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뒷모습(上)

[415호 유배지에서 만난 하나님]

2025-05-31     김기현

1

나는 신학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개죽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학자의 길이 아닌 목사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왜 그랬을까?

죽을 만큼, 아니 겨우 죽지 않을 만큼 공부한 끝에 몸도, 마음도, 돈도, 영혼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펼쳤다. 대학 시절 선배들에게 배운 그 큐티(QT)가 생각난 것이다. 신약성경을 순서대로 하루에 한 장씩 읽고 묵상하기로 했다. 그런데 성경 읽기가 왜 이리도 힘든 건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보다 버거웠다.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영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며칠은 억지로 읽었다. 그렇게 참고 꾸역꾸역 읽으니 어느 순간 읽혔다. 말씀이 내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파리했던 내 영혼도 점차 활력을 되찾았다.

그러다가 전임 사역하던 교회를 떠나서 대전의 교회 대학청년부 파트타임 전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담임목사는 개그맨보다 더 웃긴다는 소문이 자자한 분이셨다. 정말 즐겁고 열심히 일했다. 신대원 3년 때, 첫 실습 전도사 때 만났던 서울 성내역 근처 교회의 학생회 아이들이 내 첫사랑이었다면, 이때의 대학생들과 청년들은 그 사랑 못지않았다.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가르치고, 밥 먹이고, 신나게 놀고, 영어도 가르치고, 시간 날 때마다 심방 다녔다.

이전 교회가 대덕연구단지 안에 있어 성도들도 나도 지성적인 분위기였다면, 여기는 그야말로 뜨겁게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였다. 금요기도회의 담임목사 설교가 시작하면, 절대 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건만, 금세 방석 위에서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일쑤였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기도했다. 잠시 눈 감고 기도했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기 일쑤였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내 속에 잠자던 기도 본능이 폭발했다.

나는 굳게 믿는다. 모름지기 신학은 이성적이면서도 신비적이어야 한다고. 그 결과는 윤리적이다. 이를 공식으로 만든다면, ‘이성(주의)+신비(주의)=윤리’ 또는 ‘이성=신비→윤리’라 할 수 있다. 이성 없는 신비는 맹목이고, 신비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대로, 삶의 변화라는 윤리적 열매가 그의 신앙을 판단하는 궁극의 리트머스시험지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의 첫 신앙의 산물인지, 반대로 내 신앙이 사유의 결산인지는 모르겠다. 둘은 서로 물고 무는,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달까. 아무튼,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말한다. 참된 거룩은 말씀과 기도에 달려있다. 어떤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되고자 무엇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음식을 금하고, 섹스를 죄악시한다. 무엇을 하지 않는다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며, 저 두 가지 자체가 경건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 좋으니 즐겨야 할 터.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다. 절제.

사도께서는 오해를 제거하시고는 경건에 이르는 참 방도를 알려주신다. 바로 말씀과 기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5) 주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무시로 기도하는 그것이 경건에 이르는 길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물론, 각자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서 경중이 다를 수는 있다. 그래도 둘은 같이 간다.

나의 영성을 가만 톺아보면, 내 영성의 색깔은 ‘묵상주의 영성’과 ‘지성주의 영성’이 다른 일곱 가지 색깔의 영성보다 강하다. 게리 토마스가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에서 말한 아홉 가지 영성은 제각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을 리 없다. 각자만의 고유한 빛깔을 지닌다. 각자의 영성을 발견하라. 타인의 영성을 존중하라. 그러나 제 영성의 약점을 살짝 보완하라. 이것이 내가 세 번째로 만난 하나님이다.

2

너무 들떴던 걸까? 신학이 아니라 목회로 방향을 확 틀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두 권의 조직신학 책도 영향을 미쳤다.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첫 문장에서 교의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교의학은 신학적 학문으로서, 기독교 교회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고유한 내용을 학문적으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다음 도드라지는 세 단어 “교회” “신학” “학문”을 제시하고는 말한다. “교의학은 신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나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다.” 즉, 신학은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교회의 신학이다. 존재가 신학이다. 신학의 바운더리는 교회 공동체를 떠날 수 없다. 그것은 물 떠난 고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사람은 폴 틸리히다. 내게 바르트는 급진적이면서도 복음적인 그런 신학자이다. 그렇지만 틸리히는 너무 철학적이고, 시대와의 상관관계를 추구하느라, 복음의 고유성을 흐트러뜨리는 듯 보였다. 나의 이런 의구심이 틀리지 않음을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조직신학을 시작하는 말은 바르트와 다르지 않았다. “신학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기능으로서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시대의 틀에 맞추느라 복음의 스캔들을 완화하고 비틀기는 했지만, 그 역시 주지하고 있었다. 신학은 교회를 섬기는 학문임을. 그러므로 나는 목회를 해야 온전한 신학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개척한답시고 돌아다녔다. 대전의 몇 곳과 신탄진과 청주에도 가보았다. 문제는 그놈의 ‘돈’이었다. 돈, 돈, 돈. 돼지 저금통을 탈탈 털다 못해 배를 갈라 10원짜리 동전까지 싹싹 긁기도 했고, 아내는 아들 분윳값도 없어서 쩔쩔매던 때다. 내게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다. 개척을 위해 소수의 사람이라도 모아서 같이 기도하며 비전을 공유하고, 준비하는 법도 몰랐다. 후원, 지원? 언감생심이었다.

등록금 댈 형편도 못 되었다. 정기적인 수입이라 해봐야 파트타임 전도사 사례비 조금이 다였다. 더 벌어봐야 대학원(Th. M)을 마친 후부터 한 학기에 한두 과목을 강의하고 받는 강의료, 주중 저녁에는 학원에서 영어나 논술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였다. 박사과정 입학 후에 내 영혼의 멘토인 이정희 교수님께서 조교를 맡겨주셔서 등록금의 상당 부분을 해결하였다. 예배학 전공이셨지만, 전공이 다른 나를 거두어주신 거다. 그런데 타 전공 교수의 조교가 되지 못한다는 규정이 생겼고, 결국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박사과정 막바지에 이르자,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등록금 납부 독촉을 몇 번 받았는데 결국 제적 처리 직전 상황까지 내몰렸다. 당시 총장이시던 그분은 서류 결재를 하시다가 내 이름을 보고 호출하셨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어떻게 한 거냐며 호통을 치시더니, 예전의 어머니처럼, 책상 서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주셨다. 가까스로 제적은 면했다.

총장님이 제안하셨다. “부산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를 찾는데, 거기에서 한 2년 있다가 올라오는 것이 어떻겠나.” 아들을 쫄쫄 굶길 판이었고, 아내는 출산이 임박해있었다.

3

부산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다. 그 2년 동안 생활은 안정되었다. 작지만 사택을 받았고, 일정한 수입이 생겼다. 아내는 십일조로 10만 원을 드리게 되었다고 감사해했다. 무엇보다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담임목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내려오신 분인데, 강단이 있으면서도 은은하고 은근한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셨다. 내가 마음껏 사역하도록 배려해주셨다.

한 번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김 목사님, 목사는 바쁘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영문을 몰랐다. 담임목사님은 아리송한 그 말씀을 차근차근 풀어주셨다. 교인들이 당신에게 “김 목사가 너무 바빠 보여서 교제하기도 어렵고, 심방이나 기도를 요청하는 것도 미안하다”라고 했단다. 요는, 목사는 교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내외적 공간을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커 파머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교사만이 아니라, 말, 곧 말하는 것이 직업인 목사에게 천금 같다. 공간이란 곁을 주는 거다. 타인이 들어올 여지를 마련하는 거다. 하나님이 임재할 공간, 이웃이 편하게 올 여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일, 내 계획, 내 불안으로 가득해 교인들이 쉽사리 들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목사님은 목회자로서의 행동거지만이 아니라 학문할 수 있는 공간도 열어주셨다. 박사논문 준비를 위해 한 달간 미국 연수를 떠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당시는 제임스 맥클랜던이 생존해 있었기에 그의 신학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보고 싶었다. 로스앤젤레스(LA) 근교 풀러 신학교를 방문해서 자료도 찾고, 그와 면담도 했다.

자유로운 영어 구사가 되지 않았기에, 나는 질문을 적어 갔다.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읽자, 답답했던지 그가 직접 읽으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는 내가 매킨타이어의 ‘전통’과 하우어워스의 ‘내러티브’를 혼동했다고 지적했고, 소문자 ‘뱁티스트’(baptist)에 대한 나의 질문은 탁월한 철학적 질문이라며 평해주었다.

맥클랜던을 대표하는 신학 용어는 “baptist vision”(뱁티스트 비전)이다. 해럴드 벤더(Harold Bender)의 “anabaptist vision”(아나뱁티스트 비전)을 수정한 것이다. 그는 대문자 ‘Baptist’를 사용하는 침례교회 출신이면서도, 존 요더 영향을 받아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깊이 공명했다. 자유교회 전통 전체를 통칭해 소문자 ‘baptist’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개념은 너무 느슨하고 헐거웠다. 과하게 말하면, 소문자 뱁티스트가 아닌 교회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침례교회와 아나뱁티스트는 물론이고, 웨슬리안이나 오순절 교회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되면 개념의 경계가 무너진다. 칼뱅주의가 알미니안주의가 아니듯, 아나뱁티스트와 뱁티스트는 공유하는 지점이 있어도 분명히 다르다.

내가 이런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신학을 하면서 늘 붙들었던 하나의 명제, “왜 나는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질문 덕분이었다. 이 질문은 어느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강연한 뒤, 한 학생의 질문에 답하며 얻은 통찰이었다.

그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이 보시기에, 저희 선교단체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대답 대신 질문했다. “왜 당신은 다른 선교단체가 아닌 이 단체에 속해있습니까?” 그 대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의미다. 자신의 정체성을 모른 채 남의 답을 빌리는 삶. 그것은 ‘내가 아닌 삶’이다. 내게는, 내가 왜 이 길을 걷는지를 묻는 일이 언제나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맥클랜던의 대작, 조직신학 3부작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학은 투쟁을 의미한다.”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치 않으면, 허공에 못 박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고전 9:26) 내게 신학적 전투의 대상은 콘스탄티누스주의 또는 기독교 국가 이념(Christendom)이다. 신앙과 직장, 주일과 평일 사이의 간극 문제가 없지 않지만, 한국교회의 정치화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그것을 설명하는 프레임은 혼합주의에 물든 기독교이고, 그 원인은 교회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콘스탄티누스주의와 기독교 국가 이념이다.

4

아버지 부재의 문제는 곧 기준의 위기이다. 어떤 일이 닥치면, 원칙 없이 흔들렸다. 내가 그랬다. 판단 기준이 없으니, 때로 비겁하게 물러서고, 때로 감정에 휩쓸려 과하게 반응했다. 옳고 그름보다 그때그때의 처지와 분위기를 따랐고, 그렇게 결정한 나 자신이 두려웠다.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점에 개척 제안을 받았다. 단칼에 거절했어야 했지만, 갈대처럼 흔들렸다. 담임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당연히 거절하란다. 나를 후임으로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잠깐 생각하고 개척 제안을 사양하는 연락을 했다. 그런데 다시 연락이 왔다. 같이하자고.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펄럭였다. 담임목사님께 다시 의논을 드렸더니, 표정이 달라지셨다. 재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마음이 그곳에 가있는 것이니 기도하고 결정하라고.

그사이에 그분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보기에 그분들은 개혁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런 교회를 하고 싶다고, 그래서 나를 초대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분들은 우리 교단의 모 교회에서 교인 10여 가정이 따로 떨어져 나온 분들이다. 그들의 진심을 믿었다, 순진하게도. 우리 가족 전부는 내가 유학을 가지 않은 것과 교회 개척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뿐 아니라 가족 모두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안 해도 될 고생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 걸까? 패기였을까, 오기였을까. 목사라면 교회를 개척해야지 편하게 물려받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당시 세습 반대 운동 초기였다. 서울에서 만났고 활동했던 많은 이들이 그 운동에 참여했다. 사역하던 교회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에 대해 나로서는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돈과 사람 때문이었다. 대략 열 가정이고, 예배당도 이미 마련했다고 하니, 두 가지 근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셈이다.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잘할 거라는 착각도 크게 작용했다. 모든 목사가 그리 생각하는 모양인데, 거의 모든 목사가 제정신을 차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택을 구하기 위해서 교인들과 몇 군데 집을 돌아보았다. 부산의 오래된 지역이고 낙후된 주거지들. 집집이 달마도가 걸려있고, 대낮인데도 집안이 어둡고 눅눅했다. 좁은 방 두 칸에 실외 화장실, 쭈그리고 앉아서 밥을 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며칠을 찾아다닌 끝에 겨우 햇살 좋은 이층집을 구했지만, 구조가 기이했다. 기다란 직사각형인데, 한쪽이 비스듬히 꺾여 들어와 입구로 올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였다. 부엌과 거실이 통으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제야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에 따른 대가가 무엇인지를 실감했다.

그때의 일들이 아득하다. 아름다운 추억이 없을 리 만무한데도 불쾌하고 가슴 아픈 것들만 가득하다.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교인들의 모습과 교인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정녕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고통에 관해 쓴 책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도 그 자세한 내막을 쓰지 않았다. 당시 편집자는 내 삶의 이야기를 좀 더 쓰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했다. 그래도 간략하게 썼다. 부끄러워서 그랬다. 내 자존심이 뭉개지던 연대기 5년을 글로 만천하에 공개하기란 마치 발가벗는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감추고, 글로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검열 때문이었다.

실토하자면, 나는 그들을 사랑으로 품기보다는 평가하고 비판하기에 바빴고, 인내하며 사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모든 갈등의 본질은 결국 주도권 싸움이었다. 나는 목사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려 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교회이니만큼 주인 의식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반면, 나는 성경과 신학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내 욕망을 포장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개척한 지 5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한 집사님이 재정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분은 해마다 연초가 되면 재정 담당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있었다. 그러면 나도 말로써 다시 신임하며 “잘하고 계시니 한 해 더 수고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해야 했다. 이런 일이 너덧 차례 반복되자, 이제는 정말 그만두게 하고 자원하는 다른 분에게 맡겨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해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이제 자원하는 분에게 넘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담당자를 집사회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그 주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이 문제가 매월 열리는 집사회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참석한 집사님들은 손을 번쩍 들며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남편이 못 하면 아내 되는 집사님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너무나 기상천외한 논리였다. 그래서 나도 맞받아쳤다.

“그렇게 하세요. 부부가 한 몸이듯 부자(父子)도 하나이니, 초등학생 아들이 목사가 되면 이 교회 물려주죠.”

(계속)

김기현
로고스교회의 담임목사이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로 있다.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와 제자가 되어, 작가와 목사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부전자전 고전》 등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