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사이에서, 중용, 화해, 조화의 길을 찾다

[413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2025-03-31     이재근
이하 사진: 템플턴상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2000년 4월 19일,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회자 중 하나로, 20세기 한국 역사 거의 전부를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살아낸 추양(秋陽) 한경직(韓景職, 1902-2000)이 사망했다. 그는 해방 직후 1945년 겨울에 월남하여 남산 근교에 영락교회(당시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한 후, 1973년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될 때까지 28년간 영락교회에서 목회하며 이 교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이끌었다. 은퇴한 후에는 25년가량 남한산성의 작은 집에서, 그의 인격과 삶을 대표하는 단어로 널리 알려진 ‘청빈’과 ‘겸손’의 삶을 살다가 2000년에 98세로 소천했다. 사망 당시 그가 남긴 재산은 체력이 쇠한 후 타고 다닌 휠체어, 지팡이, 겨울용 털모자, 옷가지와 생필품 얼마가 전부였다고 알려졌다. 4월 24일 오전 9시에 영락교회에서 열린 장례예배에는 추모 인파 1만여 명이 몰렸다. 총회장(總會葬)으로 치러졌으므로, 장례식장과 장례예배를 찾은 이들 중에는 영락교회와 통합 교단 인사가 많았다. 그러나 그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인사에다, 연합에 힘쓰며 교파와 종교계를 초월하여 널리 존경받았던 만큼, 각 개신교단 관계자가 조문했고, 당시 영부인 이희호 여사 등 정치계 인사도 빈소를 찾았다.1)

한경직이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2001년 4월 17일에 열린 1주기 추모세미나에서 한국사학자 이만열은 글의 서두를 한경직에 대한 세간의 평가로 열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한경직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교회가 우러러보는 지도자였다. 당시 한국 개신교계 언론 기자 125명은 가장 존경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로 한경직을 꼽았다. 서양 사람들도 그를 슈바이처와 테레사 수녀에 버금가는 성자로 인정했다. 한국 교계 지도자들이 그를 ‘영원한 청교도’ ‘선으로 악을 녹이는 목사’ ‘동양의 중용과 순리, 기독교의 화해, 한국의 군자, 서양의 신사 같은 것이 그에게는 조화를 이룬 분’ ‘흠 없는 것이 흠이랄 수 있는 그런 분’ ‘목회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최고봉에 서신 분으로 단언되는 분’ ‘신앙은 복음주의이고 교회운동은 에큐메니컬주의를 지킨 화평주의자’ ‘민족과 국가까지도 그의 목양의 범위 안에 포함시킨 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인격은 어떤 것이냐라고 생각할 때 떠오르는 바로 그런 분’ ‘성자라고 불려졌기에 이 나라 전체가 자랑스럽게 된 그런 분’으로 평가하고 존경한다고도 밝혔다. 이처럼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는 신앙과 삶과 인격 셋 다 비범했던, 한국 목회자의 사표(師表)로서 추앙을 받았다(이만열, 9쪽).

그러나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 세기를 오롯이 살면서 한국사와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이정표마다 눈에 띄는 흔적을 남긴 거물인 만큼, 성자라는 전설적 면모를 넘어서, 그가 한국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사망 1주기인 만큼 평가가 좀 이르다고 주저하면서도(10쪽), 이만열은 한경직을 열린 보수에 입각한 건전한 중도성을 지향한 지도자로 평가한다(45쪽). 한경직 사망 후 7년이 지난 2007년에 열린 제3회 한경직 목사 기념강좌에서 이만열의 2001년 발제와 유사한 주제, 즉 ‘한국교회사에 있어서의 한경직 목사의 위치’에 대해 발제한 교회사학자 김영재도 1950년대 장로교회 연쇄 분열, 1970년대 유신 정권 시대에 한경직이 취한 입장들을 살피며, 그를 보수적 신앙관을 가졌으나 관계와 태도에서는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교인, 정치인, 사회인 모두를 포용하려고 노력한 한국교회와 복음 운동의 원로로 평가한다. 보수 장로교단인 고신과 총신, 합신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했음에도, 학문과 신앙의 태도에서 상당한 포용성을 가진 역사신학자로 알려진 김영재는 한경직의 에큐메니컬한 면모가 “교회사에서 위대한 교부들의 사상과 행적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김영재, 590-592쪽). 한경직은 이런 점에서 보수적 복음주의와 포용적 에큐메니컬 양자를 아우르는 중도성을 교단 정체성으로 삼은 예장통합 교단의 방향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던 만큼, 한경직은 생전에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집필하라는 권유를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라며 수차례 고사하던 그는 1975년에 처음으로 외손녀 부부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회고를 받아 적게 했다. 이후 1981년에도 두 차례 테이프 녹음을 남겼다. 2000년대 이후에는 이런 회고를 바탕으로 자서전 성격의 여러 책과 문서들이 발행되었다. 아래 내용은 주로 1975년 회고 노트(이하 ‘놀라운 은혜’)와 1981년 7월 29일 테이프 녹화본(이하 ‘나의 감사’)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평북 시골마을 소년, 세계인이 되다

한경직은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음력 1902년 12월 29일에 태어났다. 책과 인터넷 자료 중에는 그가 1903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력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음력 생일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어나 살았던 자작(自作)마을에는 집이 20여 호 있었는데, 한씨 대부분과 김씨 일부가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아버지 한도풍(韓道豐)과 어머니 청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그에게는 누나와 두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두 동생은 어린 시절에 홍역으로 일찍 사망했으므로, 두 남매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자기 집안이 아주 부유하지는 않아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던 자작농 집안이었다고 밝히는데, 흠잡을 데 없이 성실했던 농부 부모의 수고 덕분이었다고 말한다(놀라운 은혜, 9쪽). 그러나 친모는 그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한다. 약 1년 후 계모가 집으로 들어오지만, 계모는 전처의 자식들도 자기 자녀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한경직은 부친과 두 모친 모두가 자신과 형제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었고 가정에는 불화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한다(15-18쪽).

특이한 것은 그가 자란 벽지 시골에도 일찌감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1890년부터 평양에서 선교를 시작한 새뮤얼 마페트(Samuel Austin Moffett, 마포삼열)가 평양과 주변 평안남도 지역에서 전도했는데, 이 시기 신자가 된 이들이 한경직이 태어나던 무렵에 자작마을에도 교회를 세웠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오촌과 육촌 친지 중에서 이미 기독교인이 된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어린 아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다. 마을의 자작교회에서 3리(1.178km) 정도 떨어진 양수리에는 마페트와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진광(眞光)소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그가 자작교회와 진광학교를 다니던 시기에는 이 지역 순회전도 담당자가 1901년에 한국에 온 윌리엄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방위량)였는데, 한경직은 나중에 진학, 유학, 재정 확보, 귀국 후 가족 정착 과정에서 블레어 부부로부터 큰 도움을 받게 된다(10-15쪽).

소학교에 다니던 열세 살에 한경직은 이웃 마을의 세 살 연상 김찬빈과 혼인을 치른다. 조혼 관습을 따른 것이었는데, 그의 부친이 어려서 양친을 여읜 탓에 당시 기준으로 만혼하여 아들만은 일찍 장가보내겠다고 결심한 탓이기도 했다(20쪽).

소학교 8년 과정(신상소학 4년, 고등소학 4년)을 월반하여 6년 만에 졸업한 한경직의 진로를 놓고 아버지와 친지들은 서울 배재, 평양 숭실, 정주 오산을 고려하다가 결국 오산학교로 보내기로 결심했다. 집에서의 거리는 평양 숭실이 더 가까웠지만 오산에는 유명한 민족지사 기독교인 이승훈과 조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입학한 1916년 봄은 1911년에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고 조작하여 기독교인들을 대거 투옥하고 고문한 105인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승훈은 그때 주모자로 몰려 징역을 살다가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학교에는 신앙과 애국심을 결합한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이 흘러넘쳤다. 이런 정신을 배운 청소년기 한경직은 오산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학생회원으로서 전도대 활동에도 열심을 냈다. 3년이 지난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기독교계 민족대표 수장이 이승훈이었으므로, 오산학교 건물은 독립운동 직후 전소되고 다수의 직원이 수감되며 휴교에 들어갔다. 한경직은 졸업식도 치르지 못하고 귀향해야 했다(21-28쪽).

귀향 후 그는 진남포의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며 상업을 배우다, 평양 북쪽의 남산 모루교회가 운영하는 영성(英成)학교에서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다. 그러나 평양으로 오가는 중에 자주 마주친 장로회 선교회들의 연합 기관인 숭실대학이 그의 학구열을 자극했다. 1년 반 후 그는 숭실대학에 입학했다(30-32쪽).

숭실에서 이학(자연과학)을 전공한 그는 오후 2시경 수업이 끝난 후에는 주로 블레어 선교사 집에서 사무 일을 보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주일에는 창동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고, YMCA 고아원 봉사와 시골 전도, 평원군 출신 학생들의 모임인 평원학우회, 교내·평양·전국 단위로 열린 웅변대회에 참여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 출석과 봉사에 열심을 냈던 그가 목회자 소명을 확인한 사건은 블레어 선교사 가족을 따라 1923년 여름에 황해도 소래 구미포 해안에 갔을 때 일어났다.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찾는 피서지였던 이곳 해안에서 산책하며 기도하던 중에,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종이 되라는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진로를 수정하기로 한 그는 1925년 3월에 이학과 전공으로 숭실을 졸업했다(36-43쪽).

졸업 후 신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결심한 그에게 두 선택지가 있었다. 유학 전에 한국 장로회 유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서 먼저 공부하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느냐 하는 고민이었다. 숭실의 선교사 교수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으나, 그는 멘토 블레어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블레어는 처음부터 신학을 하지 말고, 미국의 기독교계 인문 대학에서 얼마간 공부한 후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블레어도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기 전에 고향 캔자스주의 감리교계 캔자스 웨슬리언 대학(Kansas Wesleyan University)에서 수학한 이력이 있었다. 블레어는 한경직에게 캔자스의 장로교 대학인 엠포리아 대학(The College of Emporia)을 추천했다. 엠포리아까지 가는 여비를 확보하는 일이 과제였는데, 이 일은 한국 첫 남감리회 교인으로서 상하이 중서서원과 미국 남부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한 교육자 윤치호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김재준에 대한 지난 글(본지 2025년 1월·411호 참고)에서도 언급했듯, 윤치호는 몇 년 후 김재준의 미국행 여비도 해결해주었다. 선뜻 경비 100원을 내준 윤치호에게 한경직이 꼭 갚겠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자신에게 갚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에게 갚으라고 권했다. 한경직은 윤치호의 이 금언을 평생 마음에 새겼고(43-46쪽), 결국 귀국 후 한참이 지나서 윤치호의 아들로 농림부장관을 지낸 윤영선에게 빚을 갚았다(‘한경직 목사 성역 50년’, 316쪽).

한경직은 1925년 가을부터 약 1년간 엠포리아 대학의 첫 한국인 유학생으로 공부했다. 인문학 과목들을 중심으로 수강하면서 소규모 기독교 학교가 줄 수 있는 교제의 유익을 누렸다. 특히 그는 평생 친구가 되는 두 학우, 졸업 후 매코믹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목사가 된 올드 초길(Orld Choguill)과 존 매스틴(John Mastin)을 엠포리아에서 사귀게 된다(놀라운 은혜, 47-51쪽).

엠포리아에서 1년간 인문학 수업을 들은 그는 1926년 9월에 프린스턴 신학교로 진학했다. 그가 공부한 1926년부터 1929년까지의 3년은 프린스턴 신학교 역사상 가장 혼돈한 시기였다. 10년 이상 이어지던 미국 개신교, 특히 북장로회 내부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이 최고조에 달하여, 결국 1929년에 보수 정통파가 이탈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한국인 대부분은 귀국 후 장로회 교계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의 주역이 된다. 프린스턴 스승들이 당시 선택한 다른 노선들을 그들의 한국인 제자들도 제각각 달리 선택하기 때문이다. 백낙준과 박형룡은 한경직이 입학하기 1년 전에 졸업한 후 각각 예일 대학과 남침례(서던 뱁티스트) 신학교로 떠났고, 한경직이 재학하던 시절에는 윤하영·송창근·김재준·이규용·최윤관·김성락 등이 함께했다. 한경직은 프린스턴에서 이미 졸업한 두 선배를 제외한 한국인 학우들과 함께 성경 읽기 및 기도회를 갖고, 생활을 지원하며 돈독하게 지냈다. 이들 동지들은 귀국 후에도 한경직과 대체로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윤하영과 한경직은 신의주에서 각각 제1교회와 제2교회를 맡으며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송창근 및 김재준과는 조선신학교 설립 및 운영을 함께했다. 김성락은 해방 후 서울로 이동한 숭실대에서 한경직에 이어 학장직을 수행했다. 선배 백낙준도 연세대 학장과 이승만 정부 시절 교육부장관으로서, 한경직의 교육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51-61쪽).

1959년 합동-통합 분열 전까지 한 총회에서 함께했던 박형룡과는 평생 소원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한 대로, 북장로회와 프린스턴에서 일어난 갈등과 분열 당시 이들이 취한 입장 차 때문이었다. 한경직이 프린스턴에 재학할 당시 학생은 총 250여 명, 교수는 약 20명이었다. 프린스턴은 19세기 미국 장로회 신구학파(Old-New School) 분열기에 구학파의 아성으로 알려진 학교였기에, 1920년대 논쟁기에도 교수 대부분은 대체로 보수적인 정통파 색채를 유지했다. 그러나 신학교, 국내 목회지, 해외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선별해낸 후 강경하게 치리해야 한다는 신약 교수 그레셤 메이첸 및 소수파(근본주의파) 교수들의 주장은 교회 분열을 염려하는 교수와 학생 대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한국 학생 중에서는 박형룡이 메이첸을 적극 지지했기에,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후배 박윤선이 메이첸의 새 신학교 웨스트민스터에 진학하도록 권유했다.

한경직은 프린스턴 선생들의 면모를 하나하나 회고하면서, 메이첸을 “오십 대로 교수도 능하고 강의도 논리가 정연하여 많은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메이첸에게 배운 헬라어와 신약 해석 과목은 1975년에도 기억이 날 만큼 잘 배웠다고 회고한다(53쪽). 그러나 다툼을 싫어하는 타고난 평화주의자였던 한경직은 메이첸을 “좋은 선생으로 존경하였으나 그의 극단적인 투쟁 심리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64쪽) 그는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성경도 하나요, 신조도 하나인 한국 장로교회가 같은 신조에 대한 다소 다른 해석 차로 상대를 이단이나 독선주의자로 밀어붙이는 경향을 애통해한다. 역사적 신앙을 굳게 지키는 동시에 겸손히 다른 이의 의견과 사상도 용납할 수 있는 관용이 교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프린스턴의 쓰라린 갈등과 분열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더욱더 화합과 중용을 위해 힘쓰는 인물로 형성되었다(63-65쪽; 나의 감사, 195-200쪽).

프린스턴 신학교 역사상 가장 슬픈 ‘고통의 해’(the year of agony) 1929년에 졸업한 한경직은 예일대 신학부로 진학해서 학업을 이어갈 결심이었다. 그러나 병마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폐결핵 2기 진단을 받고 미시간 배틀 크리크의 안식교 요양원에 입원했다가, 뉴멕시코 앨버커키 장로교 요양원, 콜로라도 덴버 유대교 병원에 차례로 입원해서 치료와 요양을 이어갔다. 학업을 지속하려던 목표의 붕괴, 한국에 남겨둔 가족에 대한 염려, 아버지 없이 한국에서 사망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비참한 처지 등으로 극도의 자괴감에 시달리던 그를 지탱해준 것은 애정 어린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준 송창근 등의 한국인 친구들, 병원에서 만난 헌신적인 미국인 의료진과 봉사자들, 기독교인 환우들과의 만남과 교류였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더 치료한 후 공부나 목회를 이어가라는 주변의 권유를 만류하고, “죽든지 살든지 고국에 돌아가서 아무것이라도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놀라운 은혜, 66-77쪽)

학업과 치료로 미국에서 보낸 7년은 그에게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다. 원래 꿈꿨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학교와 병상에서 배운 것과 예상치 못한 수많은 만남이 여생의 엄청난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안도 시골 소년이 세계인으로 성장했다.

백면서생이 신의주의 주요 목회자가 되다

1932년 여름, 타국에서 중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든다는 소식을 듣고 염려하고 있던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경직은 갑자기 나타났다. 여름을 가족과 함께 보낸 후 그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첫 직장이 있는 평양으로 내려갔다. 그는 평양의 장로교회들이 연합하여 운영하는 숭인상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채용되었다. 당시 이 학교 이사장이 오산 시절 스승 조만식, 교장이 오산 선배인 김항복이었다. 송창근도 덴버의 아일리프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 막 숭실중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 참이었다. 그러나 한경직의 교사 생활은 1년여 후 중단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전후 사상 통제를 강화하던 일제 당국이 한경직을 요시찰 인물로 간주하여 교원 인가를 연장해주지 않은 것이다(80-82쪽).

한경직이 학교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이 평안도 교계에 퍼지자, 평양, 안주 입석, 신의주의 교회들이 한경직을 목회자로 청빙했다. 그의 선택은 당시 거주지이자 지역 및 교계 중심지인 평양도, 원래 속해있던 안주노회 관할인 안주 입석도 아니었다. 의외로 그는 멀리 평북의 국경도시 신의주에 있는 제2교회를 선택했다. 절박한 필요가 이유였다. 평양과 안주의 다른 교회들은 이미 예배당에 학교까지 갖춘 구비된 교회였지만, 신의주제2교회는 예배당도, 학교도, 전임교역자도 없는 교회, 즉 일꾼이 긴급하게 필요한 교회였다(82쪽).

이렇게 해서, 1933년 9월, 백면서생은 연고도 없는 한반도 끝단의 국경도시 신의주에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한경직이 부임하던 시기에 신의주 시내에는 장로교회가 셋, 성결교회가 둘, 천주교회가 하나 있었다. 시외에도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인 마전교회가 있었다. 당시 제1교회는 장년과 유년을 합쳐서 2천 명 정도 모이는 대형교회였고, 한경직이 부임한 제2교회는 약 400명이 모였다. 나이 서른을 막 넘긴 데다, 열세 살 이후 공부만 하느라 집사도, 장로도 맡아보지 못한 경험 없는 백면서생 전도사를 노년과 중년의 당회원들은 자기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고 한경직은 회고한다. 부임 6개월 후 그는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백면서생은 마치 타고난 목회자인 양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부임 후 1년 2개월이 지난 1934년 11월에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완공하고, 이어서 부속 유치원까지 세웠다. 그가 목회하던 기간에 재적 교인 수는 2,850명까지 늘었고, 매 주일 오전 예배에는 평균 1천여 명이 참석했다(85-91쪽).

그러나 1930년대 한국 장로교회에는 1950년대에 싹을 틔울 분열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1920년대 이후 일본과 미국 신학교와 대학에서 유학한 한국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기존에 평양신학교에서 선교사들이 가르치던 보수적이고 비학문적인 교훈과 다른 새로운 사상을 한국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프린스턴 3인방 송창근·김재준·한경직이 모두 엮인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다. 1929년에 미국 감리교의 아빙돈 출판사가 발행한 단권 주석 《Abingdon Bible Commentary》를 한국 감리교회가 선교 50주년을 맞아 번역 출간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한국에 신학 영어에 익숙한 학자가 부족했던 터라, 장로교 출신의 프린스턴 3인방과 동경제대 출신의 일본 유학파 채필근도 번역에 참여했다. 한경직은 고린도전후서 번역을 맡았다. 그러나 이 주석의 신학이 고등비평을 인정하는 자유주의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장로회 총회와 각 노회는 주석 번역에 참여한 이들을 조사했다. 의산노회로부터 조사를 받은 한경직은 쉽게 의혹에서 벗어났는데, 고린도전후서 주석 내용에는 딱히 문제 될 만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필자들은 일어난 사태에 유감을 표하는 성명서를 평양신학교가 발행하는 〈신학지남〉에 발표했다. 그는 이 경험 이후 신학자로서 자기 견해를 표명하거나 가르치는 일에 상당히 신중을 기하게 된다. 사상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바른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고, 언제든 오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로 일어난 다툼이 개인과 교회를 어지럽히고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1926-1929년에 프린스턴에서 경험한 갈등에 이어,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에 한국에서 경험한 갈등은 그를 적지 않게 고통스럽게 했다. 아마도 그가 신학자보다는 목회자로 영구히 자기 길을 결정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91쪽).

신의주에서 한경직의 목회는 전도와 교회 성장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폐병 3기 아버지를 엄마도 없이 홀로 간호하다가 결국 고아가 된 예닐곱 살의 복순이를 교회가 돌보기로 결정한 사건을 계기로, 그와 신의주제2교회는 1939년에 보린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 운영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신의주에서 시작된 고아원은 수용 인원이 점점 늘어나자, 신의주와 정주, 심지어 압록강 건너 중국 안동(단둥)의 한국인 기독교인에게도 찾아가 자금을 모금한 후, 남신의주 산지에 터를 사서 고아원과 양로원을 보유한 대규모 시설로 확장되었다. 고아원 사역은 교회 목회와 더불어 한경직의 2대 중점 사역이었다. 그는 해방 후 월남해서 영락교회를 세운 후에도 후암동에 보린원을 재건할 만큼 이 사역에 의미를 두었다(나의 감사, 230-244쪽).

한편, 일제강점기 말기 신사참배 문제는 한경직에게도 큰 도전이었다. 잘 알려져있듯,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학교를 중심으로 강요되던 신사참배는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각 개인과 교회에도 강요되었다. 천주교와 다른 개신교에 비해 비교적 오래 버티던 장로회 총회도 1938년 9월에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다수의 지역 노회들은 이미 봄 노회 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상태였다. 신의주제1교회의 윤하영과 제2교회의 한경직, 여러 장로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저항하다 신의주경찰서로 끌려가 약 20일간 투옥당했다. 그러나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신의주의 거의 모든 교회 제직은 일제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실제로 참배했다. 얼마간 버티며 고뇌하던 윤하영과 한경직을 비롯한 신의주의 모든 교역자들은 양 떼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들을 다 버리고 홀로 고고한 길을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약해져서” 신사에 참배했다. 한경직은 후에 이 일을 회고하며, 당시 고민과 고뇌, 죄책감, 후회에 더하여, 그런 범죄한 이들도 붙들어주시는 ‘아버지의 손’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244-250쪽).

1992년에 한경직은 종교계 노벨상으로 지칭되는 템플턴상 수상식에서 상금으로 받은 102만 달러를 북한 돕기 성금으로 기탁하면서, 자신이 신사참배했으나 제대로 참회하지 않은 죄인이라고 공개 자백했다.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경직의 이 공개 참회는 이후 교계에서 이루어진 연쇄 참회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사적 회개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의미가 있다.

신사참배 이후 한경직의 북한 목회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42년에 일제는 의산노회 소속의 세 목사 윤하영, 한경직, 송하순(의주서교회)를 강제 사임시켰다. 해임된 한경직은 보린원에서 약 3년간 “신사참배한 죄를 참회하면서 조용히 고아들과 함께 김을 매고 소마차(소달구지)를 끌고 우리 불쌍한 보린원의 아이들을 돌보고 노인들을 부양”하다가 해방을 맞았다(250쪽).

1992년 영국 런던 버킹엄궁전에서 열린 템플턴상 시상식에 참석한 한경직 목사와 필립공(에든버러 공작)

월남하여 한국교회를 재건하고 대표하다

해방 직후 한경직은 얼마간 의도치 않게 정치 지도자로 변모했다.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패배와 종전을 선언하자, 일본인 평안북도 도지사는 한경직에게 미군 진주 전까지 치안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신의주가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였으므로, 신의주를 대표하는 교회를 맡은 명망가 한경직이 적격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경직은 신의주 교계 지도자들을 모아 ‘신의주자치회’를 결성해서 윤하영과 함께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미군이 아니라 소련군이 신의주에 진주하자, 한경직과 기독교계 인사들은 소련군과 공산당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정당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련군 지지를 받은 공산당이 민주당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경직은 윤하영과 함께 신의주를 떠나 월남해서 10월에 서울에 도착했다(한경직 목사 성역 50년, 324쪽).

월남한 한경직은 크게 두 가지 일에 집중했다. 먼저, 그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1939년부터 조선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송창근과 김재준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학교 사역에 참여하기로 했다. 장로회의 유일한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가 1938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폐교했기 때문에, 1939년에 세워진 조선신학교는 해방 후 남한의 유일한 장로회 신학교였다.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일본인이 관리하던 재산, 즉 ‘적산’(敵産)을 처리해야 했다. 당시 미군정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으므로, 적산 불하에서 가장 혜택을 입은 이들도 한국 기독교인들, 특히 영어에 능통한 미국 유학파 기독교인들이었다. 프린스턴 3인방은 미군정과의 협상을 통해 서울역 근교 동자동, 남산 자락 영락동, 신당동의 천리교 부지를 할당받는 데 성공했다.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 신축 건물과 송창근이 맡을 성남교회, 장충동에는 김재준이 목회할 야곱교회(경동교회), 영락동에는 여자신학교 건물과 함께 한경직의 교회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한경직은 1945년 12월 2일에 남한에서 월남 기독교인 27명을 모아 첫 예배를 드리며, 이 교회에 베다니전도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325-327쪽). 베다니전도교회는 이듬해 교회명을 영락교회로 바꾸었다.

이미 신의주에서 목회자의 소명과 재능을 발휘했던 한경직이 개척한 영락교회는 북한 기독교인이 대거 남한으로 이주한 해방 정국에서 이북 피난민들의 영적·사회적·정신적 안식처이자 복지센터로 기능했다. 교인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1950년 5월에 새 예배당을 준공해서 이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한 달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한경직은 또다시 남하해야 했다. 이 시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시에 적절한 구국 운동을 펼치자고 합의하고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한 후, 한국전쟁기 내내 반공 사상을 고취하는 강연을 펼쳤다. 부산으로 피난한 후에는 부산 영락교회와 전쟁 과부를 위한 다비다모자원을 설립했다. 오늘날 월드비전으로 널리 알려진 선명회도 미국 전도자 밥 피어스와 함께 설립하면서 피난민 구호와 전쟁 포로 선교에 집중했다. 전쟁 말기인 1953년에는 서울 영락교회를 재건했고, 이듬해에는 1938년에 평양에서 폐교했던 숭실대학을 서울에서 재건하며 초대 학장을 맡았다.

이후 1973년에 은퇴할 때까지 한경직의 삶은 영락교회 목회에 집중되었다. 예수교장로회 40대 총회장(1955), 기독공보사 사장(1955), 영락사회복지재단(보린원·경로원·모자원) 법인 초대 이사장(1957), 영락학원(영락중·고등학교, 영락여상) 초대 이사장(1958), 정의학원(서울여대) 이사장(1962), 선명회 이사장(1964), 홀트양자회 이사장(1967),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1971), 전군신자화후원회 발기인 대표(1972) 등, 굵직한 직함들을 얻지만, 이들을 모두 명예직이거나 영락교회 목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부수 활동이었을 뿐이다. 월남한 이후 은퇴할 때까지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한국 개신교 목회자의 대표로 자리매김했다(333-346쪽).

물러나 안식하다

1973년에 영락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된 후에도 한경직은 여러 무게 있는 대표직에 지속적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명예직이었다. 이후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남한산성의 작은 안식처에서 조용히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무리했다.

이만열이 한경직 사망 1년 후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은 2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절하고 정당한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 같다. 젊은 시절 고통받는 한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명을 여러 차례의 육체적 질고와 위기에도 초지일관 지켜나갔다는 점, 강요된 신사참배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일평생 죄책을 안고 살다가 늦게라도 공개 참회함으로써 자신의 죄와 수치를 대중 앞에 노출하는 용기와 진실함을 보여주었다는 점, 신앙의 보수와 진보 양단을 붙잡고 모두를 포용하려는 열린 마음을 내내 견지한 점, 전쟁과 재건기에 위기에 처한 고아와 과부, 노인, 실향민을 감싸안고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점, 마지막으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가 따르는 예수처럼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한 점 등은 크게 칭찬해 마땅하다.

그러나 한편, 그 역시 시대의 사람이었던 만큼, 그가 지향한 중도의 정신이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행동해야 했던 폭력적 독재의 시대에 침묵함으로써 오히려 국가폭력에 동조하는 목소리와 행동이 되고 말았다는 점,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과 공산당의 악행을 몸소 체험하며 공포와 증오를 체화한 이북 출신 월남 기독교인답게, 그 역시 사회봉사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를 개혁하려는 모든 진보적 의제에 의혹을 보내는 반공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특히,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기에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 등 후방에서 반공과 반탁 구호를 외치며 무기를 들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자행한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여러 반공 청년단과 토벌대 중에는 월남한 기독교계 청년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경직이 이들 이북 출신 반공 기독 청년들에게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체적인 이론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확인된 사실인 양 이곳저곳에서 유통되는 소문과는 달리, 연구자들은 한경직, 영락교회, 서북청년단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경직으로 대표되는 월남 기독교인 지도자들, 영락교회로 대표되는 탈북 교회 공동체들이 해방 정국과 1950년대에 보여준 입장과 행동이 이후 한국의 정치 지형도,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 부활한 일부 극우 기독교인의 극단적 사회 인식과 시위 행위의 기원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2)

■ 참고문헌

한경직, ‘한경직 구술 자서전: 놀라운 은혜’, 김은섭 편, 《한경직 목사 자료전집 6: 전기》((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4), 9-131쪽.
한경직, ‘한경직 구술 자서전: 나의 감사’, 김은섭 편, 《한경직 목사 자료전집 6: 전기》((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4), 132-284쪽.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편, ‘한경직 목사 성역 50년’, 김은섭 편, 《한경직 목사 자료전집 6: 전기》((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4), 307-369쪽.
이만열, ‘한경직 목사의 한국교회사에서의 위치’, 김은섭 편, 《한경직 목사 자료전집 10: 논문 1》((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4), 9-46쪽.
김영재, ‘한국교회사에 있어서의 한경직 목사의 위치’, 김은섭 편, 《한경직 목사 자료전집 11: 논문 2》((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2014), 578-592쪽.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