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하는 마지막 방법
[415호 이한주의 책갈피]
종말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종말이 올 때까지 만들어질 것 같다. 작년에도 류츠신의 《삼체》(자음과모음, 전 3권)와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소미미디어)가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두 소설에서 인류는 각각 외계인 침략과 소행성 충돌로 종말을 맞을 운명인데 예정된 시간표가 다르다. 《삼체》에서는 외계인이 보낸 침략 함대가 450년 후 지구에 도착하는데, 《종말의 바보》에서는 소행성이 8년 뒤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다. 시간표가 다르니 종말의 느낌도 다르다. 450년은 나 자신은 물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그들 자식의 자식까지 일반적인 수명을 누리고 자연사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만큼 여유가 있고 그사이에 뭔가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런데 8년은 너무 짧다.
《종말의 바보》에서 각국 정부는 지혜를 모아 소행성을 향해 핵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대피소도 건설하지만 지구를 구할 방법은 찾지 못한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종말까지 3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사람들은 체념 속에 마지막을 준비한다. (영화에서는 이 시간이 더 줄어 종말까지 200일 남은 것으로 나온다.) 소설 주인공 중 한 명인 후지오는 10년 전 대학 동창 미사키와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마저 잊고 지내다가 후지오의 아내가 뜻밖의 임신을 한다. 세상의 종말이 코앞인데 임신이라니, 두 사람은 아이를 낳는 일이 옳은지 혼란스럽다. 태어나 3년밖에 살지 못하는 운명이 가혹한데, 태어나지도 못하는 운명 또한 가혹하다.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던 부부는 이런 대화를 한다.
“우리가 지금 아이를 포기하면 소행성의 충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가 그렇다면 충돌시켜야겠구나, 하고 판단할지도 몰라.”
“어딘가의 누군가라니, 누구?”
“몰라. 아득히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겠지.”
“예를 들면 신?”
“그래서 말인데, 반대로 우리가 출산을 선택하면 말이야.”
“소행성이 피해 간다?”
“예를 든다면 말이지.”
“그거 꼭 무슨 종교 같다.” (76쪽)
후지오는 그들이 아기를 낳기로 결정하면 신이 판단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아내 미사키는 이렇게 말하는 후지오에게 ‘무슨 종교 같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교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을 주는 종교의 긍정적인 힘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후지오는 멸망을 앞둔 세상에서 아이를 지키리라 생각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을 상상한다. 아이와 미래를 함께하기로 결심한 후지오는 세상의 끝에서 가장 용감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소설은 그 후 지구가 어떻게 되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왠지 후지오의 바람대로 소행성이 비껴갔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아이가 태어났는데 소행성과 지구가 충돌해 폐허만 남은 세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문학동네)가 보여주는 세상이 바로 그렇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세상에 한 남자와 그의 어린 아들이 있다. 소설은 두 사람이 남쪽으로 가는 여정을 따라 전개되는데 독자는 이들과 함께 종말 이후의 세상을 본다. 대재앙으로 모든 문명과 질서가 사라진 지구에 ‘우연히’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을 사냥하고 사육하며 잡아먹는다. 남자와 아들은 숲속에서 사람들이 식인 행위를 하는 걸 목격하고, 외딴집에서 식인용으로 감금되어있는 사람들을 보고, 심지어 누군가 먹다 남긴 그을린 어린아이 시신을 발견한다. 그때마다 남자는 아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한다. 남자는 아들과 함께 죽을 기회가 있었지만 죽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남아 아이에게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미안하다. 재난과 함께 세상에는 먹을 것이 사라졌고, 배고픈 인간에게는 도덕과 양심이 사라졌다.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무정하고 폭력적인 세계다.
생각해보니 구약시대에도 이런 참상이 벌어진 적 있었다.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시대, 이웃 나라 아람이 북이스라엘을 침략해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다. 성 안에는 먹을 것이 떨어지고 백성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성벽을 걷던 왕은 한 여인의 하소연을 듣는다. “우리는 우선 제 아들을 삶아서, 같이 먹었습니다. 다음날 제가 이 여자에게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 하였더니, 이 여자가 자기 아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습니다.”(왕하 6:29, 새번역) 어미가 아이를 잡아먹고도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어제 내 아이를 같이 삶아 먹었으니 오늘은 너의 아이를 먹는 것이 나의 권리라 생각한다. 감추어놓은 이웃의 아이를 잡아먹게 해달라는 여인 앞에서 왕은 할 말을 잃는다.
《로드》의 세상은 굶주린 사마리아 성 같다. 남자는 이런 세상에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리라 결심하고 실제 살인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다친 사람을 돕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가는 곳마다 연민의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나무라면서도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거야” 말하며 아들에게서 신의 뜻을 찾는다. 남자가 길에서 죽어갈 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보면 신이 아들을 통해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작은 아이 기억나요, 아빠?
그래. 기억나.
그 아이 괜찮을까요?
응. 그럼. 괜찮을 거야.
길을 잃었던 걸까요?
아니. 길을 잃었던 것 같지는 않아.
길을 잃었던 걸까봐 걱정이 돼요.
괜찮을 거야.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선善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316-317쪽)
자신들이 도와주지 못한 작은 아이를 걱정하는 아들에게 남자는 어떤 선한 힘이 꼬마를 찾아내 길을 알려줄 것이라 위로하며, 마지막 숨을 다해 ‘선은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희망을 전한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에서도 다른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어린 아들이 남자에게는 신의 말씀이었고, 종말의 폐허에도 선한 힘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던 셈이다.
소행성과 충돌해 모든 인류가 멸망하는 《종말의 바보》의 종말보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로드》의 종말이 더 어둡고 두렵다.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되는 비참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말 그 자체보다 일상의 행복을 파괴하는 ‘7년 대환란’을 더 두려워하며, 종말의 징조에 불안해하고 ‘휴거’의 특혜를 바라는지 모른다.
그런데 소행성이 지구로 돌진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많은 부부가 이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지 고민하고, 여전히 《로드》의 남자처럼 아이의 손을 잡고 낯선 땅을 떠도는 수백만 명의 난민 부모들이 있다. 기후 재난과 전쟁으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수천만 명의 비참한 삶과 약육강식의 세계에 던져진 작고 약한 사람들의 죽음은 미래의 뉴스가 아니라 오늘의 뉴스다. 지구에 사는 수억 명에게 종말이 현실이고 대환란이 일상인데, 그 비극이 나만은 아니길 바라는 것은 너무 미안한 일이다.
단요 작가의 장편소설 《피와 기름》(래빗홀)은 한국 소설로서는 드물게 종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출판사가 ‘신학 스릴러’라 소개하는 이 소설은 1999년 12월 31일에 종말이 왔어야 하는데 어떤 이유로 지금까지 종말이 연기되었다는 설정이다.
세계인구는 1960년대 이후 폭증세를 보이며 80억명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그중 대다수가 기아, 빈곤, 전쟁, 질병, 다양한 인간적 결함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훨씬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괴로워하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비극을 막으려면 담대해져야 하지 않을까? (92-93쪽)
감당하지 못할 이자에 괴로워하기보다 파산 신청을 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죄책감과 부채 의식이 쌓이는 가망 없는 세계를 끝내는 것이 80억 인류를 위해 더 현명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당연하지요” 대답했던 주인공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의 종말을 선택하지 못한다. 세상을 끝장내지 못한 그는 이런 고백을 한다. “저는 지구 반대편에서 30만명이 굶어 죽더라도 오늘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만, 눈 앞에서 100명이 죽는 건 견디지 못합니다. 무고한 사람이라면 100명이 아니라 10명도 어렵습니다. 이러한 격차는 정말로 질병처럼 느껴지긴 합니다.”(384쪽)
보이지 않는 수백만, 수천만 명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100명, 10명의 억울한 죽음을 견디지 못해 세상의 종말을 연기한 주인공은 “세상을 망치는 힘이랑, 망가진 상태를 고착시키는 힘이랑, 역으로 고치는 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거, 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라 말하며, 세상에 기대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 아이들에게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법을 알려주리라 결심한다.
하나님 나라와 종말은 쌍둥이 같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처럼, 종말도 ‘이미’ 현실에 와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우리의 선택을 기다린다. 하나님 나라와 종말이 공존하는 세계 안에서 내가 선택한 일들이 종말의 시간표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내게 주어진 생명을 끝까지 사랑하면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도 하나님의 선한 힘이 우리를 찾아줄 것이라 믿는다. 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오래된 방식이며, 세상을 구하는 마지막 방법이리라.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