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속 사회의 경계에서 그리스도의 시간을 살아내다 ―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

[414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3]

2025-04-30     김동규

토마시 할리크(Tomáš Halík, 1948-)는 1948년 6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태어난 가톨릭 신부로, 철학자·신학자·사회학자이기도 하다. 프라하 카를 대학교 철학부에서 사회학과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고 197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라하에서 비밀리에 신학을 공부했으며, 1989년 로마교황청 라테라노 대학교와 브로츠와프의 교황청 신학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아 신학박사학위(ThDr. hab.)를 취득했다. 1978년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체코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 맞선 프란티셰크 토마셰크 추기경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하 교회’에서 활동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바츨라프 하벨과 긴밀히 협력했으며, 1989년 이후 그의 고문 중 한 명이 되었다. 2008년 베네딕토 16세로부터 몬시뇰 칭호1)를 받았다. 공산주의 정권 몰락 후 체코 주교회의 사무총장(1990-1993)을 역임했고, 현재는 프라하 카를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체코 그리스도교 아카데미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4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쉬운 글쓰기를 통해 신학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책을 저술했고, 낙태 불법화에 반대하고 성소수자 권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제 중 한 명이다.

이 인터뷰에서 할리크 신부는 본인의 삶에 대한 회고와 시노달리타스 및 카이롤로지 등 자신이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사유의 실마리를 알기 쉽게 해명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그리스도교의 오후》·《상처 입은 신앙》·《고해 사제의 밤》(분도출판사) 등 우리말로도 그의 주요 저술이 번역되었다. 할리크 몬시뇰은 2024년 3월 21-22일 룩셈부르크 종교사회연구소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주강사로 초청받았다. 해당 학술회의 둘째 날인 22일 할리크 몬시뇰을 만날 수 있었으며, 룩셈부르크 종교사회연구소에서 인터뷰 공간을 선뜻 내어주었다.

이하 사진: 인터뷰어 제공

- 2023년에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책도 여러 권 번역되어 아마 이 인터뷰를 한국 독자들이 친숙하게 여길 것 같아요. 한국에 대한 인상과 경험을 먼저 여쭈어도 될까요?

한국은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나라지요. 매우 친절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저는 우리나라와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처한 상황 사이에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1970년대 이후 민주화 혁명에 참여함으로써 매우 높은 도덕적 권위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89년에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여 투쟁했던 세력의 일부였으며,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도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세대이며, 우리는 단지 과거에만 의존하여 살 수 없습니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질문, 새로운 문제들이 있으며, 사람들에게 다가갈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의 많은 교회 지도자 및 신학자와 대화했을 때, 그들은 교회를 위한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 책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음에도 한국어로 된 제 책이 여러 권 있었고, 사람들과의 만남과 토론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이제 그리스도교는 세계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시노드 여정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시노드적 쇄신이 있고, 저는 시노드를 공동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동시대와의 대결이 아니라 대화라는 전략이 있었죠. 이제 우리는 대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의 길, 즉 ‘시노달리타스’로 나아가야 합니다.2) 시노달리타스의 일부, 이 공동의 길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 속한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 신부님의 삶에 대해 먼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선생님이 그리스도교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술하신 것에 주목했습니다. “체스터턴을 읽었을 때, 저는 가톨릭이 역설의 종교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후에 저는 교회에서 열리는 오르간 연주회에 가기 시작했고, 그 아름다움은 저에게 거기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신부님과 그리스도교의 첫 만남이 문학과 음악, 혹은 아름다움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될는지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1948년,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해에 프라하의 세속적 인문주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문헌 사학자였죠. 종교교육 없이 자랐습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조금 형식적인 것이었어요. 종교에 관한 관심은 17살 때쯤 시작되었고, 여러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톨릭 문화의 미학적 매력이었습니다. 문학, 성가, 건축을 통해 제게 영향을 미쳤죠. 그러한 관심은 공산주의와 강요된 무신론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항의이기도 했어요. 당시 국가에 의한 마르크스주의가 횡행했거든요.  1968년에는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있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 공산주의 체제 일부에 자유화를 시도하던 시기였죠. 15년 이상 감옥에 있었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는데요. 그중에는 신학자들과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위대한 증언을 했던 사제들을 만나면서, 교회는 저에게 인간의 얼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미학적인 것만은 아니었고, 지적 영감에 그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와 신앙은 인간의 얼굴이었고, 사제들과 신학자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들은 제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지요. 하지만 그 후 1968년 8월에 러시아의 점령이 있었고요. 교회 박해가 20년 더 이어졌습니다. 1950년대 스탈린 시대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더 교묘했습니다. 비밀경찰이 어디에나 있었고요. 그 시기에 저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우리나라에는 공산주의 국가가 통제하는 신학교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중등교육을 마친 직후에만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사회학·철학·심리학 분야의 대학 교육을 받은 상태였고요. 사제 활동을 할 유일한 방법은 지하 교회를 통해서였습니다. 저는 지하에서 공부했고 1978년 동독에 있는 한 주교의 개인 예배당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방으로 여행할 수 없었지만, 동독에서는 가톨릭교회 상황이 조금 더 나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죠. 저는 주말을 이용해 서품을 받기 위해 동독 에르푸르트 주교의 개인 예배당에 갔습니다.

어머니조차도 제가 사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했어요. 11년 동안 지하에서 사제로 활동했죠. 제 사회적 직업은 약물의존자와 알코올의존자를 돕는 심리치료사였습니다. 동시에, 저는 지하 교회에서 사제 활동을 했고 프라하 대주교였던 추기경의 조언자가 되었지요. 그는 여러 해 동안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제가 서품받은 시기는 1978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의 즉위식 하루 전이었는데,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후, 당시 토마셰크 추기경을 지지했고 그가 공산주의 정권에 더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하 교회 출신 사제 세 명을 받아들였고, 저는 그중 한 명으로 그의 공식 조언자가 된 거죠.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사목 서한과 정부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도덕적 반대의 상징이 되었고 벨벳 혁명에도 참여했습니다.

또 저는 ‘플라잉 유니버시티’(Flying University)라는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개인 아파트에서 만나 비밀 강의를 들었는데, 때로는 서방의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개인 관광객으로 와서 강의해주었죠. 그래서 우리는 현대사상과 포스트모던 철학적·신학적 사유로부터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반체제 운동, 곧 정치적 반체제, 문화적 반체제, 종교적 반체제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 분야 모두에 친구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이 몰락하고, 첫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은 40년 동안 제 아주 좋은 친구였습니다. 저는 또한 그의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정권 몰락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프라하에 학문적 교구를 설립했습니다. 체코 그리스도교 아카데미를 설립했고요. 이렇게 해서 다양한 대륙을 다니며 공산주의 정부 체제에서 겪었던 일을 나누는 강의를 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 신부님은 그러한 삶에서도 심리학·철학·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셨고, 특히 현대철학자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이를 글과 사유로 녹여 내셨습니다. 이를테면, 리처드 카니의 말을 인용하시는 책도 보았고요. 철학을 지속해서 연구하시는 동기는 무엇인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현대사상과 연결하여 신학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고, 저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주요 임무는 복음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화의 핵심 부분은 문화적 통합이죠. 문화적 통합 없는 복음화는 단지 피상적인 교화에 불과합니다. 특히 포스트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교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따라서 저는 문화적 통합이 성육신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신앙은 현대 문화,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 속에 육화되어야 하죠. 우리는 현대인들의 질문을 이해하고 현대사상과 깊이 대화하는 가운데 신학을 제공해야 합니다. 특히 현상학과 해석학이 신학을 새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매우 창의적이고 용기 있는 사상가들이 있었지요. 그는 당시 교회에서 매우 의심스럽게 여겨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였고, 신학을 해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방법론을 사용할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은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다른 철학적 영감도 필요합니다. 그 점에서 저에게는 현상학과 해석학이 매우 중요해요. 이것들은 중요한 도구입니다. 신학도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통해 우리 세계에 존재하시며, 그것은 특별한 경험입니다. 사랑, 믿음, 소망은 삶의 방식이자 사고의 방식입니다. 저는 신학이 살아있는 믿음, 믿음의 삶, 소망과 사랑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현상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신학을 ‘카이롤로지’, 곧 합당한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저는 교회와 신학의 예언자적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적 역할은 시대의 징표, 우리 사회와 문화의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읽고 해석하는 일입니다.

- 말이 나온 김에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카이롤로지’(Kairology)라고 불리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하셨고, 이를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담론을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성서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물론 계시의 원천인 성서와 전통에 계시지만, 전통은 변화하는 문화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지속적인 재해석과 재맥락화를 하는 살아있는 강물이에요. 그리고 하느님은 어디에나, 항상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우리 사회, 우리 현실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요.

이러한 시대의 징표들이 있습니다. 저는 시대정신(Zeitgeist), 즉 시대의 영과 시대의 징표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정신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론, 오락,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이 있겠죠. 또한 우리 세계의 도덕적 분위기와 문화적 분위기는 이데올로기, 편견 등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것들이 인간적인 것인 시대정신, 시대의 영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정신과 시대의 징표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현대사회와 문화의 사건을 통한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이는 위기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위기의 순간이 항상 변화할 기회이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갈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예언자들도 이미 그러했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 평화가 있다”고 말할 때 예언자들은 “평화가 없다”고 말하며 일부 역사적 사건들을 재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낙담했습니다. 바빌론과 이집트에서 예언자들은 희망의 비전을 가지고 왔어요. 저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포퓰리즘 등에 대해 모순을 제기하고, 희망을 가져오는 신앙의 정신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 선생님은 저술에서 신비주의와 부정신학을 인용하거나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십니다. 한국에서 부정신학과 신비주의는 사람들에게 그리 익숙한 사상이 아닌데요. 선생님의 관점에서, 신비주의에 기반한 사고의 이점은 무엇인가요?

부정신학은 하느님이 우리의 개념, 우리가 가진 하느님 이미지보다 더 깊은 신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림을 만들고, 어떤 개념을 만드는 경향이 있죠. 우리는 그림 없이, 개념 없이 살 수 없지만, 개념은 단지 거울일 뿐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현실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거울을 통해서만 보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 바울이 말한 것처럼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개념과 이미지에 너무 집중하면, 그것들은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정신학은 우상숭배에 대한 투쟁이며, 우상숭배는 신학과 종교에서도 큰 유혹입니다. 저는 신앙의 주요 모순은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비판적 무신론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메롤드 웨스트폴과 같은 사상가들도 이것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적인 무신론 중 일부는 우리와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신비주의도 일종의 영적 경험이며, 저는 아시아의 영성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휴고 마키비 에노미야-라살레(Hugo Makibi Enomiya-Lassalle)가 쓴 《선: 깨달음의 길》(Zen, Weg zur Erleuchtung)과 같은 가톨릭교회에서 다룬 선(仙) 사상의 고전에서도 영감을 받았습니다. 에노미야-라살레는 일본에서 일생을 보내고 선 수행 지도자가 된 독일 예수회 신부였는데, 선과 기독교에 관한 여러 책을 썼죠. 저는 동독에서 그가 연 그리스도인을 위한 선 강연회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도 지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했지요. 제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일본 예수회 가도와키 교수를 찾았습니다. 가도와키는 《선과 성서》이라는 훌륭한 책을 썼는데요. 저는 그를 프라하에 초대했고, 그는 제 학생들을 위해 선에 관한 수업을 몇 차례 진행했죠. 그 학생들은 지금 그리스도교적 명상 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아시아 영성에서 명상을 위한 큰 영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와 일부 아시아 전통 사이의 매우 중요한 풍요로움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가도와키의 주요 아이디어는 성서와 예수의 비유에 있는 히브리적 사고방식이 그리스 형이상학보다 일본식 사고방식에 더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문화 간 대화의 시대에, 저는 고대 신학이 내일의 신학을 위한 매우 중요한 자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번역된 토마시 할리크의 책

- 신부님의 책,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카이롤로지를 공공신학의 일부로 간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으로, 한국의 일부 가톨릭교회 및 개신교 교회들은 정치와 공적 삶에 완전히 무관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교회들은 너무 쉽게 자신들의 입장을 특정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합니다. 교회의 바람직한 공적 역할 또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저는 교회가 특정 정치권력의 파트너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더 윤리적인 정치, 민주주의 문화의 영감이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체제일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문화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우리에게는 이러한 관계의 문화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는 포퓰리즘과 가짜뉴스가 엄청난 위험으로 대두되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상호 존중, 관용, 대화 등의 문화를 함양해야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교가 사회와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닌 영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칼 구스타프 융에게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제기한 생각입니다. 융은 인간의 삶을 하루에 비유하며, 젊음은 아침과 같다고 말했지요. 그러고 나서 정오의 위기가 오고, 오후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이는 우리 삶의 영적인 측면을 더욱 발전시키는 시간이죠. 저는 이 그림을 그리스도교 역사에 적용했습니다. 제 생각에 전근대는 아침과 같았으며, 교회의 제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근대성이 정오의 위기처럼 도래했고, 많은 확실성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했던 어두운 밤, 즉 하느님이 숨겨진 시기로서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위기의 시기이며, 이는 신앙의 정화를 일으킵니다. 저는 우리가 세속화, 근대화, 무신론 등의 시기를 정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교 역사 오후로 들어갈 가능성의 시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우리가 일상생활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영감의 원천이자 내면에서 힘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측면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성적 학대 스캔들과 같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전쟁과 폭력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이 어두운 밤의 정화가 일어나는 시간의 일부이지요. 이것은 역사의 어두운 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에게 근본주의자들의 시도인 낡은 종교(이는 환상입니다) 또는 무신론, 이 두 가지 선택지만 있지는 않습니다.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에 담긴 아이디어처럼 다시 믿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는 낡은 시대의 종교로 돌아간다거나 유치한 신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신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성숙한 믿음은 지적 성찰, 분별의 영, 사회윤리, 정치윤리, 영성과 같은 믿음의 모든 측면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영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시대에는 교회와 자신을 절대적으로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어요. 독단적인 무신론자도 줄어들고 있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무종교인’으로 삽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의 종교적 소속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글쎄요, 딱히…’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때로는 구도자, 곧 영적인 구도자이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많은 영적 구도자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임무가 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방식의 선교처럼 교회의 기존 제도적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조를 열고 그들과 함께 공동의 길, 즉 시노달리타스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가톨릭교회의 삶의 원리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 간의 더 큰 에큐메니즘, 다른 종교 및 영적 구도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도전 과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시노달리타스 중 일부는 우리 지구의 울부짖음에 대한 민감성, 생태적 책임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시노달리타스가 우리 지구를 오이쿠메네, 즉 공동의 집으로 만드는 것의 일부라고 봅니다.

-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비롯한 저술에서 신부님은 소외된 인물들과 이방인들을 중요하게 언급했습니다. 특히 자캐오의 예를 들어 이를 중요하게 다루셨지요. 이와 관련해서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좋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가 성소수자 및 여러 소외된 이들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냉담하던 이들 중에 교황님의 개방적 태도 때문에 교회로 돌아간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 내 특정 장벽 앞에서 실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동성 결혼 금지, 교회 내 여성의 제한된 역할, 가톨릭교회의 여성 성직자 금지 등에 실망합니다.

저는 시노드 쇄신의 중요한 부분은 교회의 탈중앙화와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조건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변하고 있습니다. 제 삶 동안에도 이 문제에 대한 큰 생각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은 물론이고 우리 문명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변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전통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었지만, 고해성사를 하면서 성소수자들로부터 삶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으시지만, 사목 전략에서는 아주 섬세하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3)

교회의 가르침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사목 전략을 바꾸고, 심판관이 아니라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판관이 아니라 어려운 삶의 상황에 처한 이들과 열린 마음으로 동반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부 사회는 급격한 변화에 대비해야 하는데, 이 또한 필요합니다. 그래서 로마·한국·아프리카·독일 등의 각 상황에 대한 답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요. 저는 교회에 어느 정도의 탈중앙화와 단계별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저는 교회 내부의 상호 존중이 그다지 발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가톨릭 내부의 에큐메니즘, 즉 가톨릭 신자들 간의 관계와 존중이 종교 간 대화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없는 가톨릭교도 있고, 그리스도교 없는 개신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원하고, 변하지 않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인이 됩니다.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육성해야 합니다. 운동이 억압되면 혁명적이고 혼란스러운 일이 일어나지요. 저는 교회 내부에 이러한 상호 존중을 만들고, 교회 외부로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노달리타스가 가톨릭교회의 삶뿐만 아니라 가족 자체에도 공동의 길을 추구하는 매우 좋은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기후위기 등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남북한의 분단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철학이나 신학, 교회의 적절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변하고 있으며, 이러한 갈등 중 일부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그 답 또한 매우 어렵죠. 저는 푸틴을 우리 시대의 히틀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침략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런 식의 전략을 보았어요. 그것은 똑같은 전략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처음에 독일계 소수민족이 있던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침략과 같습니다.

서방 강대국들이 “좋아, 우리는 침략자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그를 달래야 해”라고 말했을 때,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점령하고 더 진격했습니다. 이른바 평화주의자들은 서방 강대국들이 그를 달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위험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크라이나와의 연대가 있어야 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러시아의 집단 학살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조약의 효력도 믿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모든 조약과 약속을 깰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을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매우 순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지금이 매우,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침략자들에게 지지의 신호가 될 것입니다. 중국은 항상 대만 문제 등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고요. 매우,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위험을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두려움에 휩싸여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은 매우 나쁜 조언자이기 때문이에요. 때로는 두려움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희망과 낙관주의의 차이점입니다. 낙관주의는 때로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환상일 수 있지만, 희망은 어려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환상 없이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영적인 힘의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 주

1) 교회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여겨지는 원로 사제에게 주어지는 명예 칭호.
2)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Synod)의 파생어다. 시노드는 그리스어 σύνοδος(synodo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함께’를 의미하는 σύν(syn)와 ‘길’ ‘통로’를 뜻하는 ὁδός(hodos)의 합성어로, ‘함께 걷는 길’ ‘함께하는 여정’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공식적인 차원에서 시노드는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교회 지도자들의 회의를 말한다. 할리크 몬시뇰은 이런 뜻을 염두에 두면서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곧 전 세계 교회가 함께하는 신앙의 여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3) 여기서는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실제로 할리크 몬시뇰은 가톨릭교회에서 성소수자나 여성 안수, 여성 권리에 대해 가장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성직자 중 한 사람이다. 자신의 교구에서 성소수자 권리 옹호 시위를 열고 교회 장소를 제공하는 문제로 체코 추기경과 충돌하기도 했으며, 낙태금지법을 고수하는 동유럽의 다른 국가에 대해서도 비판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김동규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