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속 생명의 표지
[413호 예술, 구원을 묻다]
‘인간은 죽었다’는 실로 현대 예술 공통의 주제다.1)
사실 현대미술 안에는 생명을 긍정하며 다른 이들의 영적인 건강에 관심을 두는 훨씬 많은 것이 있다.2)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관점을 고민하며 리젠트 칼리지로 유학을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 서점에서 반가운 책을 만났습니다. 당시 제 롤모델이던 한스 로크마커의 전집을 발견한 겁니다. 게다가 세일까지 해준다니, 팍팍한 유학생 형편에도 불구하고 여섯 권짜리 두꺼운 하드커버 전집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지요. 현대미술에 막연히 관심을 두기 시작한 대학생 시절, 제가 태어난 해에 세상을 떠난 로크마커의 책을 처음 접하고는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간극을 이어가라는 그가 남긴 숭고한 사명을 발견한 것 같아 혼자 가슴 뛰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영지주의적·도피주의적 복음 이해를 향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한창 신앙과 삶의 통합에 관심이 있던 제게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지요.
대립 구도의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기독교와 현대미술의 관계를 극복하려면, 과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이 필수적일 텐데요. 현재까지 오는 과정에서 논의해야 할 인물이나 영향 관계는 아주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예상하셨듯이 바로 네덜란드의 저명한 미술사가이자 신칼뱅주의자인 한스 로크마커(Hans R. Rookmaaker)입니다. 로크마커와 그가 남긴 전인미답의 책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이 교회와, 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생각할 때, 의의와 시대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는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크마커와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
한스 로크마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뱅주의 사상과 특히 헤르만 도예베르트 저작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세상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고 회복해야 한다는, 프랜시스 쉐퍼로 대표될 수 있을 복음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던 인물입니다. 로크마커는 유럽뿐 아니라 북미에서도 활발하게 강연 활동을 했고, 저작도 아주 많이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로크마커하면 빼놓을 수 없는 책이 바로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일 겁니다. 미국에서 1970년, 한국에서는 1993년에 출간된 이 책은 기독교 출판계에서 예술 관련 서적으로는 이례적일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지요. 1980-1990년대 지성적 복음주의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았을 정도로 (읽지는 않아도 책장에 한 권씩은 꽂혀있을 정도로) 독보적 위치에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현대미술과 문화를 보는 눈은 거의 반세기 전에 출간된 이 책의 시각에 여전히 머물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요.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에서 로크마커는 전문 미술사학자답게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나름의 해석적 틀 안에서 현대미술이 발전되는 과정을 분석합니다.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그의 기본 시각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오롯이 부정적인 평가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예술적 경향이나 형식사적 발전 양상이, 그가 모더니티(modernity) 곧 근대성의 특징이라고 파악한 허무주의에 찌든 인간과 실재에 대한 왜곡되고 파괴적인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평가했습니다. 한마디로 현대미술을 죽어가는 문화의 현장으로 선언한 겁니다.
로크마커의 계몽주의 비판
여기서 죽어가는 문화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어가는 계몽주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로크마커는 신칼뱅주의자답게 모든 문제의 진짜 주범은 근대성의 지적 엔진인 계몽주의(Enlightenment)라고 생각했습니다. 계몽주의는 하나님과 초월의 영역을 제거한 이성과 과학만이 참된 실재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것은 ‘축소된 실재’에 지나지 않았고 그러한 축소된 실재를 끌어안은 과학적 이성주의가 사회·정치·경제, 가장 중요하게는 문화 영역에서 소외와 허무, 부조리라는 재앙적 결과를 불러왔다는 겁니다. 이러한 근대 계몽주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비판은 일견 타당하며 진지하게 숙고해볼 만합니다.
로크마커는 실존주의나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미술 같은 당시의 문화적 반응이 이러한 모더니티가 불러온 기계화와 인간성 소외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렇지만 모더니즘 미술 역시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와 동일하게 하나님과 초월의 영역을 부정하는 폐쇄된 상자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허무주의의 토대와 귀결을 배태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기독교만이 진정으로 생명력 있는 대안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참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문화 예술 영역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죽어가는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말이지요. 세상의 변혁을 외치는 복음주의자들에겐 참으로 가슴 뛰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현대미술 전공자와 전문가들에게는 로크마커의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마치 젊은지구론을 옹호하는 진화생물학자의 주장처럼 답답한 소리로만 들린다는 데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현대미술사론
로크마커의 현대미술사론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간단히 말해, 그의 비평적 관점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재현적 예술 양식의 틀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룰 《현대미술과 문화의 생명》에서도 이런 점을 잘 지적하는데요. 로크마커가 재현적 미술관과 회화의 ‘주제적’ 접근을 고수함으로써 시각적 재현 방식을 재현된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주장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겁니다. 때문에 그는 모더니즘 미술에서 흔히 나타나는 회화적 공간과 이미지의 파편화 및 해체를, 재현된 대상 자체와 그 존엄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던 셈이지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로크마커의 접근은 모더니즘 미술의 발전 과정과 논리를 무시하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밖에 볼 수 없는데요. 사실 모더니즘 회화는 사진 복제 시대가 가져온 회화의 위기와 함께, 점점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문제(subject matter)에서 벗어나 어떻게 그릴 것인가 곧 회화 고유의 예술적 매체 특성과 회화적 실재의 구축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원근법적 환영이나 아카데미즘 미술의 이상화된 전형에서 벗어나 캔버스라는 매체의 평면성과 회화의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적극 탐구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모더니즘 회화의 발전 과정은 회화적 이상화와 환영을 거부한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로부터, 전통적 원근법과 명암법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회화적 재현 방식을 실험한 인상주의, 대상의 구조를 단순화하거나 해체하면서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장해가던 후기 인상주의, 입체주의를 지나 1940-1950년대 미국에서 꽃을 피운 추상표현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역사로 서술됩니다. 대표적인 모더니즘 미술 이론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회화(Modernist Painting)〉나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Towards a Newer Laocoon)〉 같은 유명한 글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발전이 회화의 순수성을 향한 과정이었으며, 캔버스의 평면성이라는 매체의 물리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필연적인 흐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간과 대상의 파편화 및 해체는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였지요.
이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가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들입니다. 큰 논쟁과 반향을 일으키며 피카소를 일약 스타 화가로 만들어준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보는 것처럼, 인체 이미지와 공간을 평면적 파편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한 피카소의 입체주의 화면 구성은 이후 현대미술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사조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술사적으로 이토록 중대한 의미를 갖는 피카소의 작품 세계에 대한 로크마커의 평가를 한번 들어볼까요? “그는 불합리한 인간, 불합리한 실재, 다시 말해 널빤지로 조립된 듯한 인간, 결국 인간이 아닌 인간을 그려나갔다.”3) 모더니즘 미술의 형식주의 미학 발전 논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재현된 인간의 형상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화가의 인식 혹은 세계관을 드러낸다고 보는 주제적·재현적 미술관에 입각한 존재론적 평가에 머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초현실주의 작가 호안 미로에 대한 판단에서 드러나는 극명한 차이를 비교해보는 작업도 흥미롭습니다. 1928년 미로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헨드릭 소르흐의 〈류트 연주자〉를 재해석한 〈네덜란드 실내 I〉를 그렸습니다. 로크마커는 이 작품에 대해서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작품은, 인간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 작품 속에는 부조리한 것, 이상한 것, 공허한 것, 극히 공포스러운 것이 존재한다. 옛 그림은 유머, 비난과 풍자(블랙 유머와 통렬한 풍자)[로 다루어졌으며],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지가 파괴된 것처럼 인간 역시 파괴되었다.”4)
미로가 고전 회화를 그저 모방하거나 단순히 재구성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오직 “블랙 유머와 통렬한 풍자로” 다룸으로써 이미지와 인간을 파괴했다고 보는 로크마커의 시각과 달리,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황금기의 장르화 전통을 시적 상징 기호들을 사용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원초적 감각을 일깨우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적 경험으로 변형시켰다고 평가됩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내면의 직관과 우주적 조화를 탐구하는 미로의 독창적 상징체계와 신비주의적 초현실주의의 조형 언어를 보여줍니다.
로크마커가 현대미술을 부정 일변도로 평가한 것은 어쩌면 회화의 의미와 작동 방식에 대해 자신이 ‘규범적’이라고 생각한 단 하나의 특정한 (기독교적) 시각만을 고집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회화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나 기존 고정관념을 기독교 세계관의 규범성과 혼동하거나 혼합하여, 회화를 판단하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으려던 것이지요. 예술의 고유한 특성과 논리는 무시한 채 성경의 규범성을 예술 영역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는, 수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미친 프랜시스 쉐퍼의 《예술과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문화 참여에 열려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교조적 일방성에 갇힌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술의 세계가 드러내는 미묘하고 복합적인 세상 인식과 계시를 감지할 수 있는 문화적·예술적 지식과 감수성을 키우는 대신, 피상적인 이해와 지식에 근거한 경계심과 적대감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문화의 죽음’ 관점에서 볼 때에는 부조리하고 공허하며 무엇보다 인간이 죽었다고 말하는 그림이, ‘문화의 생명’ 관점에서는 “기발하고 즉흥적이고 신비주의적이고 직관적 경쾌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면 어떨까요?5)
문화의 생명을 향하여
최근 몇십 년 동안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현대미술에 대한 의심과 경계, 부정과 거부 일색의 기존 태도를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현대미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해석학적 관용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흐름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책이 바로 조너선 앤더슨(Jonathan Anderson)과 윌리엄 더니스(William Dyrness)가 함께 쓴 《현대미술과 문화의 생명》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들은 로크마커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어가면서도, 그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극복하고자 하는데요. 때문에 ‘문화의 죽음’의 관점을 넘어 현대미술 안에서도 ‘문화의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키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연구를 기존 접근과 확연히 구별해주는 것은, 모더니즘 미술 자체의 발전 과정과 논리를 제대로 알고 존중하면서도, 그 표면 아래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동기와 맥락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모더니즘 미술 다시 읽기’를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각각 현대미술과 신학 분야 전문가인 앤더슨과 더니스는 그동안 서로를 배격하고 배제하던 미학적 입장과 신학적 입장이 함께 어우러질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다양한 해석학적 틀과 관점을 수용할 때 현대미술의 역사를 향한 시각이 더욱 온전하게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길을 제안합니다.
두 저자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세속 사회》에서 분석한 근대 세속성의 특징에 근거해, 현대미술 발전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부정과 거부가 눈에 띄게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로크마커처럼 그것을 현대미술의 결정적 특징으로 일반화할 때 역사를 왜곡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모든 형식과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해진 근대 세속 사회의 급격한 변화 가운데, 모더니즘 미술 역시 주류 미술 제도와 회화 전통, 더 나아가 종교적 규범과 교리에 저항하고 도전했으며, 근본적으로 이것은 “진정으로 자유롭고 생명을 긍정하는 예술”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6) 그렇기에 일차적으로 ‘불신앙(unbelief)의 예술’이 아닌, 다만 ‘취약해진 믿음’(fragilized belief)의 예술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저자들은 이러한 ‘취약해진 믿음’의 예술을 그저 반기독교적이라고 간편하게 일축해버리는 대신, 그 세계와의 진지한 대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때로 우리 신앙 역시 취약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칫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을 저자들의 제안처럼, 어쩌면 내 신앙의 확실성과 절대성에서 잠시 물러서는 것이야말로 대립과 단절의 구도를 넘어 대화와 상호 이해, 참여와 기여, 그리고 참된 화해와 성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열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리젠트에 기독교문화학 교수로 부임한 조너선 앤더슨을 만날 반가운 기회가 있었는데요. 한국에서도 《현대미술과 문화의 생명》 번역서가 머지않아 나올 수 있다는 소식에 놀라며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앤더슨처럼 ‘문화의 생명’의 길을 선택한 많은 신진 학자가 계속해서 현대미술을 향한 애정과 열정으로 두 세계 간의 의미 있는 대화를 멋지게 이끌어주기를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미술관에도 계시는 생명의 하나님
마지막으로 ‘문화의 생명’ 관점으로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인물을 소개하고 싶은데요. 대니얼 시델이라는 미술사학자 겸 미술비평가입니다. 시델이 쓴 《미술관에도 계시는 하나님》은 현대미술을 제대로 아는 전문가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 시대의 예술에 긍정적이고 열린 자세로 접근하는 흔치 않은 책입니다. 저도 처음 접하고는 신이 나서 흥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요즘 한창 번역 중이니, 올해엔 번역서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에서 시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역사적 신앙에 근거해, 그동안 하나님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졌던 미술관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재를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육화된 초월’의 현장임을 역설합니다. 또 흥미롭게도 개신교에서는 낯선 동방교회의 전례와 성상화(icon) 전통을 심도 있게 다루면서, 이를 인간의 예술적 실천이 갖는 성례전적(sacramental) 본질과 현대미술의 심오한 신학적 의미와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시델은 기독교적 관점을 예술에 적용하는 대신, 예술의 고유한 힘과 작동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요.
예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변혁의 ‘위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한낱 철학, 세계관, 정치적 관점, 문화 이론 안에 갇힐 수 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그 위험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우리의 신앙이 더 굳건하고 더 유연하며 더 미묘한 차이까지 담아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엡 3:18), 그럼으로써 우리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사실은 얼마나 더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7)
시델의 말처럼, 위험하고 낯설게 보이는 이 시대의 예술은 그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술이 예술로 존재하는 것을 불신하는 유연한 종류의 성상파괴주의(iconoclasm)”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저 죽음이 만연한 예술의 세계에서 우리 손으로 ‘문화의 생명’을 일구어내야 한다는 섣부른 사명감을 내세우기보다, 이미 그 세계 안에 임재해계시는 성령께서 이루고 계실 생명의 표지를 발견하기 위해 눈을 크게 떠보는 건 어떨까요?
현대미술 곳곳에 낯선 모습으로 숨어있을 그 생명을 향한 세밀한 주의력을, 성령의 행하심에 조용히 발맞추어 따라가려는 겸손함을, 그 모든 더딘 과정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있는 믿음을 우리 모두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1) 한스 로크마커,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Modern Art and the Death of a Culture)》(IVP), 158쪽. ‘modern art’는 ‘현대미술’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만, ‘현대 예술’로 표기한 로크마커 번역서의 제목은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현대미술’로 통일해서 사용하였습니다.
2) 조너선 앤더슨·윌리엄 더니스, 《현대미술과 문화의 생명(Modern Art and the Life of a Culture)》, 83쪽.
3)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 186쪽.
4) 위의 책, 180쪽.
5) 《현대미술과 문화의 생명》, 72쪽.
6) 위의 책, 30쪽.
7) 《미술관에도 계시는 하나님》, 14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이상 IVP)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