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그리고 신학으로
[413호 유배지에서 만난 하나님]
1
전두환의 시대였다. 당시 교회와 운동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세계관에서 실마리를 잡고, 결국 양쪽에 발을 걸치게 된 것은 전두환 때문이었다. 1980년 광주와 그의 군사독재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국가는 국민을 지켜야 하지만, 군대는 자국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했다.
대학 1-2학년 때는 어영부영 보내며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 탓에 학점이 그리 좋지 않았다. 2학년 말에는 학과 학생회장이 되었고, 3학년이 되어서는 김동문 선배의 요청으로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공부에 재미를 들였다. 도서관 책상에 철학, 역사, 문학, 경제, 신학 분야의 책을 꽂아두고 돌려가며 읽었다. 모든 것이 재미있었지만, 경제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주머니 사정이 좀 나았을까?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도래했다. ‘우리 조상님들이 정말 힘들게 민주주의를 찾아다녔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고, 정말 쓰레기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영화 〈1987〉을 보고 로고스서원의 청소년 인문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2학년 아이가 쓴 문장이다. 내가 벌써 조상님인가? 1987년의 뜨거웠던 그 여름이 벌써 역사가 되었구나. 거리와 광장에 쏟아져 나온 무수한 시민의 함성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왜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는가, 왜 불의에 침묵하는가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시점에 시민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이후에도 이러한 모습을 우리 역사에서 자주 목격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세월호 사건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도 그랬다.
우리 대학도 동맹휴학을 하고 데모에 적극 참여했다. 나는 과 학생회장으로서 앞장섰다. 그런데 사달이 생겼다. 아끼던 후배 한 명이 데모 중에 청량리경찰서에 연행된 것이다. 고초를 겪을 후배를 생각하니 내 잘못인 듯싶어 화가 났다. 이 일은 내 안에 철철 넘쳐흐르던 기름에 불을 던졌다. 그때부터 6·29 선언까지 명동·충무로·을지로·종로를 뛰어다녔다. 어느덧 총학생회 임원들과 제일 앞에 서있었다.
내 열심을 본 운동권 핵심 선배가 찾아와 조직에 들어오기를 권유했다. 며칠 고민했지만 거절했다. 당시 나는 《자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저작을 읽었고, 마르크스 이론에 심취해있었다. 레닌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 사상가, 그람시와 주체사상도 접했고, 기독교 사회주의에도 경도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숙집 친구 박영규(훗날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에게 했더니, 그는 안 들어가길 잘했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참여를 거절한 것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쉽사리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이후의 고단한 삶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운동권도 아닌 운동권이고, 독실한 신자이지만 신자가 아닌, 그런 이중성은 그때도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중심부도 아니고, 딱히 주변부도 아닌 나.
이런 나를 가장 잘 파악했던 분이 이동원 목사님이셨다. “김 목사는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가 좋아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쏠리지 않도록 하게.” 좌우 모두에게 소구력이 있겠지만, 그것이 나를 지금껏 버티게 해준 힘인 동시에, “너는 어느 편이냐?”를 선택해야 할 결정적 순간에는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을 운명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생각을 내내 떨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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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이 되었다. 1987년의 뜨거운 여름도 지나고, 차가운 겨울의 선거도 패배했다. 복청학련(복음주의청년학생연합)과 공정선거 감시단의 일원으로 경기도 북부의 한 도시에 가서 며칠간 도왔다. 그러나 소위 ‘3김 분열’로 군부독재는 명맥을 연장했다. 암울했다. 하숙집에서 몇 날 며칠을 시체처럼 지냈다. 일어나 밥 먹으라면 밥을 먹고, 하숙집 형들이 술을 사주면 아무 맛도 없이 그냥 꾸역꾸역 넘겼다.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좀비 같은 겨울이었다.
3월이 되자 졸업 이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회사에 취업하는 것, 기독교 사회운동을 하는 것, 신학대학원에 가는 것. 세 가지 선택지가 내 앞에 놓여있었다.
그때는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다섯 자식을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처지로서 취업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돌아섰다. 첫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둘째, 막연하게 회사 생활이 두려웠다. 왜 그랬을까? 이 역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인데 말이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었는데.
그렇다고 사회운동에 내 생애 전부를 쏟아부을 자신도 없었다. 앞의 선택이 내 안일함만 채운다면, 이것은 너무 고달파 보였달까, 위험해 보였다고 할까. 그 길을 끝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속 주인공 알리사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한 걸까? 그렇지 않다. 주님이 내게 부르신 좁은 길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었다.
남은 선택지는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때서야 마음 한쪽에 잠복해있던 서원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예수가 좋았고, 교회가 좋았고, 하늘 아버지를 잃고 서럽던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그것은 최고의 낭만적 삶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내면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그 다짐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난 거다. 이제 때가 온 건가?
이런 고민을 하던 즈음, 대학 캠퍼스는 백담사에 유폐된 전두환과 이순자를 체포하자는 데모로 시끄러웠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틈틈이 참여했지만,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당시의 데모 구호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두환·이순자의 각을 뜨자!”
이것은 북한의 구호이기도 했고, 내용 자체가 너무나도 살벌했다. ‘각을 뜬다’라는 말은 짐승을 조각조각 내는 것이다. 생선으로는 살을 일정하게 발라내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을? 예나 지금이나 나는 ‘악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전두환’을 떠올린다. 나는 그를 증오한다. 그가 광주에서, 그리고 집권기 7년 동안 자행한 헤아리기 어려운 악을 생각하면, 응당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사실, 내 안에도 전두환과 같은 마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내 안의 그 악인을 죽이는 것과 내 밖의 악인을 응징하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느 하나 없이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다. 내 밖의 객관적 실체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일과 내 속의 마성을 잠재우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각을 떠서 죽인다고? 사람을?
그때 그동안 탐독했던 마르크스주의가 ‘갈등과 투쟁의 정치학’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간 읽어온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꿰어졌다.
무릇 역사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벌이는 갈등의 장이다. 역사의 발전이란 생산력이 증대되면, 그에 따라 생산관계가 새롭게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지배계급은 생산과 그 과정, 결과를 독점하려 하고,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산에서 소외당하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모순을 초래한다. 결국, 계급 간 갈등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한 측면이 많다. 합의와 양보에 의한 변화는 드물고, 가진 자들이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은 적도 거의 없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양보 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경제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노동하지 않으면서 노동의 이익을 독점하는 이들에게서 부의 파이를 공정하게 분배하도록 사회의 근본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시즘은 인간과 세계를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인식하며, 이미 존재하는 갈등을 폭력적 투쟁과 혁명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방법론으로 삼는다.
하지만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정치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은 용서다.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정의도 기독교의 최종적인 선언이 아니다. 기독교의 마지막 말은 용서이며, 용서를 통한 화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용서의 정치학’은 개인과 집단이 잘못을 처벌과 복수가 아닌 용납과 자비로 극복하고, 갈등 대신 정의와 관계 회복을 지향하는 정치적 윤리다.
그 근거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죄와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를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용서와 화해를 실현한 결정적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과 용서를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십자가는 단순한 개인의 죄 용서를 넘어 사회적 차원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신학적 근거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용서가 정의를 무력화하거나 갈등을 배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사야는 정의를 실천해야만 평화가 온다고 말했고(사 32:17), 야고보는 평화를 통해서만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약 3:18). 평화와 정의는 결코 이분법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이를 칸트의 말로 패러디하자면, 정의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평화 없는 정의는 맹목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각자가 정의한 정의를 보편화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폭력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구약의 이사야보다 신약의 야고보 사도의 말씀에 더 방점을 둔다.
3
이런 나의 생각은 당시 곱씹던 고린도후서 5:16-21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된 계기는, 한편으로 내가 속했던 대학부 이름이 AFC(Ambassador for Christ)였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20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당시 나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란 말의 의미를 집중 고민하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관뿐 아니라 네비게이토선교회의 암송 방식에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성경 맥락과 무관하게 한두 구절이나 몇 개의 단어를 따로 떼어 전혀 다른 층위에 적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고린도후서 5:16에서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대목이다. NIV 성경에서는 ‘육신의 잣대’를 ‘세상적 관점으로’(a worldly point of view)라고 번역했다. 즉, 여기서 ‘육신’(flesh)은 단순한 물리적 육체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따라 예수를 이용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 신앙을 유지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씀이다. 이 깨달음은 나의 기독교 세계관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신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한 후에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하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 없이 타인의 죄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며, 이것이 화해 사역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제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신(21절) 예수처럼, 타인의 죄를 마치 내 죄인 것처럼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대사(大使)의 사명이다.
“모두가 모든 사람 앞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가 한 말이다. 개인과 전체는 분리될 수 없으며, 타인의 죄에 연대적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상대를 적대시하지 않을 수 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타인의 죄 속에서 나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의 죄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의 죄를 나의 죄로 짊어지는 원초적 모델이 십자가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로운 공동체와 세계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내가 보았던 악인의 죄악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용서에는 첫 번째 원칙이 있다.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요구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사죄와 회개를 강요받지 않는데, 왜 의인이자 피해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용서를 요구하는가? 그것은 2차 가해다. 용서에 관한 두 번째 원칙은, 정의 없는 용서는 또 다른 불의가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내가 용서와 화해의 정치학을 말하는 이유는, 정의가 필수적 전제 조건이지만 정의만으로는 상처와 분열이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지만, 피해자의 내면적 회복과 공동체의 관계 회복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는 가해자를 면죄하거나 피해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내적 고통에서 해방될 권리를 인정하고, 공동체가 다시 연결될 가능성을 열어주는 실천이다. 즉, 정의에서 출발하되 정의를 넘어서는 화해의 정치학은 분열을 치유하고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한 공동체적 선택이다.
나는 그러한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리고 신학에서 발견했다. 그것이 내가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신학적 변명이자 해명(apologia)이다. 이제 나를 신학과 신앙으로, 그리고 목회로 이끌었던 용서와 평화의 정치학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때다.
또다시, 또 다른 전두환의 시대다.
김기현
로고스교회의 담임목사이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로 있다.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와 제자가 되어, 작가와 목사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부전자전 고전》 등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