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작은’ 사익에 기대어
[414호 법의 길, 신앙의 길]
흡사 도토리를 묻은 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린 다람쥐처럼 첫 문장부터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나’를 화자로 하여 글을 쓰는 것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예전에는 SNS에 온갖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는데 참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잊은 건 어쩌면 도토리가 아니라 다람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작부터 웬 도토리에 다람쥐 타령인가 싶으시겠지요? 사실 저는 다람쥐를 아주 좋아합니다.(웃음)
요즘 적는 글 중 다수는 ‘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원고는’, ‘피해자는’, ‘청구인은’ 이를테면 내가 아닌 누군가, 즉 의뢰인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재단법인 동천’은 이주/난민, 여성/청소년, 북한/탈북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법적으로 지원하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각종 사건으로 만난 의뢰인의 삶은 어느새 나의 현장, 그 너머 간절한 오늘과 내일이 됩니다. 2023년 5월에 근무하기 시작하여 만으로 갓 2년을 채운 변호사라 민망하지만 감히 나의 의뢰인에 힘입어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절실한 외침, 투표 참여
국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공직 선거에서 투표하신 적이 있나요? 만일 하신 적이 있다면 대체 어떻게 투표를 하셨나요? 소송을 제기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고, 탄원서를 내고, 선거관리위원회에 회담을 청하셨나요? 여기 오로지 투표 하나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소송은 제1심과 제2심(항소심)을 지나 제3심(상고심) 즉 대법원에 있는 상태입니다. 처음 소송을 제기한 날로 치면 무려 3년하고도 3개월여가 지났습니다. 아마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만 18세 이상의 국민이면 누구나 갖는 투표권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싸우고 있다니. 혹 재산 정도, 인종, 성별에 따라 투표권을 달리 부여하던 낡은 과거를 얘기하는 게 아닌지 의아하실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아닙니다. 엄연한 대한민국의 ‘오늘’입니다.
원고들은 복잡한 전문용어로 이루어진 선거공보를 이해하거나 문자로만 이루어진 투표용지에서 후보자를 식별하기 힘든 발달장애인으로, 현행 선거공보 및 투표용지만으로는 선거에 충분히 참여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1) 이에 동천은 공동대리인단과 함께 피고 대한민국(담당부처 선거관리위원회)을 상대로, ①각 정당과 후보자들이 선거공보를 발달장애인법상 기준에 따른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할 수 있도록 하는 선거관리위원회 차원의 매뉴얼 제작, ②후보자의 사진 및 정당의 로고가 포함된 그림투표용지의 제공, ③앞선 ②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 예비적으로 그림투표용지의 역할을 일부 대신할 수 있는 선거용 보조용구의 제공을 구하였습니다.2) 이는 선거, 특히 ‘투표 참여’라는 일상을 지켜달라는 당사자들의 절실한 소원이자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헌법상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림투표용지 등을 포함한 공직선거법 개정 없이 해당 조치들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023년 8월 제1심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의 청구가 공직선거법 개정 사항에 해당하고, 따라서 행정부인 피고가 이행할 수 있는 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소의 이익을 부정, 각하하였습니다. 원고는 이에 불복하여 항소심에서 헌법이 논하는 ‘선거에 관한 법률’에 공직선거법뿐 아니라 동등한 선거 참여를 위한 조치 의무를 규정한 장애인차별금지법과 발달장애인법이 포함되고, 원고가 구하는 그림투표용지 등은 장애인 차별 상황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로 법원이 명할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습니다.3)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모두가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구체적인 해결 방법에 관해서는 선뜻 아무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법원마저 발달장애인의 소중한 일상을 부정해버릴까 봐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행정부는 입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하고, 입법부는 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냉담한 현실 속에서 사법부까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그 책임을 외면한다면 발달장애인들은 대체 무엇에 기댈 수 있을지 막막했습니다. 무엇보다 헌법과 법률이 발달장애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변호사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슬플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법원은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2024년 12월 18일,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의 청구가 헌법상 권력분립원칙과 선거법정주의에 반하지 않으며, 현행 공직선거법하에서 피고가 이행 불가능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 등을 명시하고, 비록 재정적·행정적 부담상 그림투표용지 전면 도입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피고가 선거용 보조용구(후보자 사진 및 정당 로고 포함)는 제공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즉 원고들이 예비적으로 청구한 위 ③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헌법 제24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는 기본 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모든 국민’에 발달장애인이 포함됨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다만, 이 사건은 전술하였듯 피고의 상고로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입니다.
3만 명 중 한두 명
누군가는 도대체 투표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되물을지 모릅니다. 사실 장애인의 권리는 신체와 생명의 안전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장 투표를 못 한다고 하여 어딘가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게 아니므로 기다리라는 겁니다. 장애인의 요구가 최소한의 범위에서 벗어날 때 사회는 너무나 쉽게 ‘입법 재량’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로 권리 보장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 우리가 목격한 바와 같이 후보자가 어떠한 이념과 정책을 지향하는지에 따라 국민의 신체 또는 생명은 얼마든지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더욱이 헌법재판소는 선거권이 헌법상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로서 다른 기본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헌법재판소 1989. 9. 8. 88헌가6 결정). 이는 민주주의국가의 당연한 전제입니다. 만일 투표권이 중요하지 않다면 성별, 인종, 계층을 불문하고 1인 1표를 실현하기 위해 싸워온 그간의 역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장애인에게 중요한 투표권은 어째서 장애인에게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걸까요?
나아가 발달장애인이라고 하여 투표 자체를 막는 것은 아니니 가족 등이 함께 들어가 도우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보조인이 조력할 경우 확실히 간단합니다. 다만 발달장애인 입장이 아닌 그 외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이지요. 잠깐 잊어버린 다람쥐 이야기를 해볼까요? 시각장애인인 저는 대학생 시절 한동안 학생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특수학교에 다닐 때는 점자로 투표를 했는데, 대학교에서는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투표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선택을 알리면서까지 투표하고 싶지 않았고, 도움을 구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투표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 선거에 점자투표용 보조용구가 도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학내 장애 인권 동아리와 학생회가 모여 이룬 결과였습니다. 시각장애와 별개로 비밀투표 등의 원칙이 오롯이 지켜져야 하고, 마땅히 투표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당시 학내에 점자를 사용하는 시각장애 학생이 몇이나 됐는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대학원까지 치면, 재학생 3만 명 중 한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온전히 나의 손으로 투표하던 행복한 순간을 기억합니다. 내게 투표는 별로 중요치 않고, 정 투표하고 싶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학내 장애 인권 동아리와 학생회는 오히려 투표이기 때문에 반드시 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알려 주었습니다. 마치 학생 사회에 비로소 속하게 된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나의 방식을 고민하고, 공감하며, 지지한다는 느낌에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입장을 약간만 바꾸어 여러분이 언어를 잘 모르는 외국에서 투표한다고 가정하고, 그 나라의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또는 지인이 들어와 투표를 보조한다고 하면 어떤 느낌일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학생 사회가 기꺼이, 그리고 충분히 실현한 일을 ‘국가’가 상고심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다투고 있다는 게 민망하고 부끄럽습니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발달장애인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그림투표용지 또는 선거용 보조용구는 단지 투표를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인의 방식을 고민한 결과이고, 발달장애인이 ‘모든 국민’에 당연히 포함된다는 선언입니다. 분명 발달장애인들은 직접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시작하여 사회 곳곳에 멋진 발자취를 남길 것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며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이 글을 적으며 문득 천국이 어떤 곳일까 생각했습니다. 10살 무렵 실명하여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날이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난 요즘도 저는 여전히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을 누리며, 특히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면서 빈 스케치북을 채워가는 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곤 합니다. 때로는 평생을 문화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듯한 외로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국에는 장애가 없을 거라고 쉽게 예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로 하여금 시력을 욕망하게 하고, 지금을 외롭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장애 그 자체인가, 아니면 촉각과 청각 등으로 충분히 오늘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든 세계의 ‘열악함’인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저는 예수께서 성경 속 시각장애인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주여, 세상의 모든 책을 점자 또는 음성 프로그램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 파일로 만들어 주십시오” “주여, 천국에도 점자유도블록이 필요하나이다” “주여, 제게 천국의 풍경을 묘사하여 설명해 주시옵소서” “주여, 마침 초행길을 가야 하는데 안내 보행을 해주소서”라고 답할 수도 있다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발달장애인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달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시는 분일까요? 아니면 개인의 사정과 소통 방식에 맞추어 기꺼이 손을 내미시는 분일까요? 어쩐지 저는 후자의 하나님이 더 멋지고 좋습니다. 물론 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를 가지지 않은 형태의 삶도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더 나은 삶이라서가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위하여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애 당사자의 선택에 의하여야 합니다.
어릴 적에는 굳이 질병 또는 장애를 가진 이에게 예수님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얼핏 알 것도 같습니다. 섣불리 어느 게 더 낫다거나 더 옳은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마땅한 존중으로서 물음을 던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어쩌면 천국은 장애는 있되 불편은 없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천사들이 부지런히 그림투표용지를 만들고, 점자유도블록을 깔고, 계단과 턱을 없애고, 자막과 화면 해설을 삽입하는 곳. 천국을 저 멀리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정하는 대신, 현실에 조금이나마 반영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교회, 학교, 일터, 공연장, 공원, 영화관 등 사회 곳곳에 장애인이 있고 서로의 삶을 넘나들며 불편은 없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이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사익(私益) 없는 공익(公益)은 없다고 믿습니다. 이에 부지런히 그 사익에 기대어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사익으로 건너가기를 망설이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발달장애인들이 오롯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포함하여 세상 곳곳에서 사익이 바로 세워지는 것을 볼 때 저는 비로소 진정한 십자가가 세워졌노라고, 당신의 협력하는 손들이 모여 공익을 이루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모양대로 사익의 버팀목이 된다면 공익의 길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사익 덕분에 보다 나은 내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이 아프고 힘든 다양한 사익에 존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곁에 서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3-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1) 참고로, 발달장애는 지적장애와 자폐스펙트럼장애를 통칭하며 장애 유형이나 정도에 따라 의사소통, 언어 및 지각 추론, 사회적 관계 형성 등에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2) 선거용 보조용구는 후보자의 사진, 정당의 로고 등이 인쇄된 표지로서 발달장애인이 일반투표용지에 덧대어 후보자 및 정당을 문자가 아닌 사진 등으로 인지한 후 뚫린 구멍에 기표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를 말합니다.
3) 소송이 제기된 후 피고가 위 ①선거공보와 관련하여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작성 매뉴얼을 제작함에 따라, 원고는 항소심에서 ②투표용지 및 ③보조용구에 대한 청구만 유지하였습니다.
김진영
재단법인 동천 소속 공익전담변호사로 주로는 장애 분야를 맡고 있다. 시각장애 당사자로 많은 이들의 연대에 기대어 살아온 만큼 이제는 지극히 작은 자의 곁이 될 수 있기를, 언제까지나 존재를 변호하는 변호사이기를 소망한다. 그 외 피아노, 책, 러닝, 버섯처럼 가만히 누워있기, 떡꼬치, 다람쥐, 치타를 몹시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