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고 순수한 악당들

[414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5-04-30     이한주

소설에는 영화처럼 소름 끼치게 나쁜 악당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관객과 달리 소설의 독자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악당이라도, 그 마음을 알면 악행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도 덜 미워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화의 관객보다 소설의 독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인간의 행동을 보실 뿐 아니라 그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덜 미워하고, 남들은 모르는 용서의 이유를 찾으시리라. 그런데 가끔 소설에서도 용서를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하고 순수한 악당들을 만날 때가 있다.

 

스티븐 킹의 베스트셀러 소설 《그린 마일》(황금가지)에 와일드 빌이란 악당이 나온다. 그는 떠돌이 일꾼이다. 어느 여름 사흘간 테트릭 씨 집의 헛간을 수리하는 일을 한다. 이 사흘 동안 그는 단란한 그 집 가족과 저녁을 함께하고, 열두 살 된 쌍둥이 소녀, 코리와 캐시를 알게 된다. 와일드 빌은 헛간 수리를 끝내고 동네를 떠났다가, 어찌 된 일인지 그날 밤 돌아와 쌍둥이 둘을 아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 소녀들이 전혀 반항을 하지 않은 것이다. 조금만 소리쳤으면 위층에 있던 부모들이 알았을 텐데, 폭행으로 피가 나고 큰 상처를 입으면서도 두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조용히 살해당했다. 그 이유가 소설 마지막에 밝혀진다.

놈은 동생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떠들면 너 대신 언니를 죽인다.’ 언니한테도 똑같은 말을 한 거지요. 아시겠어요? … 그놈은 사랑하는 자매를 죽였어요. 자매는 서로 아꼈는데. 이해가 가세요?” (523쪽)

동생은 소리를 내면 자기 대신 언니가 죽을까 봐, 언니도 마찬가지로 자기 때문에 동생이 죽을까 봐, 이 쌍둥이 자매는 매를 맞고 강간을 당해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2021년 우리나라에서도 자매를 둔 어떤 아버지가 10대 딸을 200번이나 성폭행하면서 “네가 거부하면 언니를 건드리겠다” 협박해서 자기 범죄를 숨긴 사건이 있었다.) 와일드 빌은 내가 소설에서 읽은 최악의 악당이다. 어린아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악행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그가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는 점이다.

그는 사흘 동안 쌍둥이 자매가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관찰했고 그 사랑의 깊이를 측정했다. 그는 쌍둥이들이 자기 목숨까지 내어줄 만큼 서로 사랑한다는 걸 알고 이 사랑을 이용한다. 그의 계산대로 쌍둥이들은 죽을 만큼 아프면서도 다른 한쪽을 보호하기 위해 소리 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와일드 빌은 완전범죄에 성공한다. 

아이들이 조금만 덜 사랑했어도,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에 조금만 더 충실했어도 와일드 빌의 범죄 계획은 실패했을 텐데, 쌍둥이들의 지극한 사랑이 악당의 지독한 범죄를 완성시켰다. 지극한 사랑을 지독한 범죄에 이용한 와일드 빌은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다.

 

소설가 커트 보니것이 ‘삶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들어가있는 소설’이라 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민음사)에도 ‘스메르자코프’라는 악당이 나온다. 스메르자코프는 욕정과 탐욕의 화신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름조차 본명 파벨이 아닌 ‘악취’라는 뜻의 별명 스메르자코프로 불린다. 어린 시절 고양이를 목매달아 죽여 장례식 놀이를 했던 스메르자코프는 자라서 바늘을 넣은 빵을 개에게 먹이는 어른이 된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불행하게 태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비뚤어지고 잔인한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생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하고 이복형 드미트리에게 혐의가 돌아가도록 상황을 꾸민 것도 지독한 소외감이 만들어낸 원한 때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이르러서 이런 이해와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또 다른 형인 이반에게 말하고 자살한다. 스메르자코프의 자살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그는 죽으면서 “누구에게도 죄를 돌리지 않기 위해 내 의지와 뜻을 따라 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유서를 남긴다. 여기에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고백과 뉘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는 교묘한 거짓이 담겨있다. 죽는 순간까지도 이복형제들이 무죄를 증명하거나 살인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거짓의 덫을 짜놓은 셈이다.

거짓말을 일삼았던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지고,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죽음 후의 심판은 두려워한다. 이것이 죽음과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고 경험이다. 스메르자코프는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거짓을 진실로 위장한다. 타인을 파멸시키는 거짓을 만들기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는 스메르자코프는 악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악당이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민음사)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더 유명하다. 주인공 소피 역을 맡았던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영화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연기로 기억된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후일 그녀는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큰 영광을 안겨주었던 ‘그 장면’은, 연기했던 기억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후로는 일부러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겼다는 그 장면은 어떤 장면일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곱 살 딸 에바와 다섯 살 아들 얀의 엄마였던 폴란드 여인 소피는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다. 이곳에서 어떤 선별 과정을 거쳐 가스실로 끌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던 소피는 결정권을 가진 군의관에게 자신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며 자비를 베풀어달라 애원한다. 그러자 군의관은 특별히 호의를 베풀어준다며 두 아이 중 한 명만 선택하라 명령하고, 소피는 그런 선택은 할 수 없다며 절규한다. 메릴 스트립이 연기했던, 기억만으로도 고통스럽다고 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제게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가 목쉰 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선택할 수 없어요.”

“그러면 둘 다 보내 버려.” 군의관이 부관에게 말했다. “나흐 링크스(왼쪽으로).”

“엄마!” 소피가 에바를 밀쳐 내고 비틀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서자 에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 댔다. “이 아이를 데려가세요!” 소피가 외쳤다. “내 딸을 데려가요!” (2권, 454쪽)

영화에서는 소피가 곰 인형을 끌어안은 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오열할 때 아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소피가 평생 그 울음소리를 기억하며 고통받았던 사실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피에게 둘 다 가스실로 보내고 싶지 않으면 한 명만 선택하라고 강요했던 독일군 장교는 한때 목사가 되고 싶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의사가 되어 가스실로 보내 곧바로 죽일 약한 사람과 수용소로 보내 강제 노동을 시킬 건강한 사람을 선별하는 일을 하며 그는 신앙과 인간성을 잃어버렸다. 그 역시 악의 희생자인 셈인데, 이 상황에서 그는 자기를 정당화할 방법을 찾는다. 누구라도 야만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처럼 선택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소피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비를 요청했을 때 군의관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줄 가장 적절한 대상을 찾았다 생각하고 소피에게 선택권을 넘겨준 것이다. 소피가 아들 얀 대신 에바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인간은 결국 그런 선택을 하는 존재라며,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선택을 강요받았던 소피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이주해 살면서도 딸을 가스실로 보냈다는 죄책감 속에 영혼이 부서진 채 살아간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헨델의 레코드에 있는 〈내 주는 살아계시니〉라는 곡인데, 그것만 들으면 내 죄책감 때문에, 그리고 내 주는 살아계시지 않고, 내 몸은 벌레들에게 파먹힐 것이고, 내 눈은 결코 다시는, 다시는 주를 보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자꾸만 눈물이 나요. (1권, 160쪽)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 더 끔찍한 죄책감을 강요했던 군의관은 악에 무감해지기 위해 악을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악의 충실한 하수인이다.

 

완벽하고 순수한 악당들을 통해 악과 인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악은 선이 무엇인지 안다. 선이 악을 아는 것보다 악이 선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악은 사랑에서 나오는 희생과 죽음으로 지키는 진실을 알고, 인간에게 선한 선택을 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선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면서 그 선조차 타인을 파멸시키는 데 이용할 때, 완벽하고 순수한 악당이 탄생한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 이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완벽하고 순수한 악당은 소설 속에 있지만, 선을 이용하는 평범한 악은 현실에 있다. 애국심으로 편을 가르고, 죽음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차악의 선택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헨델의 〈메시아〉 ‘내 주는 살아 계시니’를 들으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린다.

선이 악에게 이용되지 않기를, 선에 악이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기를.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