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되는 법
[414호 예술, 구원을 묻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엡 2:14, 새번역)
워크온워터, 포티데이즈앤드나잇, 쓰리와이즈맨, 브레드오브라이프.
우리말로 옮기면, ‘물 위를 걷다’ ‘40일의 낮과 밤’ ‘세 명의 동방박사’ ‘생명의 떡’인데요. 다 복음서와 관련한 이야기니까 찬양이나 경건 서적 제목인가 싶지만, 아닙니다. 힌트를 드리면요. 베들레헴이나 갈릴리바다가 아니라 미국의 텍사스 오스틴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다름 아닌 맥주 이름입니다. 이 경건한 맥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주유소를 개조한 생맥줏집인 나사로 브루잉(Lazarus Brewing), 주인장은 ‘커피, 맥주, 사람들과 사랑에 빠진’ 몬태나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지요. 처음에는 칼뱅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중예정설IPA 같은 맥주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가장 마셔보고 싶은 맥주는 브레드오브라이프인데요. 캐러멜, 초콜릿, 토피 풍미가 나는 알코올 도수 8.5%의 아주 진한 독일식 라거인 도펠복(doppelbock)입니다. 16세기 독일 바이에른 지역 수도사들이 금식 기간에 음식 대신 마셨던 일명 ‘액체 빵’이라 불리던 맥주라고 합니다.
복음서와 맥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세계가,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지붕 아래 만났습니다. 위로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상상력, 아래로는 땅 위의 삶에 대한 긍정, 앞으로는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뒤로는 전통에 대한 기억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유쾌한 도발이 아닐 수 없지요. 이 위트 넘치는 나사로의 생맥줏집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영성과 문화가 어우러진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데요. 로고스 포에트리 콜렉티브(Logos Poetry Collective)라는 기독교 예전 형식의 시 낭독회입니다. 이 새로운 시도를 이끄는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트라비스 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추구하는 것은 상상력을 통한 커넥션, 친교입니다. 상상력은 단지 창조성의 수단일 뿐 아니라, 소망과 공감을 위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이 상상력을 통해 우리 중 누구든 경험을 해석하는 단 하나의 정확한 렌즈를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보는 방식에 보다 온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지요.1)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불문율이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혹독한 역사적 경험을 지나온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정체성을 지키는 그 경계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자 사회적 번영의 신학적 근간이었지요. 문제는 거룩하고 구별된 삶의 지표로 기능해야 할 경계가, 배제와 차별, 폭력의 근거로 작동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그 위계와 차별의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경건한 것과 경건하지 않은 것을 나누던 기존 질서가 예수님 안에서 전복된 셈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이 담을 넘어,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로 흘러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담을 허무신 예수님을 우리의 평화, 우리의 구원이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담 없는 세상의 평화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안전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의심스럽고 위험한 존재일 뿐이었지요.
21세기에도 여전히 세상은 배제와 폭력의 논리가 지배하는 온갖 담으로 가득합니다. 나와 이웃을 가르는 벽,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 나라와 나라를 가로막는 국경이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지켜주는 우리의 구원이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가 안전과 번영은커녕 점점 갈등과 대립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불안이 조장하는 불신과 적대감이 우리의 정신세계와 우리가 숨 쉬는 사회의 온 공기를 가득 채운 이때,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마저 뛰어넘는 성육신의 신비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사람과 사람을 가르던 오랜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물고 구원이 사방팔방으로 자유롭게 흘러가게 하신 예수님을 말입니다. 어느 때보다 평화를 향한 갈망이 깊어지는 시절, 예수님이 드러내신 평화와 구원의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헴스의 말처럼 소망과 공감의 능력으로 작동하는 상상력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벽을 허무는 예술적 상상력
신학자이자 문화 연구가인 데븐 앱츠는 ‘우상을 꿰뚫어보다: 국경에서 만나는 예술과 상상력’(Seeing Through Idols: Art and Imagination at the Border)이라는 글에서 최근 몇십 년간 세계 곳곳에서 국경 장벽이 강화되는 현상에 주목합니다.2)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분리 장벽과 트럼프 정부의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대표적인 예일 텐데요. 앱츠는 근대 식민주의(colonialism)의 분리주의 정신을 그대로 담은 이러한 장벽이 이방인이나 이질 집단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에 근거하여 나와 타자를 분리하고 싶어 하는 왜곡된 갈망을 투영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만 있는 구원의 능력을 분리·안보·통제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게 한다는 점에서 국경 장벽에 숨어있는 신식민주의의 우상적 성격을 지적하기도 하지요. 더 나아가, 기독교적 가치에 충실한 사회적 관계의 역동성은 결합·소속·연결·친밀성이라는 원칙과 실천이 지배하기에, 분리주의 정신에 의해 유지되는 식민주의 사회 비전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특히 앱츠는 신식민주의의 우상과 거짓 평화에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술가들의 특별한 능력에 주목합니다. 수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이 예술 특유의 방식으로, 안전과 평화를 내세운 국경 안에 숨어있는 폭력과 배제의 논리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 견고한 장벽 너머의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을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거침없이 벽을 허무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예술적 상상력은 어떤 면에서 급진성을 담보하기에 많은 사람에게 불편하고 위험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만 저는 어쩐지 이 예술가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팍스로마나(Pox Romana)가 가져다주는 안정과 질서에 익숙한 우리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예술가들의 유쾌한 전복과 반란, 틀을 깨는 상상력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우리를 가르고 나누는 수많은 종류의 벽과 담, 경계를 소재로 한 다양한 동시대 미술 작품을 통해, 막힌 담을 허물고 갈라져있던 것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님을 따라 이 시대의 참된 평화의 길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너와 나를 가르는 죽음의 경계
이전 글(411호)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컬럼비아 출신 개념설치미술 작가 도리스 살세도는 2007년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입구의 거대한 전시 공간인 터바인 홀(Turbine Hall) 바닥에 깊은 균열을 만들고 〈십볼렛(Shibboleth)〉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바닥에 난 균열이 작품이냐며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전시장 바닥을 가로지르는 균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적 메타포입니다. 관객이 그것을 보고, 건너고, 경험하는 모든 과정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셈이지요. 예술이란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해주는 완결된 형태의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관객의 움직임을 요구하고 반응을 유도하는 과정 자체일 수 있다는 개념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관객의 경험과 참여가 작품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되지요. 이는 작품을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프랑스의 유명한 큐레이터이자 미술 비평가인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의 미학’(relational aesthetics) 개념과 연결됩니다.
흥미롭게도 ‘십볼렛’은 성경에 나오는 단어인데요. 입다가 이끄는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도망치려고 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구별해내서 죽이기 위해 이용했던 바로 그 단어입니다. 지역별 방언 특성상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발음했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구별해낼 수 있었지요. 성경은 그날,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끔찍한 종족 학살의 기억과 연결된 ‘십볼렛’이라는 단어는 배제와 구별, 폭력을 위해 작동하는 언어적 장벽을 상징합니다. 지역 갈등과 차별이 첨예하던 과거 한국 사회에서도 특정 지역 사투리는 곧바로 차별과 편견의 딱지가 되기도 했어요. 이민 생활에서 언어로 인해 차별과 굴욕감을 경험하는 일 역시 아주 흔합니다.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건물은 과거에 화력발전소였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그 공간의 바닥을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균열 속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그 균열은 산업화가 가져온 진보와 번영의 서구적 이상 뒤에 가려져있던 분리와 배제, 착취의 역사를 소환합니다. ‘십볼렛’이라고 불리는 깊고 거대한 균열은 이미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버렸을지 모르는 수많은 사회적 경계와 보이지 않는 분리선을 가시화하지요. 사회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나와 너를 가르는 저 깊은 죽음의 균열, 구별과 배제에 근거한 폭력의 실재를 대면하게 하는 셈입니다.
〈십볼렛〉을 보러 온 관객들이 작품에 반응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합니다. 바닥의 균열에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쳐 가는가 하면,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손을 넣어보기도 하고, 균열 양쪽에서 손을 잡고 걸어보기도 하지요. 이처럼 눈앞에 드러난 죽음의 경계 앞에서,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바닥에 깊은 균열을 품은 거대한 터바인 홀의 텅 빈 전시장은 어쩌면 작품이 아닌 관객에 대해, 곧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프란시스 알리스의 〈그린 라인(Green Line)〉(2004)은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1949년에 합의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 일명 ‘그린 라인’을 따라 구멍 뚫린 페인트 통을 들고 말없이 걸어가는 퍼포먼스입니다. “때로 시적인 뭔가를 하는 것이 정치적인 일이 될 수 있고, 때로 정치적인 뭔가를 하는 것이 시적인 일이 될 수 있다”(Sometimes doing something poetic can become political and sometimes doing something political can become poetic)라는 긴 부제처럼, 현실 속 국경과 경계를 예술적 행위로 탐구하는 작품인데요.
퍼포먼스는 전통적인 조각이나 회화와 달리, 행위의 과정과 맥락 자체로 작품이 됩니다. 관객 반응이나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역사적 맥락 역시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일부입니다. 알리스의 이 퍼포먼스에서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역사적 갈등이라는 맥락이 중요하지요. 최근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가자지구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상황을 생각할 때, 장벽과 경계, 배제와 차별, 폭력에 대한 의식과 성찰을 일깨우는 이런 예술가 들과 작품이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사실 ‘그린 라인’은 1967년 이스라엘이 요르단 서안지구(West Bank)를 점령하면서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지역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과거의 국경선을 눈에 보이는 녹색 선으로 가시화하고 재현함으로써, 알리스는 모두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국경이라는 물리적 경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일깨웁니다. 구멍 뚫린 페인트 통에서 물감을 흘리며 무심히 걸어가는 단순한 행위의 결과인 ‘그린 라인’은 그 자체로 어떤 내재적 의미나 위력도 없는 그저 생뚱맞고 무의미한 녹색 선일 뿐이지요. 국경이라는 정치적·군사적 경계가 원래부터 자연스럽거나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며, 정치적·사회적 구성물이자 일시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임을 드러내는 겁니다.
알리스의 그린 라인을 천천히 따라가며,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나누고 구분 짓던 경계, 나와 타자들의 관계를 규정하던 방식에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이러한 의식적 성찰이 우리 안에 새로운 사회적 삶과 존재 방식을 상상할 공간을 만들어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어린아이의 눈으로
프랑스 거리예술가 JR은 사람들의 잠들어있는 의식을 일깨우는 도발과 전복의 예술적 전략을 특유의 대담하고 유쾌한 상상력을 통해 풀어내는 작가입니다. 심각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사람들에게서 가장 순수한 인간 본연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여럿 진행했습니다. JR은 벽을 사랑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보통 벽은 사람들을 가르고 나누지만, 역으로 그 벽을 이용하면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자신의 예술적 기획으로 삼습니다.
그의 〈거인들(Giants)〉 시리즈 일부인 〈키키토(Kikito)〉 역시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지난 2017년, 그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위치한 테카토라는 마을에 사는 어린아이 키키토의 거대한 사진을 국경 장벽에 재치 있게 설치했습니다. 사진 속 키키토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마치 장난을 치듯 국경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아이의 천진무구한 모습이 국경 장벽에 감도는 삼엄한 분위기를 무색하게 하고 무력화합니다. 국경 반대편에서 그런 키키토를 올려다보고 있는 군복 입은 국경 경비대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 작품은 그즈음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멕시코-미국 국경에 10억 달러, 한화로 1조 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물리적 장벽을 세우려는 트럼프 정부의 국경 정책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습니다.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트럼프 정부는 이번엔 강력한 관세 정책을 통해서 세계에 또 다른 장벽을 쌓아 올리고 있는데요. 이런 현실 앞에서, 이제 꽤 자랐을 키키토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곳일까 생각하면 희망보다는 한숨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담을 쌓고 철저한 경계를 보장함으로써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겠다는 배제와 힘의 논리 앞에서, 〈키키토〉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쉽게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을지라도, 사람들 사이를 나누고 가르던 폭력과 배제의 장벽을 보기 좋게 무력화하는 JR의 신나는 예술적 상상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키키토〉 철거 예정일 하루 전, 그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합니다. 장벽으로 가로막힌 양쪽 지역을 거대한 식탁으로 연결하고, 양쪽 사람들이 서로 음식과 음료수를 나누어 마시는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양쪽을 연결한 식탁 위 거대한 두 눈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나뉘어있던 것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장벽과 경계의 삭막한 현실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고 공동체로 연대하는 가운데 함께 즐거워하면서 먹고 마시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상상력 넘치는 예술적 기획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비록 그들을 가로막는 장벽은 여전히 건재할지라도, 상상력과 공감으로 채워진 이 잔치에서는 국적, 신분, 문화, 성별, 경제력, 직업, 신체적 조건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모두가 함께 먹고 마시고 스스럼없이 자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새로워진 세상을 향한 사회적 상상력을 연습하는 장이 열린 셈입니다.
‘예술을 경험한 당신은 더 이상 같을 수 없다’
신학자 윌리 제임스 제닝스는 ‘예술적 정신과 예언자적 예술 구현하기’(Embodying the Artistic Spirit and the Prophetic Arts)라는 글에서, 예언자적 태도와 결합된 예술은 교묘하게 은폐된 실재와 진실을 드러내고, 보아야 할 것과 알아야 하고 말해야 할 것에 우리의 눈과 귀, 입을 열어주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예술적 태도를 삶의 양식(mode)으로 배양할 때,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의 힘과 근육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기존의 지배 논리에 안일하게 빠져 현상 유지에 급급하게 만드는 현실도피적 공상이나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망상과는 다를 텐데요. 지금까지 살펴본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 사회에 잘 드러나지 않는 벽과 경계를 드러내고 그 너머로 나아가 낯선 타자를 향해 손을 내밀게 하는, 행동하는 상상력, 일상의 존재 방식을 변혁하는 힘을 가진 ‘소망과 공감’의 상상력일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금 낯설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개념, 설치, 퍼포먼스 작품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기존의 예술 개념을 벗어나, 도발과 전복, 충격, 파열 등의 예술적 전략을 통해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잘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할 때가 많습니다. 틀을 깨서 충격을 주고 당황하게 하고,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보게 만들지요. 예술에서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가벼운 여흥거리만을 기대한다면, 이런 작품들이 그저 귀찮고 불편하고 깊은 반감마저 느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전시장 바닥에 균열을 내고, 구멍 뚫린 페인트 통을 들고 걸어가는 작품은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한 어떤 실제적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쓸데없는 일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술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해줍니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우리를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게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 밀튼 글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을 경험한 후 당신은 더 이상 같을 수 없다.”
예수님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 안에서 하늘과 땅이, 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신비와 평화와 구원의 실재 안에서 살아가려면, 우리 자신의 시각과 경험이 지닌 한계를 인식하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을 새롭게,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주는 소망과 공감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드러나지 않게 숨어있던 경계와 담을 찾아내고 과감하게 허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딘가에 있을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서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평화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시겠다고요? 이번 주말, 미술관을 방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1) 〈이미지(Image)〉(2022년 봄호), 50쪽.
2) 〈이미지(Image)〉(2020년 가을호), 42-49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땅에서 부르는 하늘의 노래, 시편》 《진리는 나의 집에 있었다》(이상 IVP)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