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조선〉 필화 사건, 소망의 저널리즘을 위하여
[415호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이
1919년 3·1독립운동은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 흐름과 내부 상황, 즉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공명으로 일어났다. 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고,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꾸었다.
문화통치라며 내세운 외양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제한적이나마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종교 기관에도 ‘법인’ 등록을 위한 법적 제도를 제공했다. 그러나 허용은 통제의 또 다른 수단이었다. 모든 공식 도서와 신문, 잡지는 검열되었고, 법인체가 된 종교 기관의 재산·활동 역시 일제가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제의 검열과 통제에 비교적 자유로운 언론도 있었다. 국외에서 발행한 조선인 신문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신채호의 〈신대한〉·〈천고〉·〈대동〉 등이다. 3·1독립운동 이후 발행된 이 신문들, 특히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과 〈천고〉는 현재 자취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당시 일제가 이 언론을 바라본 시각과 국내외 언론 보도 자료로 남아있을 뿐이고, 이를 통해 내용과 방향성을 유추할 수 있다.
〈천고〉에 대한 일제의 반응이 인상적이다. “상해에서 발행하는 한문 배일 잡지”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 당시의 광경과 주요 인물의 초상을 게재한 불온 독립사상 선전 잡지” “중국 각지에 배포하는 외에도 한국 내지에도 배송이 있을 것으로 인정됨”.1) 조선에 일부 유통된 자료를 일제가 검열하면서 판단한 내용으로 추론할 수 있다.
조선인의 일제에 대한 유일한 요구는 ‘조선총독부의 철폐’다. 구차스럽게 살기보다 오직 용감분투해야 한다.2)
국내에서 조선인이 발행한 어떤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은 실을 수 없었다. 그나마 대안적 역할을 했던 〈신여성〉·〈조선지광〉·〈동아일보〉·〈조선일보〉·〈개벽〉 등 몇몇 언론이 직접적 반일이 아닌 우회하는 방식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제는 언론을 철저하게 검열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입하여 친일 언론으로 둔갑시키거나, 폐간했다.
〈성서조선〉 역시 국내에서 발행된 잡지인 만큼 노골적인 반일 정서를 드러내지 못했다. 몸은 고달플지언정 생각과 말은 자유롭게 하던 국외 활동가와는 큰 온도 차이가 있었다. 과감하게 일제를 규탄하고 조선의 실정을 세계에 알렸던 국외 언론, 표현의 자유를 통제당하는 제한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실력을 길러보자는 국내 언론. 자유를 빼앗기고 엄혹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국내외 조선인 모두, 같이 아팠다. 1928년 7월 〈성서조선〉 제5호에 게재한 함석헌의 글 ‘신앙은 힘이다’에 그 아픔이 서려있다.
끊어질 듯하면서 아니 끊어지는 신앙의 힘이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각하(脚下)를 굽어볼 때 소름이 쭉 끼친다. 죽을 자로 살게 하는 것은 신앙이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세상, 생명을 끊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 함석헌은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인식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말살기의 저항, 장차 올 세상에 대한 소망
일제강탈기 후반은 ‘민족 말살 통치기’로도 불린다. 무단통치, 문화통치에 이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에 동화시켜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에 협력하도록 강제했던 시기이다.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 확보가 더욱 중요해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1938)을 시행하여 조선의 모든 자원을 전쟁에 동원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곡식, 금속류, 심지어 일상용품까지 강제징수하는 공출(供出)제도를 시행했으며, 쌀과 같은 주요 식량을 배급제로 전환, 남은 자원은 대부분 전쟁 물자로 반출했다.
1939년부터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강제 동원인 징용을 본격화했다. 탄광·군수공장 등에 조선인을 노동자로 배치했고, 1943년에는 조선인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학생에게 ‘학도병’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쟁에 동원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도 시행했다.
거의 모든 민족지가 폐간되었다. 일제는 언론이 제소리를 낼 수 있는 뿌리를 뽑고자 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경성일보〉는 연일 황국신민화 정책을 홍보하고, 전시 동원, 징병·징용을 독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조선〉은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다. ‘종교’ 색채가 짙었고 발행 부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성서조선〉 창간부터 폐간 직전인 1941년까지 80여 편의 글을 썼다. 대체로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주제였고, 23회에 걸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33회에 걸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성서조선〉 창간 취지도 그러하거니와, 함석헌 역시 기독교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노골적인 체제 비판 등 일제를 거스를 만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설령 있었다 해도 검열에 걸려 삭제·변형되었을 거다. 당시 국내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저술가·언론인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1910년대부터 신지식층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 운동론’이 주장되고, 1920년대부터는 민족의 자립과 교육을 통한 독립 역량을 키우기 위해 실력 양성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성서조선〉과 함석헌 역시 이 운동의 물결을 탔다.
그러나 함석헌의 글에서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기성 교회와 지향점이 달랐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의 주류 기독교는 급격하게 ‘비정치화’의 늪에 빠졌다. 3·1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기독교가 민족의 정치적·문화적 독립이라는 꿈을 접고 ‘내세’에 집중했다. 일제는 1937년부터 신사참배를, 1940년부터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각지의 기독교 학교와 단체들이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대부분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가 굴복했다. 함석헌은 이 시기에 오산학교 교사직을 사퇴한다.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이후 과수원을 경영하다가 송산농사학원을 인수, 농사와 공부를 병행하며 생활하던 바로 그때 〈성서조선〉에 ‘히브리서 강의’를 연재한다.
기독자가 거기(천국)만 전심하고 이 사회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한, 세상은 저를 무해한 물건으로 용인하려 두려 한다. 그러나 본래 (기독교의)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초대 기독신도에게 이(천국)는 전투 표어였다. 당시의 세상은 이것 때문에 저들을 “염병 같은 놈”이라 배척했고 저들은 이것 때문에 욕을 먹고 피를 흘렸다. … 믿는 자는 그 세계가 확실히 올 것을 확신하고 전파했고, 핍박하는 자도 그 세계가 오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해서 반대했다. … 지금 “장차 오는 세계”는 기독교도의 무해를 증명하는 한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 증거는 그들이 만일 그 바란다는 장차 오는 세계를 해외에서 난 이민의 자식이 그 조국을 생각하는 것만치라도 확실성을 믿었다면, 그들의 살림이 그러했을 수는 없고 세상도 이대로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3)
함석헌은 기성 종교가 천국만을 추구하고 세상에 관심을 껐다고 보았다. 내세를 강조하는 거대한 신앙적 움직임이 교회를 이끌어 나아갔다. 실상이 그러했다. 언론은 일제가 강제 폐간이라는 초강수를 쓰고 있었기에 세상에 관심을 갖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종교 이야기뿐. 그래서 함석헌은 기독교와 성서에 천착했다. 그러나 내용은 안전하지 않았다.
보신(保身)만이 생존을 담보할 수 있었던 시기. 대부분의 종교인, 지식인이 자기 몸 지키기에 힘을 쏟느라 체제에 순응하던 때에 함석헌은 본디 기독교는 세상과 버성기는 종교임을 말한다. 장차 오는 세상, 천국에 소망을 두는 이들은 현존 질서와 체제에 만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질서와 체제는 곧 일제다. 함석헌이 초대교회 역사에서 언급한 “핍박하는 자”의 현실이 바로 일제다. 핍박하는 자는 장차 올 세상을 가로막는다. 일제가 가로막은 장차 올 세상은 조선의 독립이다.
함석헌은 초대교회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루어낸 결과가 신앙적 독립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히브리서 강의’에서 초기 기독교는 줄곧 공세적 태도를 취했음을 언급하는데, 로마가 지배하는 질서, 자유를 억누르는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기독교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전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설한다. 공세적 태도가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기독인들에게서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강의의 알짬이다.
읽는 이들도 장차 올 세상을 막연한 미래에 주어지는 내세적 천국으로 읽을 수 없었을 거다. 초대교회가 공세적으로 이루어냈던 세상, 신앙과 삶의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얻어낸 기독교 나라의 꿈을 함석헌은 조선의 독립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조선의 구원 없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 이 싸움은 세계적입니다. 빙산이 솟는 남북극으로부터 야자수 그늘 깊은 적도 지방에 이르기까지 이 싸움 없는 곳은 없습니다.4)
〈성서조선〉 필화 사건, 소망의 저널리즘
1942년 3월. 김교신이 쓴 〈성서조선〉 권두언 제목은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우리 민족에 닥친 무서운 시련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는 이 글이 “한국인의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성서조선〉을 불온 잡지로 지목하고 폐간시켰다. 문제가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다 죽은 것 같았지만, 결국 살아남은 개구리들이 있음에 안도하는 김교신. ‘조와’는 일제의 총동원 수탈 정책으로 등가죽과 뱃가죽이 들러붙은 조선 정신이 다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일제는 이런 희망조차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진작 폐간 조치를 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라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던 〈성서조선〉은 1942년 3월 제158호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때 김교신과 함석헌 등 관계자 18명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고정 독자들의 집도 수색을 당했다. 잡지는 발견되는 대로 소각되었다.
〈성서조선〉 필화 사건은 이 잡지가 일제를 불편하게 하는 언론으로서 기능했다는 방증이다. 함석헌을 취조한 일본 순사가 “너희 같은 것들이 가장 악질이다”라고 말한 것과도 상통한다. 일제는 ‘조와’뿐만 아니라 〈성서조선〉 집필진의 모든 글이 자신들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필화 사건이 있기 전 함석헌은 한 차례 옥고를 치른다. 계우회 사건 배후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 4월부터 함석헌이 농사와 공부를 병행하며 활동한 송산농사학원의 전 원장이었던 김두혁이 항일운동으로 일본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함석헌도 평양 대동경찰서에 1940년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1년간 구치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버지 함형택이 별세, 함석헌은 상주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친우였던 김교신과 송두용이 대신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렀다.
〈성서조선〉에 게재한 함석헌의 마지막 글은 앞서 살펴본 ‘히브리서 강의’다.5) 8강까지 연재한 글은 마무리되지 못하고 히브리서 중반부인 6:20에서 멈춰 선다. 필자는 계우회 사건이 히브리서 강의 게재 중에 벌어졌다는 데 주목한다. 함석헌은 노골적인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 아니다. 함석헌이 계우회 사건 배후로 지목된 데는 〈성서조선〉 집필 이력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히브리서 강의 제8강, 마지막 글을 살펴보자.
우리 인생이란 이 위장(幃帳, 죽을 고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옴)은 밑바닥의 반석을 감추는 흔들리는 물결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서 저쪽에 소망을 두는 우리 믿음이 있기만 하면 장차 오는 나라는 우리 것이다.
대안 언론인 함석헌과 대안 언론지 〈성서조선〉은 조선 정신이 마침내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조선인이 장차 오는 나라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말했다. 일제는 이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사람은 잡아 가두고, 책은 불태웠다. 그러나 그 어떤 힘도 소망을 막아설 수는 없다. 하여 필자는 언론인으로서 함석헌의 기저에서 작동한 저널리즘을 ‘소망의 저널리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언론 본연의 기능인 비판과 견제가 날 선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는 시기에, 함석헌과 〈성서조선〉은 소망을 칼로 삼았다.
소망의 저널리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은 12·3 내란의 밤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빛의 혁명을 일으킨 이들을 목격했다. 응원봉을 들고, 형형색색 다양한 구호를 적은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쳤다. 포악한 체제에 맞섰다. 혹한의 추위 속 평화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위해 커피와 국밥을 선결제하는 이들이 온기를 보탰다. 오늘날 언론은 부당하고 폭력적인 체제에 비폭력과 평화, 나눔으로 저항한 시민들을 ‘소개’만 하면 되는 현실. 일제강탈기 함석헌과 언론인들은 언감생심 꿈꾸지 못했던 혁명적 사건이다.
〈성서조선〉은 1942년까지 자기 목소리를 내다가 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희망과 소망의 정신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져있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는 뭇 언론이 이 정신을 이어가기를, 더 널리 확산할 수 있기를, 그래서 장차 다가올 나라를 현실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국회도서관 편, 《韓國民族運動史料》(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78), 339쪽.
2) 신채호, ‘우리의 催一 要求’, 〈革新公報〉(1919.12.25.)
3) ‘히브리서 강의 5, 고난의 예수’, 〈성서조선〉 통권 127호(1939.8.)-128호(1939.9.)
4) ‘무교회 신앙과 조선’, 〈성서조선〉 통권 85호(1936.2.)
5) 폐간 전 〈성서조선〉 통권 135호(1941.7.)에 실린 ‘지우 여러 형제들께’가 마지막 글이지만, 계우회 사건 이후 함석헌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짧은 글이다.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때때로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목으로 파주 서로교회에서 목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