럭 잘 지내던 어느 수요일, 석이는 한국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며 휴대폰을 보여준다.

스크린 속에는 반쯤 침몰한 배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소리 좀 키워봐, 혜란이 말하자 석이는 소리를 최대로 키웠다. 사고 접수 후 해양 경찰이 출동 및 구조에 나섰다고 했다. 안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구조에 나섰다는 내용까지 들은 뒤 다행이다, 별일이 다 있네, 하며 다시 누웠고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혜란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32쪽)

나 역시 그날, 그때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나도 ‘다행이다. 별일이 다 있네’ 했었다. 그러나 별일 아닌 줄 알았던 사건은 참사가 되어 처음 경험해보는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고, 대상 없는 배신감과 말로 할 수 없는 수치심이 불쑥불쑥 일어나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세 사람은 현지 학생에게 2010년 캄보디아 꺼삑섬이란 곳에서도 300명이 넘는 사람이 압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호와 캄보디아 압사 사건이 비교되는 게 못마땅해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선을 긋는다.

그즈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혜란은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된 반면, 신앙과 무관하게 보였던 석이는 일요일은 물론 금요일, 토요일까지 교회에 나가는 열성적인 신자가 된다. 혜란은 캄보디아 봉사 활동에서 돌아온 후로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고 “신이 있다면 세상이 이렇게 될 리 없어”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석이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신과 맞는 교회를 찾아다녔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 석이는 캄보디아에서 겪었던 변화에 대해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참 세상일이라는 게 신기하다고, 전혀 신을 믿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석이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간다고 믿어야만 산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라고. 나는 그 말이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93쪽)

참사 후에 신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이 있고, 여전히 신을 믿는 사람이 있고, 더 열심히 신을 믿는 사람이 있다. 내가 본 것은 이 세 종류의 사람뿐인데 소설의 석이는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후에, 세상에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신을 믿는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비극을 경험한 석이는 신에게 비극 이후를 기대한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좋은 곳에 가게 하는 신, 죽은 사람을 비존재와 무의미로 몰아넣지 않는 신을 믿고, 죽은 사람이 산다는 믿음이 있어야 산 사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석이는 “잊히지 않는 것이 바로 영원”이라 말하는데 결국, 잊고 잊히는 인간에게는 영원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 이 말은 인간이 신을 믿고, 그 신에게 영원을 빚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비극 앞에서도 그거랑 이것은 다르다 선을 긋고,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일에는 쉽게 눈을 감는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것이 영원이라 믿는 사람은 잊지 않기 위해 영원에 빚을 지고, 영원에 빚을 져서 슬픔을 견딘다. “틈틈이 슬퍼하고 그 슬픔을 평생 간직하겠다는 태도야말로 나 그리고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책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이다. 이 구절을 쓰며 작가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좋은 곳에 있을 그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신을 생각했을 것 같다.

 

2020년에 필립 K.딕상을 받은 미국의 SF 소설가 세라 핀스커 소설집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창비)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밌는 작품이 많다. 그중 하나인 〈기억살이 날〉에는 기억과 관련한 흥미로운 설정이 나온다. 끔찍한 전쟁이 지나간 어느 시대, 인류는 특정한 기간의 기억을 삭제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다. ‘베일’이라 불리는 이 기술로 참전 용사들은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을 지운 채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1년에 딱 하루, ‘기억살이 날’이 되면 참전 용사들은 전쟁의 기억을 되찾고 군복 차림으로 종전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한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이들은 모여서 계속 전쟁의 기억을 지우며 살지, 아니면 다시 기억을 되찾을지 투표를 하는데 매년 많은 표 차이로 기억을 지운 채 사는 쪽으로 결정된다.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전쟁은 지워버리고 싶은 비극이다.

소설 주인공 클라라의 엄마도 참전 용사다. 군인이었던 그녀는 전쟁에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전쟁의 기억을 되찾는 쪽에 투표하는 소수다. 그녀가 클라라의 아빠를 만나 사랑을 한 곳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기억과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사한 아빠에 대해 알 수 있는 클라라는 기억을 회복한 엄마에게 아빠가 주둔지 어린이들과 어울려 공놀이와 땅따먹기를 하던 좋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클라라가 아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그때, 기억살이 날은 끝나고 엄마는 다시 기억을 잃어버린다. 클라라는 나쁜 기억과 함께 좋은 기억도 감춰버리는 베일이 거두어질 날을 기다린다.

그럼 나는, 어쩌면 다른 엄마에 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아빠를 기억하는 사람, 언젠가 나에게, 아빠와의 기억이 엄마가 잃어버린 전부만큼 가치있는 일이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 이다음 해에는 엄마에게 그 질문을 먼저 하는 걸 잊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62쪽)

소설을 읽으며 2014년 4월을 온 국민의 기억에서 지우는 상상을 하다, 그러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괴롭고 슬픈 날들을 지워버렸을 때 나쁜 기억과 함께 좋은 기억도 사라졌다는 걸 알고 놀랄지 모른다. 끔찍한 전쟁 중에도 사랑을 하고, 아이들과 놀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사건이 있다. 다 잊어버리고 싶은 나쁜 기억이 없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좋은 이야기들도 있다. 어쩌면 시간이 아픈 기억을 견딜 힘을 선물할 수도 있겠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생각하며 신혼부부가 될 젊은이들의 행복을 기도하는 4월이다. 참사에 어떤 뜻이 있는지, 그 모든 것이 어디로 갔는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잘 지켰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없었으면 좋았을 그날부터 시작된 새로운 삶이 있고, 잊지 못할 기억과 맺어진 인연이 있다. 이것은 오래된 빛에 생명을 비추고, 영원에 빚을 져 슬픔을 견디는 부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