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집
[414호 공간을 찾아서]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 25:13)
2021년 9월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붉은지구〉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4부작 구성의 이 다큐멘터리는 용암처럼 빨갛게 끓고 있는 지구 모습과 함께 마태복음 구절을 보여주면서 시작했다. 공영방송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 성경 말씀이 나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시청하는 동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이, 지구가 끝날 수도 있겠다’라는 위기감이 들면서 더 큰 공포가 이어졌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생명을 유지해왔다. 적응에 성공한 DNA만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생명공학에 관한 전문 지식이 없더라도, 각 지역 풍습을 보면 기후와 지형 조건을 고려한 환경 적응이 생존하는 데 필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바람길을 내어 담을 쌓고, 따뜻한 기후가 특징인 남도에서는 더위를 견디기 위해 개방형 집을 짓는다. 산이 많은 곳에서는 다랑논이, 해산물이 귀한 곳에서는 염장한 먹거리가 발달한다.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치열하게 환경에 적응했던 이유는 딱 하나다. 살기 위해서.
급변하는 지구 환경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산불은 1달 가까이 지속되면서 231제곱킬로미터 면적을 태우고 81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건물 1만 7천여 채를 파괴했다. 산불로 발생한 유해물질 폐기물도 수백만 톤에 이른다. 일본 방사능 오염수 방류가 그렇듯, 캘리포니아 산불과 그 피해는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지구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호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로 검게 그을린 코알라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글로벌한 규모의 산불이 일어나면서 기후재앙이 코앞에 닥쳤음을 실감했다.
국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지난 3월, 전국 11개 지역에서 동시다발 산불이 발생했다. 경남·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열흘 만에 주불이 진화되면서 역대 최대 규모 피해를 남겼다. 이번 산불로 총 76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소실된 면적만 480제곱킬로미터를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주택 4천 채가 전소되었고, 국가유산 피해는 30여 건, 농업 시설 피해는 2천여 건에 달했다. 3천 3백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동·식물 피해 규모는 추산조차 어렵다. 이 산불 원인은 다양하게 분석된다. 평년보다 높았던 기온도 불을 키우는 데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는 왜 재앙급 환경 변화에 처하게 됐을까. 지질학적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에 따르면, 지금은 신생대 홀로세(Holocene)다. 그러나 최근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시대 구분을 제안했다. 인류세란 인간의 영향으로 지구의 많은 조건과 과정이 크게 변한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말한다. 인간의 영향은 산업화로 크게 강화되어, 마지막 빙하기 이후 홀로세 시대의 전형적인 지구 시스템을 변화시키고 있다.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했던 활동으로 지구 환경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생명체가 위협받고 있다. 한 치 앞을 몰랐던 인류의 어리석음. ‘이럴 줄은 몰랐던’ 과거 인간을 탓하거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과욕을 부린 이들을 원망하거나, 지구 자원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앞선 국가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다. 무지했고, 자주 과욕을 부렸던 나 역시 인간 문명을 공유하는 인간으로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지구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계점은 이미 넘었고, 돌이키기 위한 골든 타임도 벌써 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건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던 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미래 세대에 폭탄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일보다 뒷전이었던 바다가, 정복당하고 이용당하기만 했던 산과 들이, 쓰고 버려졌던 땅이 크게 망가져있는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자연은 자연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유엔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는 2019년 보고서를 통해, 인간의 과도한 소비가 자연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생물종의 멸종률은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고 밝혔다.1) 이 보고서에 따르면 8백만 종 동식물 중 1백만 종이 이미 멸종 위기 앞에 놓여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많은 생명이 붕괴되면, 우리가 적응해왔던 생태계도 유지되기 어렵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조금 더 편리하기 위해 자연을 활용했으나, 이것이 생존을 위협하는 멸종 원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선택은 단 하나.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안전하게 살아갈 공간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공간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자연은 자연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사는 공간이 더 많아져야 하는 이유다.
국내 첫 재야생화 실험: 야생신탁 프로젝트
지난해 10월, 망원시장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들른 한 독립서점 입구에 붙은 “야생신탁 프로젝트-야생에게 신탁할 토지구매에 함께 해주세요” 포스터를 발견했다. 귀여운 고양이 조각을 보려고 다가갔는데, 눈에 더 크게 들어온 건 ‘그저 내버려두기 위한 땅’을 매입하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포스터였다. 한 뼘만 한 땅도 그냥 노는 꼴을 보지 못하는 이들의 피가 흐르는 나로서는 그저 ‘놀리기 위한 땅’이라는 발상부터가 참신했다.
생명다양성재단이 주관하는 ‘야생신탁’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재야생화를 시도한 첫 사례다. 재야생화란 “자연의 자생력을 이용해 인간의 개입이 필요 없는 역동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연 복원 전략”이다.2) 쉽게 말하면,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야생이 스스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환경 보전 방법 중 하나다. 자연이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하고 재건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적극적 개입을 통해 환경을 보호하는 기존의 보전 방법과 다르다. 자연은 인간이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태 시스템을 회복하는 자연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미 유럽에서는 29개국, 1백여 곳에서 재야생화 실험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3) 미국과 일본 등에서도 사례를 접할 수 있다. 놀랍게도 땅에 대한 소유권이나 이용권을 주는 것도 아닌데, 시민 1,492명이 야생신탁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파주시 조리읍에 약 400평의 땅을 매입했다.
물론 재야생화가 기후위기를 해결하거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유일한 답은 아니다. 재야생화 실험이 생태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시간과 사례가 충분히 쌓여야 한다. 야생이 회복하는 동안 주변 지역에서 생활하는 인간 사회와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도 잠재되어있다. 특히 서울 및 수도권과 지역 간 격차가 큰 한국의 경우, 인구 유출과 유휴 부지, 빈집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이 야생동물 서식지로 활용된다면 지역 소멸을 가속할 위험이 있기에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가 잘 먹고 잘사는 동안, 자연은 터전을 잃었고, 병들었고, 사망에 이르렀다. 산의 몸통을 뚫어 도로를 내고, 바다를 막아 공장을 세우고, 땅을 파서 폐기물을 묻으며 산업화를 지나온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뤘던 그 동력으로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일, 자연에게 스스로 회복하는 힘이 있음을 믿어주는 일. 뭐든 해야 한다. 자연을 개발해야 하는 자원으로 보는 인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사는 일을 도모해야 한다.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자원 부족 때문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는 열등감 때문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커다란 배도 작은 키로 항로를 바꾸는 것처럼, 우리의 이 작은 마음과 행동이 위기 속으로 질주하는 지구를 지키는 키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자연과 인간이 자기답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집, 지구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1) 최인준, ‘[IF] “인간의 욕심 때문에… 동식물 100만 種 멸종 위기”: 세계 50국 과학자 145명 발표’, 〈조선비즈〉(2019.5.9.)
2) 최명애, 〈재야생화 인류세의 자연보전을 위한 실험〉, 《ECO Vol. 25 No. 1》(2021), 217쪽.
3) rewildingeurope.com
박진영
본지 객원기자.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 녹색정치연구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