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과 광야
[413호 특집]
오래된 정원
유치원생도 아닌 꼬맹이였을 때, 엄마와 함께 종종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기껏해야 여섯 살 안팎이었을 나는 설교 시간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렸고, 몸을 배배 꼬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있는 힘껏 지루함을 호소했다. 결국 바깥으로 나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날은 조심스레,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본당 오른쪽 날개 나무문을 열고 도망쳤다. 그 순간은 마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처럼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엄숙한 예배당을 나가면 뭔가 비밀스럽기까지 하던 오래된 정원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등나무 벤치와 우거진 나무, 적당히 다듬어진 조경수들 사이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인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금세 그 무리에 끼어 얼음땡이나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했다. 우리가 너무 신나 웃음소리가 괴성 수준으로 커지면 많은 후일담이 전해지는 엄한 장로님이 나타나 예배 시간에 조용히 하라고 호통을 쳤다. 사실 그렇게 무섭지 않았지만, 무서운 척하면서 잠시 나무 뒤나 그늘 쪽으로 몸을 숨기거나 비슷한 시늉을 하다가 어르신이 사라지면 다시 뛰어나가 놀이를 즐겼다. 그러다 한 번은 예배가 끝난 줄도 모르고 신나게 뛰어놀다가 엄마와의 접선에 실패하여 졸지에 미아가 되기도 했다.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 안내위원 어른은 예배당 한구석 의자에 앉아 기다리라고 하셨고, 이제 고아가 되는 건가 싶어 정말 슬픈데 나를 위로하거나 애처로운 눈빛도 건네지 않고 자신들의 갈 길을 가는 성도들 모습에 섭섭해하다, 비어있는 본당에 두려움이 올라올 때쯤 할아버지가 그 자리로 나를 찾으러 오셨다. 굉장히 심각했던 나와 달리 나를 인계해주는 집사님과 나를 찾아왔던 할아버지는 뭐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평화롭게 임무를 완수하시고는 말썽쟁이 손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나 역시 금세 헤실거리며 할아버지 손을 잡고 오래된 정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은 매주 꼭 교회를 가니까 내가 그 정원에서 놀거나 지나갔던 날은 꽃도 피고 눈도 내리고 비도 오고 단풍이 든 날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그 정원을 생각하면 초여름 같은 싱그러운 이미지만 떠오른다. 은은하게 배어있는 등나무꽃 향기, 나뭇잎에 반사된 햇살의 반짝거림, 짙은 녹색이 되기 전의 아름다운 연한 초록.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수채화처럼 점점 미화되어만 가는 그 정원이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건 그곳이 이제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된 정원을 밀어버리고 주변 땅들까지 사들인 우리 교회는 그 자리에 석재 블록으로 마감한 작은 광장과 지하 주차장까지 갖춘 거대한 기념관을 건축하였다. 20대에 막 접어든 무렵이었고 세상은 세기말과 세기 초의 흥분과 희망으로 뒤덮여있을 때였다. 나무 하나 없는 광장이 좀 삭막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우리 교회도 이렇게 최신 시설을 갖춘 초대형교회로 거듭나는구나 싶어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대학부 사무실이 있던 기념관 8층에서 대학부 예배를 드리던 봉사관 5층까지는 교회의 가장 끝과 끝이라 광장과 본당을 가로질러 가는 약 150m의 짧지 않은 거리였는데, 뭐가 그리 기운이 넘쳤던 건지 일요일이면 짐들을 나르고 사람들을 부르러 몇 번을 뛰어다니곤 했다. 시간을 잘 맞추는 일이 중요했다. 본당 예배 전후나 광장에서 행사가 있는 날은 인파가 가득했고 엘리베이터도 타기 힘든 상황에 계단으로 다녔다. 학교보다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라, 친구들에게 너 때문에 일요일에 같이 놀 수가 없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는 정말 열심히 준비하곤 했는데, 한번은 선교 대회 때 대학부의 선교 활동 상황이나 비전 같은 것을 패널로 만들어 광장에 전시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기념관 8층 사무실에서 뭔가 이런저런 준비를 하던 중에 갑자기 회장 선배가 커터 칼을 들고 광장으로 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왜 저러나 싶어 물어보니, 우리가 운동회 만국기마냥 패널 테두리에 둘러서 장식한 여러 나라 국기 중에 북한 인공기가 있었고 그걸 발견한 어르신의 불호령이 떨어져 수습하기 위해 광장으로 뛰어 내려간 것이었다. 디지털카메라를 처음 보고서 신기해하던 시절이라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든 패널이었고, 심지어 만국기는 이미지 하나하나를 프린트해 오려서 일일이 붙힌 작품이기까지 했다. 나중에 가보니 인공기가 있던 부분은 구멍이 뻥 나있었고 결국 패널은 빠르게 내려졌다. 회장 선배와는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부딪치는 편이었는데 그때는 진심으로 선배가 너무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세대가 지나고 나면?
대학부와 청년부를 거쳐, 장년부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으나 아직 미혼인 지체들을 위해 만든 청년선교부에 몸담으며 나는 여전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가난과 소수자를 배척하고 교회 세습엔 눈감으며 사학법은 목숨 걸고 반대하는 교회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회의가 밀려올 때쯤 코로나가 엄습했다. 그리고 나의 세상에서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했다. 전 세계적인 전염병에 가장 모범적인 대처로 국격은 올라가고 있었지만 정작 엄마를 비롯한 교회 어르신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대규모 모임과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미 바닥을 향하던 교회 이미지는 더욱 나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와 반비례하여 대면 예배 금지를 교회 탄압으로 받아들인 엄마와 교회 어르신들은 분노를 땔감 삼아 미움을 키워나갔다. 급기야 흔히들 ‘태극기 집회’라 부르는 그곳으로 이어지는 루트가 확 퍼져 나갔다. 그때쯤 혹은 내가 제대로 알기 전부터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이런저런 루머들이 정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었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그 카톡방 혹은 어르신들 모임에서 들은 가짜뉴스가 많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당신의 카톡방에 예전에 통일부에서 고위직으로 일하던 분도 있고 국정원 출신도 있고 너네들이 들은 소식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고급 소식들이라며, 너야말로 가짜뉴스에 선동당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시는 순간 나조차도 엄마 말이 진짜인가 현혹당할 뻔했었다. 거기에다 하필 그 코로나 시기에 성공회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처음에 대학원 간다고 할 때는 그런가보다 하던 엄마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 너는 어디 그런 빨갱이 학교를 다니냐며 민망해서 주변에 말하지도 못하겠다는 얘기를 한 날도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잠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엄마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뭐,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그리고 교회에 대해 마음이 완전히 떠나게 된 일이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코로나 한중간, 엄마가 친구 권사님들과 함께 부산대 의대 캠퍼스 근처 교회에 계신 목사님을 만나러 내려가셨다. 그렇게 내려갔던 것은 우리 구역 권사님 중 한 분이 태극기 집회에 열성적이지 않은 우리 교회에 실망했다며 그만 다니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우리 구역 목사님이셨고 권사님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으셨으며 나도 좋아했던 목사님께 설득을 부탁하며 함께 내려가셨던 것이다. 그런데 다녀온 엄마가 마치 큰 수확을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해하며 전 민정수석 딸이 파란 포르쉐를 타고 목사님 교회의 성도한테 와서 네일과 페디를 받고 갔다는 얘기를 해주셨다고 하셨다. 이후 상대 정치 진영의 부정부패와 공산당 연루설에 대해 한참을 신나서 얘기하셨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루머를 아마도 진짜로 믿고 권사님들과 수다를 떨었을 목사님을 상상하니 공동체에 대해 내가 가졌던 신뢰와 의무감이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내가 그토록 소중히 섬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부 다 허상이었을까? 시간과 정성이 갑자기 아까워졌다. 이후로 엄마는 지나가다 포르쉐나 파란 차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하곤 하셨는데, 그 가짜뉴스는 법정에서 벌금형에 처할 때까지 제법 엄마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가고 겨우 예배만 드리며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광장을 지나 본당으로 향하는데, 불현듯 노인 세대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이 광장이 얼마나 차있을까, 언젠가는 이 광장과 이 큰 교회가 텅텅 비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이 마치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헤매었던 광야처럼 느껴졌다. 그 광야에서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스무 살 이상이었던 사람 중에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고 40년 동안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성경학교에서 그 말씀을 배울 때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나는 열아홉 살이면 좋겠다는 장난 같은 생각만 하곤 했는데, 그 죽음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결국 이집트 노예의 관습이 남아있던 한 세대의 종말 이후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읽고 나서는 하나님이 참 무서웠다. 그때 느꼈던 무서움이 다시 엄습해왔다. 역설적이게도 무서움과 함께 ‘내가 이 교회와 나의 가족들을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제(2025.3.7.)는 계엄령을 내리고 내란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탄핵 심판 중인 대통령의 구속 취소 요청이 인용된 법원 판단이 나왔다. 엄마는 어서 대통령을 석방시키라며 광화문 집회에 나가셨다. 집회에 나갈 때는 내 캠핑 도구 중 하나인 낚시 의자를 꼭 챙겨 나가신다. 바닥에 앉아있기는 힘든데 이걸 가지고 나가면 그렇게 유용하다며 주변에서 “베테랑이시네요” 소리를 한다고 자랑하셨다. 나는 곧 경복궁과 안국동 사이에서 열리는 탄핵 찬성 집회에 나갈 예정이다. 엄마에겐 다른 약속이 있다고만 했고, 아마 내가 거기에 갈 것이라 의심은 해도 확신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 엄마에게 더 이상 “이건 가짜뉴스다. 어떻게 틀렸다” 정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좋은 가족 구성원이 되려고 한다. 그전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집안일을 엄마에게 맡겨왔는데 이제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은 설거지나 빨래나 청소나 장보기 같은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무심했는지 조금은 반성도 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참 힘들었지만, 이래저래 봄을 맞이하고 있다.
이지은
건실한 사회인이자 진실한 신앙인을 꿈꾸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