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415호 내향인의 마음 탐구 생활]
용기(勇氣 - 날랠 용 기운 기)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표준국어대사전)
동음이의어
용기(容器, 얼굴 용, 그릇 기) : 물건을 담는 그릇.
용기(用器, 쓸 용, 그릇 기) : 기구를 사용함. 또는 그 기구.
민호
작년 12월 3일 저녁, 친구들과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큰 TV가 있었다. 한 친구가 갑자기 “윤석열이 비상계엄 했대. 미친”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 TV가 켜져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눈앞의 TV를 보니, 정말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식당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서 이 소식을 전했던 친구는 내게 국회로 가자고 했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일 거라며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라면, 이 밤에 국회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누구라도 사고를 당하면 어쩌나. 이 와중에 예은이는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 자리에 가있어서, 카톡 답이 빠르지 않았다. 가족들과 회사 동료들 생각이 났다. 국회 앞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복상이라는 매체에서 일하는 직원으로서 너무 큰 무리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감당할 수 없는 행동은 하지 말자.
왜 비상계엄이 선포된 건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온갖 추측을 하면서도 ‘국회’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지하철역에서 각자 집 방향으로 헤어지는 순간, 그 친구가 열차 타는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출구로 향했다. “정말 국회로 가려고?” “응.” “잘 가.”
2호선 열차를 타고 당산철교를 건너가는데 창문 밖으로 국회가 보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1호선으로 갈아타고 내리는 순간, 후회가 됐다. 나도 국회로 가야 했는데…. 다시 돌아가기엔 늦었다. 막차마저 끊길 시간이었다. 후회로 인한 한숨은 점점 커졌다. 마을버스에서 나오는 라디오를 들었을 때. 집에 도착해서 국회 앞 상황 중계를 봤을 때. 군인들이 국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시민들이 애쓰고 있을 때. 긴박한 그 순간 내 친구가 화면에 보였을 때. 그날 들고 다녔던 내 가방에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액션캠 두 대가 들어있던 걸 알게 됐을 때. 알고 지내던 몇몇 분들이 그날 국회 앞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그날 겪은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내게 해줬을 때.
그날 나는 왜 용기 내지 못했을까. 용기는 어느 순간 행동으로만 증명된다. 그 순간이 지나면 내보일 수 없다. 용기는 마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증명될 수 없다. 행동으로 일어나야 한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용기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행동한다고 해서 전부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다. 충동적인 행동을 모두 용기라 할 수는 없다. 무모함이거나, 치기 어린 유난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 내면에서 치밀한 계산이나 저울질이 선행되기도 한다.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까. 그때그때의 판단일까. 논리적인 계산일까. 양심, 마음의 소리일까.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더라도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걸 아는 책임이 그 근원이 아닐까. 위험이나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감수하겠다는 결심. 그럴 가치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용기를 낸다. 후회하지 않을 자격이 생긴다.
보통 용기가 필요한 순간은 나만 가만히 있으면 무언가가 잘못되는 상황으로, 무엇인가 놓치게 되는 상황으로 흘러갈 때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용기’가 더욱 큰 소리를 낸다. 지금 여기에서 나와 모두를 위해 책임과 위험을 떠안는 일이 용기다.
마음속 용기가 행동하라고 소리칠 때,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안전 제일주의’다. 이런 태도는 모든 행동을 소극적으로 만든다. ‘안전 제일주의’는 일상을 보내거나 일을 할 때 사고를 예방하고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이것은 치기와 무모함을 다스릴 수 있는 좋은 마음가짐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책임 앞에서 내 역할을 축소하고, 후회를 부르는 ‘용기의 적’이 되기도 한다.
며칠 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 다녀왔다.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명하는 탄흔이 발견된 전일빌딩245 전시관에서 “45년 전의 나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45년 전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시민 모두가 참여한 숭고한 항쟁이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가만히 있지 않고 저항했다. 그들의 희생과 용기는 44년이라는 세월을 지나 작년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된 날, 시민들을 국회 앞으로 모았다.
나의 용기가 다시 한번 나에게 행동하라고 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 난 마음의 소리를 따라갈 수 있을까.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용기가 제안하는 행동을 믿을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용기는 믿음의 문제다.
승은
아래의 글을 읽어본 적 있으신가요?
A: 나 용기 좀 줄 수 있어?
B: ◯◯는 항상 침착해 보이고, 너무너무 멋진 친구라고 생각해! 아주사 때부터 옆에 있어줘서 매일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는 잘할 거라고 생각해! 말은 못 하지만 다들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기도 하고… 나도 너 도와주고 싶으니까 혹시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해줬으면 좋겠어.
A: 그래, 고맙다. 너도 힘든 일 있으면 말해.
A: 근데 내가 말한 건 저번에 너희 집에 가져다준 반찬 담은 용기였어.
한가롭게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본 글인데, 씩씩하고 굳센 기운을 뜻하는 용기(勇氣)와 물건을 담는 그릇인 용기(容器)를 헷갈려 서로가 무안해져버린 이 상황.
내가 생각하는 용기는 이런 느낌일 때가 많다. 그릇을 달라고 말하면 될걸, 더 어려운 걸 요청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사실은 말이지…’ 용기 내 말해야 하는 당황스러운 상황. 애써 낸 용기는 누군가에겐 공기 같은 당연함이 되고, 타인이 낸 용기는 용기의 ‘ㅇ’조차 몰라주는 것. 용기는 이렇듯 자주 오해받고 오역된다. 차라리 동음이의어 정도의 오해라면 다행일 텐데, 용기는 동기까지 오해받는 억울한 포지션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일상에서 용기를 내야만 하는 상황은 자주 찾아온다. 가족을 이해하는 것도, 다정하게 굴지 않는 이에게 무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교회에 잘 오지 않는 소그룹원에게 “잘 지내?”라고 연락하는 것도, 생각이 다른 사람 앞에서 내 의견을 떨지 않고 말하는 것도, 무너지거나 우울한 나를 마주하는 것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강의하는 것도…. 나는 비겁하고 찌질한 마음에 때깔 좋은 포장지가 필요할 때마다 일회용품처럼 용기를 소비해왔다. 관계 앞에 의연함이 필요할 때마다, 하는 수 없이 용기를 찾았다.
대부분의 용기는 관계에서 요구됐기에, 언제부턴가 사랑 앞에 주춤할 때면 ‘용기 낼 의향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존재를 사랑할, 존재를 위해 애쓸, 존재의 결핍을 감당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관계를 수용할 준비가 됐는지 자주 곱씹고, 묻고, 확신했다가 다시 불신하며 많은 관계를 스쳐 보냈다. 부모가 자식에게, 연인이나 친구가 서로에게 하듯 친밀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선 손익계산을 뛰어넘는 유의 사랑, 이를 표현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익혔다. ‘용기 낸 만큼 내 사람!’이라는, 자기 손해를 감수하는 초월적 사고만이 요청되는 것임을 배웠다.
초등학생 시절, 아빠에게 딱 한 번 혼나면서 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다. 아빠는 밥을 차려놓고 수십 번 “밥 먹어라” 얘기했지만, TV에 정신이 팔려 대답만 건성으로 했던 탓이었다. 분명 잘못했지만 억울했다. 다음 날, 맞은 것으로 이미 빚을 청산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학원에 가기 전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엉덩이를 때린 게 너무 미안해서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용서를 구해왔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괜찮다’며 통화를 끊었고, 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어른이 내 아빠여서 기뻤다. 어른이 먼저 낸 용기는, 여전히 엉덩이가 아린 아이에게 용서할 용기를 줬다.
권위로 잘잘못을 뭉개면서 넘어가지 않고 진심을 전하는 용기는 관계에 반드시 좋은 것이다. 용기는 나이나 관계에 무관하게 서로 건네야 하고,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받은 경험에서 주는 경험으로 이어진다는 것. 지금도 관계에서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보는 감각이다.
용기, 참 좋은 단어 같은데… 여전히 사무치지 않는 것은 왜일까? 내가 찾은 이유는 두 가지다. 용기 내야 할 대상을 너무 사랑하거나, 혹은 한 줌도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결과는 모두 ‘용기 없음’. 너무 사랑할 때는 나의 용기가 바스러지듯 무시당할까 두려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용기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시도조차 안 했다. 내게 용기는 회색 지대 없이 뚜렷한 마음이라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기대만큼의 겁이 담겨있나 보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하기 전 겁먹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비참한 사람이 될지언정, 사랑하는 겁쟁이도 용기를 낼(고백 공격을 할) 깜냥은 있다. 용기는 두려움을 무릅쓰는 마음. 사랑과도 참 많이 닮았고, 무섭고 두려운 감정을 얼싸안는다는 점에서 무르익은 마음이다. 사랑할 때와 살아갈 때 ‘용기의 여부’는 자주 요동친다.
애써 낸 용기가 사랑을 전하는 것이든 용서를 구하는 것이든 간에, 이 감각이 쌓이면 마음은 용기 안에서 관계를 단단히 매만진다. 사랑이 인내를, 인내가 성품을 낳듯이, 사랑은 곁을 내어줄 용기를 다짐하게 하고, 용기는 용서할 기회를 준다.
사랑할 용기는 곧 용서할 용기라고, 둘은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용서하겠다는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 그야말로 만능-사랑꾼이다. 용기를 기반에 둔 사랑은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서로를 마주 보게 한다. 그리고 용기 내어 함께하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사랑의 범주까지 넓힌다고 믿는다.
내가 주춤하고 있는 관계와 상황은 무엇인가? 서로를 오해하지 않고 용기 낸 힘이 관계에 살을 붙여갔으면 좋겠다. 서로의 존재가 한 번 더 용기 낼 응원이 되길 바라며.
독자님은 ‘용기’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독자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상단어집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내향인들의 속마음 토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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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호
본지 기자. 신비로운 일들은 가까운 곳,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고 믿는다. 개신교 월간지를 만들며 조심스레 세상을 알아가는 중이다.
이승은
본지 독자위원. 엄마에 의하면 자아가 건강한, 아빠에 의하면 생각을 잘 묘사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며 길러진 사회성 덕에 E(외향형)냐는 오해를 받곤 하지만, 최측근은 모두 내향인이란 사실을 긍정한다.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서 관찰하기를 습관처럼 하다 보니 자주 글을 쓰게 됐고, 쓰다 보니 주어진 삶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매일 반복되는 자기 검열과 자기 긍정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인 4년 차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