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전능자가 아닙니다

[413호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

2025-03-31     정태형

한국에는 아주 특이한 신흥종교가 있다. 기독교와 불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이 이 종교를 믿는다. 이 종교를 뭐라 부를까 고민하다가 이름을 붙여보았다. ‘부모전능교’. 시중에 나오는 책들을 보면 이 종교의 실체가 보인다. ‘엄마’ 혹은 ‘부모’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의 제목을 보자. ‘수학의 신 엄마가 만든다’ ‘아이의 영어는 부모하기 나름이다’ ‘초등 문해력을 키우는 엄마의 비밀’ ‘두 아이 영재로 키운 엄마표 교육밥상 에듀푸드’ ‘부자의 싹은 부모가 키운다’ ‘내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프랑스 부모들의 십계명’ ‘사춘기 자녀의 1등 진로를 찾는 부모의 4가지 태도’…. 이를 종합하면 이 종교의 얼개가 완성된다. 부모전능교가 말하는 부모는 국어·수학·영어 등 자녀의 학업을 좌우하는 선생이며, 자녀의 뇌와 몸의 건강을 책임지는 영양사이며, 자녀에게 딱 맞는 진로를 찾아주는 컨설턴트이며, 자존감을 높여주는 상담가인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는 펀드매니저다.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자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부모의 책임이다.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것도, 자존감이 낮은 것도,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것도, 키가 작거나 체력이 약한 것도,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모두 부모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란 불가능하기에 부모전능교를 따르는 부모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육아 예능의 돌풍이 일면서 부모전능교의 교세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심리학·육아 등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미디어에 나와 육아에 관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부모의 기준이 높아진다. 예전에는 자녀를 온유하게 대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대화를 통해 감정과 마음을 제대로 읽어줘야 한다는 강박이 부모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혼내자니 아이와 관계가 틀어질까 봐 두렵고, 방치하면 아이가 일탈할까 봐 무섭고, 어설프게 가르쳤다가 긁어 부스럼일까 봐 걱정된다. 부모로서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고 늘 불안하다. 자녀의 삶에 조그만 문제만 생겨도 내 잘못 같아서 가슴이 철렁하고 눈물이 난다. 그러면서 나를 이 곤경에서 구해줄 구원자를 갈망하게 된다. 전능한 부모가 될 수 있는 정답을 제시해줄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 사람의 강연과 책을 탐독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한 후, 다시 전능한 부모가 되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필자가 진행했던 부모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분이 남긴 말이 기억난다.

“육아 서적을 얼마나 읽었는지 몰라요. 아이한테 화내고 나면 후회가 밀려오고, 그러면 꼭 서점에 가서 육아 서적을 몇 권씩 샀어요. 그걸 다 읽고 나서 잘해봐야지 해도 잠깐이에요. 또 화내고 후회하고 또 서점에 가요. 그렇게 몇 년을 하고서야 깨달았어요.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니었는데 나만 괴로웠을 뿐이구나….”

부모전능교의 함정을 주의합시다

원래대로라면 교회에는 이 종교가 자리할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자녀의 일생과 운명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선포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그렇게 한다. 하지만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부모전능교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자녀의 앞날은 부모의 기도나 신앙생활에 달려있다는 식이다. 물론 자녀 양육이 우리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지만 강조점을 조금만 잘못 찍어도 의미가 달라지기 쉽다. 기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성경적 메시지와, 성경의 옷을 입은 부모전능교의 메시지는 정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잘 분별하지 못하면 함정에 빠져서 세상 모든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부모가 되기 쉽다. 피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어렵지는 않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으면 된다. 성경은 100% 인간의 책임을 말하지 않는다. 100%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전자는 인간을 전능자로 만들고 후자는 인간을 게으르게 만든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설교에 주로 사용되는 본문으로, 사무엘상 1-3장이 있다. 이 본문으로 부모에 대해 설교할 때는 정해진 공식이 있다. 사무엘을 잘 키운 한나와, 홉니와 비느하스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엘리를 대조하는 것이다. 이런 공식으로 설교하면, 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다.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하면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제대로 못 하면 방종하게 살다가 일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심판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목사가 되기 전까지 통합·합동·합신·고신 교단의 교회에서 모두 신앙생활을 해봤는데 부모에 대한 설교에서는 꼭 이야기되고는 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무엘상 8장에 나오는 사무엘과 두 아들 이야기는 이 공식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이 늙으매”(8:1)라는 설명으로 시작한다. 사무엘상을 한 번에 읽어 내려간 독자라면 이 설명을 들었을 때 엘리와 두 아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무엘상 2장에서 엘리와 두 아들의 죄를 본격적으로 고발할 때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2:22)로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독자들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사무엘상은 사무엘이 늙었다는 묘사에 이어서 두 아들의 죄악을 고발한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8:3)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그토록 훌륭했던 사무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두 아들이 이렇게 되었는가? 사무엘상은 이런 반응 또한 예상했던 것 같다. 12장에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묻는다. 자기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백성들은 대답한다.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12:4) 이 장면에서 1-3장의 공식에 오류가 드러난다. 부모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도 자녀가 죄악에 빠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역할과 중요성을 다룰 때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자칫 연약하고 지쳐있는 부모들에게 전능자만이 질 수 있는 짐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심(잠 16:9)을 함께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할(신 6:7) 책임을 말하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마 11:28) 주님의 음성을 함께 전해야 한다. 동시에, 듣는 사람들도 분별하면서 들어야 한다. 자녀의 인생이 내 손에 달린 것처럼 느껴지고, 부담감과 자책감이 종종 밀려온다면 익숙하게 듣던 메시지를 낯설게 바라보자. 하나님 말씀이라는 귀한 양식에 이질적인 소스가 묻어있지는 않은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자.

이미 충분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부모 교육을 통해 많은 부모를 만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부모들은 기본적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유독 심하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사랑 없음’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이들이 많았다. 부모 교육을 진행하던 어느 날, ‘사랑’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말해보자고 했다. ‘예수님’ ‘보혈’ ‘희생’ ‘자기부인’ ‘십자가’….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사랑’은 ‘희생’과 동의어였다. 희생에는 끝이 없다. 사랑을 희생과 혼동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가 없다. 최선을 다해 자녀를 돌보면서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물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려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을 십자가로만 한정 지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이들과 먹고 마시는 시간을 좋아하셨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눅 7:34)이라며 조롱당하실 정도였다. 이렇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랑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묻는 청년을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막 10:21, 새번역) 무엇인가 해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빠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는 마리아가 울자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보던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요 11:36)라고 말하며 그분의 사랑에 공감을 표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거나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많은 부모가 이미 충분하게 사랑하고 있다.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녀들을 책임지기 위해 부모들은 매일매일 치열하게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다. 자녀들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연차를 사용하고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한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위한 휴식과 소비에 사용할 시간과 돈은 항상 부족하다. 이 또한 사랑이다. 자녀와 원활하게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책도 사서 보고 강의도 들으면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이 또한 사랑이다. 이렇게 해줘도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부분은 이미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수고하고 있다. 스스로를 토닥여주면서 잘하고 있다고, 충분히 수고하고 있다고 격려해줘도 괜찮다. 내가 추구하는 완벽한 부모의 사랑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사 42:3) 우리의 사랑도 귀하게 보시는 분이다. 용기를 내자. 내가 자녀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요 21:15)고 입을 열어 고백해보자.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응답을 주실 것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대다수 부모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자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하면 마치 대본이라도 짠 것처럼 비슷한 말들이 나온다. “부족하게 해줘서 항상 미안하다” “부모로서 충분하게 못 해줘서 마음이 아프다” “크게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잘 커줘서 고맙다” 등이다.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게 대다수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부모들은 왜 자녀에게 더 해주고 싶어 할까? 사랑하는 자녀가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라도 자녀에게 더 해주려고 한다. 하지만 자녀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나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마음을 마냥 편하게 받을 수 있을까? 철이 없는 시절에야 기쁘게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부모의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깨닫게 된다. 자녀 입장에서 부모의 사랑을 그리는 노래들을 보면 가사에 공통점이 있다. ‘미안함’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정서는 계속 이어진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이흥렬, 〈어머니 마음〉),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GOD, 〈어머님께〉),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자이언티, 〈양화대교〉) 등 노래 속 자녀들은 부모를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다. 성공한 지금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지금부터 잘해드린다 하더라도, 젊음을 희생한 부모의 사랑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라면 모르겠다. 희생이 꼭 답은 아니다. 희생한 부모 모습은 자녀의 마음속에 미안함으로 자리한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대통령이 행복하지 않으면서 국민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는 있겠지만, 불행한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 이걸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적용해보자. 부모가 행복하지 않으면서 자녀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는 있겠지만, 불행한 부모를 바라보는 자녀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할 수 있다. 나도 자녀도 행복할 길을 찾아보자는 뜻이다.

부모의 행복도 중요하다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보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신명기 10:13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부모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 또한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다.

더 해줘야 한다는 불안이 나를 찾아올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행복한가?’ 확실하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잠깐 멈춰도 된다. 자녀들의 필요를 돌보기 전에 자신의 필요를 먼저 돌아봐도 된다. 엘리야 선지자가 영혼이 피폐해지고 아팠을 때 하나님은 구운 떡과 물을 주시며 필요를 돌봐주셨다(왕상 19:6). 엘리야의 사명뿐 아니라 엘리야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가 자책 속에서 살아갈 때 예수님 역시 떡과 생선을 구워주시며 필요를 돌봐주셨다(요 21:13). 베드로의 사명뿐 아니라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과 필요를 먼저 돌아봐도 괜찮다. 하나님은 부모의 사명뿐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 모두가 행복한 길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길이다.

에필로그: 우울증을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

거창한 계획이 있어서 시작한 연재는 아니었다. IVF라는 선교단체에서 7년,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7년간 사역하다가 품게 된 작은 의문이 시발점이었다. 특히 선교단체 경험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각 선교단체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교회에 비해 복음을 많이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필자도 선교단체 간사로 있으면서 복음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전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의문이 생겼다. 기쁜 소식을 믿는 우리들 마음에 기쁨보다는 죄책감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엔 예수님을 기쁨으로 믿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은 희석되고 죄책감이 커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후배와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 후배는 우울증 때문에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게 고백했다. 그때의 나는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었을뿐더러, 모든 문제는 신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앙 환원주의에 가까운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우울증은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다며 신앙생활을 잘해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배의 상처받은 표정이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미안한 일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가 한 말을 주워 담고 싶다. 하지만 이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품었던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복음을 믿었는데도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곁에 다가올 때 성경적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신앙 상식’으로 오히려 상처를 주고 죄책감을 안겨주는 나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나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어설픈 ‘신앙 상식’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풍토가 교회 안에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 제일 눈에 띈 사람들이 자녀를 보고 부모를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다. 자녀가 잘되면 부모의 믿음을 칭찬하고, 자녀가 일탈하면 부모의 믿음을 뒤에서 질타하는 이들을 종종 보았다.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지만,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당사자가 눈치챌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자기 잘못은 아닌가 자책하고 있는데 주변에 그런 분위기가 있으면, 그 부모가 겪는 괴로움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보다 더 커보였다. 더 안타까운 건 그 부모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들이 비난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 부모가 평상시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지 아는 사람들이 그러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잘못된 신앙 상식 때문이었다. 성경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신앙 상식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누가 악의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아닌 것이 진리처럼 교회에 자리 잡을 때 누군가는 선의를 가진 가해자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는 피해자가 된다.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 이미 우울하고 힘든데 교회가 그걸 가속화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모습을 우울증을 권하는 교회라고 표현했다. 특정한 교회가 아니라, 나처럼 어설픈 ‘성경 상식’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늘어날 때 벌어지는 현상을 지칭한 표현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 또한 신앙 상식과의 싸움이었다.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신앙 상식에 도전하셨다. 안식일을 피해서 사역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세리와 창녀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이방인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혈루병 여인이나 나병 환자처럼 부정하다 여겨지는 이들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으셨다. 잘못된 신앙 상식이 자리 잡을 때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소외되어 이중 소외를 겪게 된다. 이중 소외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자유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 구성원으로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이들이 모여서 구약시대 이스라엘과는 다른 새로운 교회를 이루게 된다. 우울증을 권하는 그런 교회를 넘어서, 소외되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는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 시대와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 고통받았던 사람들과 다른 옷을 입었을 뿐이지 교회 안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교회의 한계도, 진리의 한계도 아니다. 좌절하거나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잘못된 신앙 상식을 분별해내고 벗겨내면 될 일이다. 우울증 때문에 고통받던 후배와의 대화가 내 마음을 가리고 있던 잘못된 신앙 상식을 벗겨준 것처럼, 이 원고를 통해 괴로워하는 누군가가 잘못된 신앙 상식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복음의 기쁨을 가리는 신앙 상식들을 한 꺼풀씩 벗기다 보면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는 날이 오지 않을까?

■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넘어서’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정태형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과 교회를 이루어가는 여린교회를 섬기고 있다. 교회의 사각지대를 보려고 노력한다. 《부모가 먼저 행복한 회복탄력성 수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