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포기해선 안 되는 질문, 악(惡)에 대하여
[414호 특집]
질문 1 : 왜 인간은 악에 매료되는가?
질문 2 : 수전 손택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시대’라고 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스마트폰으로 남의 고통을 유희하고 있다며 그는 현대 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지점에서 묻고 싶다. 과거의 악과 현대의 악은 같은가? 다른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질문 3 : 저자께서는 한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악’을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서점에서 심리학 이론서들을 살펴보던 중 어네스트 베커라는 죽음심리학자의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의 제목에 이끌렸어요. 그래서 선 채로 읽게 됐는데, 이런 말이 눈에 띄더라고요. ‘자연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이 서로 물어뜯고 죽이게 만드는 잔인한 창조자’라고요. 그 순간, 우리 모두는 결국 자연의 다른 피조물들을 물어뜯고 죽임으로써 생존하는 필연적 악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자신에게 시시각각 닥쳐오는 자기 존재 파멸의 공포인 죽음을 어떻게든 유보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 악을 연구하게 된 겁니다.”
상식적으로는 ‘악에 대한 의지’를 가져야만 악으로서 성립된다고 생각하는데, 저자께서는 악의 개념을 범자연적 현상으로까지 확대했다. 악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한 것은 아닌가? 자연의 섭리가 악이라면, 우린 굳이 선을 추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질문 4 : 저자께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공포이자 악’이 바로 ‘죽음의 공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최고의 선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망각이나 외면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숭고한 죽음’인가? 의미를 추구하는 죽음, 온전히 타인을 위한 죽음이 있지 않은가?
질문 5 :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인간들이 이 세상의 악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죽음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어떠신지?
질문 6 : ‘갑질’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만연한, ‘가장 보편적인 악’이라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너무 작고 소소해서, 개인의 유별난 습성이나 개성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갑질로 인해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을 만큼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린 일상 속에서 이런 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악을 대하는 심리적 자세나 태도가 궁금하다.
질문 7 : 저자께서는 책에서 ‘악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선하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신도 얼마든지 악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이야기로 읽었는데…, 굳이 악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폭력이나 악이 되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악에 대한 자기 성찰은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할까?
동국대에서 죽음심리학과 영화비평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김성규 교수의 화제작 《인간의 악에게 묻는다》(책이라는신화)가 출간되었을 때 나는 서대문 순화동천에서 열린 출간 기념 북토크의 진행을 맡았다. 2022년 4월 2일 그날 김성규 교수에게 내가 던졌던 질문들이다. ‘악’이 주제가 되자 한도 끝도 없이 한꺼번에 질문들이 떠올라 그걸 행사에 맞게 정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김성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악(惡)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띨 뿐만 아니라, 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은 어느 사람에게서나 나타날 수 있는 평범성 또한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나쁜 사람일 수도 있어요. 나의 어떤 행동은 그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고 해석되기 마련이지요. 철학자 니체의 유명한 격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도덕적 현상은 없다.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란 말입니다. 저는 우리 인간은 누구든 언제든지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나만큼 좋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을 가장 경계합니다.”
그에 따르면 일상의 악이 무서운 이유는 매일같이 우리를 아프고 괴롭게 만들기 때문이며, 그래서 거악(巨惡)보다 일상의 악에 대처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북토크에서 우리는 서로의 말에 빠져들어 나중엔 청중이 있는지 없는지도 별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질문을 빙자해 악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도 마구 던졌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인간들이 이 세상의 악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의미 없는 죽음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어떠신지?”
때로 무심코 내가 던진 말이 화두가 되어, 생각에 생각을 물고 늘어질 때가 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인간들’이라는 표현이 그랬다. 이 표현은 ‘대체 그런 인간들은 왜 등장하는가?’라는 질문도 되었다가, ‘죽음이 두려운 인간의 본성이겠지’ 같은 짐작도 되었다. 문득 어느 날인가는 ‘기득권자의 세계관은 현세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원하는 것을 가졌는데, 그래서 현세의 모든 것이 이미 아름답고 충분히 행복한데, 굳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내세까지 그리 절실할까 싶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 했던 마태복음 19:23-24이 처음으로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부자’라는 것이 그 자체로 범죄는 아닐 텐데 뭘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나 어린 시절부터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 모종의 깨달음(?)은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기득권의 불의와 맞서고 싸울 땐, 영원히 남는 것들에 정의를 새기는 것이 아주 좋은 전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가로 인류의 기억에 존재하는 한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에 새겨진 나치의 행위는 영원히 악의 이름으로 남는다. 이처럼 불의한 기득권 앞에서 잠시 억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스스로 무릎 꿇고 굴복하지 않는 한 기나긴 역사 속에선 정의로움이 그렇게 쉽게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세에 갇힌 상상밖엔 할 수 없는 자들은 내세를 믿고 신앙하며 그렇게 육신의 죽음 후까지 상상하는 존재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글항아리) 역시 인간의 악에 대해 깊게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베티나 슈탕네트(Bettina Stangneth)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다. 독일에선 2011년에 출간한 이 책으로 독일 NDR 도서상(논픽션 부문)을 수상했고, 2015년엔 컨딜 역사문학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2011년 최고의 책 가운데 한 권으로 꼽기도 했다. 반유대주의 역사를 연구한 저자는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의 대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한 뒤 나치 친위대 간부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두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관료였다고 분석했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이기도 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한 후 예루살렘으로 압송한다. 1961년 4월 11일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는데, 당시 이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주관했던 만큼 매우 사악하고 악마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아주 친절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아이히만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는가’라는 명제를 두고 한나 아렌트가 떠올린 개념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쓴 슈탕네트는 아렌트가 예루살렘 재판을 통해 그려낸 아이히만의 모습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그는 아이히만을 단순히 평범한 인간이자 사유 능력이 결여된 무능한 관료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가 무자비한 학살자였음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 수집에 집중한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망명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남긴 녹취록과 자필 원고,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심문 기록 등 총 8천 쪽에 달하는 자료를 분석한다. 아이히만은 치밀하게 도피 계획을 세우고 빈틈없이 감행했던 자이지만, 아르헨티나에 정착해서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연쇄살인마들에게서 종종 드러나는 특성처럼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굳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견디지 못했고, 심지어 그는 유대인을 6백만 명밖에 죽이지 못한 것을 통탄할 정도였다.
당시 아이히만이 자신을 드러내고 아르헨티나 언론인과 나눈 1천3백 쪽 분량의 인터뷰 녹취록은 저자가 그를 분석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활용된다. 이렇게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들을 분석한 후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단순한 명령 수행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밝혀낸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견해로 인해 이후 ‘사유 능력이 결여된 행정 관료’ 정도로 알려졌던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 책은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만든다. 저자는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의 악한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린 경솔한 결론이었다고 비판한다.
호주의 예술학자 앨런 크렐 교수가 쓴 《악마의 끈》(사계절)이라는 책이 있다. 2005년 한국에서 출간되었고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중고 책방에선 구할 수 있다. 철조망의 역사를 통해 근대 인류 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흥미로운 역사책이자 예술비평서다. 철조망은 1850년 간단한 철제 울타리의 기능으로 프랑스 농가에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860년 그라생 발르당이라는 프랑스인에 의해 처음 특허를 받는다. 이후 1874년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서는 농가를 위한 히트 상품이 되었지만 이후 유대인 학살에서는 끔찍한 힘을 발휘하는 상징적 물건이 되기도 한다. 현대에서는 광고나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기도 하며, 철조망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악마의 끈》은 철조망의 역사와 철조망이 등장하는 각종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을 통해 매우 흥미로운 사유를 펼친다. 근대 이후 인류 문명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가두고 구획하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물건이 바로 ‘철조망’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간단한 철제 울타리가 그 본래의 기능을 훨씬 초월해 근대를 관통하면서 적과 동지, 감옥과 자유,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등을 나누고 통제하는 중요한 문화적 도구가 되었다는 뜻이다. 저자에 따르면 철조망이 지닌 이러한 통제와 구획의 기능은 20세기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에서 끔찍한 힘을 발휘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철조망 참호의 규모와 복잡성은 사상 유례가 없었다. 거의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참호는 난공불락의 장벽을 형성하며 ‘참전국들을 구분하는 새로운 국경선’으로 기능했다. 이때 철조망은 처음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영·미 연합군과 독일의 최대 격전 중 하나인 솜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돌격을 개시한 첫날에만 무려 6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러한 결과는 바로 돌격을 방해한 독일의 철조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후일 군 역사가 존 키건은 이 전투를 가리켜 ‘철조망 안에서의 대량 학살’이라고도 표현했다. 철조망의 끔찍한 기능이 가장 극대화된 것은바로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전기 철조망이었다. 몸에 닿기만 해도 치명적인 전류를 철조망에 흘려보낸 것은 철조망의 잔혹성이 어디까지 극대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러한 철조망의 역사로부터 시작해 문학과 회화,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표현된 철조망의 의미를 분석한다. 그러고는 이 지극히 단순한 물건 하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류의 근대 세계를 복잡하게 갈라놓았는지, 또 어떻게 ‘구획과 통제로 상징되는 근대 이후 인간 문명’의 한 장면이 되었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한다. 인간의 문명에서 악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철조망’이라는 아주 작은 물건 하나를 통해 설명하는 셈이다.
‘악’을 주제로 우리의 사유를 도와줄 수 있는 세 권의 책을 살펴보았다. 2022년 김성규 교수의 출판기념회에서 내가 던졌던 마지막 질문을 나는 여전히 나에게 던지고 있다. “악에 대한 자기 성찰은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할까?” 오랜 이 질문에 어쩌면 나는 영원히 대답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해선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것쯤은 이제 안다.
김성신
2000년부터 출판평론가로 글을 쓰고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25년 넘게 서평은 물론 방송과 강연까지 넘나들며 새로운 독서 문화를 만들고 후배·제자 서평가를 꾸준히 발굴했다.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겸임교수, 사단법인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 재단법인 파주문화재단 이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북톡카톡》, 《서평가 되는 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