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선을 믿나요?

[414호 특집]

2025-04-30     김혜미

당신은 악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선한 사람인가요? 당신은 나의 적인가요? 아니면 나와 같은 편에 선 사람인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질문들처럼 너무 둘로만 나누지는 않았으면 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는 말이 있고, 형들의 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는 요셉의 신앙고백이 충분한 감명을 주니 말이다. 선한 사람도 뒤틀리면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고, 악한 사람도 개과천선할 수 있다.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악은 어디에나, 사실은 내 안에 가득한 것이니 악을 단정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

온 국민이 심리적 내전을 겪고 있다는 시사 프로그램 패널의 비유가 무척 무겁게 들리는 요즘이다. 생각은 얼마든 다를 수 있는 건데 그 다름의 방향이 너무 극과 극이다. 양극단에 선 사람들은 피아 식별이 빨라지고 있다. 정치는 화합을 도모하기보다는 혐오를 조장한다. 상대를 악으로 상정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얻거나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대결적 언행에 대중의 피로는 나날이 쌓여간다. 그야말로 심리적 내전이다.

섬뜩했다. 죽여도 된다니. 어느 배우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고,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는데 죽여도 된다니…. 뉴스 화면 속 시위 현장의 피켓 문구에 숨이 막혔다. 더군다나 혐오와 분열을 내뿜는 그 자리에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는 교회의 민낯을 마주하게 될 때면 낯이 뜨겁다.

아무리 싫어도,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그 누구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이 당연한 몇 마디를 쓰면서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내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하다. 거침없이 글을 쓰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무의식의 장력에 이끌리는 것인지 왠지 멈칫하며 주춤거리게 된다. 자신과 이념이 다른 사람이라면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한 사회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일이다.

나는 서로 다른 생각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는 신념으로 다문화 연구자가 되었지만, 이건 단순히 다름의 문제가 아니다. 주춤할지언정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그 생각은 틀렸다. 혹시 피켓을 든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읽어보시라, 다정한 부탁을 드리고 싶다.

생각을 잃어버린 시대, 이해는 없다

어쩌면 두려운 건 모두일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적으로 식별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지, 이른바 ‘좌표’라도 찍히면 큰일이라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너도, 나도 두렵다는 얘기다. 혐오로 폭력을 가하는 사람도, 그 폭력을 받아내는 사람도, 엇비슷한 실존적 불안과 근원적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간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타자에 대한 연민》에서 두려움의 문제를 다룬다. 감정을 깊이 연구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두려움이다. 누스바움이 인간의 다양한 감정 중에서도 두려움에 주목한 건 그녀를 수식하는 ‘정치철학자’라는 표현과 연관이 깊다. 두려움이 혐오의 감정으로 전염될 때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두려움이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며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반성적 성찰로부터 그녀는 타자에 대한 연민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한 줄 평을 써두었다.

두려움은 혐오를 낳고 혐오는 사유를 앗아간다. 생각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이해란 없다. 오해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을 잃어버린 시대일까, 생각이 과다하게 쏟아지는 시대일까. 누군가 묻는다면 후자를 선택하겠다. 뷔페에서 과식하여 속이 더부룩한 채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소화하기 힘들 만큼의 많은 생각과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는 시대다. 그 생각이라는 것들은 차려진 음식들이다. 무슨 뜻이냐면, 스스로 요리하여 만드는 음식, 스스로 하는 생각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콘텐츠는 쏟아지지만, 비판적 사고의 역량은 현저하게 약해지는 중이다. 《프로보커터》의 저자 김내훈은 이를 가리켜 ‘사유의 외주화’라고 이름을 붙였다.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조된 틀에 찍혀 나오는 것 같은 사상과 이념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말이다.

모두가 예상하듯, SNS와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유의 외주화를 가속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책 제목으로 쓰인 ‘프로보커터’는 직역하면 선동가이다. 한국 사회는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상대를 적대시하며 악마화하는 사회로 변해가는 중이다. 내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혐오로 번지며 사유의 외주화가 일상화된다. 혐오는 어떤 형태이든 폭력을 동반한다.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을 만큼, 응축된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는 악인들이 자유로이 거리를 활보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증오심이 심해지면 그 때문에 증오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며 인간의 본성을 풍자한 라로슈푸코의 말대로다.

그렇다. 그러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되었다’라는 단정적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지지만, 나타나는 현상들이 그렇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길에서도 불특정한 피해가 발생하니 안전이 보장되는 공간을 찾기가 어렵다. 이렇게 불안한 사회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출산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헤아릴 수밖에 없다.

누스바움은 두려움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며 ‘선에 대한 믿음’을 말했다. 솔직히 책을 덮고 되묻고 싶었다. 인간의 최악이 곳곳에서 갱신되는 시대를 살며 언제까지 선에 대한 믿음을 순수하게 붙들라 말할 수 있겠냐고. 선을 추구하는 순수한 믿음이 어딘가 빈약하게 느껴지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희망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심정의 언저리 어딘가에 나도 똑같이 머물러있지만, 그래도 그렇다. 누스바움은 종교와 인문학, 예술로부터 희망을 찾으라고도 했는데, 과연 교회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래되었고 많은 이에게 익숙하다. 그러니 적이든 편이든 알고 보면 피차 다 같은 운명 아래 서있는 것이 아닌지, 연결된 마음으로 상대를 다시 바라보았으면 한다.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절박하게.

선에 대한 믿음 vs. 악에 대한 확신

현실을 돌아보면 선에 대한 믿음보다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악에 대한 확신이다. 악의 힘이 셀까? 선의 힘이 셀까? 어제 벗과 통화하던 중 최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악할 수가 있어요?”라고 성을 냈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대로 인간은 선이 결핍하여 악에 휘둘리기 쉽다. 선과 악의 함수는 간단하지 않다.

성경 속 다윗을 생각해보자.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한순간 욕망에 눈이 멀어 권력을 남용하며 충직한 부하의 죽음을 유도하는 악한이 되었다.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무수히 많다.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거나, 그럴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닌데 충격이라든지 등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사건들 말이다. 엘리트 출신 군인은 내연녀를 죽였고, 어떤 아이들에겐 따뜻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던 중년 여성은 “어떤 아이든 상관없었다”라는 범행 후기로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1971년 스탠퍼드 대학교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잔인한 심리학 실험을 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 SPE)으로 알려진 이 실험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교수는 24명의 대학생을 선발하여 죄수와 교도관 역할을 임의로 부여한 다음, 가짜 감옥 생활을 하도록 했다. 교도관이 된 학생들이 점점 악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2주의 예정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6일 만에 중단됐다는 것이 실험의 골자다. 아주 선한 학생도 매우 가학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지만, 이 실험은 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물론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끝이 났다. 선과 악의 판단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힌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피조세계 어디에나 충만하지만, 인간의 선은 힘이 약하다.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던 이 세상은 어느새 선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신음과 탄식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이 모든 불행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하와와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은 후에도, 뱀이 꾀는 말처럼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었다. 도리어 “정녕 죽으리라”라는 경고 메시지대로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의 삶은 죽음과도 같은 괴로움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일생 동안 수고하지 않고는 소산을 거둘 수 없는 숙명 속에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며 고된 노동의 대가를 치른다. 상대가 선한지 악한지, 적인지 편인지 선을 긋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도 선악과 이후의 일이다.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 채 상대를 탓하는 속성을 갖게 된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악 간에 심판당하는 존재가 된 것만큼(전 12:14, 고후 5:10) 분명한 재앙이 있을까? 예수가 구속의 제물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삶은 출생과 동시에 불행이요, 저주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인간은 심판대에 서게 된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자주 잊으며 타인을 심판하기에 빠르다. 여기에 혐오와 증오가 동반된다.

선과 악을 알게 된 후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에 빨랐다. 선악과 이전의 에덴동산은 법이 필요하지 않은 낙원이었다. 그러나 선악과 이후, 악에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의 사회에는 곧바로 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창세기 3장 마지막에서 하와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4장 초반에 등장한 사건이 가인의 살인이니 “서로 죽이지 마시오!” 살인을 금지하는 법부터 만들어야 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또 다른 사람을 죽였으니, 사람을 만든 하나님의 마음에도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토록 악하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 6:5-6, 표준새번역)

닥치고 훈련하라?

언어를 창안하거나 새롭게 직조하는 놀이에 능숙한 도나 해러웨이는 《종과 종이 만날 때》에서 종(species)이라는 낱말을 해체하여 재구성했다. 해러웨이의 손에 들어가면 ‘사이보그’라는 기호의 의미는 흥미롭게 달라지며 ‘반려종’처럼 전혀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종은 오랜 시간 생물학적으로 다른 경계를 구분하는 데 사용된 개념이지만, 해러웨이는 그 의미를 비틀며 경계를 횡단하는 관계의 소중함을 말했다.

반려종은 관계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이다. ‘스페체레’(sepecere)에 뿌리를 둔 종이라는 단어에 “보다” “응시하다”라는 뜻이 내포되었음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은 덕분이다. 서로 다른 종으로만 여겼던 인간과 비인간은 차이를 횡단하며 교차적으로 함께 살아간다. 깨닫지 못했을 뿐, 오랜 시간 그렇게 얽힘으로 살아왔다. 하물며 인간들이랴! 이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들을 소중한 반려종으로 새롭게 인식하라는 해러웨이의 실천 강령은 놀랍게도 무척 단순하다.

관심을 가져라. 계속 관심을 가져라. 소중히 여기고 지켜보라. 유념하고 보살펴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아라. 핵심은 상호 돌봄! 닥치고 훈련하라!

물론, 이렇게 단순한 일들도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는 쉽지 않다. 말을 섞기도 어려울 만큼 이질감을 유발하는 자들도 있다. 그래도 그 상대는 소중한 타자다. 선과 악의 구분은 생각보다 얄팍하며 쉽게 뒤집힐 수 있으니,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맺을 수밖에 없음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라!

혐오와 분리의 장벽을 아무리 쌓고 쌓아도, 심각한 자연재해 한 번으로 공멸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종과 종을 넘어 모두 연결된 반려종들이다. 서로 너무 다를지라도, 나뉘고 찢기며 분열된 마음으로 적대한 상대라도 다른 방식으로 응시하는 여유를 되찾자.

연결된 마음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으로 서로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김혜미
영암교회 교육목사. 인하대학교에서 ‘이주민과 공생하는 여성 목회자의 사이보그-되기 과정 탐색’으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2008-2014년 〈한국기독공보〉 취재기자로 일했으며, 지금은 서울여대 SI교육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언제 빨간 토마토가 돼요》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