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동: 고려파 전통을 빚어낸 출옥 성도, 산증인

[415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2025-05-31     이재근

일제가 1931년에 만주를 침략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신사참배는 당대 조선인뿐 아니라 이후를 살아가는 한국 기독교인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한국 기독교인 대부분은 신사참배 강요 초기에 이를 십계명(제1계명과 제2계명)을 위반하는 우상숭배로 간주하며 거부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더 폭력적이고 제도화되자, 한국 기독교 모든 집단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며 마지노선을 구축했던 조선장로회 총회도 결국 1938년 가을 총회를 기점으로 굴복했다. 일본 제국은 신사참배가 십계명의 제1-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라는, 즉 국가의 부모인 천황을 공경하고 섬기며 애국심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기독교인 거의 모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제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었다. 정확한 비율을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극소수 남은 자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우상숭배라 확신한 제도의 강요에 온몸으로 맞선 이들은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감옥에서 사망하며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살아남아, ‘산 순교자’ 즉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다. 한상동(韓尙東, 1901-1976)은 이들, 살아남은 순교자 중 하나였다. 이들을 한국교회사에서는 ‘출옥 성도’라 부른다. 이 출옥 성도 다수는 한국 개신교의 주요 교파 중 하나로서, 순교를 각오한 저항과 도덕적·교리적 순결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유산을 남긴 ‘고려파’ 즉 ‘고신’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한상동(신앙)은 박윤선(신학), 송상석(정치) 등과 함께 각 영역에서 고려파를 끌고 간 삼두마차의 한 말이었으나(허순길, 543쪽), 전체적인 영향력과 대표성에서 그를 능가할 다른 이름은 없다.

신앙과 소명

한상동은 1901년 7월 30일에 낙동강이 남해로 빠지는 하구 지역인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에서 아버지 한치명과 어머니 배봉애 사이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김해군에 속했던 명지면은 1978년 이래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개편되었다. 부친 한치명은 낙동강 하구에서 더 아래쪽에 있는 해안인 다대포에서 농사를 지었으나, 염전업으로 업종을 바꾸기 위해 명지로 이주하여 꽤 성공한 상태였다. 그러나 1904년 여름에 밀어닥친 태풍과 해일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게 되어 당시 여섯 식구와 함께 처가가 있는 신평(현재 사하구 신평동)에 가서 삶을 다시 꾸려야 했다. 한상동은 1906년 3월부터 아들이 없던 오촌 당숙 한금출의 양자가 되어 다대포로 돌아와 살게 된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넉넉한 환경이었지만, 친부모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외로운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심군식, 21-33쪽).

일곱 살 때부터 한상동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뒤 열 살에 초등학교 수준의 다대실용학교에 다녔다. 식민지가 된 지 4년째인 4학년 때 이 학교의 한국인 교사 김성권에게 지도받아 한상동이 애국심 가득한 작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김성권이 사임하게 되었는데, 한상동의 가슴에 일제에 대한 첫 저항 의식이 자리 잡은 계기였을 것이다. 실용학교 졸업 후, 한상동은 일본 유학을 꿈꾸었지만 양아버지의 반대로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얼마 후 한상동은 아버지의 수금 심부름을 갔다가 그 돈으로 일본 밀항을 시도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순간 아버지가 신고해둔 경찰에 잡혀 강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그의 반항아 기질을 보여준다(33-46쪽; 양낙흥, 225쪽).

붙들려 귀가한 후 한상동은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1918년 3월에 실용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자신의 실용학교 시절 교사 김성권이 그의 모델이었다.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도 학생들과 함께 다대포 만세를 주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다는 일화가 있다. 2년 후 인근의 기장 출신 김차숙과 결혼했으나, 이 무렵부터 폐결핵이 그의 삶을 질곡으로 이끌었다. 1924년, 죽음 앞에서 생사화복 문제로 깊이 고뇌하던 그에게 다대포에 교회를 개척한 전도자 박창근이 찾아왔다. 한상동은 적극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다(심군식, 46-58쪽; 양낙흥, 225쪽).

양자의 기독교 개종은 양부모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옛 한국 전통에서 양자를 입양하는 목적은 사후에 자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줄 아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한상동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자 양부는 그를 쫓아냈고, 실용학교 학부모들도 기독교인 교사를 거부했다. 이듬해 1926년, 한상동은 다대포의 한씨 문중에서 공식 파양 선고를 받았다. 미수로 끝나기는 했지만 양모는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이듬해 다른 아들을 입양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청년 시절 한상동은 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모두 버림받는 경험을 했다(심군식, 58-69쪽; 양낙흥, 226쪽). 한상동은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평생 자녀가 없었다. 심군식이 직접 인용한 한상동의 미국 방문 중에 쓰인 1971년 11월 18일 자 일기에는 조카의 집에서 어린 시절 가족 부재와 애정 결핍을 회상하며 한상동이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심군식, 337-339쪽). 양낙흥은 어린 시절 상실의 경험과 외로움, 애정 결핍 등이 한상동의 신앙과 행동, 성격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한다(양낙흥, 224쪽).

파양과 면직 후 한상동은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방학 중에 다대포교회에 들른 그는 박창근의 요청으로 저녁 예배 설교를 맡았다가 목회자가 되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1928년 9월, 그는 서울 피어선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해서 목회자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업 수준에 실망하고 폐결핵도 악화되면서, 자퇴 후 다시 다대포로 내려와 요양에 들어갔다. 얼마 후 1929년 3월, 경남노회 부인전도연합회가 지원하는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교회 개척 전도자로 한상동이 선정되었다. 그는 유교 질서가 엄격했던 이곳에서 2년간 노력하다 다대포로 귀환했다. 1931년 5월에는 다시 부인전도연합회 지원으로 밀양의 삼랑진으로 파송되었으나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귀환했다. 부인전도연합회는 11월에 세 번째로 하동군의 진도면 교회 개척을 위해 한상동을 지원했다. 진도면에서 1년 조금 더 지내며, 이번에는 교회를 어느 정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제대로 신학 교육을 받지 않고 했던 세 차례 4년간의 개척 목회의 한계를 인식한 그는 1933년 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정식 신학 교육을 받게 된다(심군식, 74-93쪽; 양낙흥, 227쪽).

3년간의 정식 신학교 교육을 마치고 이제 36세가 된 한상동의 첫 번째 사역지는 부산 초량교회였다. 초량교회는 부산을 찾은 북장로회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1892년 11월에 시작한 예배당을 모태로 설립된 한강 이남 최초의 개신교 교회였다. 이 역사적 교회는 1926년에 부임한 주기철이 마산 문창교회로 전임한 후에 이약신이 1931년부터 목회하고 있었다. 당회는 이약신이 미국에 잠시 출장 간 사이에 임시로 교회를 맡을 이를 찾다가, 개척 목회 경험이 상당했고, “기도도 많이 하고 영력있다는 소문이 도는” 한상동을 임시 목회자로 청빙한 것이다. 1년 후 한상동은 마산 문창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은 후, 1938년 3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1년에 설립된 마산의 모교회 문창교회도 한국인 첫 7인 목사 중 하나인 한석진, 나중에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 전임 주기철이 담임목사를 맡았고, 이약신, 박손혁, 김길창(대표적 친일 목사)이 장로와 전도사를 거치는 등, 한국교회사의 주요 인물들을 무수히 배출한 역사적 교회였다. 한상동은, 1936년 7월에 문창교회를 사임하고 송창근의 후임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의 후임이었다. 이렇게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이으면서, 한상동은 주기철의 길을 따라갔다. 선배의 발자취를 따르던 후배는 결국 신사참배 저항운동 현장에서 동지로서 서로 마주하게 된다(심군식, 98-109쪽; 양낙흥, 229-231쪽).

신사참배 저항운동

그 전해에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한 후 1938년 3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한상동의 마산 목회에는 시작부터 먹구름이 드리워있었다. 일제가 한반도 전역에 강제했던 신사참배 시행이 거의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마산경찰서는 간담회 명목으로 마산 시내 목회자와 제직들을 초청했다. 당국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 간담회에서 마산을 대표하는 주요 교회 목회자 한상동은 신사참배가 제1-2계명을 위반하는 행동이므로 순응할 수 없다고 의견을 밝혔다. 얼마 후 3월 말에 열린 경남노회에서는 3김(김길창·김만일·김석창)의 제안으로 신사참배 참여 안건이 올라왔으나, 한상동·이약신·주남선·최상림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9월에 열린 경남노회에서는 신사참배 안건이 가결되었는데, 노회 직전에 한상동을 포함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일경이 예비검속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일로 유명한 1938년 9월 조선장로회 총회에는 이런 식으로 이미 각 노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주도한 이들만이 총대로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 통과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특히 해방 후 경남노회에서 한상동 등 출옥 성도 및 고려신학교 진영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는 김길창은 신사참배를 결의한 1938년 총회 부총회장으로서, 총회 직후 임원단을 인솔하여 평양 신사에서 첫 공식 신사참배를 했고, 부산에서도 목사들을 데리고 송도 해안에서 신도 사제들이 행하는 ‘미소기바라이’ 의식을 주도적으로 행한 인물이었다(허순길, 294-296쪽; 양낙흥, 261쪽).

한상동은 총회 직후 10월 24일 주일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부터 마산경찰서가 문창교회 장로들을 소환해 압박하고 심지어 고문까지 가하자, 교인 사이에서 한상동 사임 청원 서명을 받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상동은 결국 1년 만에 문창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허순길, 296쪽; 양낙흥, 231쪽).

문창교회 사임 후 한상동은 1939년 8월에 부산 수영해수욕장에서 윤술용·이인재·조수옥·김현숙·이정자·백영옥·배학수 등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양성적으로 하기로 결의했다. 구체적 결의 사항은 다음 네 가지였다.

1.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말고 따로 예배드릴 것.
2. 신사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말 것.
3. 신사참배하는 목사에게 성례 받지 말 것.
4.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과 모여 예배하되 특히 가정예배를 드릴 것.

1938년 폐교 시까지 평양신학교 학생이던 이인재를 통해 평양에서도 이기선과 채정민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상동은 1940년 1월경 부산·마산·거창·함안·진주·남해 등에 반대 운동 조직망을 결성하고, 신사참배한 노회를 해체하고 새 노회를 조직한다는 등의 더 강경한 강령을 채택했다. 주기철이 농우회 사건과 신사참배 반대 등으로 평양에서 세 번째 구속되었다가 1940년 4월에 가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상동과 신사참배 반대 운동가 20여 명은 평양 채정민의 집에서 주기철을 만나 위로하고 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주기철과 한상동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다. 주기철은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 특히 신사참배 반대자들로만 이루어진 새 교회와 노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한상동의 주장을 ‘시기상조’라며 수용하지 않았다(심군식, 126쪽; 허순길, 296-299쪽; 양낙흥, 232-235쪽).1)

1940년 7월 3일, 한상동은 저항자 2백여 명과 함께 경상남도 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외국 선교사의 스파이, 예수 재림 시 천년왕국 설교라는 세 혐의로 주로 신문을 당했다. 투옥된 다수가 고문을 못 이겨 일제에 순응(소위 ‘시국 인식’)하기로 하고 석방되었지만, 한상동은 계속 저항을 이어가다, 1년 후 1941년 7월에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한 달 뒤 다시 종로경찰서로 갔다가, 얼마 후 다시 평양으로 이동한 후에는 해방 후 풀려날 때까지 평양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투옥 중 재발한 폐결핵으로 그는 수차례 신비한 빈사 체험을 한 것 같다. 이런 경험은 그를 신앙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편, 1942년 봄에 각혈이 심해지자 그는 병보석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자기가 요청한 저항운동에 관여한 모든 이들이 검속, 투옥, 고문을 당해 폐인이 되거나 심지어 순교한 상황에서, 보석으로 나가 요양한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결국 한 번도 보석을 나가지 않았다.

그가 투옥되어있던 와중에 동지들은 하나둘씩 죽음의 길을 걸었다. 함께 경남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최상림과 이현속이 죽었다. 1944년 4월에는 평양의 최봉석(최권능)·주기철이 순교했다. 1945년 3월에는 박관준이 병보석으로 나왔다가 사망했다. 1944년 11월경, 그는 독일이 패배 중이라는 정보를 옥중에서 듣고, 일본 패망도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때 이후 그는 해방 후 자신이 해야 할 과제를 선명히 정했다. 첫째, 수도원을 설립해서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로 배교한 목회자들이 회개하고 수양할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신학교를 설립해서 진리를 전수할, 즉 보수 정통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전도인을 양성한다. 셋째, 복음 전도로 신자를 늘려서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다. 옥중에서 살아남은 그는 1945년 8월 17일, 약 5년간의 투옥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이기선·주남선·이인재·최덕지·조수옥·안이숙 등과 함께, 그는 이제 ‘산 순교자’ ‘산증인’으로 추앙되었다(심군식, 151-207쪽; 허순길, 299-301쪽; 양낙흥, 235-239쪽).

출옥 성도: 산 순교자

한국의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예외 없이 신사참배와 동방 요배 등의 신앙적 죄과를 범한 상황에서,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투옥되었다가 죽지 않고 살아나온 출옥 성도의 도덕적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평양에서 출옥한 한상동과 이기선, 주남선은 8월 18일부터 주기철이 목회하다가 그의 투옥 후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에서 한국교회의 회개와 회복을 위한 신앙부흥회를 열었다. 얼마 후 그는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결정되었다.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다시 주기철의 행로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북한이 소련군과 공산당의 통제를 받게 되자, 기독교인 다수는 월남하거나 잠적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지켰다. 한상동도 1946년 3월에 월남했다. 그가 월남한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해석이 있다. 1977년에 심군식은 한상동이 친모 배봉애가 자신이 투옥되어있는 동안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혈육의 정을 이기지 못해 평양으로 2개월 후에 돌아간다는 약속을 하고 부산으로 떠났다고 썼다(심군식, 203-239쪽). 그러나 양낙흥은 2006년 발굴된 한상동의 새 서신 및 여러 역사적 정황을 분석한다. 한상동이 북한을 떠난 이유는 공산당의 박해 위협과 남한에서 신학교를 설립하려던 계획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한상동은 애초에 평양으로 돌아갈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양낙흥, 239-243쪽).

분열, 합동, 환원

분열: 1946년 3월에 경남으로 내려간 한상동은 이때부터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과 분열, 즉 고려파 분열에 깊이 관여한다. 한상동은 옥중에서 계획한 정통 보수 신학교 설립 건을 추진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평양신학교 폐교 후 송창근과 김재준 등이 서울에 설립한 조선신학교는 신사참배함으로써 신앙적으로 변절했을 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오염된 학교라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양신학교 폐교 후 만주 봉천에서 박형룡과 함께 목회자를 양성하다 귀국한 박윤선, 거창 기반의 출옥 성도 주남선과 함께 5월에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한 후 먼저 진해에서 신학 강좌를 시작했다. 7월 말에는 이전에 시무했던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취임했다. 9월 20일에는 신학교 장소를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부산 좌천동 일신여학교(금성중학교)로 옮기고 고려신학교를 정식 개교했다. 교장은 봉천의 박형룡이 취임할 때까지 임시로 박윤선이 맡기로 했다. 1947년 5월에 부산을 떠난 송상석이 넉 달 만에 박형룡을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다. 박형룡은 10월 중순에 고려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박형룡과 박윤선을 보유하게 된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보수 신학 전통을 계승한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형룡은 신학교가 한 개인이나 교회, 노회가 아니라 전국 총회로부터 인준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어야 하며, 한국 장로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오래도록 관계해온 외국 선교회들과 공식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교회관은 신사참배로 배교한 총회의 교권에 신학교를 맡길 수 없으며, 이런 교권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서울로 이동하는 일도 불가능하며, 이전 정통 신학을 보수하고 있지 않은 해외 교단들 소속 선교회와는 더 이상 교류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한상동의 교회론과 충돌했다. 결국 박형룡은 1948년 5월에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 남산에 총회가 인준한 장로회신학교 교장이 된다(허순길, 345-357쪽; 양낙흥, 358-428쪽).

한편, 해방 후 재건된 경남노회는 한상동과 주남선 등 출옥 성도파와 신사참배를 주도한 김길창 등 교권주의자 세력, 중도 세력으로 삼분되어 노회 때마다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전국구 보수 신학자 박형룡의 합류는 일시적으로 출옥 성도 중심의 고려신학교 일파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그의 이른 이탈은 다시 반대편에 힘이 쏠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까지는 주로 경남노회 내부의 다툼으로만 진행되던 이 갈등은 1948년 이후에는 총회와 고려신학교 계파의 갈등 양상으로 변모한다. 이때부터 1952년 9-10월에 ‘총노회’라는 이름으로 새 교파(고신)를 탄생시키기까지 노회와 총회에서 양 진영이 수많은 소책자와 성명서를 발표하며 진행된 논쟁은 너무 복잡하여 몇 쪽으로는 정리하기조차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 대한 입장은 연구자가 속한 진영의 논리를 따르기 마련인데, (양낙흥을 제외하고) 고신 측 역사가는 자신들이 총회에 의해 ‘축출’되었다고 평가하고, 총회 측 역사가나 제3자 역사가들은 대개 고신이 총회를 ‘이탈’했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고려파의 대부 한상동은 당연히 전자였다. 1976년 사망 4년 전인 1972년에 쓴 한상동의 글은 대체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고신 진영의 공식 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비열한 그들의 수단에 의하여 축출당한 고신파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고신파’의 연유에 대한 전말입니다. 끝내 한국 교회를 진리로 사수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없지 않으나, ‘신사참배’도 죄라고 하지 아니하고 더구나 ‘미소기하라이’ 의식으로 일본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에는 여호와 하나님도 신으로 섬기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이면서도 그것이 죄라고 자복하지 못하는 무리들과 추종자들이 어찌 하나님을 바로 인식한 기독인일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볼 때, 고신파가 이루어진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것을 저는 믿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보수주의적 개혁신학의 고취로 그래도 한국 교계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쳐 온 사실과, 심지어 극단의 신신학계에까지 아직은 바른 진리를 고수함으로써 견제하여 온 것 등은 하나님이 남겨 둔 ‘진리의 파수대’로서, 거룩한 그루터기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임을 봅니다. 그리하여 허물어진 한국 교회를 진리로 재건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절감하는 바입니다(한상동, 164쪽).

합동: 1952년 한국 장로교회 역사상 첫 분열의 주인공이었던 고신 교단은 1960년 12월에 예상치 못한 반전 드라마를 썼다. 이 반전의 계기는 1952년과 1953년에 있었던 고신과 기장의 분열 이후, ‘총회’라는 이름으로 불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주류가 1959년에 WCC 가입 문제와 박형룡 교장이 사기당한 신학교 부지 자금 사건으로 승동측(이후의 합동)과 연동측(이후의 통합)으로 갈라진 일이었다. 장로교 내부의 진보파와 중도파가 이탈한 상황에서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승동측은, 박형룡과 한상동 간 교회론 이해 차를 제외하면, 고려파와 크게 다른 요소가 없었다. 1년 후 1960년 8월에 박형룡과 승동측 목사 몇이 고신과의 회합을 제안하여 ‘보수 대연합’을 요청하자, 한상동을 비롯한 고려파 지도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9월 20일에 열린 10회 고신 총회 한 달 후 두 교단은 각각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한상동은 합동에 실로 적극적이었다. 11월 28일에 부산대학교 학생신앙운동(SFC) 강연회에서 그는 ‘승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해야 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한 해 전 대전 총회에서 승동과 연동이 분열한 일은 한국에 정통 신앙을 전수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면서, 두 보수 장로교회의 연합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2월 13일에 승동교회에서 두 교단의 합동 총회가 열렸다. 8월에 승동측이 고신에 합동을 제안한 지 불과 넉 달 만의 일이었다. 합동 총회는 투표로 임원을 선출했는데, 고신 대표 한상동이 총회장, 승동 대표 김윤찬이 부총회장이 되었다. 이로써 한상동은 한국 보수 장로교 진영의 최고 지도자 대우를 받았다(양낙흥, 622-643쪽).

환원: 급속하게 진행된 연합은 집약된 흥분과 기쁨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만큼 빨리 식었다. 신학교 문제가 가장 걸림돌이었다. ‘합동 서약과 원칙들’에는 “신학교 일원화: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로 하고 동수의 이사를 선출하여 경영케 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는 한 총회 안에 단일 신학교, 즉 총회신학교 하나만 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합동 총회 몇 시간 전에 열린 고신 총회 속회에서 송상석은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라는 문구를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한다”는 문구로 수정했다. 즉, 서울의 총회신학교와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둘 다 유지하되, 모두를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한다는 뜻이었다. 저녁에 열린 합동 총회에서 연합의 흥분에 취한 총대들은 이 문구들의 변화에도, 그 의미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규모가 다른 양자 간 준비 없는 연합이 야기한 여러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려신학교 문제였다. 합동된 교단 내 고신 세력의 반발에도, 합동 총회는 고려신학교의 단계별 폐쇄를 추진했다.

환원, 즉 재분리의 시작은 1962년 10월 17일에 이제는 총회신학교 부산분교로 이름이 바뀐 고려신학교 경건회 후에 한상동이 고려신학교를 복교한다고 폭탄선언한 사건이었다. 이 선언은 단순히 한 신학교의 복교가 아니라, 고신 교단이 합동을 떠나 다시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첫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다음 날 한상동은 옛 고려파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복교 이유를 셋으로 제시했다. 첫째, 총회와 총회신학교가 부패하여 고려파도 곧 동화될 것이며 정화의 희망이 없다. 둘째, 총회신학교 교수회장을 두 진영 인사가 윤번제로 맡기로 했던 합의가 번복될 우려가 있다. 셋째,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의 3천만환 사건에 대한 분명한 해명이 없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옛 고려파 인사들도 한상동의 이 주장을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치부한 것 같다. 고려파 출신의 총회신학교 교수들(이상근·홍반식)도 정당한 절차를 결여한 한상동의 복교 움직임에 반대했다. 목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한상동은 고려신학교 복교를 강력하게 원한 학생들의 지지를 업고 11월 6일에 고려신학교 복교 예배를 드리고, 20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허순길, 500-505쪽; 양낙흥, 643-663쪽).

고려신학교 복교는 결국 고신 교단 환원으로 이어졌다. 서울 총회신학교에 다니다가 복교한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학생 5명에게 1963년 6월 총회 고시부는 강도사 고시 응시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학교 설립은 반드시 새 교단 창설로 이어진다는 개신교 교회사 불변의 법칙은 여기서도 증명되었다. 1963년 7월에 환원 발기회가 조직되었다. 노회별로 환원이 진행된 후, 9월 17일에 부산남교회에서 13회 고려파 (환원) 총회가 열렸다. 이로써 고신과 승동의 ‘합동’ 교파는 만 3년, 정확히는 34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이 총회에서 합동위원장 송상석과 부위원장 황철도, 그리고 ‘고신의 얼굴’ 한상동은 합동 운동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잘못이라며 사과했다(허순길, 506-511쪽).

고신은 이 환원으로 잃은 것이 많았다. 합동 당시 590개였던 고신 교회는 445개 교회만 고려파로 환원했다. 교회 수로는 4분의 1을 상실했지만, 각 지역의 대규모 교회들이 고려파를 이탈했기에 실제로 교인은 3분의 1을 잃은 셈이었다. 고려파의 졸속 환원(재분리)에 대해서는 고신 소속의 역사가들(허순길·이보민·이상규·양낙흥)도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에 일치한다. 허순길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졸속한 합동, 공감을 얻기 어려웠던 고려신학교 복교 방법, 부자연한 환원의 과정” 등은 한때 고신이 자랑했던 신학·신앙·생활의 조화를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탄식했다. 양낙흥은 1960년대 고려파의 이런 결정들을 주도한 한상동과 지도자들의 “과도한 감투욕과 파당 정신”(양낙흥, 692쪽)을 비판한다(허순길, 511쪽; 양낙흥, 675-693쪽).

환원 이후

1963년 환원 후 1976년 사망할 때까지 한상동은 주로 고려신학교 운영에 집중했다. 교권주의자들에게 좌지우지되지 않기 위해 고려신학교를 1946년 설립 시부터 사설로 운영했던 고신 지도자들은 환원 직후 1964년부터 신학교를 총회 직영 체제로 전환했다. 초대 이사장은 한상동이었다. 1970년 12월에 고려신학교가 고려신학대학으로 개편되어 문교부 인가를 받고, 한상동이 초대 학장이 되는 과정에서, 한상동과 송상석 사이에 갈등이 있기도 했다. 사실상, 1947년에 박형룡을 만주에서 부산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 이래로, 송상석은 한상동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고려파 진영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인자였고, 사안에 따라서는 경쟁자이기도 했다. 특히 경남노회에서 송상석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한상동의 마지막 10년은 송상석과의 정치적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한편, 송상석은 1974년 9월에 열린 고신 총회에서 고려신학대학 이사회록을 날조한 잘못과 이후의 행태 등을 이유로 ‘면직’이라는 극단의 치리를 받았다. 같은 해 1월에 한상동은 고려신학대학 학장직에서 정년 퇴임했다. 퇴임 후 2년이 지난 1976년 1월 7일, 한상동이 별세했다.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은 용감한 죽음이 생의 마지막이었으므로 논란 없이 일제강점기 한국 기독교인의 사표로 추앙받는다. 똑같이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고문받고 투옥도 되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나온 출옥 성도들은 이후에도 산증인으로 생을 이어갔으므로, 죽은 증인보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더 많았고, 더 오래 노출되었다. 책임지고 과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받은 비난도 당연히 더 많았다. 해방 후 전체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연합, 재분열 역사, 그리고 분리된 고신 교단의 첫 30년 역사에서 한상동이 담당한 역할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다양한 평가를 내린다. 1990년대 이래 고신 교단에 속한 역사가들이 그를 자기 교파의 창시자라는 이유만으로 신성화하지 않고, 학자적 양심을 발휘하여 한 개인의 여러 면모와 그가 밟은 역사의 행보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노력한 점은 특히 인상적이다. 

■ 참고문헌

심군식, 《세상 끝날까지: 한국교회의 산 증인 한상동 목사 생애》(총회출판국, 1997).
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 형성과 분열 과정, 화해와 일치의 모색》(생명의말씀사, 2008).
이상규, 《해방 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 고신교회중심》(영문, 2008).
KIATS 편,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한상동》(홍성사, 2009).

 

■ 주

1) 주기철이 한상동의 주장을 ‘시기상조’라며 받아들이지 않은 시기가 1939년인지, 1940년인지 분명하지 않다. 심군식과 양낙흥은 1939년 4월, 허순길은 1940년 4월이라고 썼다.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