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 비둘기를 도와줄 수 있을까

[414호 구선우의 동물기]

2025-04-30     구선우

벽난로로 참새 떼가 들이닥쳐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납게 공격한다. 까마귀 떼가 뛰어가는 아이들을 무섭게 뒤쫓아 습격한다. 공중전화박스에 갇힌 여성에게 수많은 갈매기가 달려든다. 이 모든 장면은 10여 년 전 우연히 방영된 옛날 명화를 시청하던 중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강렬한 장면들은 새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던 내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그 후로 새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인 호감보다는 섬뜩한 두려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당시 내가 본 명화는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연출한 〈새〉(The Birds, 1963)였다. 히치콕은 1961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수천 마리 바닷새들이 무리를 지어 하늘에서 내려와 극심한 대혼란을 일으켰다는 실제 신문 기사를 접한 후,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소설 《새》를 떠올렸다고 한다.1)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하여 탄생한 작품이 바로 〈새〉이다. 우리에게 익숙해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예측 불가능하게 인간을 공격하는 데서 오는 본능적인 공포를 다룬다. 새를 통해 위기에 처한 인간관계의 은유를 담고 있을 뿐, 새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대화하여 표현한 〈새〉. 이것은 단지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 집 앞 주차장에는 비둘기들이 머물 수 없도록 틈을 막는 철망이 처져있다. 그 아래에는 비둘기 먹이 주기를 금지하는 현수막도 달려있다. 비둘기를 도와달라는 외침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행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도록 돕자는 메시지일 수 있다. 인간의 선의가 때로는 자연의 섭리를 해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새들의 섬뜩한 공격 장면처럼 도시에서 마주치는 비둘기는 묘한 불안감을 준다. 비둘기를 도와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비둘기에 대한 책임 회피는 아닐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경계의 대상,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는 비둘기는 복잡한 존재다.

고대부터 함께해온 가축

척삭동물문, 조강(鳥綱, Aves)에 속하는 수많은 조류 중에는 나라의 상징[國章]으로 사용될 정도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날짐승이 많다. 예로부터 높은 하늘은 신성한 영역으로, 그곳을 나는 새들은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했고, 고대이집트 태양신 라(Ra)는 매의 머리를 하고 있다. 힌두교의 주신 비슈누는 모든 새의 왕인 신조(神鳥) 가루다를 타고 다닌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주작·봉황처럼 다양한 신비로운 새가 존재한다. 현대사회의 여러 문화권에서 새가 중요한 긍정적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군대·학교·스포츠팀 등 많은 영역에서 마스코트로 사용된다. 독수리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불길한 새로 여겨지는 까마귀조차 북유럽·영국·아랍 등에서는 길조로 여겨진다. 닭도 인도네시아 발리 등 일부 지역에서 강력한 남성성을 상징하며, 닭싸움과 여러 의식에 사용되었다.

비둘기 또한 예외는 아니다. 비둘기는 성경 속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긴 홍수 이후 땅이 마르고 평화로운 세상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창 8:8-12).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려온다(마 3:16). 순결·희망·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는, 중세 시대 서구 사회를 거쳐 전 세계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비둘기가 이미 다른 문화권에서도 친숙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작용했다.

비둘기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해온 가축이었다. 메소포타미아문명의 기록과 수메르 쐐기문자 등에는 비둘기와 관련한 내용이 남아있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스라엘의 벧구브린-마레사 국립공원에는 헬레니즘 시대에 사용된 수백 개의 비둘기 사육장 동굴이 존재한다. 비둘기 한 쌍씩 들어가 살았던 공동주택은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데, 절벽이나 높은 바위 틈새에 집을 짓고 생활하는 비둘기를 위해 인공 구조물을 만들어 사육했던 흔적이다. 도시의 비둘기들은 이 습성 때문에 지금도 아파트 베란다 등 고층 건물 바깥 빈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 비둘기들은 제의와 식용으로 널리 사용되어, 거래 기록 또한 많이 남아있다. 오늘날에도 일부 문화권에서는 식용으로 섭취한다. 물론, 비둘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닭이 식용 가금류로서 더 높은 점유율을 차지한다.

강한 귀소본능은 비둘기가 노아의 전령을 담당하고, 이후 가축으로서도 여러모로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내는 통신 수단으로 쓰인 비둘기를 전서구(傳書鳩)라 부른다. 장거리 비행 능력 덕분에 오랜 기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43년, 로마제국의 무티나 내전 당시 안토니우스 군대에 포위되었던 브루투스가 비둘기를 통해 히르티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플리니우스에 의해 전해지고 있으며, 네덜란드독립전쟁(1568-1648)의 하를럼 공방전(1573)에서는 스페인군에 포위당한 네덜란드군에게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비둘기를 통해 전하기도 했다.

비둘기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활용되기 시작한 때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부터이다. 당시 파리가 포위되자 프랑스군은 열기구를 이용하여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포위망을 벗어난 비둘기들은 다리에 메시지를 담은 작은 캡슐을 부착하여 스스로 도시로 돌아갔다. 1·2차 세계대전 중에도 통신 장비 사용이 어려운 상황에 대비하여 전서구를 활용했으며, 심지어 21세기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군이 비둘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2)

1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정찰을 위해 사용된 비둘기. 흉갑에 부착된 카메라가 미리 설정된 시간에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평화의 상징은 어쩌다 유해야생동물이 되었나

우리나라에는 멧비둘기·양비둘기 등 예부터 토종 비둘기가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종인 집비둘기(Rock Pigeon)는 조선 후기에 주로 사육용으로 유입된 것이다.3)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을 통해 해외에서 개량된 비둘기가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전서구로서 군과 관청에서 통신용으로 쓰였으며, 각종 행사 때 평화의 상징으로서 비둘기를 날리는 일도 이 무렵에 도입되었다. 이후 비둘기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신문 기사에서 어렵지 않게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70년대에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비둘기 5백 마리를 운동장에서 사육했다고 한다. 대전에서 서울로 비둘기를 날리는 비둘기 경주도 있었다. 비둘기는 인간에게 이처럼 다정한 동물이었다.

특히 행사용 비둘기의 인기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정점을 찍는다. 이 무렵 어린이날 큰잔치, 프로야구 개막식 등 각종 행사에서 비둘기 날리기는 거의 필수적으로 곁들여진 이벤트였다. 1986년 한 기사는 어린이대공원에 2천5백 마리, 시청 옥상에 1천2백 마리, 남산조류장에 5백 마리의 비둘기가 존재했으며,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직접 관리하며 각종 행사에 사용하도록 대여 서비스를 했다고 전한다. 서울 올림픽에는 비둘기 2천5백 마리가 동원되었고, 이 비둘기들을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후 도심지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비둘기들은 천적이 없는 환경에서 숫자가 급증하게 된다. 1991년에는 1만여 마리였던 비둘기가 1994년에는 무려 10배 증가해 10만 마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비둘기를 점점 평화의 상징이 아닌 골칫거리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둘기 배설물이 건축물과 문화재를 손상시킨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서울시의 주요 공원에서 비둘기를 쫓아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농약을 먹여 비둘기를 집단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에는 종로 탑골공원에 살던 비둘기가 1년 만에 2천여 마리에서 3백 마리 정도로 줄어들었으며, 서울 전역에서는 비둘기 숫자가 5분의 1 정도 규모로 감소했다. 갈등과 재산 피해가 쌓이자 야생동물과 가축의 경계에서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평화의 상징이 몰락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이들도 있었지만, 비둘기는 이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나가게 된다. 더 나아가, 버려진 비둘기 때문에 공중위생에 취약성이 증가하고, 심지어 인간이 공격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비둘기는, 접근하는 것조차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엔 국가 주도로 적극 유입되었지만, 결국 법적으로도 유해한 동물로 낙인찍히고 만다. 2009년 환경부가 집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한 것이다. 유해야생동물 목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7. 일부 지역에 서식밀도가 너무 높아 분변(糞便) 및 털 날림 등으로 국가유산 훼손이나 건물 부식 등의 재산상 피해를 주거나 생활에 피해를 주는 집비둘기.4)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둘기를 둘러싼 잔혹한 현대사를 모른다. 왜 도시에 비둘기가 이렇게 많은지 혀를 내두르면서도 원인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비둘기 문제가 전적으로 인간 책임이라는 사실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 인간의 손을 거치며 원종인 바위비둘기는 집비둘기로 변화했다. ‘집’ 비둘기가 ‘야생’ 비둘기가 되었다가, 결국 유해야생동물이 되고 말았다.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에서

미지의 동물에게서 오는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연히 영화를 통해 새에 대한 섬뜩한 두려움이 생겼던 나의 경우에도 동물 묵상을 하며 꾸준히 관찰한 결과, 지금은 비둘기가 거의 두렵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일상적 불안이 심하지 않은 공포증은 약물 치료보다는 비약물 치료인 인지행동치료와 대상에 대한 노출 치료가 효과적이라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게 되면 비둘기가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공포는 혐오와 배제를 낳는다. 평화를 위해서는 예측 불가능하거나 통제 불가능한 대상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을 없애야 하고, 그러려면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무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지는 무지와 다르지 않다. 결국 변화는 전적으로 인간 몫인 셈이다. 관심과 경험이 그 출발점이다. 비둘기가, 앞선 연재 글에서 살펴본 뱀(410호)이나 쥐(412호)와 다른 점은 바로 지금도 인간 곁에 흔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으니, 어쩌면 극복하기 쉽다고도 할 수 있겠다. 관심에서 출발하여 함께하는 경험치를 쌓아가다 보면, 비둘기를 비롯한 새들과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은 인간과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사회적 관계 속의 능동적인 ‘행위자’ (Actor)로 본다. 이 행위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결망’(Network)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 라투르는 이 상호작용 과정을 ‘번역’(Translation)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행위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재구성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이 이론은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비인간 행위자들의 역할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제시한다.5)  특정 장소에 둥지를 만들거나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행위는 이 연결망 속에서 비둘기가 수행하는 역할이다. 인간이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거나, 비둘기가 머물지 못하도록 시설을 설치하는 것, 심지어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하는 것 역시 이 연결망 안에서의 번역 과정이다. 결국 도시의 비둘기 문제는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들이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사고를 확장해준다.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인간너머의 인류학’을 연구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와의 단순한 상호작용을 넘어, 세계와 어우러지는 ‘조응’(Correspondence)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동물뿐 아니라, 나무·바위·햇빛·바람·사물과도 조응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는 대칭성과 탈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하지만 사실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는 데서 약점이 있어 보인다. 비둘기는 인간과 다르다. 철학적 토론은커녕 가벼운 대화조차 나눌 수 없다. ‘번역’과 ‘조응’은 인간 중심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고, 책임도 전적으로 인간이 져야 한다. 이에 잉골드는 인간이 다른 종(種)을 자신의 고유한 삶의 양식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체 중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6)

인간이 피조물 중 독특하고 특별한 지위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고 힘주어 말하는 기독교 세계 안에서, 인간과 다른 피조세계의 완전한 대칭을 요청하는 관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 충돌 이전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과, 다스림의 책임을 지닌 청지기라는 점은 모두 인간을 이 세계 아래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준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며, 모든 피조물이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며 각 피조물이 존재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인간의 역할이다.

인간과 비인간 피조물 간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은 라투르와 잉골드를 비롯한 현대 생태 사상과 기독교의 가르침에 공통분모로 존재한다. 어떤 생각도 결국 인간이 하기에,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모순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특별함을 이야기하더라도,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와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신학과 신앙 성숙이 요청되는 때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수많은 폭력이 넘치는 세상에 비인간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때때로 급하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구의 위기를 외치는 절박한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자. 비둘기를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동안, 지구의 위기는 커져만 간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타자에 대한 존중과 겸손을 아울러 갖춘다면 지구는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잘난 것 없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자연사박물관을 찾았다. 세밀화 교육 프로그램 수강생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림 주제는 바로 새였다. 박새·딱새·촉새·멧새 등, 산속에서 만날 수 있는 새 그림들이 배치돼있었다. 아쉽게도 비둘기 그림은 없었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강사는 생태 세밀화가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날개깃, 무늬의 패턴, 자세 등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화가가 된 수강생들이 관심 없이 그저 지나쳤던 새를 매우 유심히 관찰하며 그릴 때 얼마나 즐거웠을지 상상해보았다. 바닥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새를 찾아보아요!”

자연에서 새를 만났을 때의 기쁨이 떠올랐다. 산속에서 새소리를 듣게 되면 반가운 기분이 든다. 도시에서 참새·까치와의 만남이 반가운 것은 인간 삶과는 구별된 세상, 나무에 살기 때문일 수 있겠다. 도시나, 특별히 건물 내부에서 만난 비둘기가 반갑지 않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둘기들을 아스팔트로 뒤덮인 땅에서 본래의 터전인 바위나 절벽 틈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갈 길이 참 멀다.

비둘기가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진정 도우려면 할 일이 많다. 서식지 보호, 도시 설계 개선, 불임 모이를 통한 개체수 조절 등등. 꾸준한 관찰과 해외 사례를 참고한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 개선이다. 인류세 시대, 지구를 파괴하는 악당이 되어버린 인간에게 엄청난 회심이 요구된다.

계도 기간을 거쳐 오는 7월부터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면 최대 1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서울시 조례가 시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전 같았다면 인간을 위한 조치라서 환영했을 것 같다. 지금은 마음 한쪽이 불편하다.

〈와일드 로봇〉(The Wild Robot, 2024)은 로봇 엄마와 기러기 아들의 가족애를 다룬 애니메이션 영화로, 감동과 영감을 준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원작 소설을 읽고 있는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제하야. 영화 재미있게 봤지? 이 이야기가 로봇과 동물을 빌려서 인간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아니면 그냥 정말 로봇이랑 기러기 이야기 같아?” 아들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2번!”

“로봇이 진짜 동물하고 대화하며 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다시 물었다.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지!”라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인간이 특별하지 않아?” 아들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돌아왔다.

“아니. 인간이 잘난 것도 없잖아.”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잘난 것 없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지.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비인간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 주

1) 패트릭 맥길리건, 윤철희 옮김, 《히치콕 Hitchcock》(그책, 2016), 941쪽.
2) 이재철, ‘[전쟁속의 동물들 (1)] 최고(最古) 통신수단 비둘기’, 〈중앙일보〉(2016.11.18.); pigeons-of-war.com 참고. ‘Pigeons of War’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서구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사진 자료가 있다.
3) 일찍이 가축화되어 인간과 함께 살아온 비둘기는 길들이기 쉬워 반려동물로 키우기도 한다(조혜민, 《도시인들을 위한 비둘기 소개서》(집우주, 2024), 131-133쪽). 《도시인들을 위한 비둘기 소개서》는 인간과 함께해온 비둘기의 전반적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축산·통신·경주·반려조 등 비둘기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책을 참고하라.
4) 국가법령정보센터,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개정 2025.1.24.) - 유해야생동물(제4조 관련)
5) 김홍중, 〈21세기 사회이론의 필수통과지점: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 이론〉, 《사회와 이론 No. 43》(2022).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는 김환석, 《브뤼노 라투르》(커뮤니케이션북스, 2024)를 추천한다.
6) 팀 잉골드 지음, 김현우 옮김, 《조응》(가망서사, 2024), 28쪽; 33쪽.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