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의 삶, 잔치로의 초대

[415호 예술, 구원을 묻다]

2025-05-31     백지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 14:2)

정현종 시인은 요새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을 꿈꾼다 했지요. 온갖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 모질고 사나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그런 이들을 먹이고 재울 그 집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일 거라고요. 시인은 이렇게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 아래에서 한숨 돌릴 그늘을 찾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도 그런 비슷한 꿈을 품은 “방이 많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모나이 폴라이, 말 그대로 “많은 방”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집입니다. 번역가를 위한 환대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오랜 바람에서 시작된 곳인데요. 현실을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꿈이었지만, 어느 날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monai pollai)”며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알 수 없는 확신과 무모한 용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모든 것은 만물이 깃들 만큼 넉넉한 아버지의 집, 그 환대의 풍요로움을 나누고 맛보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후 정말로 ‘방 많은’ 집으로 이사하고, 번역가뿐 아니라 한숨 돌릴 작은 그늘이 필요한 이들에게 열려있는 게스트룸 ‘친구들의 방’을 꾸몄습니다. 그렇게 모나이 폴라이의 환대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정현종 시인의 아름다운 시도 모나이 폴라이에 묵으셨던 귀한 손님이 주고 가신 특별한 선물이랍니다. 특별한 환대의 공간을 꿈꾸며 시작한 모나이 폴라이는 문화와 영성이 만나는 공간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버려져있던 뒤뜰의 헛간을 고쳐 만든 소박한 워크숍 공간에는 비움을 통해 채움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플레로마’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밴쿠버 도심 한복판에 대책 없이 모나이 폴라이를 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환대란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베풂을 통해 채워지는 신비를 맛보라는 하나님의 초대임을 천천히 배워가는 중입니다.

환대에 관하여

요즘 어디서나 환대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듣는 것 같습니다. 복음 전도나 영혼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진 기존의 교회에서 환대라는 말이 낯설기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반가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지나가는 유행이 아닐까 싶어 지레 씁쓸하기도 합니다. 환대는 그저 한때 반짝 관심받고 지나가서는 안 될 기독교 신앙과 전통의 핵심 가치이자 실천이기 때문인데요. 환대는 우리가 믿는 것에 관한 심오한 통찰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구원이란 그저 심판에서 면해지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우리를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환대라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지요.

성경에서도 환대를 몇 차례 직접 언급합니다. 그중 한 구절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입니다.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사실은 하나님(의 천사들)인 것을 알지 못한 채로 극진히 환대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지요. 여기서 “손님 대접하기”로 번역된 헬라어 ‘필록세니아’(philoxenia), 곧 환대(hospitality)는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를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낯선 이, 이방인’을 뜻하는 크세노스(xenos)를 합친 단어인데요. 말 그대로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 낯선 이와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환대는 나와 다른 낯선 존재에서 출발할 뿐 아니라, 타자를 향한 개방성과 포용성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예가 보여주듯이, 타자를 향해 문을 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문을 여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신학자가 타자와의 만남을 하나님을 아는 것 혹은 초월의 경험과 연결해서 이해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성과 초월》에서 타자의 얼굴은 나를 초월하는 가장 근원적인 윤리적 요청으로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타자와 맺는 윤리적 관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하는 초월적 차원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성공회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도 창조세계의 본질적 타자성에 대한 주의력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성장의 필수 요소로 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창조질서나 아름다움의 순전한 타자성에 몰입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 몰입이 지배적인 자아가 자리에서 밀려나는 근본적인 전환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전환 없이 영적 성장은 일어날 수 없다.”1)

윌리엄스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타자를 향한 환대는 근본적인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이는 내 지식의 한계와 유한성, 내가 믿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삶에 타자를 맞아들이는 환대는,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요. 실로 우리 손에 쥐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살아있는 진리이신 예수님은 겸손하고 차별 없는 사랑으로 가는 곳마다 참된 환대를 통해 샬롬을 이루셨지요.

우리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에게 열려있는 환대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열망하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분의 사랑과 샬롬의 실재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의 이야기, 곧 창조와 구속, 완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환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창조는 자신을 제한하고 하나님 아닌 것(not-God)들을 위해 존재의 공간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환대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죄로 인해 소외된 하나님 아닌 것들을 다시 품으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환대의 완성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환대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영원한 사랑의 친교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부터 시작됩니다.

환대의 근원, 삼위일체의 신비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완벽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인간 공동체의 환대와 화해의 기초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 위격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적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하는 삼위일체의 본성이 인간 사회에서 타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포용과 환대의 기반이 된다는 말입니다. 모더니즘 미술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회화 〈춤(Dance)〉(1910)은 이러한 환대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 생명, 즉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내주)를 잘 보여줍니다. 마티스가 그려내는 부드럽고 역동적인 춤의 이미지는 세 분의 고유한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완벽하고 조화로운 연합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엿보게 합니다.

앙리 마티스의〈춤〉

기독교 초기부터 교회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의 역할이 두드러졌는데요. 카파도키아 교부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는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이 사랑의 친교(communion)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관계적 생명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춤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신비를 춤(perichoresis)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포착했다. 이 상징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내고 각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가 이루는 하나의 순환(circle)으로서 역동적으로 살아계신다.2)

마티스의 그림이 보여주는,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춤 이미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관계적 본질을 잘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인 통일성 안의 다원성, 다원성 안의 통일성을 발견합니다. 춤을 추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각자 자유로운 동작을 통해 원을 그리며 하나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은유적인 방식으로나마 포착하게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내재하는 차이와 타자성에도 주목하게 합니다. 겸손하고 부드러운 각각의 몸짓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함과 차이를 담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몸짓들이 이루는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인 순환의 움직임은 서로와 외부를 향해 무한히 열려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것을 똑같이 만들고자 애쓰는, 동화시키는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기희생적이고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능동적 관계를 통해 타자와의 조화로운 친교 안에서 사신다.”3) 이렇게 마티스의 〈춤〉이 보여주는 역동적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조화롭고 열려있는 공간은, 하나님의 관계적 생명이 그 안에 내재하는 차이를 억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외부의 타자를 향해서도 열려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과 사회의 다원성에 열려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선교학자 라민 사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원주의는 걸림돌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주적 설계의 모퉁잇돌이다.”4)

우리는 너무 쉽게 내가 절대적이라고 확신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꾸는 일에 집착하면서, 그것이 진리를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우주적 설계의 근본 원리로 삼으신 하나님을 따라 환대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마티스의 우아한 춤이 보여주듯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며 그들에게 부드럽고 유연한 포용과 아름답고 조화로운 몸짓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요?

버림받은 곳에서 버림받은 것들로

영원한 사랑의 친교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환대의 삶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해 다가설 뿐 아니라, 낮은 곳의 소외된 이들을 위한 긍휼을 품고 아래로 향해 가는 움직임 역시 보여줍니다. 존 프랭키는 “기독교 전통에서 우리는 타자의 얼굴, 특히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보도록,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도록 초대받는다”고 말합니다.5) 예수님은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하는 것 혹은 하지 않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하는 것 혹은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지요. 저는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을 사회의 가장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적 존엄을 부여하는 급진적 환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빅 뮤니츠의 예술 세계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급진적 환대의 삶을 아름답게 구현합니다. 브라질 빈민가 출신인 뮤니츠는 우연히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 예술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도, 과거 자신이 속했던 고향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예술이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삶을 바꾸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길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픽처스 오브 가비지’(Pictures of Garbage)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인데요.

뮤니츠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이 가져다준 안정된 삶과 풍요를 고향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눌 방법을 고민하다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 쓰레기 처리장인 자르딤 그라마초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버려진 쓰레기와 음식을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카타도르(catador, 포르투갈어로 ‘줍는 사람’ ‘수집가’)들을 만나 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제안합니다. 처음엔 그를 경계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제안을 거부하던 이들도, 2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며 뮤니츠가 한결같이 보여준 진솔하고 진심 어린 모습에 점차 마음을 열게 되지요. 결국 카타도르들은 작품을 함께 만드는 뮤니츠의 작업 파트너가 됩니다. 뮤니츠는 그들과 함께 완성한 그림들을 런던의 미술 경매로 가져가 판매했고, 수익금 전액을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이 모든 과정은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겨있지요.

뉴욕의 스타 예술가와 쓰레기 처리장의 카타도르들이 함께 만든 ‘픽처스 오브 가비지’ 시리즈는 총 일곱 개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작 과정이 무척 흥미로운데요. 먼저 뮤니츠는 신고전주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같은 과거 걸작을, 카타도르가 직접 모델이 되어 실물로 재연하게 하여 사진으로 찍습니다. 그런 뒤 사진에 기초해서, 폐품과 쓰레기로 바닥에 거대한 모자이크를 제작하지요. 마지막으로 그 거대한 모자이크를 공중에서 사진으로 찍어 작품을 완성합니다.

〈웨이스트 랜드〉 스틸컷(왼쪽)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유튜브 영상 ‘Artist of the Week: Vik Muniz’ 갈무리

뮤니츠는 “단 2분만이라도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있는 세상과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사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이 바뀐다”고 말합니다. 작품을 제작하는 이 모든 과정은 이런 그의 믿음을 구현하는 예술적 전략인 셈이지요.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쓰레기를 주워 살아가던 카타도르들은 과거 걸작 속 주인공이 되어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추한 쓰레기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모했습니다. 힘겨운 삶을 연명하는 수단으로 쓰레기를 줍던 행위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창작 행위의 일부가 되었고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너무 가까이에서는 버려진 슬리퍼와 변기 시트에 불과하던 것이 존엄한 인간의 초상이 됩니다. 위에서 보아야만 땅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던 거대한 모자이크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술을 매개로 한 수없는 전위의 경험은, 카타도르들이 세상과 자신,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끈질기게 바꾸어놓았을 겁니다. 작품의 판매 수익금을 받은 한 카타도르는 자르딤 그라마초에 도서관을 지었고, 어떤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시 쓰레기 줍는 일로 돌아간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뮤니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돌아와 쓰레기를 줍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들의 삶은 이제 달라졌어요. 그다음의 선택은 그들의 몫입니다.”

무엇보다 ‘픽처스 오브 가비지’의 특별한 작품들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은, 거대한 쓰레기 산에서 고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여전히 인간의 존엄과 고귀함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에서 버림받은 것들로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낸 뮤니츠의 작품은, 가장 낮고 소외된 곳의 사람들에게 신적 존엄을 부여하도록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급진적 환대를 예술적으로 구현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가이자 신학자인 마리아 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은 개인들이 자아를 넘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자리로 움직이도록 돕는다. 이것은 초월의 행위다.”6) 뮤니츠의 ‘쓰레기 그림들’에서 거룩한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그의 예술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 타자들과 놀이할 수 있게 해주는 문이자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웨이스트 랜드〉 스틸컷

이상하고 위험한 잔치

다큐멘터리에서 뮤니츠와 카타도르들이 서로의 컬레버레이터가 되어 작품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기쁨과 유쾌함, 삶의 생명력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매일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서로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로 살아가던 뮤니츠와 카타도르들이 자신들의 삶 안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환대했을 때, 그들의 삶에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렇게 아래를 향한 환대의 삶은 역설적으로 잔치로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환대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단서 역시 감사와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잔치를 벌이는 삶은 한없이 관대하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기 때문이지요.

신명기에는 이스라엘이 일 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잔치를 벌이는 절기력에 관한 규정이 나오지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잔치에 관한 지침에는 주변의 민족들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신 16:14),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이들의 잔치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며, 특히 나그네와 과부, 고아, 즉 가장 취약한 이들을 포함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차별 없이 함께 잔치를 즐기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철저한 위계질서 안에서 유지되던 고대의 주변 민족과 문화에서는 분명 이상하고 심지어 위험하게 보였겠지요.

기존의 사회질서와 통념을 거슬러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셨던 예수님의 환대의 삶이야말로, 신명기의 절기력이 보여주는 포용적 공동체에 대한 급진적 비전을 가장 아름답게 구현합니다. 그런 예수님이 머리이신 교회는 서로 다른 다양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한없는 관대함과 사랑 안에서 서로를 환대하며 한 몸을 이루고 있지요. 그 몸은 외부 타자들을 향해서도 환대의 팔을 벌립니다. 신학자 게일 램셔는 이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모든 시대와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내가 알지 못하고 아마 좋아하지도 않을 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아직 그 몸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향해 서도 팔을 벌린다. 그 몸은 세례받지 않은 모든 이들을, 어쩌면 심지어 모든 동물과 나무까지도 껴안으려 한다.”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고전 10:17, 새번역) 예수님의 몸으로서 교회를 드러내는 상징적 예전이 바로 성만찬, 주님의 식탁에서 모두가 함께 먹고 마시는 잔치라는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으며, 구속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묘사한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겁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가 부름을 받은 환대의 삶은,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춤추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춤을 추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을 먹고 마시는 잔치의 삶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환대의 삶은 곧 잔치로의 초대입니다.

■ 주

1) 로완 윌리엄스, 《Wounds of Knowledge》, 188쪽.
2) 클락 피녹, 《Flame of Love》, 31쪽.
3) 존 프랭키, 〈상호 문화적 해석학과 선교적 신학의 형태〉, 마이클 고힌 엮음, 《선교적 성경 해석학》(IVP) 144쪽.
4) 라민 사네, 《Translating the Message》, 27쪽.
5) 〈상호 문화적 해석학과 선교적 신학의 형태〉, 145쪽.
6) ‘Social Drama’, 〈Fuller Magazine〉(18호)
7) 〈Pried Open by Prayer〉, 《Liturgy and the Moral Self: Humanity at Full Stretch Before God》, 169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하나님의 집》 《온 마음 다하여》 《빅 스토리 바이블》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