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하나 여자 혼자
[413호 공간을 찾아서] 권유빈 님(가명, 79세)
“내 나이 일흔하나 만에 처음이지. 혼자 사는 건.”
‘처음’을 힘주어 말하는 표정에서 맑고 개운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배 속에서부터 꽉 막혀있던 체증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함이 얼굴에 퍼졌다. 1인 독립생활 9년 차를 맞이한 권유빈 님(가명, 79세)을 서울 구산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혼자’라는 말에는 외로움이나 고독감이 아니라 성취감, 해방감 같은 것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2017년 남편이 죽고, 같은 해 아들이 결혼하면서 70년 만에 비로소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후부터는 남편, 아들과 쭉 살았다. 함께 살고 있던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둘 떠나고 아랫집에 사는 임차인의 담배 냄새와 연기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사했다. 누구에게 묻지 않았고, 상의하지도 않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이사 날을 잡았다. 이사한 지 1년 남짓 되었을 때 가까운 곳에 홀몸 어르신을 위한 공공주택이 생긴다는 사실을 아들이 알려줘, 현재 사는 집으로 이사했다.
1947년생 여성이 거쳐 온 집
지금 사는 집에 오기까지 그가 산 세월만큼이나 살아온 집의 역사도 다채로웠다. 해방 직후 개성에서 태어나 현재의 구산동에 정착하기까지 거쳐 갔던 수많은 집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
첫 집이었던 개성 집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몇 개의 흐릿한 기억이 있었는데, 하얗고 조그맣던 강아지가 뒤따라오던 마당과 칸칸이 나뉘어져있던 방과 방 사이 문을 열면 하나로 연결되었던 것이 기억의 전부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 전, 아버지의 일자리 때문에 가족 모두 부산으로 이주했고, 전쟁이 수습된 뒤에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자리를 잡았다. 평생 거쳐 간 집 중에 ‘우리 집’으로, ‘고향 집’으로 여겨지는 곳은 ‘아현동 집’이었다.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었기에 켜켜이 쌓인 추억도 가장 많았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사람들이 득실득실했어.”
기와를 올린 양옥집이었는데, 방 세 칸에 마당과 화장실, 부엌이 있는 꽤 넓은 집이었다.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끓었다. 친척들, 먼 친척들, 사돈의 팔촌과 이웃사촌들까지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해운 공사에서 기관장으로 근무하셨던 아버지와 대학병원의 수간호사로 일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가정경제가 꽤 안정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래봤자 겨우 방 두세 칸이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기거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게 배가 고픈 사람들이 오면 밥을 주고, 잠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주고, 보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명해주던 부모님의 영향 때문인지, 고등학교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얼마 동안 함께 살기도 했다. 객식구들로 항상 시끌시끌하고 북적였던 집이 ‘지겹다’라는 말 뒤로 정말 지긋지긋하게 손님을 치렀던 과거의 시절이 그리운 듯, 재밌고 활기 있었던 젊은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그는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했다. 능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젊은 날의 생기가 커진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가장 좋았던 AID차관아파트를 떠나
수많은 집 중에 가장 좋았던 곳은 서울의 AID차관아파트였다. 지금은 삼성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과거 강남구 영동에 1974년 세워진 1,650세대 대규모 아파트였다. 대부분 집들이 연탄을 때던 시절이었는데 AID아파트는 기름보일러를 중앙난방식으로 공급하는 몇 안 되는 신식아파트였다. 아무리 좋은 기와 양옥집이라도, 날이 추우나 더우나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 했던 재래식 화장실만큼은 꽤 힘들었던 터라, 미국식으로 지어진 최신식 아파트가 기억 속에 가장 좋았던 집으로 남아있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였는데 문지방도 없었고 양변기를 갖춘 수세식 화장실도 편리했다. 그리고 연탄을 안 갈아도 되니까. 맨날 집게로 연탄 들고 빼고… AID차관아파트가 너무 좋아서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아현동 주택에 사시던 부모님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이사하시게 했다.
그 좋던 AID차관아파트를 떠났던 건 남편의 술버릇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술을 마셨던 남편은 귀가 따갑도록 잔소리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의 술친구였던 이가 예수님을 믿고 개과천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기보다는 희망이 가까웠던 젊은 시절이었기에 그 친구가 믿는 예수님을 믿으면 내 남편도 나아질까 싶어서 친구네 동네인 서울 암사동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그 교회도 등록했다. 그 후로 10여 년을 열심히 신앙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을 했다. 느지막이 아이 하나 낳고 키웠던 그 집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다. 예배가 끝난 뒤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과일을 먹고, 쉬다가 놀다가 또 저녁을 먹고… 정말 한 식구처럼 살았다. 남편의 술 문제는 몇 번 위기를 겪다가, 나이 60이 넘어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암사동 아파트에 대한 재건축 논의가 시작됐고, 열심히 다녔던 교회의 목사와 갈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남가좌동 빌라를 매수해서 4-5년 남짓 살았는데, 가장 굴곡이 많고 컸던 시절의 집이었다. 함께 살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남편이 야심 차게 벌인 사업이 크게 망하면서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계가 무너져 내렸다. 빚이 늘었고 아이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다.
노후 자금 300만 원
빌라를 매도하고 집과 짐을 줄여 형편에 맞게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28만 원 흑석동 산꼭대기 월세방으로 이사를 했다. 집을 볼 때는 몰랐는데 계약서를 쓸 때 보니 반지하였다. 경사가 큰 골목에 놓인 집이었기에 올라갈 때는 분명 1층처럼 보였는데, 위에서 내려갈 땐 집이 반쯤 땅속에 묻혀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바로 결혼해서 60세까지 가정주부로만 살았기에 돈을 벌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늘어난 빚을 갚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발 벗고, 뭐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예순 나이에 처음으로 나가서 돈을 벌었다. 마침, 조카가 운영하는 매점에 일손이 필요했고,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집을 팔고, 돈을 벌어 빚을 갚았다.
그러나 무너진 가정경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다니던 일터도 운영 계약이 종료되면서 사라졌다. 일흔 나이를 앞두고 경험 없이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라는 것들이 무엇이 있었을까. 무언가를 배워서 일자리에 ‘도전’하기 위한 에너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동창 친구들이 여유롭고 풍족한 노후를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하는 나이에 그에게 남은 건 생의 전력을 다해 소진된 몸과 보증금으로 묶여있는 300만 원이 전부였다. 교회 식구, 친구, 지인, 친척 할 것 없이 사람들과 거리를 둔 것도 이즘부터다. 해방 직후 태어나 한국전쟁을 통과하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지나온 세월인데 노인이 되고 보니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버렸고 생활 규모를 현실에 맞추는 수밖에 남은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삶의 굴곡을 경험한 그는 고요한 이 집이 ‘너무’ 좋다고 했다. 여러 사람을 거둬 먹일 만큼 넉넉했던 시절부터 반지하 월세방까지. 시련의 낙차를 딛고 선 그에게서 무력감도 열패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명랑함이 깃들어있었다. 집이 ‘너무’ 좋다고 여러 차례 반복하는 그에게 무엇이 그렇게 좋으시냐 물었다.
“뭐든 내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대로 있어도 되고. 노냥노냥 정리정돈할 것도 없으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집이 그에게는 “만족도 백 프로”의 집이었다. 가끔 반려묘 루이(약 10세 추정, ♂)가 새벽에 깨워 츄르를 내놓으라고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루이는 그가 임시 보호하고 있는 고양이인데, 원래의 주인이 알레르기 때문에 키울 수 없게 되자 잠시만 맡아달라 부탁한 게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소박한 살림이 꿈
방 하나에 거실과 주방, 화장실로 구성된 26평방미터(8평) 주택인 이 집은 지자체와 SH(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공동 운영하는 어르신 맞춤형 공공임대주택이다. 노령 인구를 위해 맞춤 설계되었기에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가장 먼저 꼽은 것은 엘리베이터. 젊었을 땐 별것도 아니던 계단이 나이가 들면서 버겁고 부담스럽게 여겨졌는데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더없이 편리했다. 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걸터앉을 수 있는 간이 의자가 층마다 설치되어있는 점도 세심한 배려라고 여겨진다. 혼자 살기에 딱 좋은 규모라서 청소와 관리에도 부담이 없다. 조용하고, 편리하고, 적당하고… 불을 조금만 때도 금방 따뜻해지고, 또 시원한, 잘 지은 이 집이 얼마나 좋은지. 시시때때로 지자체에서 불편함은 없는지 귀찮을 정도로 물어봐주고 관리해주는 데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는 점에서 안심이 된다. 줄담배를 피워대던 아랫집 할아버지와 생선구이를 좋아하는 옆집에서 자주 탄 냄새가 나서 불이 날까 염려된다는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으니까.
“만족도 백 프로”인 이 집에 산 지는 벌써 5년이 되어간다. 계약 종료 이후의 집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살금살금 던진 나의 질문을 그는 와장창 부서뜨리며 5년 뒤 일을 왜 벌써 걱정하느냐고, 그사이에 죽을 수도 있으니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시 민간 주택시장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을 돈도 없고 모아 봤자 비상금 정도인데 시세에 맞춰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으니까. 어디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캐리어 두 개로 충분한 소박한 살림이 꿈이라는 그는 시시때때로 살림들을 정리한다. 동거묘 루이의 살림만 채워도 이미 한가득이지만.
식량이 많아지면 기아가 사라질 줄 알았다. 정보 통신이 발달해서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면 모두가 꿈을 펼치면서 자기답게 살고 학교 순위 같은 것들은 가치를 잃을 줄 알았다. 집을 많이 지으면 누구나 따뜻한 물 나오고 안온한 집에서 살게 될 줄 알았다. 봉건주의 시대에는 계급을 이유로, 산업주의 시대에는 근로 능력과 자산 규모를 이유로 사는 곳에 대한 차별과 차등을 용인했다. 계급은 사라졌고, 기술은 향상했고, 자본도 넉넉해진 요즘 시대에도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존재들이 여전히 많다. 문명 발전의 낙수효과를 기대하기엔 서로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일까.
집에서 죽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야무진 꿈을 꾼다. 죽음의 순간뿐 아니라 생의 순간에서도 우리는 모두 나답게 안전하게 살아갈 공간이 필요하다. 소비하지 않는 존재, 돈이 되지 않는 존재, 돈의 힘을 무력화시키며 사는 존재를 따라가다 보면, 가속화된 자본구심력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중력으로 딛고 서있는 이들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작고, 연약하고, 낮고, 적은 이 세계는 캄캄하고 무력한 시간을 걷는 이들에게 분명한 빛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박진영
본지 객원기자.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 녹색정치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