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414호 내향인의 마음 탐구 생활]
다정(多情 - 많을 다 뜻 정)
정이 많음. 또는 정분이 두터움. (표준국어대사전)
동음이의어
다정(茶亭, 차 다, 정자 정) : ①간단한 다방. ②차 마실 때 사용하는 기구를 벌여 놓는 탁자.
반의어
무정, 비정, 몰인정
승은
평소 ‘다정’에 대해 논하는 것을 좋아한다. 덕분에 친밀한 사람이 다정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추출한 다정-데이터가 쌓여 깨달은 바에 의하면, 다정은 상대가 안-다정할 때 더 크고 짙게 감각된다. 무정한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다정의 밀도를 감각한 적 있는가? 명사의 단어들은 반의어 상태를 감각할 때 더 짙게 느껴진다.
나는 외로워본 사람만이 ‘다정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외로움의 층이 쌓여 다정이라는 행위와 감각을 낳았다고. 그리고 ‘다정’은 평소 외로움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고민이 흔적으로 새겨져, 상흔 대신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애정의 모양으로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나 다정을 또렷하고 밀도 있는 것이라고 믿는 나는, 덕분에 다정만큼 복합적인 애정이 없다고 여기고, 덕분에 다정의 값을 몹시… 올려 치기 하는 편이다.
다정을 인지하고 나면, 희미하게 와닿던 다정의 말, 행동, 눈빛이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한다. 내게 전해진 다정이 한 번도 당연한 적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달까. 애정의 값은 무척이나 애틋하고 치사한 것이어서, 내게는 선택적 다정만이 도달했을 테다. 매 순간 누군가가 나를 떠올리며 했을 선택과 집중의 결과물이 되어버린 다정은, 내게 와 섣부르지 않게 마음속 깊이 터를 내린다.
이렇듯 다정을 감각하며 향유하기 시작하면, 일상적 다정이 모여 내 하루를 살아내게 한다고 믿게 된다. ‘삶에 켜켜이 쌓인 다정이 내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 누가 이기랴!’라고 광장에서 외칠 수 있을 것만 같은 비장함으로, 치사한 일상을 버티게 된다. 사람 마음은 작은 것에서 들통나기 마련이지만, 서투르게나마 전달받은 진심은 혼자서 고이 간직하고 만끽하기 좋은 비밀이 된다.
다정은 내게 퍽 힘이 된다. 대충·얼추·적당히와 같은 부사처럼 행위자의 의도를 쪼그라트리지 않는다. 쉽게 몸집을 부풀려 위안을 준다. 어쩌면 다정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로는 쉬이 가늠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발화해내는 인간이라는 형체에게 보답하게 하는 것. 대상에 대한 견고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자주 자책하곤 했다. ‘주어진 시간에 왜 그리 모질었고 다정하지 못했는지’ ‘나의 모남에 초점을 맞추고 품을 내어주지 못했던 건 아닌지’. 애정의 다짐은 늘 게으르다. 부지런한 애정은 작심삼일에 불과해서,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엔 크고 작은 자책과 후회를 낳았다. 다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존재에서 존재로 전해지는 일이기에, 시간의 추억과 마음의 상태를 살피다 보면 다정의 유무를 자주 마주치게 되나 보다.
습관일지, 태도일지, 반응일지… 그 영역을 쉬이 넘나드는 다정은 어쩌면 매일 새롭게 형태를 바꾸어 내게 찾아오지만, 글에서 ‘덕분’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된 것을 보면, 다정이란 베풀어준 마음(덕분)에 짙어지는, 타인에 의해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명확한 것 같다. ‘다정’한 이가 곁에 존재해야 감각되기에 혼자서는 체감할 수 없는 것. ‘다정’을 목격하려면 타인이 필요하기에, 어쩌면 삶에 꽤 가시적인 영역이다.
상호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다정을 곱씹으며, 꾸준하고 성실하게 전하는 마음은 다정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다정 애찬론자의 다정론.
민호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남자반과 여자반이 구분된 공학이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여자반 앞 복도를 지나가게 되면 정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뛰어간 적도 있다.) 분명 숫기가 없어서 그랬을 거다. 그런 내게 호기심을 갖고 먼저 말을 걸어준 여자반 애가 있었다. “너 어디 동아리 들어갈 거야?” “인스텝(축구 동아리).” 사실 떨면서 겨우 대답한 건데, 걔가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와, 쟤 엄청 시크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내가 시크함이라는 멋을 탑재하고 태어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 좋은 사람이 생기면 더 무심한 척하고, 시크한 매력을 보이려 했던 게…. 다정한 게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츤데레’라는 말이 생길 때까지.
‘다정한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남자친구로 6년을 살았으니 이 정도면 내가 ‘다정한 사람’의 범위에 들어가는 건가 싶다가도, 금세 다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시크함, 아니 무심하고 옹졸한 모습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예은이는 다정한 남편 혹은 남자친구로 알려진 지인이 SNS에 일상을 올린 걸 나에게 보여줬다. 저 사람이 정말 멋지고 좋다면서. 다소 비현실적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배우자, 애인이 행복해 보인다는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다정’은 내가 갖추고 싶은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 SNS 게시물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따라 해보며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태도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음의 관성에 변화를 주는 일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다정하다’라는 말은 본인이 어필하는 형용사가 아니다. 주로 제삼자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배려가, 다정을 입증하는 주된 근거가 된다. 나만의 의도나 객관적 행동 양식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나는 다정하다’라는 문장이 어색하게 보이는 이유다. 한동안 나는 내가 받고 싶은 배려를 남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면서 살아왔다. 선물 받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좀처럼 선물을 해주지 않았다. 누군가 베푸는 친절도 곧잘 ‘유난’으로 받아들이던 나는, 식당에 가도 셀프코너 반찬을 가져오지 않는 뻔뻔한 배려(?)를 일삼았다(원하는 사람이 가져오기…).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세련된 배려라는 이상한 생각으로.
“너는 원래 그러잖아”라는 말들이 돌아왔다.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내가 그 정도로 매정한 인간이라고? 배려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지인들의 애정 어린 항의로 알게 되었다. 상대가 원하고 기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게 배려라는 것을.
그렇다고 친절과 선행이 꼭 다정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다정해지려다 보면 가끔 무리하게 헌신해서 친절을 베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이라면 하지 않는 것도 배려다. 무조건 도움을 주기보다는 상대의 필요를 헤아릴 줄 아는 세밀함이 다정에 가깝다. 위하는 행동이랍시고 하는데 상대방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들이 쌓이면, ‘나는 다정하다’라는 어색한 문장이 선명해진다.
누군가에 대해 넓게, 깊게 알수록 그에게 다정해질 기회는 많아진다. 그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미리 알고 행동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다정을 실천하게 되는 셈이다. 의외의 정보일수록, 개인적인 것일수록, 관찰해서 알게 된 것일수록 효과는 크다.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는 알뜰함이 필요한 순간이다. 다정해지려면 귀찮음과 맞서야 한다. 부지런한 사람이 다정해질 수 있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고 더 이상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질 때가 있다. 상대와 다툴 때면,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 못되게 구는 인간이 되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베풀어왔던 친절과 배려를 인질 삼아 내 기분을 되갚아주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 노력해왔던 일들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는, 차라리 미리 약속으로 정해두는 것이 좋겠다.
나는 삐치면, 먼저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제 의지를 내서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라고 물어보기로 했다. 실제 그런 상황이 오면 이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긴 하다.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지런히 관찰하고 사랑해야 한다.
다정이란, 결국 시선과 기준을 ‘나’에서 ‘타인’으로 바꾸는 일이 아닐까. 상대방의 시선과 기준이 되는 일. 그 사람을 위해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겸허함이 ‘다정’ 아닐까. 내가 누군가로 인해 달라진 것이 많았다면, 그만큼 다정해졌다는 뜻이겠다. 내가 오늘도 여전히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는 이유다.
독자님은 ‘다정’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독자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상단어집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내향인들의 속마음 토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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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은
본지 독자위원. 엄마에 의하면 자아가 건강한, 아빠에 의하면 생각을 잘 묘사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며 길러진 사회성 덕에 E(외향형)냐는 오해를 받곤 하지만, 최측근은 모두 내향인이란 사실을 긍정한다.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서 관찰하기를 습관처럼 하다 보니 자주 글을 쓰게 됐고, 쓰다 보니 주어진 삶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매일 반복되는 자기 검열과 자기 긍정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인 4년 차 직장인.
정민호
본지 기자. 신비로운 일들은 가까운 곳,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고 믿는다. 개신교 월간지를 만들며 조심스레 세상을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