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다?
[414호 유배지에서 만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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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다.” 이 말은 내내 나의 신학 공부 여정의 모토였다. 나는 죽을 만큼,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공부했다. 이것은 타인과 비교한 결론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다.
신학 공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신학대학원을 선택한 과정부터 말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처음 염두에 둔 곳은 서울에 있는 두 곳의 유력한 교단 신학대학이었다. 두 학교 모두 수도권이라는 지리적 이점은 물론, 쟁쟁한 교수진과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있어 학문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대형 교단 소속이어서, 졸업 후 진로도 탄탄해 보였다. 한 곳은 보수적이고, 다른 한 곳은 개방적인 분위기인데, 후자에 마음이 쏠렸다. 내가 신학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가 칼 바르트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고향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누나를 만났다. 대학 입학 후 서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주었던 분이다. 그녀의 안내로 서울침례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진로 상담 기회도 얻었다. 누나는 나에게 몇 가지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원래 침례교회 출신이라는 점, 서울침례교회를 중심으로 이미 일정한 인맥이 형성되어 있어서 다른 교단으로 진학한다면,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곳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인재가 많아 내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조언들은 충분히 타당하고 논리적이었다. 나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방 신학교에, 군소 교단보다는 크지만 이따금 이단 아니냐는 야박한 소리도 듣고, 학문으로서 신학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다른 신학교에 비해 외국에서 정식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교수들이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목회적으로도 큰 교회보다 중소형 교회가 대부분이어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럽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나일 수 없다.
나를 분발하게 만든 입학식 예배 설교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설교자는 당시 총장 허긴 박사님이었다. 그는 미국의 고등교육 제도 가운데, 학부 없이 대학원만 존재하는 세 가지 분야를 언급하셨다. 그것은 의과대학(Medical School),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 그리고 신학대학원(Divinity School)이었다. 이 세 기관은 공통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룬다. 불행하게도 이 중에 가장 공부하지 않는 이들이 목사라는 말씀이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는 신학생이 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렇게 대전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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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지아비 잃고 과부 되어 다섯 남매를 키우느라 등골이 휘어진, 작고 단아한 어머니. 당신은 예수를 믿기는커녕, 무속에 깊이 빠져있었고, 한때는 남묘호렌게쿄에도 몸담은 적이 있었다. 천상천하에 의지가지없는 과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미친 신앙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내 신학교 간다는 내색도 하지 않다가 내던지듯 통보하고 입학했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은 막막했다. 교회 형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해주었다.
첫 학기를 마치고 고향 가는 길은 참 멀었다. 난 여태 그런 어머니 얼굴도, 분노하는 눈도 본 적이 없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언성을 높이고 호통을 치셨다.
나는 다섯 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다녔다. 기운 가세를 일으키지는 못할망정 제 몸 하나 건사하는 직장이나 얻어야 마땅할 판에, 뜬금없이 신학교라니, 목사가 되겠다니.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당시 어머니는 생선 장사하며 번 돈을 장판 밑이나 휴지통에 숨겨두시곤 했는데, 장판 밑에서 꺼낸 돈다발을 내게 몽땅 건네주셨다. “다음 학기 등록금 해라.”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는 혀를 차셨다. “고맙다는 말도, 나중에 벌어서 갚겠다는 말도 못 하냐. 바보같이.” 1989년, 여름, 6월에서 8월 사이였을 것이다.
그해 가을, 11월 18일은 토요일이었다. 대전역에서 오전 7시 53분, 서울로 향하는 통일호를 탔다. 나는 당시 기독사상연구회(기사연) 간사였고, 매주 토요일이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들렀다가 저녁엔 교회로 가는 일정이었다. 날씨는 차차 흐려지더니 이내 눈이 내렸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당시 어머니는 거의 매일 생선을 팔기 위해 경북 울진에서 봉화를 거쳐 영주 가는 버스를 타셨다.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로 소문이 난 곳이고, 왕복하는 데 족히 6시간이 걸렸다. 좌판을 잡지 못해 수모를 겪기도 하셨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용케 자리를 잡았다. 이 눈은 영주 시장에도 내릴 것이다. 눈을 피할 수 없는데 추위에 떨며 하나라도 더 팔려는 어머니 모습이 그려졌다. 당신 뜻에 반해 살아가는 아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 놓으면서도, 결국엔 고생하여 번 돈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며, 온 세상을 망가뜨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대책은 십자가였다. 그것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온몸을 내어주신 미친 사랑이다. 인간을 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인간을 용서하는 사랑이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 그제야 알았다. 하나님은 어머니임을. 하나님은 내 어머니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내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의로운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스러운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양극성을 동시에 지닌다. 우리는 둘 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설 수 없다. 엔도 슈사쿠는 ‘부-모 하나님’을 이야기했다. 나의 언어로는 ‘아빠 하나님, 엄마 하나님’. 이것이 내가 만난 두 번째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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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공부는 즐거웠다. 기도하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도, 매시간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대한기독교서회 ‘현대신서’ 시리즈를 애독했다. 가격도 적당했다. 구내식당 한 끼가 1,000원에서 1,500원 하던 시절, 그 책들은 가격표가 두세 번 붙은 뒤에도 대개 천 몇백 원 정도였다. 한 권이 한 끼 아니면 두 끼 값이고, 세 시간 수업이면 다 읽을 수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이 소책자들은 명확한 핵심 딱 하나를 말한다. 그래서 오래 남는다.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J. M. 로흐만의 《프로메테우스냐 그리스도냐》, 헬무트 틸리케의 《신과 악마 사이》, 칼 바르트의 《바르트 사상의 변화》, 루돌프 불트만의 《성서의 실존론적 이해》 등이다. 로흐만의 책은 내게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프로메테우스와 그리스신화는 운명과 신에게 순응했다. 반면 야곱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저항했다. 그렇게 생물학적 동생이라는 운명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감히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야곱에 관한 내 책 《내 안의 야곱 DNA》의 씨앗은 이 책에서 나왔다.
틸리케의 책은 예수의 광야 유혹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어주었다. 자크 엘륄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 유혹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경제적·종교적·정치적 메시아라고 보는 것인데, 그것은 거짓 메시아다. 언젠가 이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한 자그마한 책 한 권을 써보고 싶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광야의 예수와 달리,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헛된 미혹에 빠져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아닌 다른 이름의 메시아를 따르며 구원을 좇는다.
그 외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책을 탐닉했다. 주로 한국신학연구소, 대한기독교서회, 분도출판사, IVP의 책들이었다. 신학생 시절 나를 키운 책들의 7할은 이 네 출판사에서 나왔다. 학교 안에서는 보수적 공기를 마시며, 책을 통해선 진보적 신학과 다양한 전통을 흡수했다. 때로는 그 이질성이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것들이야말로 나를 풍요롭게 만든 자양분이었다고.
대학에서 강의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전통과 사상을 경험해보라고 권한다.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만나는 교인들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이질적인 집단 앞에, 단 하나의 신학에 매인 목회자는 그들을 이해하거나 설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학 외에도 문학과 역사, 철학은 물론 과학·건축·미술·음악·스포츠까지 분야를 가리지 말고 읽으라고 말한다. 무엇이든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책이라면 주저 없이 접해보라고.
또 하나의 이유는, 20대와 30대가 방황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청소년기는 방황을 허락받지 못한다. 그러니 적어도 이 시기, 즉 신학을 공부하는 청년기에야말로 자기 경계를 넘는 독서가 절실하다. 그럴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신학과 전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자신을 상대화하면서도 자기 전통에 굳건히 설 수 있다.
어쨌든,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다양한 전통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나는 이질적인 신학과 전통을 맘껏 흡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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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만으로는 공부의 한계를 절감했다. 함께 공부할 무리를 찾았다. 그들은 내 공부를 지속시켜주는 동력이 되었고, 내 시야가 편협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꾸준히 모였던 이들은 여영기·이기대·전남식·진일교 등이었고, 김용민과 이성하 등은 필요할 때마다 합류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책들은 대부분 혼자 읽기 벅찬, 이른바 ‘벽돌책’이었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상·하권,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성찰》,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쇠렌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과 《죽음에 이르는 병》,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는 영어 원서로 읽었다.
신학 쪽에서는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탁상담화》, 《루터 선집》 일부를 읽었다. 또 파울 알트하우스의 《마르틴 루터의 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고백록》, 선한용의 《시간과 영원》,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총서 소책자들과 영어로 된 《로마서 주석》도 함께 보았다. 그런데 이 마지막 책은, 읽고도 무엇을 읽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대학 후배인 손성현 목사의 탁월한 번역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빌립이 광야에서 만난 간다게의 내시가 한 말은 내 말이기도 하다.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행 8:31, 이하 새번역) 나는 그저 읽었다. 숙고하거나 소화할 여력도 없이. 읽었다기보다는, 밀어붙였다. 높은 산 정상에 오른다고 해서 그 산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정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그 산을 올랐다. 산이 좋아 산에 가듯, 나는 독서에 빠져들었고, 미친 듯이 읽어댔다.
다행히 석사과정(Th.M.)에서는 최고의 동료를 만났다. 오성택 목사다. 그는 나의 가장 강력한 맞수였다. 서로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을 이기고 싶어서 책을 읽었고, 토론을 벌였다. 대학원 세미나는 거의 우리 둘만의 전장이었다. 과열된 우리 모습을 묵묵히 지켜봐준 교수님과 참아준 동료들에게는 미안할 따름이다. 우리 둘은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서로의 진심을 나누었다. “너로 인해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했고, 축복했다. 그는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나는 모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후배들과의 독서 공동체를 꾸려 공부한 경험과 맞수를 만나 경쟁했던 기억은 나를 성장시켰다. 네 명이 함께 읽는다면, 나는 동서남북, 전후좌우, 네 개의 시선으로 책을 읽는 셈이었다. 그들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는 그들이 놓친 것을 보았고, 또 우리는 같은 것을 함께 보았다. 독서모임은 단순히 읽는 행위를 넘어서 있었다. 감정은 뜨거워졌고, 사고는 날카로워졌다.
다른 학문도 그러하겠지만, 신학은 혼자서는 깊어질 수 없다. 신학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가운데, 서로의 한계를 비추는 우정 안에서 비로소 살아 숨 쉰다. 신앙이 신자의 공동체 없이 존재할 수 없듯, 신학도 우정의 공동체 안에서 자란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 사고는 더 깊어졌고, 더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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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서 나는 신이 나서 공부했다.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재미있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학공부의 필요성과 중요성》이라는 설교에서 말한다. 신학은 신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성도가 신학을 공부해야 하며, 그래야 히브리서가 말하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숙한 신자(히 5:12)가 된다.
에드워즈에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식은 단순한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의 길이다. 지식 없는 은혜는 맹목적이기 쉽고, 은혜 없는 지식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참된 신학은 경건의 훈련이다.
나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꼬박 밤을 새워 공부했고, 새벽 2시나 3시 전에 잠든 적이 드물었다. 독서실에 앉으면 세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꼼짝없이 책만 읽었다. 낮에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영어학원이나 논술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주말에는 파트타임 사역을 계속했고, 그 시절엔 석사만 졸업해도 시간강사를 할 수 있었기에 한두 과목 정도는 정규 강의도 맡았다. 나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예배처럼 여겼다. 강의는 주일예배, 대학원 세미나는 오후나 수요 예배, 독서는 새벽기도회, 밤샘 공부는 금요 철야 예배였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에 미쳐 사는 동안, 내 영혼은 점점 파리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기도한 적이 없다. 겉으로는 기도를 드렸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비트겐슈타인, 바르트, 그리고 존 힉의 종교다원주의를 어떻게 논파할까와 같은 온갖 신학적 주제들만 생각했다. 에드워즈와 달리 내게는 신학과 기도가 따로 놀았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말하지만, 정작 내 안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팍팍한 심령으로 사역하니 열매도 시원찮았다. 타인과의 관계도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공부·아르바이트·사역,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다 보니 몸은 점점 망가져갔다. 아내 건강 문제로 교인이 운영하는 한의원에 들렀다가, 나도 진맥을 받았다. 한의사는 내 맥을 짚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러고도 어떻게 사세요?” 수입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주유할 돈이 떨어진 날도 있었고, 아들 분유 살 돈이 없던 날도 있었다. 모든 게 총체적 난국이었다.
내가 왜 그렇게, 내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공부했을까.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긴 투병 중에 한 번 집에 오셨던 날, 내가 예수에 미친 걸 아시고는 걱정하셨다. “나는 네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기를 바랐는데, 교회만 다니는구나.” 그분이 남긴 유일한, 그리고 제대로 된 유언 같은 말이다. 예수도, 공부도 버릴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이 말했듯이 오로지 독서만이 아버지 잃은 유배지의 삶을 오롯이 버텨내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죽도록 공부하다가 죽을 판이었다. 전도서 말씀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고,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 그래서 살기 위해 성경을 묵상했고, 결국 목회로 방향을 틀었다. 신학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다? No! 신학 공부하다 죽으면, 개죽음이다.
김기현
로고스교회의 담임목사이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로 있다.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와 제자가 되어, 작가와 목사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부전자전 고전》 등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